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Horeudon
기지개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 호원이 거실로 나오자마자 느낀 것은 동우가 없다는 것이다. 동우야, 동우야! 동우야 어디있냐! 호원의 목소리에 화장실에서 여기있어! 라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놓였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화장실 문을 덜컥 열었다. 그런데, 헉. 호원은 그대로 화장실 앞에서 굳어버렸다.
" 문, 문 닫아! "
" ..저, "
" 문 닫으라고! "
동우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이 든건지 화장실 문을 재빨리 닫고 그 문에 기대어 주저 앉았다. 분명 동우의 나체, 아니지 아 모르겠다. 동우가 씻고있는 줄 모르고 화장실 문을 덜컥 연 것인데.. 절, 절대 일부러 그런게 아니란 말이다. 호원이 멘붕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어푸어푸 거리고 있을 때 쯤 화장실 문이 다시 열렸다. 흰 색 티셔츠에 검정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동우가 머리를 탈탈 털고는 호원을 끌고 의자에 앉힌다.
" 아침은 그냥 먹지말자. "
" 뭐? "
" 머리 좀 자르게. 어제 약속 했잖아. "
도망가면서 안된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만히 눈을 감는 호원의 모습에 동우는 꽤 놀랐다. 뭐야, 한번 한 말은 지키겠다 이건가? 나름 누나가 미용실 일을 해서 알바가 빵꾸났을 때 땜빵으로 머리 손질을 했던 경험이 있었던 동우기 때문에 능숙하게 호원의 머리를 슥슥 잘랐다. 헐 뭐야.. 이, 이호원 맞으세요?!
" 이게뭐냐. 완전 못생겨졌지 않느냐! "
" 못생겨지긴 뭐가 못생겨져! 한 구천배는 나은데! "
" 그건 내가 원래 좀 멀끔하게 생긴 외모였기에 가능한 것이고, "
근거 모를 호원의 자신감에 동우가 헛 웃음을 지었다. 아니 대체 이런 근자감은 어디서 나는거야? 그런 호원을 혀를 차며 바라보다 동우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생겼는지 호원을 끌고 거실 식탁에 앉힌다. 참, 우리 할 말 많잖아.
" 이호원 니가 어떻게 여기에 왔고, 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건지 알아봐야지. "
" 사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조금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
" 뭐? 너 그걸 왜 이제 말해. 좀 빨리빨리 얘기하지. "
" 실은 내가 서책과 함께 이곳으로 뚝 하고 떨어졌는데, 그 서책이 무언가 비밀의 열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
" 비밀의 열쇠? "
" 분명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터인데, 아무 이유 없이 그 서책을 이리로 보냈겠느냐? "
오 듣고보니 그러네? 동우가 호원이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고는 역시 옛날사람이라 머리하나는 빠릿빠릿 잘 돌아가는구나! 란다. 또 그 말을 듣고 호원은 좋다고 에헴 거린다. 그 동우에 그 호원이지 뭐. 아마도 둘은 도토리 키재기로 싸우고 칭찬하는 듯 싶다.
***
우현은 하루동안 자신의 전화와 문자를 다 씹는 장동우 때문에 미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회사에서 일은 해야되는데 온 신경은 그리고 쏠려있으니. 우현은 매일같이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바람을 피는 이유는 장동우의 중요성을 알기위함이고, 자신이 장동우에게 욕하는 이유는 조금 더 애정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그런데 장동우는 자신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잘 아는데 왜 바람을 피는지, 아 바람은 아닌가? 아직 자신이 너무 앞서나갔나 하는 생각에 더 미칠지경이었다. 아니 왜 연락이 안되냐고 연락이!
" 아 씨발, 미치겠네. "
우현의 욕두문자에 옷 수량을 세고 있던 명수가 표정을 찡그렸다. 아침부터 왜 욕질이야. 명수의 말에 우현이 뒷머리를 짜증난다는 듯 탈탈 털고는 핸드폰을 꺼내어 또 동우에게 전화를 건다. 아, 이 씨발. 왜 전화를 안 받아? 미친 거 아니야? 진짜 나한테 제대로 맞아봐야 그제서야 정신 좀 차리지?
" 넌 회사와서 욕만하고 가냐? 그래놓고 월급 꼬박꼬박 다 받아 처먹고? "
성규였다. 우현은 가뜩이나 장동우 때문에 일에 집중도 안되고 짜증나 죽겠는데 자신의 성질을 한번 더 건드는 성규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저번 주에 들어 온 신입치고는 배짱이 꽤 두둑하다. 아무리 이 쇼핑몰 피팅모델이건 뭐건 위 아래는 있는 것인데 그런 것 하나 없이 저번 주 부터 자신을 갈궈댄다. 통화하면 통화비 아깝다 일이나해라. 문자하면 문자하지말고 일이나 해라. 도대체 왜 자신의 일에 나서 사사건건 간섭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우현이 결국 그대로 터졌다.
