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가피한 상황이란 살면서 끊임없이 발생한다. 나는 그 불가피한 상황에 쓰일 변명들을, 인생을 살아가며 용이하게 쓰기 위하여 리스트 마냥 머릿속에 줄 세워뒀다. 아 오늘 밤 제사가 있어서요. 제가 장남이라 빠지면 안 되거든요. 내일은 친구 결혼식이 있는 날이라 시간이 없네요. 주말은 부모님이 외국에서 돌아오시는 날이라 배웅을 나가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등등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북적이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회식에서 빠지고 단합회 때 빠질 변명은 점점 구차해지고 궁상 맞아지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거의 일터 부적응자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번에 회식에서 술 처먹고 뻗었다가 지갑 안에 고이 접혀계신 계산서를 본 뒤로 회식이라면 치가 떨렸다. 양심도 없는 인간들. 잘 벌어먹는 사람들이 더 하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김진환 씨 부모님이 외국에 나가 계셨었나?" "예? 예 뭐." "저번에 울릉도에 오징어 잡으러 놀러가셨다고 하지 않았나 싶어서." "……잘못 들으셨겠죠." 멀끔하고 상큼하게 웃어보이는 낯짝이 역겹기 그지없다. 눈 굴릴 틈 없이 열라게 타이핑질할 시간인 오전 업무 시간인데, 뭐 그리 한가한 지 자꾸 말을 시키고 난리다. 회의에서 한 번 까여봐야 정신 차릴 텐데. 짜증이 치솟아 옆자리에서 턱을 괴고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김진환 씨. 커피 좋아하나?" 상사가 커피 좋아하냐고 물을 때 안 좋아한다고 하면 그게 미친 거지. 눈치를 밥 말아먹은 사원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키지는 않지만 대답을 해보였다. "예……." "그럼 스타벅스 한 번 갔다 와. 카드 줄 테니까 팀원들 간식도 좀 사오고." "이거 다 하고 가야할 것 같은데." "됐으니까 갔다 와." 이거 빨리 안 끝내면 제일 먼저 쿠사리 먹일 거면서.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소속한 기획 팀장 임시완이었다. 듣자하니 부산에서 디게 공부 잘 했다던데. 부산대 기계공학과였나. 얼굴도 잘 생기고 공부도 잘 하고 직급도 겁나 높은 이 남자는 세간에 떠도는 신이 몰빵한 남자 같았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전혀 그런 수식들이 들어먹지 않았다. 저 얼굴로 능글맞게 웃을 때는 정말이지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왠지 억울해졌다. 아아. 신입 사원의 고충이란! 그냥 가게에 있는 커피 다 털어서 일시불 결제 질러버려? 2. 더운 날씨도 아닌데 이마에 흐르는 것은 분명 땀이렸다. 주인 집 떠나 가출한 시바견마냥 헥헥댔다. 손이 부족해 입으로까지 커피 상자를 물고 왔건만 아무도 없다. 심지어 갔다 오라고 지시한 빌어먹을 상사놈도. 치를 떨며 힘겹게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니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회사 앞 스타벅스는 이 지역 모든 아침 샐러리맨들의 요충지였다. 이 거리 자체에 대형 회사들이 많이 집결해있기도 했고, 커다란 카페는 저 스타벅스 밖에 없으니 줄도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는데 늦장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그 멀디 먼 옆옆옆 블록의 던킨으로 득달같이 달려갔던 거다.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오는 것을 느끼며 소리나게 걸어가 책상 위에 애물단지들을 팽개치듯 놓았다. 손바닥에까지 식은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임시완은 악마다. 임시완은 할 일 없는 잉여다. 임시완은 (나보다 잘 나가지만) 사회 쓰레기다. 끊임없이 읊조리며 불쌍한 중생을 버리고 간 동기들을 원망했다. 그렇담 뭐 어쩌랴. 임시완의 카드로 신나게 긁어댄 이 도넛들은 다 내 거야! "늦었네요." "악!" "뭘 놀라고 그래요. 기다려줘서 감동이라도 먹었나." 믿을 수 없게도 방금 전까지 씹어댄 타깃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얼 깜짝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도넛을 떨어뜨릴 뻔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펄쩍하고 뛰어버렸다. 바닥과 키스를 할 뻔 했던 도넛은 다행스럽게도 기지를 발휘해 잡아냈다. 왜 아직 여기에 남아계세요? 그냥 점심 드시러 가시지……. 우물거리며 뇌까리자 임시완이 웃는 상태로 굳었다. "나랑 같이 밥 먹기 싫어요?" "……." "아까 결제 문자 날아왔던데. 비싼 거 사왔나봐요. 어쭈 도넛까지 있네." "간식까지 사오라면서요. 팀장님이." 배고파서 그러는데 먹어도 될까요. 입에 먼저 집어넣으려다 말고 눈치껏 임 팀장의 딸기잼 도넛까지 챙겨 줬다. 사회 생활에 완벽 적응했다. 아무리 뭣같은 상사라도 일개 사원 주제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은 곤란했다. 임시완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건네는 것을 받아들었다. 시선은 아직도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끈적하다시피 옮겨붙는 눈길에 괜히 오금이 저렸다. 난 저 새끼 저런 얼굴 할 때마다 겁나서 죽겠더라. "헐." 뭔가 묘한 느낌에 고개를 숙여보니 아까 떨어뜨릴 뻔한 여파로 바지에 하얀 도넛 가루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것도 아주 찰지게 골고루 데코레이션 되어 있다. 짜증이 팍 솟았다. 손으로 야무지게 털어내도 꿈쩍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멍하니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다가, 결국 잔여물들을 지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서 팔짱 낀채로 도넛을 야금야금 먹고 있던 임시완의 시선이 그제서야 나의 바지로 향했다. "으. 다 묻었네요. 칠칠맞기는." "예 예. 죄송합니다. 그래서 좀 지우고 오려구요." "화장실 말입니까? 같이 가요. 나도 손 좀 씻게."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화장실까지 같이 가게…? 웬만하면 따로 가시지……. 나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임시완을 몰래 훑었다. - 가꾸 왔습니당 ㅎ.ㅎ 아이콘 독방에서 시작한 썰이니 말머리는 아이콘으로 할게유 ㅠㅠ 왜 두 그룹을 뭉칠 수는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