구원
作. DD
경수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옅게 내리는 비가 창틀로 떨어지며 툭툭 소리를 냈고, 책상 위 올려 둔 탁상시계 초침이 움직이며 틱틱 소리를 내 새로운 박자를 만들어 제 집중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그 짜증스런 박자를 이겨내고자 짧게 깎은 머리를 쥐어 뜯어보아도 단정하게 자른 발톱이 돋보이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인상을 써보아도 깨져버린 집중력이 되살아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종국에 오늘은 안 될 날이라는 것을 인정한 경수가 잡았던 잉크 펜을 던지듯 내려놓고 책상 위에 이마를 박았다. 생활비 충당을 위해 글을 쓰는 것도 아니었고 또 글을 그런 마음으로 쓸 수도 없었지만, 경수는 요즘 들어 초기의 패기 넘치던 마음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당장 반찬 종류부터 달라지니 마음이 창작보단 돈 쪽으로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운 좋게 지인이 출판사 직원이라 하이패스까진 아니더라도 남들보단 쉽게 투고에 성공한 경수는 마니아층이 꽤 있는 소설가였다.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사실 경수는 출판사에 빽도 있겠다, 출간만 하면 일사천리일 줄만 알았었다. 무릇 어떤 글쟁이든 책을 내면 몇 달을 처박혀 머리를 쥐어짜 낸 시간의 보상 값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 제 자만이었다는 것을 책 2권을 냈을 적에 깨달은 경수는 끝없는 슬럼프에 빠져들었었다.
그러니까, 내용과 필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이름이 없다면 건드려보지도 않는 것이 사람들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달간 죽은 듯 지내던 경수를 암흑에서 건져 올린 것은 앞서 말한 출판사에서 일하는 지인이자 경수가 투고하는데 도움을 준 찬열이었다.
「그래서 글 안 쓰게?」
별거 아닌 말이었다. 의미를 담아서 한 말도 아니었고,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임이 틀림없지만, 경수는 찬열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글 안 쓰게?’ 스스로 수백 번도 되물었던 질문의 끝은 NO.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 번째로 출간한 책은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꽤 괜찮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마니아층도 전보다 두텁게 생기며 도경수라는 소설가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렇게 번 돈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던 경수가 얼마 안 가 다시 펜을 든 이유는 며칠 전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기함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감도 없이 무턱대고 구상을 하는데 좋은 소재가 떠오를 리 없었다. 가뜩이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시계 초침소리 때문에 예민해진 경수가 포기하고 펜을 던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차가운 책상 유리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경수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싱숭생숭할 땐 집 앞 공원에서 맥주 한 캔을 마셔줘야 정신이 들었다. 그건 이 집으로 이사 온 후부터 제가 무의식중에 만들어 놓은 습관 중 하나였다. 4월임에도 기승하는 꽃샘추위에 안감이 두꺼운 후드집업을 걸친 뒤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온 경수가 잠깐 멈칫했다. 들고 나온 우산이 무색하게 비는 이미 그쳤기 때문이었다.
* * *
슈퍼에서 캔 맥주만 덜렁 사 들고 나온 경수가 우산을 달랑거리며 공원 입구로 들어섰다. 10시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간대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저 멀리 희끗하게 보이는 것은 담배 연기임이 틀림없었다. 찰박이는 소리를 내며 담배 연기가 올라오는 정자(亭子) 쪽으로 걸어간 경수가 제 예상과는 다른 사람에 살짝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술 취한 아저씨거나 대학생이겠거니, 했지만 담배를 꼬나물고 앉아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교복을 입은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야 할 쪽은 고삐리 주제에 담배나 뻑뻑 피워대는 소년이었지만 오히려 제가 놀라 흠칫한 것이 괜히 머쓱해진 경수가 아무렇지 않은 척 소년의 옆에 앉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워 넣고 한숨 쉬듯 연기를 내뱉은 소년이 신발 코끝으로 젖은 흙을 긁어댔다.
왠지 모르게 적막한 느낌이 나는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본 경수가 캔 맥주의 뚜껑을 땄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맥주 거품이 입구로 밀려나오자 경수가 흘릴세라 입구에 입을 갖다 댄 뒤 후루룩 소리를 내며 거품을 마셨다. 차가운 맥주 덕분에 괜히 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 후드집업을 좀 더 여미고 몸을 움츠리자 소년이 경수를 힐끗 쳐다봤다. 그 시선에 맥주를 들이켜려던 경수는 눈을 돌려 소년의 얼굴을 마주했다.
