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는 폴짝폴짝 뛰어보며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져서는 그만 근처 가게에서 옷까지 사주고 말았다.
계속 남자 옷을 입고 있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와 보기만 해도 따뜻해 보이는 털로 된 폴라티를 사주었다.
잠바종류는 너무 비싸고. 어차피 추위를 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티만 샀다.
나도 참 냉정한 남자다.
그녀는 딴 것에는 무관심 했어도 예쁜 옷은 좋은지 얼굴이 상당히 밝아졌다.
그렇다고 예리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건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이 좀 환해졌다는 느낌이랄까.
아마 속으로는 더 기뻐해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옷가게를 나왔다.
스커트와 티만 산 것뿐인데도.
거기다 브랜드 의 옷도 아니었는데.
역시 돈의 출혈이 컸다.
덕분에 요번 달 생활비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며칠 전에 그녀 덕분으로 식음을 전폐하며 폐인이 되어 버린 적이 있어서 돈이 절약 되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밥도 굶고는 노숙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될 뻔 했다.
.
.
그 후 예리를 대리고 완전히 박살난 자취방으로 돌아가 “Z" 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탄환자국 하나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잠은 자야 했다.
일단 엄청 싸 보이고. 후져 보이는 3층짜리 여관으로 들어갔다.
모텔 같은데 갈돈 없다.
돈 아껴야지.
예리는 옷이 정말로 마음에 들긴 들었는지 여관 방 의 대형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서있었다. 생각해보면 옷에라도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그녀에게도 충분히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그렇게 맘에 들어?”
“응”
“그럼 피 묻히면 안돼”
“알았어. 멀리 떨어져서 죽 일께”
“..................”
“안 죽이면 안돼??”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예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어”
뭐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간 설득 시키고 말거라는 의지를 마음속으로 불태웠다.
그리고는 여관방 한구석의 이불을 가져와 깔기 시작했다.
“거울 그만 보고 자야지”
“인간 죽이러 갈 시간인데?”
시간?
나는 시계를 보았다.
막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네가 무슨 흡혈귀냐? 인간 죽이러 갈 시간이라니..
나는 그녀 몰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 한명 죽였잖아. 그리고 이런 시간에는 사람도 별로 없어
오늘은 휴업. 이리와 누워“
나는 그녀를 끌어다가 억지로 이불속으로 눕혔다.
예외로 순순히 누워 주었다.
그녀가 정말로 나간다고 고집부리면 내 힘으로는 막을 길이 없다.
다행이었다.
왜 순순히 말을 들어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무튼 기쁜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잘 생각 했어. 그래야 착한 아이지.
그래! 상으로 자장가 불러 줄테니까. 빨리 자는 거야“
“자장가?”
“응”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그녀는 귀를 막아 버렸다. 정확히 엄마라는 단어가 나오자 취한 행동이었다.
“왜..왜 그래?”
“싫어...”
“그..그래?”
아마도 엄마라는 것이 듣기 싫은 것 같았다. 뭐 그럼 다른 노래 부르지 뭐.
“알았어 그럼 다른거 불러줄께”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새록새록 잘잔다~ ”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나를 예리는 빤히- 쳐다보았다.
자장가를 얼마나 불렀을까. 나는 하품을 하며. 엄청난 피곤함에 곧 의식을 잃어 버렸다.
.
.
.
.
어느새 잠들었나?
예리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다 그녀의 옆에서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예리는 편안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저번처럼 몸을 떨거나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안심이었다.
예리의 바로 옆에서 고꾸라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옆에 깔아놓은 내 이불로 가기 위해서였다.
요즘 수면부족을 오늘만큼은 회복하기로 굳게 마음먹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둠에 의식을 맡겼다. 아니 맡기려는 순간.
“콰앙”
아래쪽에서 무언가 부셔지는.
아니 정확히는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 버렸다.
“이런. 뭐야”
“콰앙”
조금 있으려니 한 번 더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번 것은 소리가 워낙에 컸던지라 어느새 그녀도 깨버렸다.
잔뜩 졸린 눈을 부비며 나를 쳐다본다.
“시끄러”
“아래에서 뭔가가 폭발했나 봐”
“아래?”
