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 대국에 말입니까?"
아버지의 표정엔 그늘이 드리웠다. 어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무슨 일이 터지리라곤 예감 해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혼인이라니.
" 어인 일로 갑자기 혼인이란 말입니까.."
" 나라의 부름이다."
" ..."
" 대국에서 공주를 후궁으로 삼겠다는 전갈이 내려왔다더구나."
쉴새 없이 떨리는 눈동자를 힘겹게 들어올려 아버지께 맞추었다. 여느때나 확신이 가득했던 눈동자엔 근심이 가득했다. 무신이 오를수 있는 최고 품계인 상장군 까지 지냈던 아버지셨다. 여느때건 흔들림없이 군대를 진두지휘하셨던 분이, 딸의 혼인에 이리 흔들리는 눈빛을 하실줄이야.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의 조국은 여느 곳과 다를바없이 평화로운 나라였다. 남쪽에 위치한데다 비는 모자람이 없었고 토지는 언제나 비옥했으며 따라 백성들은 굶주림이 없었다. 위로는 험준한 산맥에 가려지고 아래론 드넓은 바다와 맞닿아있으니 외세의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감히 태평성대라 부를 수 있는 시대가 흘러갔다. 나랏일에 앞장서서 백성들을 돌보셨던 선왕이 후대없이 돌아가시고 재앙은 시작되었다.
궁이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을 즈음, 맞물려 가뭄과 홍수가 몇년간 번갈아 가며 터졌다. 평화로움에 익숙해져 있던 백성들은 갑자기 닥친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당장 배를 곯아 죽는 사람이 여럿인데 군대를 소집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단 열흘. 비록 큰 규모의 땅은 아니었지만 수백년간 다른 나라의 침입을 보란듯이 막아내던 군대는 전멸했고, 다른 전장에 나가 계시던 아버지는 침통한 면으로 돌아오셨다. 열흘만에 나라는 대국의 손에 넘어갔다.
대국은 북쪽에 위치한 유목민의 나라였다. 사냥에 능했으며, 이번 대의 왕은 포악하고 성질이 사나우며 여색을 탐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했다. 과연 왕좌에 앉자마자 몇번의 전쟁으로 나의 조국과 같은 약소국을 손쉽게 점령했고 범위를 넓혀갔다.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리하여 이렇게 무리한 전갈을 내린 것이다. 공주를 후궁으로 삼겠다니. 본인의 사욕은 물론 정치적인 면에서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악한 이다. 후궁이 아니라 볼모가 더 알맞은 표현일지 모른다. 수틀리면 언제건 모가지를 틀어쥐고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 먹을 속셈이 빤히 보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선대의 왕도 후대가 없는 마당에 현 왕실엔 공주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왕의 먼 친척이라고 웬만한 사내들은 모조리 찾아왔는데 이와중에 계집이 낄리 없었으니 말이다. 무관의 총책임자셨던 아버지에게 화살이 틀어졌을 것이고, 과녁은 아버지의 유일한 약점이라 손꼽히는 내가 됐겠지. 맑은 생각에 방해가 된다며 멀리하셨던 술을 몇날 몇밤을 두고 마시는 모습을 보며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긴 했다. 하지만 막상 실제 입에서 나오는 확정형의 선고는 상상보다 가혹했다.
" 나라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처사가 아니겠느냐. 너 하나로 이 땅의 백성들이 목을 적시고, 배를 불릴것이야. 무얼 망설이느냐."
" ..."
" 나라의 부름을 받은 것을 감사히 여겨라. 네게 닥친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여라. 알겠느냐."
" 네."
몇번이고 목을 가다듬었지만 그 짧은 대답속에서도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치마 저고리에 감춰진 발끝이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곱게 다문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 성정이 포악하기로 유명한 대국의 왕이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 대감!! 너무 하신것 아닙니까? 감사히 여기라뇨, 겸허히 받아들이라뇨!! 단이는 이제 겨우 열 일곱입니다. 이렇게 어리고 여린 아이한테 어찌 그리 무정하실 수 있어요, 네?"
" 부인은 가만히 있으시게."
