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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이준혁 샤이니 온앤오프
l조회 4490l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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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중에 삭제되어서 놀란 정들한테 사과할게T.T 내가 수정중 뭔갈 잘못 건드려서 재업로드해.. 마지막까지 모자란 주최라서 미안해T.T

모바일보단 PC로 보는 것을 추천!_!
공지를 이전에 한 번 올렸었는데 못 본 정들이 있을까봐 짧게 설명하자면.. 원랜 블로그를 팔 생각이었는데(사실 파뒀음)
아무리 익명이더라도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파는 건 친목에 해당된다고 하시더라구! 
그렇지만 그취에 모아서 공개하는건 괜찮다고 하셔서 이렇게 공개해. 관련 질문/답변은 접기글로 접어놨으니 합작 주최할 생각 있는 정들은 참고해줘▼

질문/답변 캡쳐

그취 마이너 합작 공개 | 인스티즈

그취 마이너 합작 공개 | 인스티즈



제목이 왜 저 모냥이냐면.. 원랜 별을 붙였는데 별이 필터링이 되더라구..? 이유는 나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트를 붙였어 정들에 대한 내 마음을 고백하려구! ..미안
정들의 편의를 위해 커플명이 아닌 이름 X 이름으로 표기했으니 ctrl+F 로 원하는 멤버 이름을 쳐서 찾아가길 바래!
공지처럼 ●글, ○그림이야. 정들이 적어준 제목은 숨김글 안에 적어뒀어! 브금 포함해준 정들은 브금도 넣었구, 만약 지금이라도 브금을 넣고싶다는 정 있으면 메일로 보내줘!
본문은 최대한 정들이 보내준 그대로 올리려고 노력했어!_! 엔터 수도 똑같이 맞췄구.. 수정 원하면 덧글이나 메일로 연락해줘!
글 안에 필명을 넣어서 보내준 정들이 있는데.. 여기가 익명방이쟈나 내가 모자란 주최쟈나T.T 필명은 삭제했어. 합작 공개됐으니까 어디든 업로드 자유롭게 해도 괜찮아!
순서는 가나다순이고!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업로드해서 미안해^.T.. 나도 본방탕탕을 하고싶었어....
안 보내준 정들한텐 한마디만 할게. 정들의 글이랑 그림을 분명 기대한 사람이 있을테니까, 다음에 또 합작에 참여하게 되면 책임감 갖고 신청해줬으면 좋겠어~
그럼 글과 그림 보내준 20명의 아벨라들 수고했어^-^♡♡♡♡♡

-

다니엘 린데만 X 줄리안 퀸타르트



< 독줄 : 그 바람의 이름 > 


이건 황량한 바람이야.



너는 바람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늘 종알거리며 제 몸에 스치는 바람들에게 이름을 붙이기 바빴다. 좋은 날, 같이 바깥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는 날에는 나는 너의 목소리로 귓가를 가득 채웠다. 나는 너를 떠올리며 머릿결을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줄리안. 이 바람은 황량함의 이름을 가졌어. 그렇지?



너에게 마음을 보낸다. 네가 받을 수 없는 이 마음을.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던 몸을 이끌고, 발걸음을 뗐다. 걸음이 계속될수록 나의 몸을 스쳐가는 바람이 늘어갔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빠졌다.



다니엘, 얘는 솜사탕. 쟤는 민들레 할래.

, 예쁘다. 



저 멀리 뛰어간 너를 따라 나도 뛰어가 너의 손을 붙잡았고 민들레 바람이 너의 머릿결을 흔들어 놓았었다. 처음에는 그리 어린 나이가 아닌데도 어린 아이 같은 깨끗한 순수함을 가진 네가 신기했고, 그 다음엔 너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날 한없이 막막하게 만들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바람을 느끼며 웃는 너의 모습에서 느꼈었다. 너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님이 어둑한 색으로 색칠놀이를 하고 몸을 숨긴 후였다.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나는 한참이나 망연히 서 있다가 숨을 몰아쉬고 문을 열었다. 차게 가라앉은 공기가 나를 둘러쌌고 나는 무거운 공기를 헤치며 방으로 다가섰다.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다니엘. 이제 와요? 나 기다렸어.



감았던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멀뚱히 눈을 감고 서 있는 내게 다가오는 너의 온기가 느껴진다. 내 손목을 잡고 흔들거리는 너의 손이 예상 외로 너무나 따듯했다. 그래서, 눈을 떴다.



밖에 추워? 손이 차.



내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 호호, 따뜻한 입김을 분다. 



괜찮아.



나는 침대에 반만 누운 너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자다 일어난 건지 머리가 흐트러져 있어 손을 들어 정리를 해주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머릿결의 감촉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참으로 생경했다.



자꾸 이렇게 오지 말랬잖아. 이제 그만해, 줄리안.



너는 내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비밀번호도 다 바꿔버렸는데, 왜 이렇게 자꾸 나타나는 건지. 한숨을 뱉었다. 그래,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니. 그런 건 아무것도 달라지게 할 수 없겠지.



거짓말. 보고 싶었으면서.



네가 나에게 다가온다. 환하게 웃으면서 내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맞댄다. 짧게 머문 온기가 아쉽다가도, 자꾸만 가슴이 무너진다. 너의 웃음이 한없이 예뻐서, 아프다. 


언제 창문을 열어 놓은 건지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네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편안히 눕혔다. 그리고 나의 가슴에 안겼다. 이상한 박자로 뛰고 있는 심장을 들킬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이건 다니엘의 바람이야.



눈을 맞춰오는 너를 알면서도 난 창밖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바람결에 마음이 분다.



다니엘의 바람은 사랑으로 부는 거야, 다니엘.



나는 내게 안긴 너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이 바람은 그리움이야, 줄리안.

……아니. 사랑이야. 사랑이야, 다니엘.

이건 그리움이 맞아.

사랑이야…… 사랑이란 말이야……



네가 울먹이는 게 느껴진다. 너의 등을 토닥였다. 너의 뜨거운 눈물로 셔츠가 젖어가고 있다. 그저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줄리안…… 이건 그리움의 바람이야. 나는 알고 있어.


멀지 않은 곳에서 진동이 울린다. 네가 전화를 손에 쥐려고 하는 나의 손을 저지했고, 나는 고개를 두어 번 저으며 너를 타일렀다. 늘 나를 거스르지 못했던 너는 내 고갯짓 하나에도 수긍을 했다.



여보세요.

다니엘, 너 또 약속 잊은 거야? 



익숙한 목소리인데도 이상하게 이름이 기억나질 않았다. 조금 시끄러운 곳에 있는지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무슨 약속.