“응 나가봐야겠어”
화재가 난거라면 신속하게 바깥으로 도망쳐야 했다.
게다가 생각하기도 싫었지만 “Z" 가 쳐들어 온 것이라면 화재 난 상황보다 더욱 신속하게 대비를 해야 했으므로 그대로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불평 없이 나를 따라왔다.
3층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2층 쪽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봐서 그곳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복도의 가운데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하였으나.
혹시라도 “Z" 가 쳐들어 온 것이라면 위험해 질 것 같았기 때문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 찰나.
마침 복도의 끝 쪽에 있는 비상구가 눈에 들어왔다.
“예리야. 저쪽으로 가자”
멍하게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한발을 내딛던 예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아무튼 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서둘러 비상구의 입구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잡고 열려고 하였으나 요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통 비상구를 열어놓는 건물이 드물다.
그러니까 화재가 나면 많은 사상자가 나는 거지.
나는 여관주인을 마구 욕하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예리야. 이 문 좀 부셔줄래?”
“왜?”
“이리로 내려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잠겨있어”
예리는 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짝을 부셔버렸다. 얼마나 세게 부셨는지 안쪽으로 튀어나간 문짝의 파편들이 비상구의 벽에 박히며 엄청난 소음을 내었다. 조금 머리가 울렸지만 개의치 않고 계단을 통해서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아래쪽의 출구도 잠겨 있었으므로 다시 그녀의 힘을 이용해 부셔버렸다.
부셔버리자 보이는 건 거리였다. 새벽시간이라 아주 조용한 거리.
보통의 비상구라면 건물의 1층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아예 바깥쪽으로 나오게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아무튼 거리로 나와 여관의 입구 쪽을 쳐다 본 순간 나는 놀라서 입이 쫙 벌어졌다.
10명 남짓의 군인. 거기다 가슴에는 “Z”의 휘장이 박혀있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여관입구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예리를 불렀다.
“저...저기“
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발견한 순간부터 엄청난 살기를 내뿜더니 결국은 그들이 우리 쪽을 쳐다볼 사이도 없이 파안을 떠버렸다.
“쿠와아아앗”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곤 터져 나가버렸다. 여관의 입구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여졌다.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걸 말리려고 애쓰는 나였지만.
“Z” 가 죽어나가는 건 어째서인지 말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말리면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머리로는 생각해도 몸이 말리는 걸 거부한다.
아무튼
처참한 광경에 여관안쪽이 소란스러워 졌다.
그러더니 다시 10명의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들은 동료들이 살점으로 변해 버린 광경을 보더니 경악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앞쪽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더니 물었다.
“네놈들은 뭐..뭐냐”
“???”
조금 이상했다.
분명 “Z” 라는 휘장이 박힌 군복을 입고 있는데.
예리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전혀 모르는 것 같은 눈치였다.
오히려 누구냐고 물어보기 까지 한다.
우리를 노리고 쳐들어 온 것이라면 얼굴을 보고도 반응이 없을 리가 없는데.
많이 이상했다.
“네놈들은 뭐냐고!”
다시 한 번 그들이 외쳤다.
그러나 마땅히 대답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중사님!”
“무슨 일이야?”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대장인 것 같아 보였다.
별로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대화는 훤하게 들려왔다.
“저..저기. 저...여자는 특수랭크로 분리되어 있는 00367 인 것 같습니다. 저번에 명단을 정리하다가 본 적 있는데.”
“뭐 00367!!??”
중사도 예리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는지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게다가 예리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기의 발밑에 동료들의 시체조각들이 널려있었으니.
아마 더 당황한 것 같았다.
“그..그렇다면. 처...철수다!! 기껏 10명으로 될일이 아냐. 바보들아. 철수해 철수!!
지원바람. 00367이 나탐남. 여기는 작전c......"
"푸카앗!“
막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외치던 중사의 머리가 터져나가 버렸다.
누구 짓인지는 뻔하다.
“시끄러워.”
그녀는 그렇게 나지막하게 말하며.
다른 군인들도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뭐야....중사님이...”
