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구준회의 묘비 앞에 섰다. 구준회가 내 앞이 아닌 두 발밑에 누워있을 거란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잔디가 비에 젖은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새까만 묘비를 우산 끝에서 떨어져나온 굵은 물방울들이 적시고 흘러내렸다. 솔직히 구준회의 죽음이 내가 이렇게까지 슬퍼할 일인가 싶긴 했다.
Goodbye, Pluto
w.97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운이 좋은 아이가 된 적 있었다. 정말 이상할정도로 하는 일마다 행운이 따랐다. 비가 오면 우산이 생기고, 시험을 치면 찍는 족족 정답인데다가, 먹을 복까지 굴러들어왔다. 단순히 신나는 기분 정도로만 그칠 게 아니라,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 정도로 말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의 행운들이 일주일 전 길바닥에서 주웠던 펜던트 덕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언제나 가던 길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돌아가던 하굣길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골목에서 유독 빛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검은 가죽 끈에 돌덩이 같은 구슬이 하나 엮인 펜던트였는데, 그 구슬은 갈색과 회색 사이의 칙칙한 색이었지만 반짝이는 표면 덕에 아름답게 보였다. 그 당시에 내가 한참 빠져 살았던 우주 책에서 보았던 명왕성의 모습과 꼭 닮아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명왕성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나는 명왕성을 주웠던 날부터 운수 좋은 아이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이 명왕성을 소중히 여겼다.
다들 여자 아이돌이나 AV 배우, 운동선수 따위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중학교 시절을 천체 관측과 함께 보냈다. 학교에 아주 유쾌한 지구과학 선생님이 계셨다. 통틀어 과학이란 과목을 배웠기에 선생님은 과학 선생님이라 불리었지만 선생님은 ‘지구 과학 쌤’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 나는 천체 관측부에 들었다. 부원수가 충분치 않아 하마터면 없어질 뻔 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처음으로 동아리 활동이 있던 날은 화요일 저녁이었다. 선생님은 화요일 저녁마다 천체 관측을 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과학실 한 구석에 한참동안 쓰이질 않았는지 하얀 먼지가 수북이 앉아있던 망원경들이 운동장 한 곳에 나란히 서있었다. 부원들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맥없어 보이는 놈들이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 곳에서 구준회를 처음으로 만났다.
-너지.
구준회는 나와 처음 마주했을 때 대뜸 ‘너지’라고 말했다.
-뭐가?
-내 목걸이.
-목걸이?
-구슬 달린 목걸이 말이야.
-아.
‘목걸이’라는 말이 구준회 입 밖에 나왔을 때 나는 이미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주머니 속에 넣은 손으로 반질반질한 구슬을 돌려만졌다. 녀석의 물건이 확실하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불안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거짓말.
-네 거라는 증거 없잖아.
-난 그거 꼭 필요해.
-...
-화 안낼 테니까 지금이라도 돌려줘.
구준회는 허여멀건 하고 길쭉한 손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그 순간엔 정말 돌려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준회의 단호한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넘겨줘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 애가 어떻게 알았는지 한참 뒤에야 궁금해졌다.
★
구준회는 자신이 명왕성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말을 당연히 믿지 않았다. 처음엔 말이다. 하지만 내심 기대도 했다. 그럼 내 친구가 외계인인거니까. 아니, 내가 외계인이랑 친구를 먹은 거니까. 그 땐 명왕성이 명왕성체가 아닌 명왕성일 시절이었다.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 명왕성. 구준회에게 명왕성엔 외계인이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구준회는 있다고 얘기했다. 그럼 왜 지구에 왔는데. / 지구는 예쁘니까. / 지구보다 예쁜 곳 많은데. / 어디? / 금성이나 천왕성? / 네 취향을 강요하지 말아줄래.
구준회의 시커먼, 아주 까맣고 깊은 눈동자를 제대로 관찰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명왕성에서 왔다는 그 녀석의 말을 믿을 것이다. 녀석의 눈동자는 우주처럼 깊은 검은색이었으니까.