아무튼, 문자로 장소 알려줄 테니 얼른 와. 이게 몇 번째야. 



네가 손을 들어 내 귀를 막는 시늉을 한다.



가지 마. 여기 있어, 다니엘.



나는 귀를 막은 너의 손을 잡아 조심스레 내려놓고 그 손을 그러쥐었다. 



줄리안이 가지 말래, 나 못 가.

……다니엘.



상대의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야 이름이 기억날 것도 같다. 나는 쓰게 웃었다.



……다니엘. 이제, 돌아올 때도 됐잖아.

어디에 돌아가, 내가…….



네가 귀를 세우고 통화를 엿듣다가 다시 눈가가 붉어져서는 전화를 빼앗고 통화를 끊었다. 차게 바람이 분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래도록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바람이 멈추기를 바라며. 어느새 바람이 잦아들었고 나는 눈을 떴다. 고스란히 남겨진 너의 빈자리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시야를 뚫고 들어오는 강한 빛에 눈을 감았다가 서서히 떴다. 역시 너는 없고 나는 걸음을 옮겨 창문을 닫았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잔향에 몸이 떨렸다. 시계 바늘 소리마저 소음이 되던 침묵을 깨고 시끄럽게 진동이 울린다. 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전화를 받았다. 



너 어제 그렇게 전화 끊어버리고 여태 연락이 안 되면 어떡해.

……못 간다고 했잖아.

아무튼, 좀 나와. 밖에도 좀 나오고 그러고 살아, 제발.

어제도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었어, 뭐가 문제야.



나는 괜히 짜증이 났다. 눈이 부실 만큼 밝은 햇빛이 싫어서 커튼을 쳤다. 



대체 그 애가 너한테 뭐야?

…….



널 함부로 말하는 것에 화가 치밀었지만 너를 떠올리며 참을 수 있었다.



다니엘, 화가 나고 힘이 들 땐 하늘을 봐요. 하늘은 언제나 우릴 감싸고 있고 언제나 아름다워.



웃음이 났다. 커튼을 다시 걷고 하늘을 봤다. 그래, 너의 그 순수함이 나의 심장을 분홍빛으로 칠했었다.



그 애가 뭔데 널 이렇게 만들어?

줄리안이 말도 없이 나갔어. 찾으러 가야 해, 끊어.

……, 평생 그렇게 살아. 병,신같은 새끼……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거리를 걸으며 나는 너를 찾았다.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새 메시지 1. 나는 너일까 싶어 그것을 눌렀고 하얗게 메시지 창이 떴다.



다니엘, 정신 차려. 그 애는

…….



뒷말은 더 읽을 것도 없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챙겨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잰걸음으로 걸어 근처 꽃집에 들어섰다. 너는 화려한 장미보다도 들꽃같이 조그맣고 소소한 꽃들이 더 예쁘다고 했다.



꽃은 어떤 마음을 먹고 봐도 참 예뻐.

……네가 더 예뻐, 줄리안.

다니엘은 꽃보다 내가 예뻐? 하하.



꽃보다도 예쁜, 세상 어느 것보다 아름다운 그 웃음이 나를 둘러싼다.




나는 네가 좋다고 했던 꽃들로 다발을 만들어 손에 들고서 한참을 걸어 차가 있는 곳으로 와 꽃을 옆자리에 누이고 차를 몰았다. 



뒤로 스쳐가는 풍경들이 너무 익숙해서 낯설었다. 자꾸만 뜨거운 것이 눈앞을 가려서 운전을 하기가 힘들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나는 울었다. 너를 떠올리며 나는 울었다. 지나가는 시간을 느끼며 나는 울었다. ……언제나처럼 바람이 불고 너는 내게 다가와 나를 안는다. 등을 토닥이는 너의 손길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리다. 꽃 같은 너의 웃음이 늦가을 바람에 힘없이 부서졌다. ……나는 울었다. 울음을 멈추려고 기십 번 숨을 몰아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마음이 점차 가라앉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한숨과 함께 차를 몰았다.



액자에 갇힌 너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예뻐서 자꾸만 숨이 멈췄다. 유리 안에는 네가 아끼던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 너와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놓은 사진첩이 뿌연 먼지를 껴안고 조용하게 앉아 있다. 나는 꽃을 들지 않은 손으로 유리를 만져보았다. 이렇게 울고 싶지 않았는데, 뜨거운 것이 자꾸 앞을 가려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소리 없이 꽃을 내려놓았다. 



이제 와서 미안해…… 내가, 미안해……



어떠한 다른 말도 생각나질 않았다. 같은 말이 입속을 쳇바퀴 헛돌듯 맴돌았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나는…… 울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유리를 쓰다듬어 보고 건물을 나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늦가을 추위를 흩어놓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바람이 나를 껴안는다. 나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이건 너의, 줄리안의, 바람이야.

이 바람의 이름은…… 사랑.

그리움도, 슬픔도, 후회도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의 바람.






나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너무도 늦었지만, 이제야, 나는 너를 만나러 간다.







안녕, 다니엘?

안녕, 줄리안.







……온통 사랑으로 부는 바람이 분다.


다니엘 린데만 X 타일러 라쉬

[독다/타일러] Sugar







※캠퍼스 라이프를 잘 모릅니다.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타일러, 오늘은 좀 해피해요?"






아뇨, 덕분에 전혀요...






지금 나에게 해피하냐고 묻는 저 남자는 다니엘 린데만으로, 대학 조교와 학생으로 처음 만나 친해졌다. 과 수석으로 들어가서 교수님과 그의 관심을 듬뿍 받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 그와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타지 생활을 하는 나에게 린데만은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아마 둘 다 외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서로간의 유대에 크게 한 몫 했을것이라고 예상한다.) 과제를 걷어서 그에게 가져다주면 '수고하네 타일러-' 하며 사소한 간식거리를 챙겨준다던지, 교수님이 어려운 과제를 내주면 다른 친구들 몰래 자신이 참고했던 자료들을 밀어준다던지... 그렇게 썸을 타다 사귀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썸을 타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그의 말을 빌리자면- 폭풍철벽을 쳤긴 했지만... 여튼, 지금 저 해피하다는 말의 의미가 뭐냐면...