"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대국의 왕은 이 아이의 나이의 곱절은 더 됩니다. 이게 도둑놈 심보지 어찌, 어찌 감사히 여겨야 하는 일입니까.. 대국은 이 곳보다 훨씬 춥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길지 않은 이곳의 겨울에도 못견디고 매번 고뿔에 드는 아입니다, 제 오라버니들 보다 한참이 어려 아직 어리광이 많은 아입니다. 이대로 가면 다시 볼수는 있답니까? 어찌 그리 매정한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문 밖에 있던 어머니가 뛰어들어 오셨다. 원래가 조용하시고 차분했던 분인데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봤다. 내 어깨를 부서질 듯이 붙잡고 오열하듯 내뱉는 숨엔 어절마다 비통함과 원통함이 가득 담겼다. 그제야 실감이 나는 기분이었다.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추운 겨울이 일년 내내 계속 되는 곳, 한번 가면 기약없이 지내며 돌아오지 못하는 곳. 울음을 참는 목구멍이 솜뭉치라도 욱여넣은듯 꽉 막혔다. 다신 못본다니. 어머니 아버지를 다신 볼 수 없다니. 이 조국의 땅을 다신 밟을 수 없다니.
" 저는 괜찮습니다. 울지 마세요. 죽으러 간단것도 아닌데 왜이리 우십니까."
그런 상황임에도 할 수 있는 것은 위로 밖에 없다니.
-
지난 밤 어머니는 쉴새없이 우셨다. 늦은 통보에 난 이튿날 아침에 바로 출발 해야할 운명이었고, 그런 날 보낼 수 없다며 어머니는 오열하셨다. 그러면서 또 손에 쥐어주시는건 내 품만한 보따리였다. 이번 겨울에 추위를 유독 많이 타는 널 위해 준비했던 몫이라며, 비단옷에 솜을 넣어 누빈 겉옷이랬다. 하얀 빛의 옷감을 확인하고 설핏 웃자 다시 날 꼭 끌어안으셨다. 힘이 들땐 언제고 날 생각하라고. 이렇게 보낸 날 원망하라고. 죽을때까지 원망하라고. 미련하게 널 탓하지 말고. 한참 울다 탈진하기 직전에 들었던 음성은 그리 말했다. 나보다 내 걱정을 많이 한 사람을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냐마는. 작은 의문을 품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침은 여느때보다 분주했다. 대국에서 보내왔다던 궁인들은 날 치장시키고 거친 손길로 이끌었다. 마지막 인사는 남겨야 할 것 같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번씩 품에 안았다.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라 몸종에게 부축받으신 엄마를 보며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
" 곱구나, 단아."
아버지는 그말을 끝으로 안채로 들어가셨다. 딸이 말그대로 팔려가는 모습을 보기 힘드셨을거라 추측했다. 어젯밤 어머니와 함께 우느라 팅팅 부은 눈에 어울리지도 않는 분을 바르고 연지를 칠했는데 어찌 곱냐고. 장난스레 되묻고 싶었지만 그런 농도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저 희미한 웃음으로 내게 답하셨고 오래도록 가마까지 향하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셨다. 강한 아귀힘으로 손목을 잡아챈 궁인들은 날 가마에 욱여넣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몇날 며칠을 보내야 한다니. 나조차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결코 가볍지 않은 가마를 든 가마꾼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사사로운 걱정을 속에 안고 쓰러지듯 또다시 잠이 들었다.
-
" 마마. 도착했습니다."
몇날 몇밤을 달려 도착한 곳이다. 확연히 달라진 풍경과 공기에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곳이 대국이구나. 광활히 펼쳐진 평원과 조국의 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궁의 규모에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곳이 내가 살아야 할 곳. 죽어서는 나가지 못할 곳. 가마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얼을 빼놓던 날 재촉이라도 하듯 다부진 손이 내밀어졌다. 가마에서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기에 외간 남자의 손이라고 생각도 못한 채로 덥석 잡았다.
" ...?"
익숙한 감촉, 익숙한 음성, 익숙한 체취.
" 국아?"
" 마마, 이제 입궐 하실 겁니다. 전하의 용안을 바라보는 것은 예에 어긋나니 고개를 숙이세요."
아무리 뜯어봐도 정국이었다. 조국에서 거의 유일했던 죽마고우. 집안 어른들부터 형제들까지 친했기에 자연스레 어울렸던 벗이었다. 나이가 차고 신체에 변화가 생길 무렵부터 마주하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알 수 있었다. 정국이 분명했다.
인지한 순간부터 줄곧 고개를 숙인 상태였던 정국이 손을 슬며시 빼고 고개를 들었다. 푹 눌러쓴 갓 아래로 드러나는 고운 피부, 유려한 턱선, 부드러운 입술, 깎아지른 콧대, 그리고,
" 쉿."
여전히 반짝이는 눈망울까지. 눈을 마주치자 이곳이 어딘지조차 망각하고 왈칵 눈물을 터뜨리며 끌어안을 뻔 했다. 소꿉친구란 과거가 아니고, 동향인이란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웠을 일인데 그게 정국이라니. 등을 지고 온 고향이 생각나 코끝이 시큰해졌다가 마음놓고 미소를 지었다.