구준회와 나는 천체관측부의 주요 멤버였다. 방학이 되면 선생님은 부원들을 데리고 별이 잘 보이는 언덕으로 캠핑을 가셨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모두 허락해준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중3말이 되어서는 고등학교 준비에 더욱 그랬다. 아마 모든 캠핑에 참여했던 것은 우리 둘 뿐이었을 것이다. 한 번은 우리 둘만 총 인원의 전부였던 적도 있었다. 차라리 그 쪽이 재밌었다. 오순도순, 친한 사람들끼리. 선생님은 셋이 팔을 쭉 뻗고 뒹굴어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넓직한 남색 텐트를 하나 쳐놓았다. 우리는 이제 망원경을 다루는데 있어서 도가 트였기 때문에 선생님은 우리를 내버려두고 야식거리를 챙기러 잠시 시내로 내려가셨다. 나는 새하얀 망원경 렌즈에 눈을 대고 질리도록 봤지만 또 봐도 아름다운 별들을 구경했다. 여름 밤 하늘엔 백조자리가 빛나고 있었다. 구준회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뭐가 보여? / 응. / 굳이 망원경으로 볼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구준회의 말에 나는 눈을 슬며시 뗐다.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니 간의 의자에 앉은 녀석은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 나도 맨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녀석의 말대로 하늘은 충분히 깨끗해 맨눈으로도 반짝이는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너네 집 보이냐? / 응. / 어디? / 넌 안보일걸. / 거짓말쟁이.
구준회는 한참이나 묵묵히 하늘만 바라봤다. 여름이었지만 밤이라 그런지 쌀쌀한 기운에 양 팔에 소름이 돋았다. 아, 추워. 혼자 중얼거리자 구준회는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담요 같은 거 챙겨 오셨을 걸.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은 텐트 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뒤적거리더니 얇은 부직포 같은 담요를 챙겨 나왔다. 자, 하며 녀석은 손수 담요를 둘러씌워주었다. 궁금하지 않아? / 뭐가. / 우주에 직접 가면 어떤 느낌일지. / 궁금하지. 너는 가봤을 거 아냐. 지구에 오는 동안. 장난스런 어조로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구준회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응. 엄청 아름다웠어. / 거짓말쟁이. 항상 구준회와 나의 대화는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외치는 것으로 끝났다.
-재미없는 거짓말 이제 그만 칠 때도 됐잖아.
-명왕성이 이제 행성이 아니래.
-뭔 소리야?
-뉴스에.
-행성이 아니라고?
-왜소 행성이래. 134340.
-말도 안돼.
-그러니까 말이야.
구준회는 정말 고향을 잃어버린 냥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그 애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놀릴 수 없었다. 안됐네, 하고 심심찮은 위로를 건네는 것 밖에는. 가끔 그 애와 어느 정도 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색한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이 그랬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이라는 것처럼 굴 때, 정말로 가끔은 그 녀석이 외계인처럼 느껴질 때 말이다.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던 녀석은 뜬금없는 말을 건네 왔다. 너, 키스 해봤냐. / 뭐? / 키스. 당연히 없는 게 맞는 것 아닌가. 아직 중학교 졸업장도 채 못 뗐는데. 무슨 그런 소릴 하냐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혹시나 구준회는 해봤다면? 하는 쓸모없는 중학생의 자존심이 내 입을 막았다. 구준회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궁금하지 않냐, 무슨 느낌일지. / 뭐가. / 키스 말이야. / 갑자기 무슨 소리야? / 혀랑 혀가 맞닿으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물으니 궁금해지긴 했다만, 그런 쪽에 통 관심이 없던 나는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얼굴을 붉히며 전혀, 라고 외쳤다.
★
자리는 참 기가 막히게 잘 잡았네. 구준회가 좋아하겠다 싶었다. 앉아서 문득 하늘을 보니 별들이 참 잘 보일 자리다. 지금은 날씨가 꾸무리한게 영 별로지만, 맑은 날엔 우리가 그 때 바라봤던 하늘처럼 잘 보일 듯 했다.
★
지구과학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 나는 엉엉 울었다. 가끔 어딘가 아프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건강해보이셔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쉽게 돌아가실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급하게 검은 옷을 골라 갈아입고 난생 처음으로 가 본 장례식장에서 나는 눈물을 잔뜩 쏟았다. 사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그렇게 울 정돈 아니었는데, 국화꽃사이에서 나를 향해 웃고 계신 선생님의 영정사진을 보자 정말 실감이 나서, 그래서 울었다. 구준회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어 대충 검은 티셔츠를 입고 나온 나와 달리 성숙해보였다.
구준회는 나를 식장 밖으로 데려나왔다. 날씨는 별을 관측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풍경이 지나가는 구름 하나 없이 선명하게도 식장 앞에 펼쳐졌다.