바야흐로 때는 학기 초 동아리 홍보기간, 동아리를 홍보하기 위해 2학년들과 3학년들이 뭉쳐 다함께 동아리 홍보영상을 찍기로 계획이 되어있었다. 퍼렐의 'Happy'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춤(이라 쓰고 깜..찍한 율동이라 읽는다)을 곁들여 촬영한다고 해서 난 일찍이 하지 않겠다고 한 상태였다. 학업에 치여 동아리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친한 사람이 몇 없는 동아리 부원들과 이걸 촬영하고 나서 내 평생 느낄 어색함이 모두 몰려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수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라고, 동아리의 얼굴마담인 친구가 숙취로 인한 희대의 지각을 해버려서 구경하러 왔던 대신 찍게 되었다. 그것도, 센터에서...  편집과정을 거쳐 그 영상이 공개된 후로, 소식을 접한 교수님과 그가 그 영상을 보고나서, 내 호칭은 '정외과 해피남', '상크미'가 되었다. 그 호칭이 묻힌지 어언 2년째,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 호칭을, 사귀게 되어서도 징하게도 우려먹고 있었다. 자신한테는 아직도 귀엽다나 뭐라나... 그러나,







"오늘은 별 일 없었어요, 큐티?"








늘 능글맞게 나의 일과를 물어보는 그. 그날따라 하던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나도 모르게 그 별명에 화를 내고 말았다.





"후... 다니엘, 잠깐만 나가줄래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큐ㅌ..."

"아 좀! 나가주면 안돼요?! 그리고 내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죠?!"

"타일러...?"

"....나가줘요, 얼른."

"ㅇ..아니, 잠ㄲ..."

"나가달라니까요?!"






쾅, 하고 세게 문을 닫아버렸다. 어떡하지? 당분간 그의 얼굴은 보지 못할것 같다.










*Side D








쾅, 하고 내 앞에서 문이 닫힌다.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났나보다. 꽉 막힌 전현무 과장이 추가로 일을 더 줬다거나, 아니면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았거나... 그러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문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일러, 울어요...?"

"...흐으..."

"내가 미안해요. 내가 좀 예의 없었죠?"

"...저리가요."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문 좀 열어봐요... 응? 타일러-"

"......"






불안하게 대답이 없다. 10분간의 정적 끝에 문 근처에서 기척 소리가 들렸다. 덜컥, 문이 열렸는데 외출을 하려는지 훌쩍거리며 야상에 폭 묻혀있었다. 촉촉히 젖은 눈망울로 날 올려다보는 게 평생 개인소장하고플 만큼 귀여웠다. 그러기도 잠시, 몸을 홱 돌려 문을 열고 나가는 타일러에 나는 당황할 틈도 없이 그를 따라나서야 했다. 외투를 벗은 그대로 나왔다는게 흠이지만.






"타일러! 타일러? 잠깐 거기 서 봐요!"

"......"

"잡았다, 후우, 타일러, 잠깐만, 잠깐만 나 좀 봐요."

"...이거 놔요."

"타일러, 얘기 좀 해요. 얼굴 좀 봅시다. 네? 저 추워요..."






춥다는 한 말에 바로 나를 돌아보며 하는 말이,





"세상에... 다니엘, 이 상태로 나왔어요?"

"어우, 춥다..."

"못살아요 정말..."

"미안해요. 분위기를 살피고 장난쳤어야 했는데 도를 넘었어요."

"씨이..."

"화 풀렸으면 나 좀 안아줘요. 이러다 동상되겠어.."





웃으면서 팔을 넓게 벌렸다. 타일러는 지체하지 않고 달려와 폭 안겼다. 반동으로 넘어질 뻔 하였지만, 한 품에 꼭 들어오는 그의 몸에 웃음을 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꽉 껴안으니 그가 '으윽, 다니엘! 숨..막히잖아요...!!' 하며 어깨를 퍽퍽 쳐온다. 팔을 풀어주니 잠깐 눈을 마주치다 외투가 없는 내 옷차림을 보고 기겁한다.






"맞다... 얼른 집에 들어가요. 다니엘 감기 걸리겠어요."

"괜찮아요. 별로 안추ㅇ..."

"별로 안 춥다고 하기만 해요?!"

"...정말 괜찮은데..."

"아깐 동상되겠다면서요?"

"에이, 그건 타일러 안아보고 싶어서 그랬죠-"






얼굴이 확 달아오른 게 보인다.






"ㅃ...빨리 가요!"

"좀만 천천히 가요."

"왜요?"

"그냥, 타일러랑 손도 잡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

"이런 짓도 좀 하려구요."

"어...어...?"





어벙하게 서있는 타일러에 한 번 더 가볍게 입 맞추고 먼저 걸음을 옮기니, '으...이 변태!'하며 달려와서 팔을 툭 친다. 시선이 마주치고, 서로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그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저녁 골목을 울렸다.


다니엘 린데만 X 테라다 타쿠야

다니엘X타쿠야

길거리 화가 다니엘 X 부산 여행 온 타쿠야. 


타쿠야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것은 2년 전이었다. 17년간 한 번도 여자 친구는커녕 여자와 썸도 타지 못했고, 친구들은 멀쩡하게 생긴 놈이 왜 연애를 못하냐며 여자에 관심 좀 가지라고 타박을 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집에서 함께 AV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동영상은 타쿠야에게 아무 감흥도 주지 못했고, 아래서 커다란 젖가슴을 흔들며 신음을 내지르는 여자보다 위에서 헉헉대는 남자 쪽이 더 신경이 쓰였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친구들을 바라보니 다들 앙앙대며 우는 여자를 보고 넋이 빠져있었다. 그날 이후 인터넷 검색이나 동성애자를 위한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상담을 받아보고는 확실해졌다. 내가 진짜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깨닫고 나니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이해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이야기했다. 엄마 아빠는 그동안 날 항상 믿어주었으니 이 얘기도 들어주실 줄 알았다. 하지만 타쿠야의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얘기 하자마자 잔뜩 굳어버린 부모님의 표정, 훈련과 교육으로 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정신과 상담 등을 예약하며 타쿠야의 '병'아닌 '병'을 고치고자 했다.  



치료 아닌 치료를 받는 동안 식구들과도 점점 멀어지고, 가족들한테 이야기한건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입 센터시험(일본의 수능)이 끝난 후 부모님께 그동안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 이번에 여행 끝나고 오면 다시 멀쩡한 아들로 돌아오겠다고 얘기한 후 짐을 싸서 옆 나라 한국, 부산행 배를 탔다.




혼자 가이드북을 보며 여기저기 여행했다. 광안리도 가고 벽화가 가득한 마을과. 태종대도 구경했다. 한국말을 조금도 할 수 없어서 불편했지만 일주일간 그럭저럭 다닐 만 했다. 타쿠야가 여행의 마지막 날,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코스로 잡은 곳은 부산 여객터미널 근처 BIFF광장이었다. 여기서 먹어보아야 할 음식들이 많다고 블로그에서 봤다. 