" 고개를 숙이시라니까요."
" 예."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웅장한 전경을 담은 궁의 문지방을 넘었다. 정국과 함께라면 어려울 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
혼인식은 며칠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몇줄이나 늘어서 있느라 왕의 용안조차 볼수 없었던 혼례식이 어영부영 끝났고 사무적인 절차만이 남아있었다. 그리 복잡한 절차는 아니었지만 워낙 인원수가 많았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강대국의 여식부터 나와 같은 처지의 약소국의 공주까지 족히 오십명은 넘는 것 같았다. 그런 이들의 신원을 일일히 확인하고 기별을 넣는 한편, 각자의 전각을 지정해주느라 궁인들은 내게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내 차례가 오려면 서른명은 족히 넘을 듯 싶어서 기다리는 와중에 정국에게 말을 걸었다.
"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 마마, 소인은 마마의 호위무사의 신분입니다. 과거의 사사로운 정은 버리시고 하대하시옵소서."
" 아.. 그, 그래. 내가 여기 오는 것은 어찌 알고 대국까지 따라온 것이냐."
" 마마의 아버님께 소식을 듣고 제가 이곳에 오는 것을 자원했습니다. 먼 곳에서 혼자 계실 마마가 염려되어 아버님도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 언제부터 여기 와 있었던게냐."
" 마마가 도착하시기 엿새 전이옵니다. 이곳에서 마마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전하의 명도 있었습니다."
아무렴. 나라를 책임지기위해 대국까지 온걸로도 모자라 도둑결혼까지 당하게 생겼는데 신경을 써줘야지. 이러나 저러나 오감에 익은 이가 내 주변에 있단 사실은 타국에서도 날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다행이다. 작게 중얼인 것을 들은건지 듣지 못한건지 정국은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
" 마마 차례인가봅니다. 어서 가보세요."
정국이 일러주자 종종걸음으로 매서운 눈매를 한 궁인앞에 가서 섰다. 궁인은 형식상 신상에 관한 것을 묻더니 내 품계와 전각을 일러주었다.
" 마마는 이제부터 정 3품 소용마마가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은월전에서 지내게 되실 것이구요. 위치는 마마의 호위무사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지고 온 짐이 있으시면 챙겨서 은월전으로 가세요."
" 아, 저 근데... 혹시 다들 조국에서 동향인을 데리고 오는 편입니까?"
조국에선 아가씨 소리는 당연하고 존대도 밥먹듯이 받아왔는데 이런 말씨라니. 다른 후궁도 아니고 한낱 궁인에게! 하지만 원하는 바를 얻기위해선 한수 굽히는 것도 필요했다.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자 이제 이 궁인은 아주 날 애물단지 보듯 노려보며 한심하단듯 말했다.
" 동향인을 데리고 온 것은 마마가 유일합니다. 직성이 풀리셨으면 어서 은월전으로 향하세요."
어라, 말투 봐라? 기분은 상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인사를 했다. 궁인은 썩 내키진 않은듯 했지만 궁인에게 정 3품 후궁이 먼저 인사를 한 상황으로도 욕을 먹기 충분한 상황이었기에 고개를 조아렸다. 상관으로 보이는 여인이 그 궁인을 곁눈질 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후에야 대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전각으로 향하는 걸음은 정국과 나 뿐이었다. 간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국에게 물음을 놓았다.
" 정국아, 은월전에 가보았다고 했느냐? 이름은 마음에 드는데 어떤 곳이더냐?"
" 마마께서 좋아하실 만한 곳인 것 같았습니다."
" 어떻든?"
" 전각 주변엔 화초가 무성하고 바로 옆에 있는 인공 연못엔 비단잉어들이 노닐더군요. 그리고 바로 뒷편의 언덕도 있으니 전부터 놀러다니기 좋아하셨던 마마껜 안성맞춤인 곳 일 겁니다."
" 그으래? 그럼 얼른 안내해보거라. 어서 그 곳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희미하게 웃음을 띈 정국이 앞서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자 나도 발을 재게 놀리며 따라잡았다. 가는 길을 기웃거리다 정국의 어깨로 시선을 고정시키자 이유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어렸을때 만날때완 정말 딴판이다. 여자애인 나보다 곱던 피부와 둥그렇고 반들거리던 눈망울이 아니었으면 몰라봤을지도. 어느새 그 정도로 근사한 사내가 된 정국이었다. 키는 내가 조금 더 컸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비교도 못할 정도로 정국이 훨씬 커졌다. 머리 하나는 족히 차이나는듯 했다. 떡 벌어진 어깨하며, 젖살은 어디가고 날렵해진 턱선 따위에서 사내의 향기가 나는 듯 싶었다. 어느새 사내가 되어버린 남동생을 바라본 누이의 마음처럼 기분좋게 부풀어올랐다. 기특하긴.