놀란 다른 군인들이 철수하려다 말고 급히 예리에게 총을 겨냥했으나. 이미 예리의 파안은 그들의 모습을 짓이겨 버리고 있었다. 결국 남은 9명의 “Z" 도 죽어버렸다.
“예리야. 저 사람들은 우리를 쫒아온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죽일 것 까지는...?????”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춰야 했다.
예리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리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멍하니 지독한 살기를 거두지 않고는 피바다를 이우고 있는 여관입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예리야!”
나는 다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그때서야 예리는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 길래 정신이 없어?”
“이상해. 여자들 없어”
“여자들?”
갑자기 왠 여자들?
이해가 가지 않았으므로 되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예리야? 그럼 일단 여관 안으로 들어가 보자.”
“여관 안? 응...좋아! 더 잘래. 졸려워...
또....또.. 자장가 불러줘”
하하. 자장가를 들으며 자는 게 꽤 좋았었나 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게 아니고. 그들이 너 때문이 아니라면 여기에 왜 나타난 건지 알아봐야겠어”
“안자?”
“알아본 다음에 자도 되니까.... 따라와”
“응”
졸린 눈을 비비는 예리를 대리고 꺼림칙한 여관입구의 참혹한 현장을 지나서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여관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다른 투숙객은 없는 건가?
이만한 소동에 아무도 안 나타나다니?
게다가 여관주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101호실로 가서 문을 두드려 보았다.
“똑똑. 아무도 안 계세요?”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예리가 말을 걸어왔다.
“부술까?”
“아니 잠깐만..”
나는 더 이상의 소란을 떨고 싶지 않았으므로 한손으로 예리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표시를 하고는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희한하게도 열려있었다.
열려 있으니 당연히 들어가 보았다.
긴장한게 억울할 정도로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사람의 흔적은 있었다. 시계나. 담배 같은 소지품들이 선반위에 놓여 있었고. 거기다 이불까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없다.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 질 치다가 뒤에 있던 예리와 부딪혀 버렸다.
“퍽”
예리는 얼굴을 감싸쥐며 짜증을 냈다.
“갑자기 왜 뒤로 와? 아프잖아!...”
그러나 화가 난거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여관 방안의 기묘한 상황에 예리의 손을 꽉 쥐어버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는 느낀 거지만.
내 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예리의 손은 물기하나 없이 건조하고.
게다가 차가웠기 때문에 더 알기 쉬웠다..
하여튼 서둘러 그 방에서 나와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 난건데 사람이 하나도 없어?”
나는 투덜거림과 조금의 공포가 섞임 말투로 중얼거리며 102호실의 문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103호실, 104호실. 전부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다.
“대체 뭐야....”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왜 입구에서 전멸한 “Z"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거야!
맘속으로 절규를 외치며 주위를 마구 둘러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예리가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살짝 까치발을 들더니 한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땀이 많이 나.. 왜 그래? ”
“아...아니야... 근데 머리는 왜 쓰다듬는 거야?”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동한 내가 묻자 그녀는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몰라....”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내 머리를 쓰다듬다니.
무슨 의미지?
설마 걱정을 하는 건가?
난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돌려버린 그녀의 윗머리를 부비부비 쓰다듬어 보았다.
“으응”
예리는 내가 쓰다듬어 주자 눈을 감아버렸다.
표정이 엄청나게 온화했다.
그녀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방금 당황하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 한 건가?
에이...
설마....
나는 스스로 내린 결론에 고개를 저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마찬가지로 조용하였으나.
다른 점이 있었다.
202호실과 203호실이 처참하게 부셔져 있었다.
아니 폭발해 있었다.
“아까 들린 소리가. 이곳이 폭발하는 소리였나?”
쾌쾌한 냄새를 풍기며 모든 것이 부셔져 버린 방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으나. 별로 특별한 건 없었다. 전형적인 폭발의 현장이랄까.
문 쪽에서부터 부셔져 있는 걸로 봐서 바깥에서 소형폭탄이라도 장치한 모양이었다.
보나마나 “Z" 가 한 짓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의문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예리야??”
무심코 뒤를 돌아보며 예리를 불렀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에??”
“예리야?”
방에서 완전히 나와 다시 한 번 불러 보았지만.