"학생, 이리와 봐요!"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를 걷고 있는데 길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타쿠야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한국말로 뭐라 뭐라 이야기했다. 한국말을 할 줄 모르지만 왠지 저를 부르는 것 같았다. 타쿠야가 주변을 돌아보고는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나 부른 건가? 눈빛과 고갯짓으로 물어보자 외국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여기 잠깐 앉았다가요. 예쁘게 그려줄게요"

"Um, I.. I cannot speak Korean"

[일본 사람?]




서양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일본어에 타쿠야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국에서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다니엘 린데만이에요. 남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다니엘의 손을 잡으며 타쿠야가 의자에 앉았다. 다니엘의 옆에는 그간 다니엘이 그렸던 초상화들이 놓여있었다. 목탄으로 그려 따뜻하고 둥글둥글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일본어 잘하시네요?]

[독일에서 동양학을 전공했거든요. 예쁘게 그려줄게요. 그림 하나 그려요]

[얼마..인데요?]

[음, 원래는 3만원인데, 특별히 만 오천 원에 해줄게요]



다니엘은 타쿠야가 알아듣기 쉽게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들어 보였다. 원래 3만원일 리가 없는 상술이라는 걸 알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어로 다른 사람과 말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다. 타쿠야가 자세를 고쳐 앉자 다니엘이 손가락으로 타쿠야의 얼굴을 이리저리 재본다. 타쿠야의 얼굴과 캔버스를 번갈아 보며 스케치를 하던 다니엘이 먼저 말을 걸었다. 



[부산은 어쩐 일이에요.]

[그냥 생각 좀 정리하려고요.]



다니엘은 말을 하면서도 타쿠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초록색과 갈색이 반 씩 섞인 눈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 빨려 들어갈 것 만 같았다. 누군가 저를 이렇게 빤히, 오래 쳐다봐 준 건 오랜만인데. 가슴께에서부터 간질간질하게 올라오는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타쿠야가 발끝만 쳐다보고 있자 다니엘이 왼손으로 타쿠야의 턱 밑을 잡아 들어 올리며 똑바로 눈을 마주치게끔 했다.  



[자꾸 그렇게 고개 숙이면 못나게 그려줄거에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양 볼이 잔뜩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타쿠야가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있자 다니엘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요. 80대 노부부도 있고, 갓 1살이 넘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도 있고. 많은 사람들 중에  멀리서 혼자 여행 오는 사람들은 보통 뭐가 답답하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경우가 많죠. 타쿠야씨도 뭔가 알게 모르게 답답한 게 있으니까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요? 


타쿠야는 대답 없이 아랫입술만 꾹 깨물었다. 맞췄구나. 다니엘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일본인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데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림을 그리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죠. 사는데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 나 자신 그대로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나 자신 그대로 사는 것. 그 한 마디에 타쿠야의 속에서 감정들이 한가득 뭉쳐 울컥 올라왔다. 다니엘이 뭘 알고 이야기 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꼭 자기에게 맞는 조언을 해주는 것만 같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울렁이는 목울대를 쿡 찌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표정에 다니엘이 얼른 주제를 바꿨다. 



[부산 와서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요?]

[음, 밀면이랑 씨앗호떡?]

[꼼장어랑 회랑 이런 거 하나도 못먹은거에요? 혼자 오면 이런 게 아쉽죠.]



오늘 저녁에는 뭐 할 거에요. 여기 뒤에 꼼장어 잘하는 집 있는데. 같이 먹으러 갈래요? 다니엘이 바람에 이리저리 흐트러진 타쿠야의 머리를 한 방향으로 정리한 후 다시 목탄을 손에 쥐었다. 타쿠야가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집에 가야해요.



[오늘 밤 11시에 배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요]

[아쉽다. 하루 더 자고 갈 생각 없어요?]

[안돼요. 집에서 걱정해서 가야해요.]

[술 한 잔 해요. 11시까지 여기서 기다릴게요]




다니엘은 집에 가야한다는 이야기를 못들은 양 기다린다는 말만 반복했다. 다 끝났으니까 와서 봐요. 타쿠야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니엘의 옆으로 향했다.  



[에에, 저 너무 예쁘게 그린 거 아니에요? ]

[실제로는 이거보다 훨씬 예뻐요]



그림을 건네주며 다니엘은 다시 한 번 기다리겠다고 이야기했고, 타쿠야는 그림 값을 지불하고는 도망치듯 터미널로 향했다. 여객 터미널에 후쿠오카행 배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배를 타기 위해 하나 둘씩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출발 시간이 임박했다는 알림이 다시 한 번 방송되었지만 타쿠야는 손에 표를 쥐고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타쿠야가 타야할 배가 출발 안내 전광판에서 깜빡거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제야 타쿠야가 표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터미널 밖으로 내달렸다. 낮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유난히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내리는 비에 어깨와 머리카락은 점점 젖어가고 생각이 많아진다. 다니엘은 갔으려나. 11시까지 기다린다 했었으니 이미 동료 화가들과 떠나버렸겠지. 광장 입구에서 내리자마자 한달음에 다니엘이 있던 자리로 내달렸다. 혹시나 했지만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갔네, 갔구나. 젖은 가로등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뛰어왔어요?]



타쿠야의 머리 위로 무지개색 우산이 드리워졌다. 다니엘이 타쿠야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패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왔네요. 다니엘이 웃으며 비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어주었다. 머리를 정리해 주는 다니엘의 손길에 왠지 모르게 수줍어져서 또 고개를 푹 숙였다. 운동화 끝이 비에 젖어있는 것이 보였다. 배고프죠? 가요. 1인용 우산에 다 큰 남자 둘이 들어가려니 잔뜩 몸이 붙었다. 가로등도 제대로 켜지지 않은 골목골목을 지나 구석에 있는 허름한 가게로 향했다.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다니엘을 반겼다.



"아이고 독일 총각 왔구먼."

"이모 안녕하세요~ 꼼장어랑 소주 한 병만 주세요."



[뭐가 고민이에요. 정체성?]

[어, 어떻게 알았어요? ]

[나도 그랬었거든요]




 나는 내 스스로 커밍아웃한 건 아니고 의도치 않게 아웃팅 당했죠. 유럽은 차별 없을 것 같지만 암암리에 그런 시선같은건 있어요. 특히나 부모님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겠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게이라니. 린데만이라는 성이 독일에서 16세기부터 내려온 성이거든요. 내가 외동아들이라 그 성을 이어나가야 했는데 내 고향 주변에는 숲과 호수가 있어서 하루 종일 집에도 안 들어가고 바깥에서 멍-하니 생각만 했었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까 그림 그릴 때 이야기하는 당신을 보는데. 딱 그 때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았어요.  



