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거룩한 밤-어둠이 묻힌 밤-'
세상은 말 그대로 거룩하고도 고요한 그런 밤이였다. 추운 날씨만큼 경제와 지갑은 꽁꽁 얼어서 그 어디에도 연말의 분위기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이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은 행복과 풍족을 느끼고 있었다.
이른바 모든 소녀들의 자칭타칭 교회오빠 이홍빈은 하루종일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고, 연극무대에 오르며 분위기를 달구는 데에 한 몫 톡톡히 하고 있었다. 환한 미소를 지을때면 소녀들은 마치 천사라도 본 듯이 황홀해 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이홍빈은 자기가 잘생겼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있단 사실이었다. 또 그 미소가 얼마나 대단한 무기인지도 잘 알았다.
"택운형, 방금 또 반칙했지!"
"안했는데."
반칙 안했는데 또 저런다. 아까 한번 가위를 바위로 몰래 바꾼게 계기였다. 그 뒤로 이홍빈은 뭐만 했다하면 자꾸 트집을 잡는 것이다. 그리고는 예의 그 미소를 짓는 거다. 보조개가 움푹 패이도록 짓는 그 미소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보고 반칙좀 그만하라고 놀려댔다. 어느새 나는 게임이 재미가 없어져서 그냥 몰래 빠져나와 작은 기도실로 들어갔다. 사실 크리스마스고 뭐고간에 나에게 사실 그닥 중요한 이벤트는 아니였다. 그저 홍빈의 부탁을 받아서 왔을 뿐이다. '형, 교회에 일손이 부족해서 그런데 와서 좀 도와주면 안돼요? 형은 애들도 좋아하니까 편할것 같은데.' 실제로 교회일은 어렵지 않았다. 천사같은 아이들은 처음보는 사람인 나를 생각보다 잘 따랐고, 금방 친해져서 이런저런 준비에 힘을 보탤수 있었다.
어려운 것은 이홍빈이었다.
자기가 부탁해서 온 것인데 뭔가 점점 못마땅한게 생긴 모양이었다. 내가 어딜 가든지, 무엇을 하던지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는게 느껴졌다. 그 따가운 시선에 눈길을 돌리면 언제 보고 있었냐는듯 태연자약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몇분뒤면 또. 시선. 청량한 웃음속에 바늘을 숨기고 있는지 참 그 시선이 따가웠다. 아니다. 사실 이홍빈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 교회에 처음 온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는 내가 신기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친한 형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니까 계속 신경을 써 준 것일지도 모른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것이 아니라 실은 그의 피부만큼 부드러운 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솜사탕같이 부드러운 그 미소와, 그 시선이 나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내 마음에 죄가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럴것이다.
한쪽 벽에 기대어 앉자 이제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어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이 곳에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나뿐인가 싶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 곳에도 홍빈이 쫓아 들어오지 않을까-하는 옅은 '기대'가 피어나는 마음이 자리잡았다. 걔가 여길 왜 들어와. 나는 잠시 도리질을 치고는 멍하니 한쪽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음속에 스멀스멀 죄를짓는 기분이 들어서 기도를 했다.
그래, 나는 죄를 짓고 있어서 그랬나보다. 만인의 교회오빠는, 나에게 있어서도 교회오빠같은 존재였다. 나는 이홍빈에게 기집애들이나 가지는 그런 동경과 애정, 그리고..사랑. 뭐 그런것들을 가슴 깊이 품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어서 난 그저 묵묵히 십자가를 진 기분으로 이 방에 숨어들은 것이었다.
방석위에 꿇은 다리가 조금씩 저려왔고 내 입은 계속 작은소리로 아멘, 아멘..수없는 기도를 담았다.
종반에는 뭐가 그리 슬픈지 눈물이 하염없이 터져서, 나는 어느샌가 부모에게 생떼를 쓰는 어린 아이처럼 울며 기도했다. 내 사랑에 죄는 없지 않나요. 나는 그냥 쟤를 좋아하는거 뿐이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게 남자일 뿐이잖아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왜 같은 성별은 안되는걸까요. 제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러는걸까요. 왜 난 아무 의미없는 시선에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해 해야하는 걸까요. 왜 그러면서도 그 시선이 계속 닿아주길 바라는걸까요. 왜 나는 이홍빈이 사라진 나에대해 걱정하고 신경써주길 바라는걸까요. 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이토록. 왜죠. 왜인가요. 왜. 그 수많은 의문을 기도라는 이름으로 묻어두고 온 길이었다. 하지만 본인에게만은 말할 수 없는 그런 기도. 그렇게 울부짖어도, 흐느껴도 본인이 알면 안되는 그런 기도.