-
전각이 가까워질수록 내 입은 점점 벌어졌다. 우리 집의 내 침소도 꽤나 큰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대국은 크기부터가 남달랐다. 새로 지은 모양인지 깔끔해보이는 전각은 내 방보다 훨씬 컸고, 내부의 가구들도 고풍스런 분위기에 나비들이 나전칠기와 수로 은근한 화려함을 더했다.
" 와아..."
" 그리 좋으십니까."
" 당연하지. 엄마도 보면 분명 좋아하셔..."
삽시간에 굳은 내 표정을 알고 정국은 손목을 잡아챘다. 밖엔 더 볼거리가 많습니다. 구경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그리 얼을 빼놓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정국의 말과 함께 후문으로 나왔다. 화려하게 수놓아진 화초들을 보며 주춤주춤 다가섰다.
" 정국아, 이리 추운데 모두 꽃을 피웠구나."
" 은월전은 대궐중에 가장 따뜻한 곳입니다. 마마께서 추위를 많이 타신단 소릴 들으신게 분명합니다."
" ... 그러게."
얼굴도 보지못한 대국의 왕. 꽃향기가 역하게 느껴질 무렵 정국은 또 내 손목을 잡아챘다. 저 쪽엔 연못이 있습니다. 상을 받고 남은 낱알들을 던져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맑은 물은 밑바닥까지 다 들여다보였다. 정국의 말마따나 비단 잉어들이 어울려 헤엄을 치고 있었다.
" 와. 우리도 우리 집 뒷산의 냇가에 가 놀지 않았더냐. 내가 치마 저고리로 피라미를 잡느라 아버지께 야단이 나면 다 네탓이라고 네가 뒤집어썼는데."
" ... 마마."
" 너도 참 무정하구나. 생각은 오롯이 나의 것이 아니더냐. 고향을 떠난 것도 서러운데 회상조차 막으면 난 대체 어쩌란 말이냐. 넌 당장 내가 힘들어하는 것이 보기 싫겠지만, 난 이리 무감하게 있다가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것이 더 비참할 것이다."
" ...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낮게 한숨을 뱉었다. 뭐가. 애꿎은 상대에게 화를 내는 내가 더 어리석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잠시의 정적이 돌았다. 이렇게 어른인척 나선다지만, 정국도 어찌됐건 열일곱이다. 고향 생각이 안날리 없지.
" 가자. 밤 바람은 차구나."
정국이 재빨리 제 도포를 걸쳐주었다. 사내 다 됐네. 놀리듯 말하자 얼굴이 붉어져 바로 앞에 있는 언덕을 향해 시선을 홱 트는 정국이다. 부끄러워 하긴. 큭큭 거리자 민망한지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렸다. 이리 순탄한 날만 이어졌으면 더이상 바램이 없을텐데. 내게 닥친 운명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에 그저 쓴 웃음만 지었다.
공주의 남자 ost - 꽃물
은월각이란 이름답게, 이 전각은 어두운 한밤중이 되어서야 진수를 드러냈다. 은은한 달빛이 전각 옆의 인공 연못에 비치면 물빛과 달빛이 섞여 기묘한 색을 만들어내는데 또 그게 절경이라 밤잠 설치는 날엔 항상 침소의 창을 열어두고 고개만 내밀어두었다.
" 마마. 바람이 찹니다. 왜 여직 이러고 계십니까."
그 빛에 홀리듯 빠져들어가 정국이 내게로 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눈을 연신 끔뻑이다 입술을 포개 깨물었다. 어찌나 훈계가 심한지 몰래 하곤 했던 일인데, 오늘은 달빛이 너무 맑아서 깜빡 경계도 풀어버렸다. 정국은 대개 내가 잠이 들때까지 침소 앞에서 눈을 감고 앉아 선잠을 자고 새벽녘이 되면 호위무사들의 처소로 향하곤 했다. 지금도 내가 쥐죽은듯 고요히 있으니까 잠이 든 줄 알고 처소로 가려던 길인 듯 싶었다.
전각의 창문 아래 바로 위치한 연못이었기에 정국은 연못가에, 그러니까 창문을 통해 바로 나와 마주보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리 난 반쯤 누워있고 정국은 서있는 상태라지만 건물 높이도 있는데 눈높이가 맞을건 뭐람. 괜한 자격지심에 입술을 비죽 내밀자 정국은 크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 아."