[모르는 사람이 볼 때도 그렇게 티 나요? 저 남자 좋아하는 거?]

[타쿠야. 오늘 그림 그리는 내내, 내 눈 보면서 엄청 부끄러워했던 거 알아요?]



타쿠야가 마시던  물을 반쯤 뿜으며 콜록거렸다. 옷과 턱으로 튄 물방울을 옷깃으로 닦아내며 다니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쪽팔려 죽겠는데 다니엘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맨 정신으로 있다가는 정말 부끄러움에 타버릴 것 같아서 앞에 놓인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술이 넘어갈 때 마다 목구멍이 후끈 후끈거렸다. 창피함을 피하려 마셨는데 오히려 술기운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터질 것 만 같았다. 



둘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나란히 소주 한 병 반씩을 비우고 나서야 식당에서 나왔다. 술버릇인지 타쿠야는 걸어가는 내내 헤실헤실 웃으며 이야기했다. 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아요! 한 걸음 뒤에서 다니엘을 따라가며 일본어로 종알종알 거렸다. 뛰어다니는 거 보면 키만 크지 아직 애는 애다. 골목을 지나 다니엘이 숙소용으로 장기 대실한 모텔로 나란히 걸어 올라가는데 이상하게 주변이 조용했다. 뒤 돌아보니 방금 전까지도 참새마냥 종알거리던 아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타쿠야는 이런 곳이 처음인 듯 캐리어 손잡이만 꼭 붙잡고 모텔 안을 두리번거렸다.



[왜요. 나랑 같이 자는 거 싫어요?]

[아니, 그런 거는 아닌데-]

[애기네. 아니면 내가 따로 방이라도 잡아줄까요?]



타쿠야가 크게 도리질 쳤다. 술값도 전부 다니엘이 냈는데 더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타쿠야가 먼저 씻은 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물을 맞으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다. 나 진짜 게이랑 같은 방에 둘이 있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머릿속에 오만가지 잡스러운 생각들이 떠올랐다. 눈알만 도록도록 굴리다가 화장실에서 다니엘이 씻는 물소리가 그치자 재빨리 눈을 감고 이불을 덮었다.


다니엘이 씻고 나오자 턱 밑까지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있는 타쿠야가 눈에 들어왔다. 겉으로 볼 때는 잠든 것 같지만 잔뜩 긴장해서 힘이 들어간 눈에 '나 아직 안자고 있어요.'라고 써놓은 듯 한 어색한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안자는 거 다 알거든요. 다니엘이 웃음을 터뜨리자 타쿠야가 한 쪽 눈만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 마요. 나도 취향이란 게 있거든요.]




타쿠야는 내 취향 아니거든요. 아담하고 섹시하고 귀여운 애들이 좋지. 다니엘이 젖은 몸을 닦으며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입술을 삐죽이던 타쿠야가 다니엘의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웅얼거렸다.



[남자가 볼 때 저 그렇게 별로에요?]

[그럼 본인이 되게 매력 있는 줄 알았어요?]



다니엘의 녹색 눈과 마주한 까만 동공이 잔뜩 당황해서 크게 일렁였다. 손끝만  움찔거리다가 이내 이마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 아주 온몸으로 표현한다. 정말 알기 쉬운 남자다. 타쿠야- 다시 한 번 부르며 이마까지 덮여진 이불을 살짝 들췄다. 이마를 가리는 앞머리를 한쪽으로 정리해 준 후 아프지 않게 이마를 툭 쳤다. 



[장난이에요, 예뻐요.]



타쿠야가 뭐라 칭얼거리기도 전에 이마 위로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눈까지 이불을 덮어서 참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터질듯 빨간 얼굴이 그대로 보였을 테니까.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쉽게 잠이 들지 못했던 것 같다. 아침에 두 사람 모두 숙취와 피곤이 반 씩 섞인 얼굴로 타쿠야의 짐을 들고 여객 터미널로 향했다. 가장 빠른 배편을 예매하고는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또 볼 수 있을까요]

[벚꽃 좋아해요?]

[에?]

[4월에. 여의도 윤중로에서 나는 또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에요. 그 때는 진짜 예쁘게 그려 줄 테니까 또 와요.]


그 때는 더 싸게 해줘야해요! 타쿠야의 한 마디에 다니엘이 웃음 지었다. 확실한 대답을 해주지 않은 채 벤치에 앉은 타쿠야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본 돌아가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도 말고, 주변 환경 때문에 너무 기죽지 말고 그렇게 웃어요. 그러면 다음에 만날 때는 더 밝은 표정으로 그려줄게요. 


얼마 후 타쿠야가 타야할 배가 들어왔다. 그 흔한 번호교환 하나 없이 두 사람은 그렇게 터미널에서 손을 흔들며 잘 가라는 인사만 했다. 



돌아오는 봄은 벚꽃이 한가득 피어날 정도로 따뜻했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봄은 모두 행복할 수 있게 사랑이 가득 했으면 좋겠다. 


대니 애런즈 X 로빈 데이아나




그취 마이너 합작 공개 | 인스티즈



대니 애런즈 X 타일러 라쉬

* 범죄자








타일러는 어지럽게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제 앞에 드리워져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장벽에 타일러는 어떻게 할 줄 몰라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분명 사람들의 장벽 너머에 있는 곳은 대니 애런즈의 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걸까. 오전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강의가 끝나자마자 걸음을 재촉하여 왔건만, 타일러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 걱정을 불안으로 바뀌게 했다. 눈 앞에서 빨간 사이렌이 번쩍거렸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타일러를 압박하는 손이 되어 타일러를 옥죄고 있었다. 타일러는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파고들었다.



