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시완 ver.
분위기에 취해 소주에 취해 갈 데까지 가보자! 큰 소리로 고함친다. 얼굴에 몰린 열로 인해 사과마냥 빨간 얼굴로 잘도 웃어대는 진환의 모습을 시완은 조금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술만 들어가면 저렇게 되는 건가. 남들과 다르지 않게 이마에 넥타이까지 질끈 묶어놨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시완은 환장하겠다는 듯 진환이 웃을 때마다 따라 웃어버렸다. 문득 테이블 위에 있는 술병의 양을 세어 보았다. 도수가 센 양주들도 여럿 있었고,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젬병이라는 소주병은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게다가 개중에는 진환이 비운 것들도 여럿 있을 터였다. 김진환. 미치겠네 진짜.
"어이!"
진환은 이미 골로 가기 직전이었다. 흐물흐물거리는 꽐라가 된 몸으로 어딘가를 손가락질하더니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시완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다 대고 말하는 거야?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제 곁에는 이미 전멸 상태인 사원들이 있었고, 부장은 나 홀로 묵묵히 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요즘 부인이 바가지를 긁는다고 푸념하더니 결국 깡소주 행이구나. 주변 탐색을 마친 시완이 다시금 진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거, 나보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건가.
"너 부르는 거야. 너."
"참 나."
"임시완!"
쩌렁쩌렁 울리는 진환의 목소리에 시완은 화들짝 놀랐다. 이게 진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시완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진환의 입을 턱하고 막아버렸다. 꽉 덧대인 손바닥 안으로 진환의 입술이 바르작거렸다. 순간 기분이 이상스러워졌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진환을 일으켰다. 비몽사몽한 진환의 몸은 작은데도 불구하고 술에 쩔어 무거웠다.
"김진환 씨. 정신 차리세요."
"이게. 임시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어? 불만이 많았는데! 야자 타임 해!"
"회식 끝났습니다. 당장 똑바로 일어나요."
안 그러면 버리고 갈 줄 알아. 으르렁거리는 시완의 어투에 진환은 올라오는 취기 속에도 움찔하고 만다. 다람쥐 같은 본성은 남아있나 보다. 시완은 한숨을 내쉬고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진환의 뒤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양 어깨를 잡아 질질 끌기를 시전했다. 어깨도 작네. 머리통도 작고. 다 작네. 눈앞에서 들쑥거리는 진환을 내려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진짜. 작은 게 잘 어울린다.
진환은 여전히 헛소리를 했다. 그동안 쌓인 게 많긴 많았나 보다. 비틀거리며 걷는 와중에도 저를 향해 눈을 치켜뜨기도 하고, 못 생겼다며 기도 안 찰 욕을 날리기도 했다. 평소라면 꿈도 못 꿀 행위들을 저지르고 있는 김진환을 보는 시완의 표정은 굳어있기 보다는 오히려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어쩐지 좀, 귀엽다는 거다. 회사 내에서 조용해도 늘 바락바락 대들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표하는 적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귀엽긴 귀여우니까 이런 하극상은 봐주기로 할까.
"왜 자꾸 일이랑 관련도 없이 놀려?"
"내가 언제 놀렸어."
그리고 어느새 반말에 동참하고 말았다. 언제 놀렸냐는 시치미에 김진환은 걷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물만두 같은 주먹을 들어 보이며 위협 아닌 위협을 해보이는 게 아닌가. 놀렸잖아! 빽 소리친 뒤 씩씩대는 모습을 본다. 시완은 자신 또한 걷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그리고는 살짝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게 그러니까.
"뭘 봐?"
"……."
"그 눈빛 뭐야? 더러운 눈빛 뭐야!"
그게……. 멍하니 있던 정신을 다잡고 고개를 천천히 흔들어 보았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속으로 중얼거린 시완은 전에 없던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진환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뭐지. 뭔데 이렇게 귀엽지.
"불순한 임시완. 타도!"
"…입 다물고 빨리 가요."
"갑의 권력질은 물러가야 한다!"
요란스럽게 뛰듯이 걷는 진환을 부축해주지도 못한 채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애처럼 날뛰는 모습이 한심하다기 보다는, 뭔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게끔 했다. 김진환이 술에 뭘 탔나. 시완은 갸웃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애써 아까 본 진환의 '귀여운' 모습을 부정하고서 말이다.
진환은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술에 어지간히 약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객기를 부리긴 왜 부려. 시완은 귀찮은 듯한 말본새로 진환에게 넌지시 물었다. 정상적인 대화가 이어질런지 걱정이 될 정도로 진환은 100& 순도의 꽐라로 진화된 상태였다.
"김진환 씨. 집 어딥니까?"
"집 없어!"
시완은 자고로 일이 바쁜 남자였다. 명색이 기업의 팀장인데 할 일이 태산이면 태산이었지 시간이 비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찰거머리 같은 사원 하나가 시완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길거리에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인데, 진환은 도무지 시완의 일에 협조할 기색이 없다.
"집 없으면 어디서 자게요."
"길 거리에서 자지 뭐."
"장난치지 말고 입 털어요 빨리. 놀아줄 시간 없으니까."
배 째! 진환은 정말 배 째라는 듯 시완에게 얼굴을 들이밀어 보였다. 정말 미치광이가 다 됐군. 시완은 오른손을 들어 한 손만한 얼굴짝을 밀어냈다. 어쩔 수 없다. 시완은 무표정으로 진환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이거 왜 이래. 웅얼대는 음성을 무시하고 재빠르게 동행한 곳은 주차장이었다. 제 차량을 발견한 시완은 주저않고 차 뒷문을 열어제꼈다. 내일 아침에 쪽팔린 건 자기 몫이겠지 뭐. 진환이 내일 아침 느낄 창피는 시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집이 없으면, 상사된 도리로서 불쌍한 부하직원을 제 집에 하루 정도는 묵게 해줘야지.
"얌전히 타."
제법 냉정하게 말하고 문을 쾅, 닫았는데 어쩐지 조용하다. 김진환이 이렇게 아무 말없을 위인이 아닌데. 팔짱을 끼고 있던 시완은 다시 슬금슬금 그 쪽으로 다가가 차창 안을 살폈다. 그리고는 김빠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쳐버리겠다."
뒷문 안으로 구겨지듯 탑승한 진환은 정말 타자마자 거짓말처럼 취침 모드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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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