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찬 밤,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와 잎사귀 떠는 소리마저 제법 을씨년스럽다.
성균관의 모든 곳이 칠흑으로 뒤덮여 있을 때, 어느 한 곳만이 여즉 환하다.
환한 그곳에선 잠을 날리는 이야기 꽃을 피우기가 한창이다.
"이곳 반궁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귀신이 많다고 하더구나."
"사형은 유치하게 그 나이 먹도록 죽은자의 존재를 믿는.."
"예에? 정말입니까, 사형? 저, 저 그런거 무, 무서워 하는데요...."
정국은 한심한 표정으로 피식 코웃음 치려다 옆에서 눈 빠지게 놀라는 지민에, 코웃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놀라서 입도 제대로 못 다문채 어버버 거리는 지민을 보고, 귀신 이야기를 꺼낸 호석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봐라. 원래 사람들 많은 곳에 귀신도 많은 법이야. 내 듣자하니 우리가 있는 이 서재에도 귀신이 많다 하.."
"끼야아아악!!!!!!!!!"
"아오씨, 깜짝이야!!!!!"
서론도 채 다 끝내기도 전에 냅다 소리를 질러버린 지민에 호석도 덩달아 놀라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서재에도 귀신이... 안그래도 밖에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오는데 분위기가 공포스럽게 잡혀버려 지민은 잔뜩 울상이었다.
그의 옆에 앉아있었던 태형은 히죽이며 그런 지민의 표정변화를 관찰했다.
몇 초마다 한번씩 변하는 것 같은 그의 표정은 워낙 다채로워 보는 맛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야기 하는 것에 관심이 없어 뒤로 빠져 옆으로 누워 있던 윤기는, 갑자기 화두에 오른 귀신 이야기에
그대로 슥슥 몸을 밀어 둥글게 앉은 그들 뒤에 바짝 붙었다.
정확히 말하면 호석의 바로 뒤에 밀착해 호석과 정국 사이에 얼굴을 들이민 자세였다.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으어어억!!!!!!!"
"끼야아악!!!!!!!"
호석은 갑자기 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침한 목소리에 소름이 쭈뼛 돋아 그대로 자리에 벌떡 일어나며 소리질렀고,
지민은 그런 호석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호석이 일어나자 그대로 옆으로 누워있던 윤기의 모습이 드러나고 정국과 태형은 호석과 지민이 한심해 피식피식 웃음만 나왔다.
"아 새끼들 거, 사내 자식들이 뭔 겁이 그리 많아?"
"아, 사형! 놀라지 않았습니까! 제발 기척 좀 내주세요!"
"먼저 시작한 건 정호석 너였다."
"우리 이만하고 침소에 들면 안됩니까?"
벌벌 떨며 그만 자자고 말하는 지민의 발언은 안타깝게도 아무도 듣지 못했다.
윤기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상체를 일으켜 그대로 호석과 정국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르 잡았다.
딱 방 위치도 아주 적절하군.
윤기의 혼잣말이 너무 작아 아무도 듣지 못했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다들 알지?"
"아무렴요.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죠."
윤기가 뜸을 들이며 꺼낸 말에 태형이 헤헤 웃으며 대꾸 했다.
내일은 1년에 단 한번, 여름마다 오는 몸보신의 날이다.
이 날은 나라의 허가하에 성균관 내에서 술잔치를 벌이는 날로, 유생들이 제대로 고삐 풀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태형은 이 날만을 기다렸다. 윤기는 그런 태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같은 애들 때문에 내가 얘기한다. 제작년 이맘때 즈음이었지. 정확히 말하면 제작년 그 날이었어.
한 유생이 고삐풀려 미친 망아지처럼 술 퍼마시다 그대로 즉사했다. 너무도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그 유생은
억울함에 이 반궁을 떠돈다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그 자가 머물렀던 방이 바로 이곳이다."
"예? 그, 그런..."
"이 방에서 머물던 유생들은 꼭 한번씩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방을 나오던군. 그래서 물어봤지.