어느정도 감정을 추스리고 다시 기도실 밖으로 나왔을때 크리스마스 행사는 어느새 막바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형 얼굴이 왜그래요? 울었어?"
이홍빈이 다가와 눈가를 살짝 만졌다. 눈가가 아렸다.
"아냐, 좀 피곤해서."
짧게 대답하고 눈가에 닿아있는 손을 슬쩍 밀어냈다. 괜찮아. 그러자 이홍빈은 내 눈꼬리에 닿았던 손 끝을 서로 짧게 스치고는 팔을들어 어깨동무를 걸어오며 말했다.
"내가 형때문에 오늘 살았다 진짜. 다 끝났어요 다 끝났어."
귓가에서 들리는 맑은 웃음소리에 나도 옅게 웃고는 우리는 무대 뒤쪽으로 갔다. 오늘 하루 모든 행사의 마무리를 짓는 청소년반의 뮤지컬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처럼 각자의 자리로 가서 준비를 도왔다. 열렬한 박수와 함께 음악이 터져나오며 첫 배우가 무대로 나갔고 나는 휴- 한숨을 쉬고 뒤쪽으로 빠졌다.
멍하니 무대를 바라봤다.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히 움직였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아까 울어서 그런지 피곤했다. 어차피 지금 빠져도 다들 그냥 일찍갔나보다...하고 말거란 생각에 나는 한발 두발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무대조명이 비추지 않는 완벽한 어둠까지 왔을때, 확 잡히는 손. 그리고 귓가에 목소리가 작게 속삭였다.
"무슨 기도를 그렇게 울면서 해요 형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직 눈이 어둠에 익숙치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홍빈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디있는지 무슨 표정인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익숙해 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어둠속에 묻혀서 그렇게 있고싶었다. 내 얼굴이 그저 어둠이었으면 싶었다. 이홍빈의 한마디에 나는 나 자신이 모두 까발려진 그런 기분이, 참담함이 몰려들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직 신에게만 보여드린 모습. 그런데 이홍빈은 알고 있었고,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내가 무슨이야기를 했더라, 내가 어떻게 울었더라? 온통 혼돈이었다.
"뭐가 그렇게 슬펐어요."
"..아..나는.."
"오늘 크리스마슨데. 왜 혼자 그렇게 울어요 청승맞게."
"..."
"...사실 다 들었어요 형."
가슴 속의 모든 박동이 바닥으로 내리 꽂혔다. 그 어떤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아직까지도 잡혀있는 내 손에 시선을 박았다. 아니 그러다가 다시 발끝으로, 그러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천정으로 불안한 시선을 계속 옮겨댔다.
"아 저..미안해 홍빈아, 나는,"
"..네."
"아 그게...난 그게 정말로..아.."
결국 바닥으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아...망했어. 다 끝났어. 나는 망연히 바닥에 부딪혀 깨진 방울방울을 바라보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무 한심하고 초라했다. 참담하고 비참했다.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저 무대에서 박수와 환호가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이 어둠속에서 그렇게 구겨져 쳐박혔다. 아 제발.. 이렇게, 이렇게 알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제 기도가 그렇게 죄악이었던건가요..이토록 발끝마저 남겨두시지 않을만큼의 그런 죄였던걸까요. 머리가 멍하게 울렸다. 등 위로 홍빈의 손길이 닿는것이 느껴졌다. 무너져 내린 나를 토닥.토닥. 몇번인가 그렇게 쓸었다.
"형, 난 아직 아무말도 안했는데."
옆자리에 홍빈이 나와 같은 높이로 앉는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형.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하루종일 쉽지 않았을텐데. 진짜 형이 있어서 살았잖아 나는. 생각보다 애들이 형을 좋아하더라고요. 어르신들도 좋아하고. 목사님이 나보다 형을 더 좋아하는거 같아. 거 참 내가 이 교회에서 몇년을 있었는데."
"..."
"형..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나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나 때문에 울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마음 못받아줘서 미안해요."
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내 등을 토닥이는 그 다정한 손을 잡았다.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잡고있었고, 또 그렇게 다정히 잡혀있었다.
그래서 나도 다정히.
안녕.
너를 안녕.
이 초라한 나를 안녕.
너를 놓지 못하는 이 마음에 안녕.
수없이 흘렀던 내 기도에 안녕.
메리 크리스마스. 홍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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