진한 쌍꺼풀과 도톰한 입술을 보면 여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체적으론 덩치도 있고 남자다운 게 잘생긴 소년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교복에 붙어있는 명찰로 시선을 옮긴 경수가 소년의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김종인. 오랫동안 마주하고 있던 눈을 먼저 피한 것은 경수였다. 명찰을 끝으로 한 번 더 종인의 얼굴을 쳐다본 경수는 시선을 캔으로 돌려 왼쪽 눈만 감고 눈가를 찡그린 채 내용물을 살폈다. 한 모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마실래?”
경수의 목소리에 짧아진 담배를 볼이 패이도록 깊이 빨아들인 종인이 연기를 내뿜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모호한 답이었다. 맥주를 건넨 채 멀뚱히 종인의 옆얼굴을 쳐다보자 한참 뒤 담배를 고인 물웅덩이에 던진 종인이 경수의 손에서 맥주를 채갔다. 빈손이 되어버린 경수가 허공에 남겨진 손을 까딱이며 종인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복수라면 복수였다. 버르장머리 없이 어깨를 으쓱이질 않나 어른을 기다리게 하질 않나 홱 하고 맥주를 채 가질 않나. 당해보라며 경수 역시 모호한 액션을 취한 것인데 눈을 느리게 끔뻑이던 종인이 선택한 것은 담배였다.
물물교환이라도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경수의 손에 담배를 턱 하니 올려놓은 종인이 희어 멀건 경수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경수가 꽤 흡족한 결과물에 별말 없이 담뱃갑을 받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자 전처럼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종인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은근히 뿜어져 나오는 날티는 괜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경수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워 넣고 연기를 내뿜었다.
“아저씨.”
“어.”
“나 고딩인데.”
“알어.”
코로 연기를 뿜으며 짧게 말한 경수가 종인을 쳐다봤다. 쌍꺼풀이 지는 과정이 다 보일 정도로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던 종인이 왼쪽으로 살짝 고개를 꺾어 보였다. 그렇게 종인이 제 얼굴을 쳐다보다 들고 있던 캔 맥주로 시선을 옮겨 한참이나 눈을 끔뻑거리는 것을 기다리다 못한 경수가 기어코 종인의 손에 들려있던 캔 맥주를 뺏어 들어 단숨에 들이키곤 입가에 묻은 맥주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여전히 멀뚱하게 제 얼굴을 쳐다보는 종인을 보고 담배를 땅에 던진 경수가 인상을 썼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종인은 술에 취해있었다. 주위에서 나는 술 냄새는 당연히 제가 들고 있던 맥주냄새 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맥주냄새가 아닌 소주 냄새였다. 지나치게 느릿한 행동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주사라고 생각하니 여태껏 종인의 행동들이 수긍되기도 했다.
“아저씨.”
“어.”
“왜 줬다 뺐어요.”
“안 마셨잖아, 네가.”
종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반응에 경수에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도배됐다.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기껏 생각해서 줬더니 안 마시고 들고만 있었으면서 왜 줬다 뺐냐고 물어보는 심보는 뭘까. 하지만 경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얘는 지금 술에 취한 상태니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나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충 머릿속을 정리한 경수가 담배를 뻐끔거리며 의미없는 눈길로 종인을 쳐다보자 종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진한 쌍꺼풀이 돋보이는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래도 한번 준건 뺏는 거 아닌데.”
한 글자씩 느리게 내뱉은 그가 말을 마치자 마자 눈을 감고 경수의 품으로 쓰러졌다.
| DD |
울리는 신알신에 트럽인줄 알고 달려오신 독자님들 죄송합니다 ㅠㅠ 취향에 맞지 않다면 그냥 지나치셔도 되는 글이에요 하하 암호닉은 신청 가능합니다. 사실 신청 하실 분이 있을진 모르겠지만요ㅋㅋㅋㅋ 아 그리고 이 글 역시 구독료는 없어요 하찮은 글에 포인트 낭비 하실 필요 업ㅂ슴니다. 다음편은 언제 올라올지 모르겠네요... 잊을 만 하면 올라 올 예정입니다. (아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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