그제야 속곳밖에 입지 않은 내 차림새를 떠올리며 솜이불로 몸을 꽁꽁 감쌌다.
" 이, 이제 봐도 된다."
" 칠칠치 못하긴. 어떻게 변함이 없냐."
민망해진 분위기를 쇄신 시키기 위함인지 예전의 정국의 말씨가 되었다. 아까의 부끄러움은 잊고 비죽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 국아. 고향의 백성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 ..."
진실을 아는 자는 말이 없었다.
" 당연하지. 괜한 걱정을."
거짓을 담을 수 밖에 없는 날 영리한 네가 용서하기를.
" 그럼 됐어. 그럼... 됐지, 뭐."
한껏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이다 정국을 바라보았다.
" 너는 행복해?"
" 응, 이 곳 사람들도 썩 나쁘지 않고, 너도 이제 철이 들어서 예전처럼 사고 치지도 않고."
" 아니, 그런거 말구."
" 그럼 뭐."
" ... 아니다, 너랑 무슨 얘길 하려고 말을 꺼냈냐. 됐어, 나 이제 잘거니까 어서 너도 처소로 가."
난 널 지킬 수 있어서 행복해. 정국은 대답 대신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
" 마마, 일어나세요."
낯선 목소리에 눈을 힘겹게 떴다. 눈에 설은 여인의 얼굴이 보이고 그제야 방안의 빼곡히 들어찬 궁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급히 몸을 일으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 어인 일이냐."
" 마마. 오늘 마마께서 초야에 든다고 하십니다. 저녁즈음에 침소에 들리신다니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합니다."
내 물음에 정국이 대신 대답했다. 그제야 이렇게 많은 인원의 궁녀가 한아름 들고 온 것이 무언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풍성한 가채부터, 온갖 화장도구들을 가지고 온 것은 집을 떠나 올때 보았던 그것들과 같았다.
" 오, 오늘 밤이란 말이야? 이렇게 갑자기... 반년간 언질도 없지 않았느냐."
정말 그랬다. 은월전이 가장 안쪽에 위치한 처소인데다 이름 난 나라도 아니었으니 이대로 까맣게 잊었을거라,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홀로 예상하고 있었던 바는 그랬다. 당황한 채로 울망거리자 정국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확고한 움직임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을 가라 앉혔다. 내가 얼굴을 팔면, 백성들이 목을 적시고, 내가 몸을 팔면 백성들이 배를 채운다. 결국 나 하나만 포기하면 깨끗할 일이었다. 단단한 눈빛을 하고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 마마는 결이 워낙 좋으셔서 분을 많이 안칠해도 되겠어요."
" 속눈썹도 어찌 이리 기세요. 화장까지 끝마치면 그 유명한 청의 미인들과 견주어도 되겠어요."
아부성 대사들에도 난 입술만 꼬옥 다문 채였다. 심란했다. 여색을 취하는 왕, 배를 곯는 백성들, 성정이 포악한 왕, 고향에 계실 부모님. 엇갈리는 생각에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화려한 복식까지 억지로 꿰어 입히자 본분이 끝났다는 듯 궁녀들은 일제히 침소 밖으로 나섰다.
-
왕이 행차할 길을 미리 마중한다며 침소와 약간 떨어진 통로로 향한 궁녀들에 다시금 침소에는 죽음같은 고요만이 감돌았다. 아, 침소 밖의 정국만 제하고.
" 정국아."
" 예, 마마."
" 너 거기서 계속 그러고 서있을거야?"
" 그게 제 일입니다."
수치는 그 다음 단계의 일이었다. 당장 내겐 왕과의 초야가 우선이었다.
" 전하께서 늦으시는구나."
" 정사가 아직 끝나지 않으셨나 봅니다."
" 정국아 바깥이 어떻니, 어두워?"
" ... 예. 달도 떴습니다."
덜컥이는 소리가 나더니 동태를 확인한건지 정국은 삽시간에 말이 없어졌다. 왕의 여자 랬다. 왕을 위해 꾸민 모습은 왕 이외에 다른 사내가 봐선 안된다며 쪽창도 막아놓고 정국 역시 내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다. 정국마저 입을 다물자 어색함만이 공기를 부유했다. 주위가 고요해질수록 머릿속은 시끄러워졌다. 그러다 무의식의 망에 걸린 기억은 정국과 함께 한 유년 시절이었다.
" 국아."
" 마마. 소리가 새어나갈까 염려스럽습니다."
" 정국아. 우리 산에 놀러갔던거 기억나?"