"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



몸이 부딪히는 사람마다 불평과 짜증을 뱉어내니 타일러는 최대한 그들에게 사과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했다. 한참동안 몸이 완전히 압축될 것 같은 답답함을 견디고 나서야 타일러는 그 장벽의 맨 앞 열에 자리할 수 있었다. 타일러가 사람들의 틈에서 몸을 빼내자마자 집 안에서 구조대원 둘이 들것에 무언가를 실고 나오고 있었다. 들것에 실린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피가 묻은 새하얀 천에 덮여있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욱더 커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타일러의 귀에 더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대니가 무사한지만이 알고 싶었다. 그런데,




" ....!!!! "



흰 천 사이로 백금발의 짧은 머리칼이 보였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타일러의 눈이 불안감에 요동쳤다. 제발, 저 머리카락이 대니의 것이 아니기를. 대니 애런즈가 무사하기를. 타일러는 서로 꽉 붙잡은 두 손을 입가에 갖다대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그 때, 대니의 집 안에서 누군가가 또 나왔다. 배가 불룩 나온 경찰관 둘과, 그들에게 양 팔이 잡혀서 나오는 한 남성. 백금발의 머리칼에 밝은 푸른빛이 나는 눈동자, 입술 밑에 자리한 은색 피어싱. 대니였다. 타일러는 대니가 경찰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야, 무사하구나. 어딘가 다친 모양인지 부축을 받고 나오고 있었다. 집을 나오던 대니도 사람들의 무리 사이의 타일러를 발견한건지 타일러를 보고 싱긋 웃었다. 대니는 경찰관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와 사이렌이 번쩍거리는 사람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게 된 대니의 모습에 타일러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가까이 다가온 대니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있었다. 그의 흰 티셔츠는 피로 가득했고, 그의 얼굴에까지 피가 튀어있었다. 그는 다쳐서 경찰관들의 부축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연행되고 있던 것이었다. 놀란 표정의 타일러를 지나쳐간 대니는 경찰관들에 의해 경찰차에 올라탔고, 경찰차는 그대로 그 곳을 떠나 내달렸다. 용의자의 연행을 목격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더욱 커졌다. 저 사람이 범인인가? 저 사람이 죽였대? 세상에, 그렇게 안 봤는데.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시작으로 사람들의 무리 안에서는 하나의 소설이 써지기 시작했다. 돈을 갚지 않아 홧김에 죽였을 거라는 둥, 혹은 애인을 뺏겨 복수심에 불타 살인은 저질렀다는 둥. 타일러는 더이상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결국 타일러는 귀를 틀어막고 사람들의 무리를 빠져나왔다.

아냐, 대니가 그럴 리가 없어. 타일러는 아까 자기가 보았던 장면을 부정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자기가 너무 피곤해서 잘못 본 것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타일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입으로는 계속 아니야, 아닐거야. 하고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지만 눈에선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머릿속엔 수갑을 찬 채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대니의 모습만 떠올랐다. 제발, 대니. 아니라고 말해줘요. 제발. 타일러는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이나 눈물을 쏟아내면서 중얼거렸다.






-




' 잘 지내고 있어요? '




투명한 벽 너머에 죄수복을 입고 있는 대니는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타일러를 맞이했다. 타일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대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담당 형사에게 사정을 해서 알아낸 사건의 전말은 참으로 끔찍하고 믿기 힘들었었다. 피해자는 대니의 옆집 청년이었다. 살해동기는 아직 몰랐고, 다만 시체를 심각하게 훼손시킨 점에서 피해자에게 엄청난 분노가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보고 있다고 형사는 답했었다. 그리고 덧붙여, 대니는 모든 범행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대니가 죽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사건의 모든 진상을 들은 타일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이라는게 너무 싫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했다. 타일러는 벌써 축축해진 눈으로 투명한 벽 너머의 대니를 보았다.



' 타일러, 안색이 좋지 않아요. 과제 때문에 밤샜어요? '

" ...... "

' 건강에 안 좋다고 몇번을 말해요. 밤새지 말고 푹 자요. '

" 대니. "

' ?? '

" ...아니에요. "



타일러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지금 심정으로는 대니한테 화를 내고 싶었다. 왜 사람을 죽였어요? 왜, 왜 그랬냐구요. 내가 걱정할건 생각 안 해요? 하지만 그 말이 계속 목구멍에서 턱 막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입을 열지 못하고 대니를 보고 있으니 대니가 살짝 웃으며 투명한 유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톡, 톡, 하고 유리와 손톱이 부딪혀 자그마한 소리를 냈다.



' 미안. 내 걱정하고 있는거예요? '

" ...네. "

' 걱정 마요. 나 괜찮으니까..타일러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지내요. '



타일러는 애써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대니도 조금은 안심하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그 때, 교도관이 시간이 다 되었다며 대니를 의자에서 일으켰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던가, 타일러는 벌떡 일어나서 교도관에게 끌려가는 대니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면회실의 문은 소리를 내며 닫혔고, 대니를 부르던 타일러는 절망적인 얼굴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신의 연인은, 한순간에 이름이 바뀌어버리고말았다. 자신이 정말 혐오하는, 범죄자라는 이름으로.








-






타일러는 폴리스 라인에 둘러싸인 대니의 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 시각에 대니의 집에 가서 그와 시간을 보냈었는데. 지금은 그 편안하고 위로가 되던 장소가 범죄현장이 되어버렸으니. 타일러는 한참이나 대니의 집 앞에 서있었다. 대니가 풀려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사람을 죽인 것이 쉽게 풀려날 수는 없는 죄목이라는걸 알고 있지만, 얼른 대니가 돌아와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타일러의 어깨를 잡았고, 타일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휘둘러 어깨를 잡은 손을 쳐내었다. 그 바람에 타일러의 어깨를 잡았던 이는 깜짝 놀라 그 자세로 얼어붙어있었고, 타일러 역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타일러는 모르는 사람에게 굉장한 무례를 범했다는 걸 깨닫고 그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를 했다.



" ㅈ,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

" 아아, 아니에요. 저, 길 좀 물으려고 하는데, 도서관이 어느 쪽에 있죠? "

" ㅇ, 이쪽 길로 쭉 가셔서..우체국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돼요.. "

" 아, 네. 감사합니다. "



남자는 고맙다며 상냥하게 웃고는 타일러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어갔다. 타일러는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파르르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대니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만난 낯선 남자. 그리고 그에게 끌려가 당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로버트 리안. 제 옷을 거칠게 벗기고 반항하는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치던 그의 손에 새겨진 십자가 모양 문신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 같았다. 타일러는 마치 누군가가 옷을 벗기기라도 하는 것마냥 옷깃을 꽉 쥐며 눈을 감아버렸다. 그 사람은 이미 형량을 채우고 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겠지. 난 정작 그 때의 충격으로 이렇게 불안에 떨면서 살고 있는데. 


타일러는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대니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대니, 나 너무 힘들어요. 위로해줘요. 얼른 나와서 내 옆에 있어줘요.



" ...부탁이에요.. "



물기 어린 목소리가 힘겹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대니가 그 때의 상처를 많이 치료해줬다고 생각했는데. 타일러는 평소라면 제 앞에서 웃으면서 서있을 대니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눈꼬리에 매달려있던 눈물들이 떨어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대니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니는 그 판결에 항소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죗값을 받아들이겠다며 그 판결에 순응했다. 물론 살인죄이기에 당연한 처벌이었다. 대니도 그걸 알고 있었고. 대니는 2주 후면 사형당할 것이다. 타일러도 일찍이 그 소식을 접했고, 그가 사형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면회를 갔다.