어젯밤에 뭔 일이 있어서 그리 얼굴이 새하얗게 뜬 것이냐.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어.
그 유생을 봤다고."
"끼야아, 억!"
지민이 소리를 지르려 하는 순간 태형이 그의 입을 막았다.
지민은 무서움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윤기의 표정이 심각한게 그냥 해본 농은 아닌 듯 했다.
호석은 너무 무서워 아예 소리도 안나오는 듯 입만 벙긋했다.
"저.. 윤기 사형..."
"왜."
"혹, 저랑 방을 바꿀 생.."
"없어."
"저 좀 살려주십시오! 사형이 그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어도!"
"그게 왜 내 탓이냐. 제일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건 호석이 아닌가."
"예? 사형! 이런식으로 덮어씌우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지민은 여전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호석을 노려봤다. 호석은 어이가 없어 와, 와 말도 안나왔다.
나 이제 잠 다 잤다... 지민은 절망적이었다. 윤기가 말한 귀신 나온다는 이 방은 바로 자신의 방이었다.
"너 혼자만 자는 것도 아니면서 뭔 걱정이 그리 많으냐."
"그러면 사형은 이 방에 사형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방을 바꿔주시지 않는 겁니까..."
"난 내방이 좋아. 정 그러하면 호석이 한테 바꿔달라 하던지."
윤기의 심드렁한 말에 지민이 옳다구나 호석을 봤다. 호석은 미친듯이 고개와 손을 휘저었다.
"내, 내, 내가 나, 남준이와 자지 않느냐. 고 녀석 잠버릇이 워, 워낙 독해서 날아 남준이만 쓰는거 모, 모, 모르느냐?"
"....그러지 마시고 한번만 바꾸면.."
"에이, 그냥 자자. 우리 이때까지 무탈하게 잤지 않았냐."
지민의 간절한 부탁은 태형의 손과 입에 의해 막혀 버렸다.
그냥 이야기 같은 것일 뿐인데 왜 이리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
태형의 말에 지민은 욱해서 자신의 입을 막은 손을 확 치웠다.
그때와 지금과 같으냐?!
지민의 반응이 생각보다 재밌어, 만사가 귀찮은 윤기의 표정이 흔치 않게 장난스러워 보였다.
윤기가 한번 재미를 잡으면 자신이 질릴 때 까지 그 장난을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꽤 오래 갔다.
뒤에서 몰래 옷가지를 확 잡아당기는 장난은 아마 석달은 갔다지.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데..."
"사형, 이제 그만하고.."
"뭡니까?"
"이번에도 실제 일어났던 일입니까?"
윤기가 뜸 들이듯 꺼낸 말을 태형과 정국이 확 낚아챘다.
무서운걸 워낙 싫어하는 호석과 지민은 귀를 틀어막고 눈만 꾹 감고 있을 뿐이다.
내가 왜 이야기를 시작했지... 호석은 후회했다.
윤기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지민을 힐끗 보며 말했다.
"이번 이야기는 아마 지민이 잘 들어둬야 할거다."
"예...예?"
"작년이었지. 이 사건은 호석이 자네도 알지 않은가?"
"예? 무슨....아."
호석은 불현듯 생각나 바보 도 트는 소리를 냈다.
저는 그 사건만 알지, 그 이후로 귀신이 나온다는 소리는... 말 끝을 흐리는 호석에, 윤기는 쯔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지민이 너 같이 귀여움을 받는 유생이 있었다. 조그마하고 똘망똘망한 것이 사내이긴 하나, 귀엽기가 그지 없었지.
그래서 그 자는 반궁 내에서 굉장히 유명했어. 그 중 그자를 유난히 아끼는 유생이 둘 있었는데, 그 둘이 그 자와 같은 방을 썼었지."
윤기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귀여운 사람이었어. 나와 같은 해에 들어왔지. 지금 보니 지민이 너, 그 자와 똑 닮았네. 사형들이 너를 그렇게 아끼는 이유가 있었구만.