" ..."
" 우리 그때 진달래 따먹고 그랬잖아. 너는 따는 족족 진달래였는데 난 구분도 못하고 철쭉만 한가득 따왔는데."
" ..."
" 그때 내가 독버섯 예쁘게 생겼다고 무작정 따왔던건 생각나? 그거 손에 잡고 열꽃이 올라 아버지한테 엄청 꾸중 들었잖아."
" ..."
" 그때 니가 준거라고 해서 우리 아버지께서 너 다신 안보려고 했었는데.. 탕약먹고 빨리 나았기에 망정이지."
대꾸없는 수다를 떨다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 어쩌다 이리 됐을까, 우리."
가슴께를 누가 짓누르는 것 마냥 숨이 콱 막혀왔다. 정국도 마찬가지인지 문너머로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속이 쓰렸다.
" 주상전하 납시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발개진 눈망울을 되돌리려 눈을 깜빡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문이, 열렸다.
-
왕의 얼굴은 난생 처음보는 면이었다. 용안을 함부로 쳐다보면 안된단 언질이 있었지만 얼을 빼놓다 꽤 오랜 시간 바라보고야 말았다. 왕은 슬쩍 웃음을 지었고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전장에 수시로 나갔다더니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엔 잔채기들이 무성했다. 아버지 역시 무신이었기에 한평생을 전장에서 살았지만 성정에서 나온 인상은 딴판이었다. 아버지께선 강단있는 성격이었지만 그만치 유쾌하셨기에 매서운 눈매를 가지고도 인자한 인상이셨다.
눈앞의 왕은 달랐다. 전장에서의 야만과 잔인함들이 그대로 얼굴에 맺혀 보는이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할만한 얼굴이었다. 초조함에 버릇처럼 입술을 뜯으려다 의식적으로 멈췄다. 사내는 큰 낯빛의 변화 없이 불을 젓가락으로 그으며 껐다. 가까이로 다가왔다. 사내처럼 멀쩡히 있으려고 했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은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린 왕은 저고리를 쥐채어 잡아뜯듯이 풀었다.
파드득 놀라버린 난 그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의복을 손쉽게도 쥐어뜯어버리는 왕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한번에 몇겹의 속치마를 벗기고 적삼을 뜯는 손길에 난 차라리 눈을 감았다. 입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보며 약간의 유예가 될거라고 생각했던 날 비웃는듯 했다. 빠르게 발가벗겨진 나는 능숙하지만 거친 손길에 의해 눕혀졌다.
왕이란 작자가 질척한 혓바닥으로 몸 곳곳을 누빌때면 난 가만히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부모님 얼굴이며 고향의 전경이 펼쳐졌다. 이곳을 박차고 나갈수 없는 이유는 수만의 생명들 탓이었다. 보잘것없는 내게 수만의 목숨이 걸려있다.
애초에 속국의 공주를 후궁으로 들인 것은 계약 관계나 다름없었다. 왕이 내 다리 사이를 드나들 때마다 계약서에 인장이 쾅쾅 찍히는 느낌이었다. 핏물이 흐르고 낯선 감각에 아릿해도 비명 한번 없었던 내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을때 역시 그 생각을 했던 즈음이었다.
" 가엾게도. 왜 우는 게냐."
그제야 끅끅 거리며 울음소리와 함께 교성이 터졌다. 날 감히 가엾다고 생각조차 못했던 내 상황이 너무 가여워서. 내가 이리 시들어갈수록, 조국의 부모님과 백성들은 생기를 띄겠지. 내가 수치에 몸부림치다 죽고 싶단 생각을 할수록, 그들은 삶의 이유를 되찾겠지. 왕은 척척한 혀를 내어 내 눈가를 핥아 올렸다. 정사는 막바지로 치닫고 왕은 자신의 씨를 내안에 뿌렸다. 까무룩 기절한 나를 안고, 몇번이나.
그리고. 고스란히 듣고 있었을 넌,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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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침소를 나섰다. 아직 열 일곱밖에 안된 애를 보며 무슨 욕정이 들끓었다고. 속안에서 부글거리는 용암을 애써 눌렀다. 꼬박 뜬눈으로 지새워 눈엔 실핏줄이 죄 터지고, 눈 밑이 퀭하게 어두워졌지만 네 걱정에 쉽게 잠들 수도 없었다. 궁녀들이 안으로 들어가 널 추스르고 목욕궁으로 데리고 갈때까지 나는 꼼짝없이 서서 바라볼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자네도 사내구만. 그치만 시선은 좀 떼도록 하게. 딴 사람도 아니고 왕이 머리를 올린 여인네한테."