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할 정도로 울었다. 언제 그렇게 훌쩍 컸는지, 구준회 품에 안겨 울던 나는 새삼 우리가 흘려보낸 3년이란 세월이 와 닿았다. 내가 차츰 진정이 되자 구준회는 나를 꼭 껴안고 있던 품을 풀고 어깨를 토닥여줬다. 들썩이던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숨을 크게 들이 내쉬었다. 괜찮냐. 하고 구준회는 한 마디 던졌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만 떨궜다. 주머니에 푹 꽂은 녀석의 손이 보였다. 우리 별 보러갈까. 구준회가 내게 말했다.
★
언덕 위에 단 둘이 앉았다. 그 당시에도 충분히 어렸지만 구준회를 처음 만났던 3년 전은 정말로 어렸었는데. 나는 빨갛게 충혈 되어버린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다. 우리 진짜 많이 컸다. 그지. 구준회는 한참 답을 않았다. 그래서 난 그 애를 바라봤다. 구준회는 그 날도 명왕성을 목에 걸고 있었다. 응. 구준회가 대답했다. 나는 그 짧은 대답에 만족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았다.
“내가 명왕성에서 지구로 온 건 말이야.”
나는 더 이상 거짓말 말라는 말조차 하기 귀찮아졌다. 난, 그 말마저 유치하게 느껴질 나이가 됐던 거다.
“널 만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나는 구준회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내뱉은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그 애가 날 처음만나 목걸이를 내놓으라고 했던 그 때처럼.
“좋아해.”
구준회는 거짓말쟁이였지만 그 말만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나는 똑똑히 알았다. 하지만 난, 난… 아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기엔,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엔, 내가 어렸다. 구준회는 나보다 성장이 훨씬 빠른 것 같았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이다. 아래를 향하고 있던 내 시선이 가까워진 구준회의 얼굴로 가득 찼다. 몇 년 전 내게 키스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던 구준회가 생각났다. 글쎄, 이건 어떤 기분일까.
구준회는 참 궁금한 게 많았다. 그래서 항상 내게 질문을 했다. 나라고 그 녀석보다 아는 게 많은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습관처럼 질문을 던져댔다. 그러다 어느 하루는, 그런 녀석에게 내가 질문을 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보고 싶은데 못 보는 거랑, 없어서 못 보는 것 중에 뭐가 더 슬픈 거 같아? 구준회는 콧잔등을 쓸었다. 글쎄. 구준회는 잠시 고민하더니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있든 없든, 보고 싶은 게 중요한 거지. 그게 뭐, 중요할까.
☆
구준회의 소식을 한 동안 못 듣고 지냈다. 고등학교도 갈렸고, 전공도 갈렸으며 대학교도 당연히 갈렸다. 우리 둘 다 썩 사교적인 성격이 못됐기에 소식을 건너, 건너 듣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사색에 잠기는 편이 나으니까. 구준회가 잊혀지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명왕성이 명왕성체가 된 지 몇 일 즈음 지났던 때였나, 그랬었다. 명왕성은 아마 사라질 거야. 우리 세대가 없어지면. 그냥 별 하나가 되겠지. 그럼 나도 없어질 거야. 난 명왕성에서 온 사람이니까. 내가 너를 잠시 동안 잊어서 없어진 걸까. 구준회의 거짓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거짓말쟁이… 나는 너를 잊지 않았어.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 장이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를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하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 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나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글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의 파티용 동물 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사담과 암호닉 |
☞암호닉 토끼님 초아님 다람님 민트님 파란밤님 코랄님 구구콘님 수박님 라면님 김뿌요님 레퀴엠수니님 리연님 초코콘님 준혁님 뿌요구르트님 욷둥님 뱔뱔님 초코송이님 햇님님 초코콘님 세니님 시계태엽님 설빙님 주네오빠님동님 케스퍼님 동동동님 백설기님 모카님 팡이님 김첨지님 암호닉은 언제든 받아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죠? 죄송합니다 T-T 게다가 또 단편이고.. 장편을 올릴 계획이었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에도 단편으로 떼웁니다 저도 무슨내용인지 모르겠네요 저의 멘붕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듯한. 흐허허 글이 아니라 이미지로 생각을 표현하는게 제 전공이라 한참 서툴고 글인데도 찾아와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하고 자주 못봬서 죄송해요
그리고 미리 사죄드리자면 이제 더 느릿느릿하게 글이 올라올거라는 사실(..) 다들 바쁘실텐데 잘 준비하시구 즐거운 월요일 보내세요 안녕
그리고 당신 그곳에선 꼭 행복하게 지내주세요.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