꽤나 수척해진 모습의 대니를 보자마자 타일러는 눈물이 쏟아지려는걸 억지로 꾹꾹 눌러담았다. 울음을 참는 타일러를 본 대니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 왜 울려고 그래요. 울지 마요. '

" ..안 울어요..누가 운다고 그래. "

'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타일러. '

" ....... "

' 그동안..어, 고마웠어요. 많이 보고 싶을거예요. 그리고.. '



대니는 목이 메이는지 두어번 헛기침을 했다. 이미 타일러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져 타일러의 손등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대니는 눈물을 흘리는 타일러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타일러를 보고 있다가 유리벽을 톡톡 두드렸다. 잔뜩 젖은 타일러의 눈이 대니를 향해 굴러갔다. 대니는 슬프게 웃으면서 유리벽을 두드리던 손을 내리고 말을 이었다.



' 앞으로는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거예요. '

" ...? "

'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요. 다른 사람들이 더이상 타일러를 괴롭히지 못하게요. '



그러니까 울지 마요. 그렇게 말하는 대니의 눈에도 눈물이 살짝 고였다. 타일러는 코트 소매로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벅벅 문질러 눈물을 닦아내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고마워요. 울음 때문에 잔뜩 잠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타일러의 대답을 들은 대니는 싱긋 웃었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주던 웃음. 이제는 더이상 보지 못할 웃음이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타일러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 때, 면회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 교도관이 면회실로 들어왔고, 대니는 교도관의 부름에 순순히 일어났다. 타일러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대니를 붙잡을 생각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제발, 가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면회실의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 대니는 타일러에게 작게 손은 흔들며 입을 움직였다. 


안녕, 이라고.










**





"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애런즈씨. "

" 별 말씀을요. 이웃인데 당연히 초대를 해야죠. "



대니는 자신의 집에 놀러온 이웃에게 맥주 한 잔을 건네었다. 백금발의 그는 대니가 건네주는 맥주잔을 받으며 고맙다고 눈인사를 하였다. 대니는 그에게 맥주를 건네주고 간단한 안주를 접시에 챙겨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 차를 준비하고 싶었는데, 집에 있는게 술 뿐이라서요. "

" 아, 오히려 이 편이 더 좋은걸요. 저도 차는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에요. 남자끼리는 술을 마셔야죠. "



이웃의 말에 대니는 웃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잔을 들고 있는 이웃의 손에 새겨진 문신이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웃은 맥주를 마시다 대니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향해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제 손의 문신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 아, 이건 아는 형님이 타투이스트셔서요. 놀러간 김에 한거예요. "

" 참 멋있는데요? "

" 칭찬 고마워요. "



대니는 벌써 잔의 반을 비워낸 그를 흘끗 쳐다보며 자신도 맥주를 조금 마셨다. 즐겁게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이웃은 안주를 입에 넣고 우악스럽게 씹고 있었다. 참, 생긴 것과는 다르게 좀 더럽군. 대니는 인상을 썼다가 곧 그가 보지 못하게 인상을 풀었다.



" 이름이 로빈..? "

" 로버트요. 로버트 리안. "

" 어, 맞아요. 죄송해요, 제가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워서. "

" 하하,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절 로봇이라고도 하는걸요. "

" 맥주 조금 더 갖다드릴까요? 부족해보이시는데. "

" 오, 그래주시면 고맙죠. 사양 안 해요. "




대니는 소파에서 일어서 주방으로 향했고, 로버트라는 이름의 이웃은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키고 안주를 집어먹었다. 대니는 맥주를 가져가기 위해 냉장고로 향하지 않았다. 다만 싱크대로 다가가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을 집어 아무것도 모르고 안주를 씹고 있는 이웃에게 다가갈 뿐이었다. 한껏 발소리를 죽여 이웃의 뒤로 다가간 대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식칼 끝을 세워 그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그의 목덜미에 칼을 밀어넣었다.



" ㅋ..커헉..!!! "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그의 옷과 식칼을 쥔 대니의 손을 적셨다. 빈 맥주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났고, 목에 식칼이 박힌 이웃은 잔뜩 괴로워하며 뚫린 목을 붙잡았다. 대니는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피를 쏟아내는 그를 보다가 잡고 있는 식칼을 단번에 뽑아내었다. 칼을 뽑아내자마자 피가 울컥 쏟아져 대니의 옷과 얼굴에 튀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금세 잦아들어 축 늘어졌고, 대니는 피묻은 칼을 들고 그의 앞으로 돌아갔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은 모습이 처참했지만, 조금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이 극악무도한 새끼한테 당해 두려움에 떨었을 자신의 연인을 생각하면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대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식칼을 들어 그의 얼굴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휘둘러지는 식칼에 대니의 옷과 얼굴에 튀는 피의 양이 더해졌다.


죽어.


죽으라고.


너 같은 새끼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어.


죽어.


죽어!!!





한참이나 칼을 휘둘렀을까. 대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대니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식칼은 챙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과 부딪혀 소리를 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치던 대니는 멍하게 이웃의 시체를 보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수신음이 들렸고, 얼마 안 가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 경찰입니다.

" ........ "

- 여보세요?



대니는 아직도 가빠오는 호흡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깊게 들이쉬고 내뱉는 숨이 한숨처럼 뱉어졌다. 제가 이대로 감옥으로 들어간다면 혼자 남겨질 자신의 연인을 생각하니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혼자 남으면 얼마나 외로울까. 이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 한편으로는 많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자신은 그를 위해서, 모든걸 다 떠안고 갈 준비가 되어있다. 이 범죄로 자신에게 내려질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준비를 하고 저지른 일이니까.

대니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이며 말했다. 별안간 대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대니의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내었다.




"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


비가 온다

이쯤에서 너도 왔으면 좋겠다

보고싶다

비가 온다-김민호


후두둑,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내리는 비였다. 아침에 집에서 나설 때부터 하늘이 잔뜩 흐리더니 결국엔 내리네, 하고 느긋하게 생각했다. 창가에 흐르는 빗물을 바라만 보고 있자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시선을 찻잔으로 돌렸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던 홍차는 식어가고 있었다.

“괜찮은 거 맞아?”