지난 밤 옆에서 자리를 지켰던 왕 측의 호위무사가 건넨 말이었다. 곱게 분칠을 했을 얼굴은 눈물과 타액으로 죄 번져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꺾여도 향내는 사라지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 이름 없는 약소국에서 왔다 들었소만, 전하께서 꽤 만족한 모양이네. 왕실의 피도 못받았다기에, 박색일줄 알았더니 저런 미색이 숨어있을줄 어찌 알았겠는가."
" ..."
" 자네 소문 못들었나? 은월전에 양귀비와 견줄만한 미인이 산다고, 그게 소용마마라고 소문이 퍼졌던걸 정녕 몰랐단 말인가?"
비단 내가 품은 연심 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조국에서도 유명했다. 은은하고 기품있는 미색으로, 그에 걸맞는 곧고 유한 성품으로. 집안도 집안이니 언젠간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길 날이 오리라 생각은 해왔다. 다만, 내가 아닌 다른 사내의 품에 꼭 안겨야한다면, 그 사내는 너의 정인이었으면 했다. 네가 사랑하고, 또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인. 나보다는 못하더라도, 나만큼 널 보듬을 수 있는 정인. 한순간 호기심으로 널 찾아온 왕이 아니라,
" 전하 역시 은월전은 안중에도 없다가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게 아니던가. 역시. 탄복할만한 미모군. 전하께서 이리 밤을 길게 보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네. 내가 전하 곁에 오래 머물러서 아는건데, 대게 이런 경우엔 승은을 내려 격상하,"
" 다시 말해봐, 뭐?"
궁금하지도 않은 소식을 꾸준히 물어다주던 무사를 듣는둥 마는둥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번에 귀를 채는 내용에 본능적으로 멱살을 쥐틀었다. 어젯밤까지만해도 북적이던 복도엔 궁녀들이 모조리 목욕궁으로 향해 단 둘 뿐이었다.
" 무, 뭘 말인가!"
" 격상? 씨발, 격상? 네놈이 지금 격상이라 했느냐?"
"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서슬이 퍼렇게 선 칼날을 주저앉은 이의 목에 겨누자 벌벌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목을 베기 위해 칼을 들어올리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 그, 그러니까. 귀인!! 귀인으로 승격될거라 들었소!! 전하가 지난, 사적인 자리에서 말하셨소. 그, 그걸 내가 엿들었고!!"
" 귀인이라고?"
" 목숨만 살려주시오. 내 식솔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단 말이오."
칼을 거두자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귀인. 귀인 이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까지 그녀의 옆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왕의 승은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약소국인데다 공주도 아니었으니 다른 후궁들보다야 덜 조명을 받았고, 덜 관심을 얻었고, 그래서 여태까지 곁을 지킬 수 있었다. 밤이 깊으면 단 둘이 산책을 나갔고, 외로움에 잠길때면 둘만 아는 이야기를 했다. 추억을 하나 둘 팔다보면 향수병을 어느정도 덜 수 있었다. 이제 귀인이 된다면, 호위무사나 궁녀들도 못잡아도 몇명은 더 따라 붙을 것이고, 왕의 여자란 낙인이 떡하니 찍힌 그녀와 단 둘이 보낼 시간은 거의 없을 게 분명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짐승같은 왕이 여색을 밝힌단 소문은 뜬눈으로 지새우며 몸소 깨달았고, 그녀가 고향을 그리워 한단 것 역시 빤히 보였다. 그런데, 그런데. 착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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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 꽃말 : 사랑의 노예, 나는 영원히 당신의 것, 희망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봄이었던 것 같아. 야트막한 담을 넘어 그날도 너의 방에 모여 앉았지. 너는 조막만한 손으로 수를 놓고 있었고 난 엎드린채로 서책을 가져와 읽고 있었어. 하얀 나비와 복숭아꽃이 놓아진 수를 보고 넌 또 심통을 부렸고. 아.. 하기 싫어. 나는 네 쪽으로 시선을 힐끔 던지고 다시금 서책으로 고개를 돌렸어. 너는 다리를 까딱이다 내게로 아예 몸을 틀었지.
" 국아."
애교섞인 목소리에도 난 돌아보지 않았어. 명치께가 간질간질 해졌어도 말야. 그럴때마다 넌 꼭 난처한 부탁을 했었거든. 무심하게 서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랬지.
" 왜."
기다렸단 듯 넌 해맑은 목소리로 그래.
" 도망가자."
" 됐어, 얼른 수나 마저 완성해."
" 아아... 한번만. 이번 한번만이다, 응?"