어둠에 쌓여있는 2층의 복도만이 보일뿐이었다.
계속 남자 옷을 입고 있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와 보기만 해도 따뜻해 보이는 털로 된 폴라티를 사주었다.
잠바종류는 너무 비싸고. 어차피 추위를 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티만 샀다.
나도 참 냉정한 남자다.
그녀는 딴 것에는 무관심 했어도 예쁜 옷은 좋은지 얼굴이 상당히 밝아졌다.
그렇다고 예리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건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이 좀 환해졌다는 느낌이랄까.
아마 속으로는 더 기뻐해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옷가게를 나왔다.
스커트와 티만 산 것뿐인데도.
거기다 브랜드 의 옷도 아니었는데.
역시 돈의 출혈이 컸다.
덕분에 요번 달 생활비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며칠 전에 그녀 덕분으로 식음을 전폐하며 폐인이 되어 버린 적이 있어서 돈이 절약 되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밥도 굶고는 노숙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될 뻔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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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예리를 대리고 완전히 박살난 자취방으로 돌아가 “Z" 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탄환자국 하나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잠은 자야 했다.
일단 엄청 싸 보이고. 후져 보이는 3층짜리 여관으로 들어갔다.
모텔 같은데 갈돈 없다.
돈 아껴야지.
예리는 옷이 정말로 마음에 들긴 들었는지 여관 방 의 대형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서있었다. 생각해보면 옷에라도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그녀에게도 충분히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그렇게 맘에 들어?”
“응”
“그럼 피 묻히면 안돼”
“알았어. 멀리 떨어져서 죽 일께”
“..................”
“안 죽이면 안돼??”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예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어”
뭐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간 설득 시키고 말거라는 의지를 마음속으로 불태웠다.
그리고는 여관방 한구석의 이불을 가져와 깔기 시작했다.
“거울 그만 보고 자야지”
“인간 죽이러 갈 시간인데?”
시간?
나는 시계를 보았다.
막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네가 무슨 흡혈귀냐? 인간 죽이러 갈 시간이라니..
나는 그녀 몰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 한명 죽였잖아. 그리고 이런 시간에는 사람도 별로 없어
오늘은 휴업. 이리와 누워“
나는 그녀를 끌어다가 억지로 이불속으로 눕혔다.
예외로 순순히 누워 주었다.
그녀가 정말로 나간다고 고집부리면 내 힘으로는 막을 길이 없다.
다행이었다.
왜 순순히 말을 들어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무튼 기쁜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잘 생각 했어. 그래야 착한 아이지.
그래! 상으로 자장가 불러 줄테니까. 빨리 자는 거야“
“자장가?”
“응”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그녀는 귀를 막아 버렸다. 정확히 엄마라는 단어가 나오자 취한 행동이었다.
“왜..왜 그래?”
“싫어...”
“그..그래?”
아마도 엄마라는 것이 듣기 싫은 것 같았다. 뭐 그럼 다른 노래 부르지 뭐.
“알았어 그럼 다른거 불러줄께”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새록새록 잘잔다~ ”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나를 예리는 빤히- 쳐다보았다.
자장가를 얼마나 불렀을까. 나는 하품을 하며. 엄청난 피곤함에 곧 의식을 잃어 버렸다.
.
.
.
.
어느새 잠들었나?
예리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다 그녀의 옆에서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예리는 편안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저번처럼 몸을 떨거나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안심이었다.
예리의 바로 옆에서 고꾸라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옆에 깔아놓은 내 이불로 가기 위해서였다.
요즘 수면부족을 오늘만큼은 회복하기로 굳게 마음먹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둠에 의식을 맡겼다. 아니 맡기려는 순간.
“콰앙”
아래쪽에서 무언가 부셔지는.
아니 정확히는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 버렸다.
“이런. 뭐야”
“콰앙”
조금 있으려니 한 번 더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번 것은 소리가 워낙에 컸던지라 어느새 그녀도 깨버렸다.
잔뜩 졸린 눈을 부비며 나를 쳐다본다.
“시끄러”
“아래에서 뭔가가 폭발했나 봐”
“아래?”