" 이봐요, 김성규씨. "
" 뭐요. "
" 당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봤자 여기서는 저번 주에 새로 들어온 피팅모델에 불과한거 모릅니까? "
" 같은 동료로써 충고하는거에요. 쇼핑몰 말아먹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지금 당신 때문에 명수 혼자 수량세고, 성열이 혼자 주문작업해요. 당신 때문에. "
" 이봐요 지금 내가 중요한, "
" 애인이 그렇게 중요하면 연애사업이나 더 키우지 왜 여기와서 이러냐고. "
" ...야 "
" 그렇게 할거면 일 관두라고. "
" 지금 말 다했어요? "
네 다했어요. 성규가 살짝 웃으며 우현을 쳐다본다. 전혀 웃을 상황은 아닌데.. 지켜보고 있던 명수와 성열이 눈치를 보며 잠깐 자리를 뜬다. 성열과 명수가 나가자마자 우현은 성규에게 다가가 손목을 끌고 벽 쪽으로 성규를 밀어붙였다.
" 저번 주 부터 자꾸 내 일에 대해서 간섭하는데, "
" ...... "
" 그거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김성규씨. "
" ...... "
" 그만 나대라구요. "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우현을 보고 성규가 소리친다. 내가 나대지 않게 니가 일을 열심히 하면 될 거 아니야!
***
혹시나해서 핸드폰을 열어본 동우는 어제의 기록보다 더 큰 기록을 세운 우현의 부재중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마도 남우현 엄청 화났겠지? 동우의 약점은 거의 없는데 딱 한가지가 있다. 그 한가지는 바로 남우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감도 넘치고 기죽지 않는 그 장동우가 남우현 앞에만 서면 항상 작아진다더라.
결국 동우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뭐야 왜 안받지? 아마도 회사 생활 때문이라 생각한 동우는 전화를 끊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정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호원이 있었다.
" 뭐해? "
" ..... "
" ..자? "
" 아니다. "
호원의 눈 앞에 손을 휘휘 젓던 동우가 아니라는 호원의 말에 손을 자시 제자리로 급하게 옮기고는 호원의 옆에 자리 잡는다.
" TV도 몰라? "
" 알리가 있겠느냐. "
" 아, 그렇지. "
호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동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마주편에 있는 TV를 가르킨다. 저게 TV라는 건데.. 인형극같은건 알죠?
" 우리 때 꽤 유행했던 극이다. 근데 그건 왜? "
" 지금 시대에서는 인형이 연기를 하는게 아니라 사람이 연기를 해. "
" 그렇게 인간의 가치가 떨어졌느냐? "
" 요즘엔 그게 인기직업이거든? "
" 아.. 시대가 많이 바뀌었구나. "
" 그걸 제 3자가 어떤 기계 안에 담고 우리에게 보여주는거야. "
동우의 말에 호원이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동우가 재빨리 리모컨을 들고 전원을 키자, 요즘 최고 유행이라는 응답하라1997이 티비 전원을 채웠다.
" 저게 그 인형같은 직업인가? "
" 맞아. 요즘 저게 되려면 연기도 잘해야되고 노력도 해야되고 얼굴도 잘생기고 예뻐야해. "
" ..나는 쉽게 할 수 있는 직업이겠구나. "
" 허 참, 그냥 보기나 해. "
몇 분간을 TV화면에 집중하던 호원이 허탕하게 웃으며 인피니트 호야의 연기에 감탄한다. 저 사내가 연기를 정말 잘하는구나! 어떻게 저런 섬세한 연기를 하나하나 표현할 수가 있단 말이냐!
" 아주 좋아 죽네, 죽어. "
준희의 연기가 끝나고 곧바로 TV스크린이 시원과 윤제의 키스신으로 넘어간다. 동우는 갑작스레 진행되는 키스신에 고개를 돌리고 괜히 헛기침을 내뱉는다. 호원을 살짝 쳐다보니 엄청나게 집중해서 보고있다. 와, 대박이야.. 너도 남자였구나?
" 내는 다 나았다. "
시원의 대사에 동우가 괜히 얼굴을 붉힌다. 키스신이 끝나고 드라마도 끝나자 동우가 재빨리 TV전원을 끈다. 재, 밌지? 동우의 말에 호원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우의 양 볼을 감싼다.
