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문 앞.
교문을 통과한 아이들이 쌀쌀한 기운에 저마다 팔을 쓸었다. 기대와는 다른 봄날씨에 꽃들도 서운해 고개를 숙였다. 어제만해도 환하던 꽃들이 물기를 머금고 축 늘어져있었다. 안개가 겨울날을 데리고 온건지 해는 자취를 감추고 구름뒤로 숨어서, 미약한 온기만 남아있었다. 뿌연 안개로 무채색이 되버린 배경. 교문을 지키는 선생님들과, 무슨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교문을 지나는 학생들. 시작의 계절, 봄이 왔다.
2. 교실 안.
분주한 등교시간의 교실. 징어가 책상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몸에 힘이빠져 의자에 앉는 소리가 조금 컸다. 밤샘여부가 그다음날 컨디션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나치게 솔직한 체력이 원망스러웠다. 목을 길게 빼고 책상에 엎드려 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니 앞문으로 들어오는 경수가 보였다.
"왜 이렇게 처졌어?"
"도갱 하이. 어제 밤샜어."
"어째 오늘따라 더 못생겼더라. 뭐 하느라."
"죽는다. 내가 뭘해. 공부지 뭐."
"수학 프린트물은. 했어?"
"응. 죽는줄."
"그러게 미리미리하지. 시간을 일주일이나 준걸.."
"나도 후회중이니까 조용히해."
징어의 말에 경수가 입을 꾹, 다물곤 자기자리로 향했다. 등교시간이 가까워지니 교실이 아이들로 꽉 찼다. 저마다 하는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에서, 징어는 가방에 손을 뻗었다. 뒤적이더니 표지가 조금 낡은 시집과 아이팟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책갈피를 꽂아놓은 페이지를 열고, 손가락으로 제목을 한번 쓸었다. 봄날은 간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웃는다.
흥미에도 없는 과학시간은 지루했다. 수능과목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문과교실에서 교양이랍시고 가르치는 화학은 그 누구의 관심도 받을 수 없었다. 화학시간이면 징어는 교과서옆에 줄이 없는 공책을 하나 펴두곤했다. 그때 그때 떠오르는 말들, 생각들을 적어내려갔다. 평소라면 노래가사나, 즐겨읽는 시의 구절이 쓰여져있을 공책위에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경수였다. 요즘 징어의 미간을 좁히는 주범이 경수라는 것은, 본인도 알아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몇날 몇일을 고민하면서도, 하루종일 경수를 생각하면서도 징어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도경수를 좋아해...?'
어젯밤 잘자라는 경수의 마지막 카톡을 붙잡고 몇분동안이나 설렘에 빠져있었던 징어는, 사실 밤을 샌이유가 수학 프린트가 아니라 너라는 말을 경수에게 건넬 수 없었다. 자기자신도 의문이었다. 경수를 좋아하는 건지. 요즘따라 징어는 하루종일 경수를 생각했다. 수업시간에도, 밥을 먹을때도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해 고민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 만났다. 듬직한 첫인상이었다. 1년동안 해온 반장노릇을 2학년때도 하고있는걸 보면, 첫인상이 정확했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무관심의 대상인 화학선생님은 종소리와 동시에 교실을 빠져나갔다. 여기저기 기지개를 펴는 아이들의 소리가 난무했다. 경수도 목을 한번 주무르곤 팔을 쭉- 폈다. 그가 유일하게 긴장하지 않는 수업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곧 이었다. 점심시간 전에 프린트를 걷어오라는 수학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수가 자신의 프린트물을 집어들고 큰소리로 말했다.
"수학 프린트물 내. 이번시간까지 안걷으면 최하점이야."
경수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수학선생님을 떠올렸다. 대머리에 철테안경. 언제부터 썼는지도 모를, 어쩌면 학교의 역사와 같이했을것도 같은 회초리.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다면 그 누구도 수학에 소홀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프린트를 꺼내들고 여기저기서 경수의 이름을 불렀다. 징어가 지나가는 경수를 붙잡고 프린트를 쥐어줬다. 눈이 마주치고, 손이 스쳤다.
"나 24번."
"와, 김징어 진짜 열심히했네."
경수가 징어의 프린트를 훑어보더니 큰눈을 더 크게떴다. 징어가 스친손을 한번 더 쓰다듬었다. 경수와 아무렇지 않게 눈을 맞출 수 있고, 손이 스쳐도 괜찮았다. 나는 도경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징어는 나름의 결론에 뿌듯하게 미소지었다.
고요한 연필소리를 뚫고 빗소리가 들려왔다.
"아, 비온다.."
창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밖으로 향했다. 우산을 안갖고왔다거나 가져오길 잘했다는 이야기로 교실이 웅성거렸다. 조용히하라는 선생님의 말에 말소리는 잦아 들었지만. 빗소리는 더 커지고있었다.
"아, 우산 없는데.."
징어는 비가 싫었다. 공기가 끈적해지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깊은한숨을 내뱉었다. 햇살이 보고싶은 마음에 샤프를 집어들고 교과서 구석에 등그랗게 해를 그렸다. 어서 해가 떴으면 좋겠다.
종이 치자마자 교실이 분주해졌다. 엄마에게 전활걸어 데리러 오라는 아이들과, 여기저기 우산을 빌리는 아이들로 온 복도가 분주했다. 징어가 몇초간 아이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오늘도 어김없이 출장중이신 부모님과, 예체능이라 야자를 하지않는 제 친구들. 모든게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있었다. 책상에 엎드린 징어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눈을 떴다.
3. 중앙현관 앞.
"아, 괜찮아. 뭐하러 와. 너 오늘 밤까지 훈련이라며."
'진짜 혼자가게? 우산없잖아. 안소희라도 부르던가!'
"됐어. 걍 갈래."
'헐. 그럼 얼른 뛰어가! 나 관장님이 부르신다. 집가서 카톡할게! 빠이!'
전화너머로도 걱정이 묻어났다. 통화를 끊는 징어의 표정이 미묘했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비맞는게 괜찮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특히 징어는 비라면 질색이었다. 팡,하는 소리와함께 우산을 들고 하나,둘 학교를 빠져나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징어는 처음으로 부모님을 원망했다. 그러게 왜 자꾸 출장이야, 출장이. 애꿎은 부모님을 원망하는것도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교문을 쳐다보며 숨을 골랐다.
"빨리 뛰어가면 되겠지..아, 진짜 싫다."
"우산 없어?"
그때, 경수가 징어 옆으로 다가왔다. 발과 시선을 나란히한 경수의 손엔 검정색 우산이 들려있었다. 짧은순간에도 징어는 우산이 주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경수가 우산을 펴 징어의 머리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같이 가."
"어? 나 집 가까워. 괜찮,"
"안 괜찮은거 다 알아. 얼굴에 짜증난다고 다 써있어."
경수가 징어의 어깨를 끌어 당겼다. 징어는 닿아오는 팔이 낯설어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돌려 경수를 올려다봤을땐, 미소를 띠운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경수가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징어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을때, 징어는 오랜고민의 진짜 결론을 찾았다.
경수를 좋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