“응 나가봐야겠어”
화재가 난거라면 신속하게 바깥으로 도망쳐야 했다.
게다가 생각하기도 싫었지만 “Z" 가 쳐들어 온 것이라면 화재 난 상황보다 더욱 신속하게 대비를 해야 했으므로 그대로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불평 없이 나를 따라왔다.
3층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2층 쪽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봐서 그곳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복도의 가운데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하였으나.
혹시라도 “Z" 가 쳐들어 온 것이라면 위험해 질 것 같았기 때문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 찰나.
마침 복도의 끝 쪽에 있는 비상구가 눈에 들어왔다.
“예리야. 저쪽으로 가자”
멍하게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한발을 내딛던 예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아무튼 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서둘러 비상구의 입구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잡고 열려고 하였으나 요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통 비상구를 열어놓는 건물이 드물다.
그러니까 화재가 나면 많은 사상자가 나는 거지.
나는 여관주인을 마구 욕하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예리야. 이 문 좀 부셔줄래?”
“왜?”
“이리로 내려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잠겨있어”
예리는 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짝을 부셔버렸다. 얼마나 세게 부셨는지 안쪽으로 튀어나간 문짝의 파편들이 비상구의 벽에 박히며 엄청난 소음을 내었다. 조금 머리가 울렸지만 개의치 않고 계단을 통해서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아래쪽의 출구도 잠겨 있었으므로 다시 그녀의 힘을 이용해 부셔버렸다.
부셔버리자 보이는 건 거리였다. 새벽시간이라 아주 조용한 거리.
보통의 비상구라면 건물의 1층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아예 바깥쪽으로 나오게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아무튼 거리로 나와 여관의 입구 쪽을 쳐다 본 순간 나는 놀라서 입이 쫙 벌어졌다.
10명 남짓의 군인. 거기다 가슴에는 “Z”의 휘장이 박혀있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여관입구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예리를 불렀다.
“저...저기“
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발견한 순간부터 엄청난 살기를 내뿜더니 결국은 그들이 우리 쪽을 쳐다볼 사이도 없이 파안을 떠버렸다.
“쿠와아아앗”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곤 터져 나가버렸다. 여관의 입구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여졌다.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걸 말리려고 애쓰는 나였지만.
“Z” 가 죽어나가는 건 어째서인지 말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말리면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머리로는 생각해도 몸이 말리는 걸 거부한다.
아무튼
처참한 광경에 여관안쪽이 소란스러워 졌다.
그러더니 다시 10명의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들은 동료들이 살점으로 변해 버린 광경을 보더니 경악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앞쪽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더니 물었다.
“네놈들은 뭐..뭐냐”
“???”
조금 이상했다.
분명 “Z” 라는 휘장이 박힌 군복을 입고 있는데.
예리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전혀 모르는 것 같은 눈치였다.
오히려 누구냐고 물어보기 까지 한다.
우리를 노리고 쳐들어 온 것이라면 얼굴을 보고도 반응이 없을 리가 없는데.
많이 이상했다.
“네놈들은 뭐냐고!”
다시 한 번 그들이 외쳤다.
그러나 마땅히 대답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중사님!”
“무슨 일이야?”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대장인 것 같아 보였다.
별로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대화는 훤하게 들려왔다.
“저..저기. 저...여자는 특수랭크로 분리되어 있는 00367 인 것 같습니다. 저번에 명단을 정리하다가 본 적 있는데.”
“뭐 00367!!??”
중사도 예리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는지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게다가 예리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기의 발밑에 동료들의 시체조각들이 널려있었으니.
아마 더 당황한 것 같았다.
“그..그렇다면. 처...철수다!! 기껏 10명으로 될일이 아냐. 바보들아. 철수해 철수!!
지원바람. 00367이 나탐남. 여기는 작전c......"
"푸카앗!“
막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외치던 중사의 머리가 터져나가 버렸다.
누구 짓인지는 뻔하다.
“시끄러워.”
그녀는 그렇게 나지막하게 말하며.
다른 군인들도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뭐야....중사님이...”
놀란 다른 군인들이 철수하려다 말고 급히 예리에게 총을 겨냥했으나. 이미 예리의 파안은 그들의 모습을 짓이겨 버리고 있었다. 결국 남은 9명의 “Z" 도 죽어버렸다.