호석의 말에 지민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래서요? 그 자는 어떻게 됐답니까?
정국의 말에 윤기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매우 추운 겨울이었어. 눈까지 잔뜩 내린 날이었지. 침소에 들 시각이라 이부자리를 펴고 있었는데,
한 명이 춥다는 이유로 그 자를 끌어안고 자려고 했나봐. 그러자 다른 이도 끌어안고 자겠다고 서로 싸웠지.
가운데 있던 그 유생은 장난인 줄 알고 허허 웃으며 다 같이 붙어 자자고 했으나, 둘이 경쟁심에 불이 붙었는지
각각 한 쪽 다리를 붙잡고 밀고 당기고 싸우다 결국 다리 찢겨 죽어버렸지. 그 후 그 유생귀신이 덜렁거리는 다리를 하고
이 반궁을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어. 가끔 이 방문을 열고,"
"침소에 안드십니까?"
"끼아아악!!!!!"
윤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덜컹 열리는 문에 지민은 아예 뒤로 넘어갔다.
호석은 너무 놀라 소리도 채 나오지 않아 꺽꺽 댔다. 정국과 태형은 안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온 몸에 힘을 주었다. 윤기 역시 헉 소리 나게 놀라 문 쪽을 봤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눈만 끔뻑이는 남준에,
윤기는 열이 확 올라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에이씨! 놀랐지 않은가!
예? 제가 무얼 했다고..
영문도 모른채 날라오는 베개를 맞은 남준은 억울할 뿐이다.
이 야심한 시각에 그렇게 언질도 없이 문을 벌컥벌컥 열어재끼는 법도는 어디있단 말입니까!
그럼 이 야심한 시각에 침소에는 안들고 둘러 앉아 뭐하는 것이야.
지민이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남준은 어이가 없어 대꾸했다. 입만 뻐끔대며 할 말이 없는 지민이다.
남준은 거의 넋이 나가 멍하니 앉아있는 호석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얘는 먼저 침소에 들라니까 예서 뭐하는거야.
그가 방으로 들어가 호석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올렸다. 지민이 기다시피 다가와 남준의 다리를 붙잡았다.
엥? 남준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저어기...사형. 하루만 방을 바꿔주실련지요?"
"갑자기 왜?"
"또 그런다. 너는 우리가 그렇게 미덥지 않은게야?"
태형이 투정부리듯 하는 말에 정국도 맞장구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형. 그깟 귀신이 어디있다고 그리 벌벌 떠는건지, 원.
아하. 남준은 대충 이 방에 있었던 상황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방 유난히 귀신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 그 방이군.
남준은 흘리듯 중얼거리며 윤기를 힐끗 봤다. 장난기 가득 어린 표정을 보아하니 또 입을 터셨구만.
"사형은 어린 유생들 데리고 그런 장난 하고 싶으신겁니까?"
"내가 무얼 했다고. 난 그냥 실제 있었던 일을 얘기한 것 뿐일세."
"그만하고 빨리 침소에들 드세. 지금 시각이 얼마나 됐는지 아는게냐?"
사형도 어서 나오세요.
남준이 호석을 질질 끌고 나오며 말했다. 아, 재밌다. 윤기가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이 방을 나서는 둘 아니, 셋을 올려다 봤다.
그렇게 가시는 겁니까...
"아, 맞아. 지민아. 가끔 그 유생귀신이 이 방으로 들어와 다리를 툭툭 건든다는구나."
"그만 놀리고 빨리 가요, 사형!"
윤기가 문을 닫으려다 얼굴만 빼꼼 내밀고 하는 말이 저거다.
남준이 짜증내며 소리치자 윤기는 그 장난기 어린 얼굴로 잘 자. 하곤 문을 닫았다.
새벽바람이 문을 한번 두드리고 지나갔다. 지민은 그 바람소리 마저 음산해 흠칫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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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관련 책을 봤는데
귀신사건은 실제 성균관에서 있었던 일이라네요
성균관 생활을 하는 멤버들을 귀엽게 써보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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