" 그리 속은게 벌써 수십번이다. 됐어, 오늘은 진짜 안돼."
새침하게 토라진 넌 풀죽은 듯 수를 놓기 시작하지. 그럼 난 그제야 몸을 일으켰어. 한번 토라지면 티라도 내려고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널 누구보다 잘 알았거든. 그럼 이제야 마음껏 네 뒷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거야. 같은 한복을 입었음에도 드러나는 유려한 몸선에 특히 눈에 띄는 둥근 어깨가 쳐져 있으면 난 또 어김없이,
" ... 이번 한번만이다?"
약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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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들은 속곳만 입은 날 정성껏 닦아내었다. 복숭아꽃잎이 떠다니고 은은한 향유가 섞인 목욕물이라니. 이런 대접은 대국에 온지 처음으로 받아 보는 것이다. 물론 궁녀들이 수족을 대신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닦아낸다고 해도 뼛속 깊이 아로새긴 사내의 흔적은 지워낼 수 없을걸. 자조적으로 웃음을 띄웠다. 복숭아꽃이 일렁이는 물결에 뒤집혔다.
정국. 그 이름이 떠오른건 큼지막한 천으로 내 몸을 감싼 후였다. 밤새 있을거라고, 그게 제 일이라고 말했던 네가 그제야 떠올랐다.
들었을까? 어디까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더럽다? 끔찍하다? 이제 어떤 시선으로 날 바라볼까. 그게 아니야. 네가 생각할 그 어떤것도 내 본심이 아니야.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대화할 상대가 없음에 삼켜졌다.
전각으로 가서 멍하니 앉은 채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어제보다 부쩍 차가워진듯한 공기가 창틈새로 새어들어오면 이불을 덮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이불조차 사치로 느껴졌다. 허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고, 처음 겪어본 감각에 몸 구석구석이 쑤시는데 정국은 그림자도 비추질 않았다. 끔찍했던 정사보다 지금의 고립감이 더 괴로웠다.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듯한 기분에 호롱불조차 켜지않고 고개를 숙였다. 향긋한 향유도 역하게 느껴진지 오래였다.
" 소용마마."
" ...정국아?"
정적을 깨운건 그토록 기다렸던 네 목소리였다. 왕실의 기품따위는 잊은지 오래였다.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 마마, 열지 말고. 거기서 들어주세요."
물기에 젖어 척척한 음성을 들으며 몸이 굳었다. 문손잡이를 잡은채 미동이 없자 정국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 마마, 소인을.... 소인을 용서해주시옵소서."
" ... 왜그래, 정국아."
" 감히, 제 주제도 알지 못하고 감히 소인이,"
마마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이 연심을 용서해주세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혀 몰랐던, 아니 어쩌면 모르는척 해왔던 진실이 단박에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입을 벌린채 어떤 모양의 형태소도 만들어내지 못한 나는 느리게 감기를 하듯 무너졌다. 슬쩍 밀린 문이 그대로 열리고 꿋꿋이 버티고 선 정국의 모습이 드러났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정국에게 향했다. 토하듯 진심을 뱉어내낸 어깨가 바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넓게만 보였던 너의 어깨였는데. 이제야 열일곱 제나이로 보이며 속내를 비춘 정국에게 소리없이 안겼다. 힘이 통 들어가지 않는 팔이었지만 있는 힘을 가득 줘서 정국을 껴안았다. 판판한 가슴에 볼을 대자 미친듯이 뛰어대는 심장고동소리가 들렸다.
" 단아."
대국에 온지 반년만에 타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모든게 다 내 욕심이었다. 널 따라 이 궁에 들어 온것도, 나라면 널 지킬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도..."
" 무슨 소리야, 그런거 아냐."
" 그런데 널 지켜내지 못했어."
열일곱의 꽃들은 차가운 칼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렸다. 정국은 떨리는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안았다. 숨도 못 쉴 정도로 바투 붙은 상체에 가쁜 숨만 내쉬며 울음을 참고 있는데,
" 도망가자."
어린 날의 꿈처럼,
" 우리 둘이 숨을 곳 하나 없겠니."
고작 네 음절에 껌뻑 취할 정도로 달콤한 향내를 흩뿌리며.
" 도망가자, 우리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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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신 사진이랑 브금 안넣을거야 (울뛰) 이런 거 넣으시는 작가님들 정말 존경스럽네요........
제 짤막한 역사상식은 모른척 해주세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안그래도 찾는데 애먹었습니다.....
고전물도 안쓸거야 (울뛰2) 단이는 탄들에서 따온거예요, 알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하고 오늘도 즐거운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