“예리야. 저 사람들은 우리를 쫒아온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죽일 것 까지는...?????”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춰야 했다.
예리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리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멍하니 지독한 살기를 거두지 않고는 피바다를 이우고 있는 여관입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예리야!”
나는 다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그때서야 예리는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 길래 정신이 없어?”
“이상해. 여자들 없어”
“여자들?”
갑자기 왠 여자들?
이해가 가지 않았으므로 되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예리야? 그럼 일단 여관 안으로 들어가 보자.”
“여관 안? 응...좋아! 더 잘래. 졸려워...
또....또.. 자장가 불러줘”
하하. 자장가를 들으며 자는 게 꽤 좋았었나 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게 아니고. 그들이 너 때문이 아니라면 여기에 왜 나타난 건지 알아봐야겠어”
“안자?”
“알아본 다음에 자도 되니까.... 따라와”
“응”
졸린 눈을 비비는 예리를 대리고 꺼림칙한 여관입구의 참혹한 현장을 지나서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여관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다른 투숙객은 없는 건가?
이만한 소동에 아무도 안 나타나다니?
게다가 여관주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101호실로 가서 문을 두드려 보았다.
“똑똑. 아무도 안 계세요?”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예리가 말을 걸어왔다.
“부술까?”
“아니 잠깐만..”
나는 더 이상의 소란을 떨고 싶지 않았으므로 한손으로 예리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표시를 하고는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희한하게도 열려있었다.
열려 있으니 당연히 들어가 보았다.
긴장한게 억울할 정도로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사람의 흔적은 있었다. 시계나. 담배 같은 소지품들이 선반위에 놓여 있었고. 거기다 이불까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없다.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 질 치다가 뒤에 있던 예리와 부딪혀 버렸다.
“퍽”
예리는 얼굴을 감싸쥐며 짜증을 냈다.
“갑자기 왜 뒤로 와? 아프잖아!...”
그러나 화가 난거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여관 방안의 기묘한 상황에 예리의 손을 꽉 쥐어버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는 느낀 거지만.
내 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예리의 손은 물기하나 없이 건조하고.
게다가 차가웠기 때문에 더 알기 쉬웠다..
하여튼 서둘러 그 방에서 나와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 난건데 사람이 하나도 없어?”
나는 투덜거림과 조금의 공포가 섞임 말투로 중얼거리며 102호실의 문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103호실, 104호실. 전부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다.
“대체 뭐야....”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왜 입구에서 전멸한 “Z"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거야!
맘속으로 절규를 외치며 주위를 마구 둘러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예리가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살짝 까치발을 들더니 한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땀이 많이 나.. 왜 그래? ”
“아...아니야... 근데 머리는 왜 쓰다듬는 거야?”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동한 내가 묻자 그녀는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몰라....”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내 머리를 쓰다듬다니.
무슨 의미지?
설마 걱정을 하는 건가?
난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돌려버린 그녀의 윗머리를 부비부비 쓰다듬어 보았다.
“으응”
예리는 내가 쓰다듬어 주자 눈을 감아버렸다.
표정이 엄청나게 온화했다.
그녀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방금 당황하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 한 건가?
에이...
설마....
나는 스스로 내린 결론에 고개를 저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마찬가지로 조용하였으나.
다른 점이 있었다.
202호실과 203호실이 처참하게 부셔져 있었다.
아니 폭발해 있었다.
“아까 들린 소리가. 이곳이 폭발하는 소리였나?”
쾌쾌한 냄새를 풍기며 모든 것이 부셔져 버린 방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으나. 별로 특별한 건 없었다. 전형적인 폭발의 현장이랄까.
문 쪽에서부터 부셔져 있는 걸로 봐서 바깥에서 소형폭탄이라도 장치한 모양이었다.
보나마나 “Z" 가 한 짓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의문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예리야??”
무심코 뒤를 돌아보며 예리를 불렀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에??”
“예리야?”
방에서 완전히 나와 다시 한 번 불러 보았지만.
어둠에 쌓여있는 2층의 복도만이 보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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