" 저거 진짜 정말로 재미있구나! "
" ...응? "
" 다음에도 보여줄 수 있느냐? "
" 아, 뭐.. "
" 내가 꼭 값은 갚겠다. "
보는거야 어렵지 않은데.. 동우의 말에 호원이 고맙다며 동우를 꽉 안는다. 호원의 입장에선 그냥 고망무의 표시로 포옹을 한 것인데 동우는 그게 아니였나보다. 우현이 고백했을 때 빼고 처음으로 따뜻하게 안겨보는 것이 었기 때문에 괜히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이건 내가 저 양반한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부드러운 스킨십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걸꺼야.
식탁 위에 동우가 김치찌개를 올려놓자 호원이 입 맛을 다신다. 우와, 이게 다 네가 한 음식이라고? 호원의 물음에 동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호원이 재빨리 김치찌개에 숟가락을 담구어 한 입 후루룩 집어 넣더니 맛있다며 호들갑이다. 동우가 살짝 웃자 호원이 동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 니가 생각보다 의외의 구석들이 많구나. "
" 그게 무슨 말이야? "
" 화만 내는 사내인줄 알았더니, 극도 값치레 없이 보여주고 이렇게 맛있는 밥도 대접하고.. 게다가 날 데리고 살기까지 하지 않느냐. "
" 아, 그런가..? "
" 너는 최고의 남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호원의 웃음에 괜시리 동우도 웃음이 나왔다. 와 진짜 장동우 미쳤나봐. 요즘 스킨십이, 아니 진정한 사랑이 궁했냐? 남우현이 하도 굴려먹어서 이호원이 남자로 다 보이네. 난 절대 이호원을 좋아하는게 아냐. 이건 그냥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이라 그런걸 뿐야. 아니지?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이라니! 그냥 나는, 그냥..
어제부터 호원에 대한 이상한 생각들만 둥둥 머릿속을 떠다니니 동우는 죽을 맛이었다. 나는 절대로 이호원을 좋아하는게 아냐! 만난지 몇일 됬다고...
***
" 명수야. "
" 응? "
진짜 괜찮을까? 저렇게 성규형이랑 우현이 둘만 남겨두고 나와도? 성열의 걱정스러움이 한껏 묻어나오는 말투에 명수가 따뜻하게 웃으며 성열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괜찮아, 남우현이 누구 때릴사람이야? 명수의 말에 그건 그렇지.. 라며 말하지만 아직도 걱정스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 근데 명수야. "
" 어? "
" 요즘 왜 동우형 안오지? "
" 그러게, 무슨 일 있나? "
" 아까 우현이 형 전화도 씹는 것 같던데.. "
그건 우리가 신경쓸 거 아니잖아. 헤헤 하며 웃는 명수를 보니 성열도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명수야, 오늘 나 너랑 일찍 집에 들어갈래.
" 왜? "
오랜만에 너랑 자고 싶어서?
***
일을 하다 우현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 홀드키를 풀어보니 부재중 전화 한통. 발신자 장동우. 김성규 그 개자식이랑 얘기하느라 장동우의 전화를 놓쳤다.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나 또 받지 않는다. 왜 자기가 걸어놓고 전화를 안받냐고.
" 야 김성규. "
" ..어 '
" 너 때문에 장동우 전화 놓쳤잖아. "
"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
"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
" 그냥 아무말도 꺼내지마. "
그만하자. 우현의 말에 성규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탁자 위에 올려진 새 신상 옷을 괜히 만지작 거리던 성규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우현의 손목을 잡고 끌어 올린다.
" 야, 너 뭐하는. "
" 놀러가자! "
" 방금 너 나랑 싸웠잖아.. 기억안나? "
" 싸운게 뭐어. 그냥 좀 놀다 오자, 응? "
" 아깐 일이나 하라며. "
" 아, 심심하다고. "
아무래도 김성규는 미친게 분명하다.
얼떨결에 사무실 밖을 나선 두사람은 근처 분식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했다. 성규가 좋아한다는 떡볶이와 자신이 좋아하는 순대를 시킨 후 기다리는 와중 성규가 턱을 괴고 우현을 지긋이 쳐다본다.
" 야. "
" 뭐. "
" 내가 피팅 온 처음 날 든 생각이 "
" ..어 "
" 옛날에 좋다고 나 쫓아다닌 놈이랑 너랑 되게 비슷하게 생겼다 이거였어. "
" 의외로 기분 더럽다? "
" 에이, 걔는 너보다 한 수천배는 못생겼었어. "
칭찬이냐? 라고 물은 우현에 성규는 몇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응, 엄청나게. 걔는 완전 못생겼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