걱정이 한껏 묻은 물음을 받았지만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는 답답한 모양인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단번에 커피를 마신다. 그에 자신도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꽃을 통째로 씹어 먹은 듯 한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벌써 5개월이 지났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눈은 한껏 진지해져있었다. 자신은 그의 이런 점이 참 좋다. 매사에 즐겁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가 가벼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렇게 대한다. 하지만 그는 깊게 생각할 줄 알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생각할 줄 하는 사람이다. 지금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듯이.

“내 마음이 정리가 될 때까지?”

스러지듯 미소를 짓는 타일러에 줄리안은 목 끝까지 답답함이 차올랐다. 공부만 잘 했지 연애에 대해서는 영 소질이 없는 친구였다. 연애를 하게 되었다며 자신에게 말하던 날이 생각났다. 전에 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한 미소뿐이었다.

“전화도, 문자도, 메일도 없었다며. 근데 아직 정리가 안돼?”

솔직히 너 지금 이해 안되는 거 알아? 다그치듯 말해도 타일러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여행이라면서. 여행하면서 문자할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여행만 하는 게 아니니까. 글도 쓰니까 바쁘지 않을까?”

찻주전자를 들고 빈 찻잔에 홍차를 따르는 타일러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줄리안은 모른척했다. 불안할 것이다. 왜 그렇지 않을까. 강한 척, 괜찮은 척 다 해도 실은 여린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옆에서 그만 하라고, 이제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울음을 삼키며 지낼 것을 아니까.

“있잖아, 줄리안.”

“왜.”

퉁명스레 대답하는 줄리안에 타일러는 슬핏 웃었다.

“가을에 들어서 처음 내리는 비야.”

대답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는 줄리안에게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고싶다, 같이.”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한가득 차오르기만 했다.



다음 날까지 비는 세차게 내렸다. 카페에 출근한 타일러는 인사를 해오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마주 인사를 해주었다. 숨을 한가득 들이쉬어 비 내음을 맡았다. 타일러는 비 오는 날 특유의 물비린내를 좋아했다. 그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비가 오는 날이면 언제나 창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신은 진하게 우린 홍차, 그는 진하게 내린 커피. 그렇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들고는 창가에 앉아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멍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그를 생각하는 자신을 알아챈 타일러는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다. 어제 줄리안은 모레 또 올테니 도망가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자신이 걱정되어 하는 말이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나마 줄리안이 간간히 자신을 찾아와 주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타일러는 다시 고개를 젓고는 막 들어온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웬일로 하루 종일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뜸해진 손님에 한숨 돌린 타일러는 고생한 아르바이트생에게 먼저 들어가 보라 말했다. 이미 늦은 시각이어서 손님도 없고, 더 오지도 않을 것 같아서였다. 수고하셨다며 인사하고 나가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손을 흔들어준 타일러는 테이블을 정리했다. 의자를 바로 정리하고, 휴지조각을 치우고, 바닥을 쓸고 하나하나 시작한 청소는 금세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주방 쪽을 정리하던 타일러는 문이 열리며 나는 종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영업이 끝났는데요.”

말을 마친 타일러는 자신의 눈 앞에 서있는 사람의 모습에 손에 든 행주를 떨어뜨렸다. 가만히 서있는 타일러에 그 사람은 멋쩍은 듯 머리를 한 번 긁적였다.

“다녀왔어요.”

낮은 목소리가 카페 안에 울렸다. 한참을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 생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대니였다.

“미안해요, 늦어서. 이건 선물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카운터로 걸어온 그가 내려놓은 것은 탐스럽게 핀 장미 세 송이였다.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보기만 하던 타일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이내 뚝, 하고 한 방울이 떨어졌다. 점점이 떨어지던 방울은 줄기가 되어 흘러내렸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타일러의 모습에 대니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긴 적막 끝에 대니는 다시 입을 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용서 받지 못할 것 알고 있습니다. 정말 미안해요.”

“기억하고 있어요.”

뜬금없는 타일러의 말에도 대니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게 장미 세 송이를 주었잖아요.”

떨리는 손으로 장미를 집어든 타일러는 코 끝에 장미를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도 장미 세 송이를 주었죠. 잘 다녀오겠다면서요.”

고개를 들어 대니의 푸른 눈을 응시하는 타일러의 눈은 눈물에도 영롱한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어서와요.”

그렇게 말한 타일러는 그가 떠난 후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취 마이너 합작 공개 | 인스티즈



로빈 데이아나 X 다니엘 스눅스


소년, 어쩌면 그는 소년







소년은 종종 도로변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나는 그 시기가 정해져 있음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 때마다 거기서 소년을 기다렸다. 밤에 나타날 적이면 별이 까만 머리통에 박혀 빛났으며 낮 적에는 파란 머리통이 쨍한 빛을 내고는 했다. 소년은 그 자체로 하늘과 같은 매력이 있었다.


불투명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동시에 익숙한 체취가 흘러나왔다. 나는 일어서 있던 자세를 고쳐 도로 곁에 걸터앉았다. 눈앞에 부닥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소년이 눈썹을 찡긋거리며 웃은 것이었다. 나는 그런 미소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으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제야 소년은 만족한 듯이 내 옆에 앉았다. 장난스럽게 주먹을 쥐고 들이미는 소년에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느낌 없이 닿아오는 주먹은 꽤 슬픈 것이었다. 소년은 죽었음을 알고 있을까, 죽음을 인지하고 있을까. 여전히 소년의 머리칼은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안녕. 오늘은 좀 늦었네?

어…… 그래, 늦었지. 급한 일이 생겨서 어딜 다녀오느라.



소년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어렸다. 나는 어색한 기류를 참지 못하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소년은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가만히 있더니 겨우 내 손목을 잡았다. 냉기도 없는 움직임이 여간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정확히는 지었다고 생각하며 손목을 들어올렸다. 힘없고 깡마른 팔이 따라 올라왔다. 한숨을 쉬며 손목을 내 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무릎에 앉았음에도 앉지 않은 듯, 구름이 내려앉은 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소년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싫다는 표시는 아닌 것이었다.




울고 있지?

……

나, 다 알아. 울고 있지?



소년은 말없이 내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나는 그 유별난 행동에 익숙해진 상태였으므로 제지하려 들지는 않았다. 톡톡, 세 개의 단추를 풀고서야 소년은 말을 이었다. 그가 쓰다듬고 있는 부분은 배 한복판에 그려 넣은 오니의 머리 부분이었다. 유독 그가 좋아하는 무늬였고, 또 그가 제안한 것이기도 했다.



……머리 부분이구나, 이거. 여기 이 부분. 맞지?

응. 거기가 머리고, 좀 더 내리면 뿔하고 눈.

입, 맞추고 싶어. 그래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신체 중 유일하게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그건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남들처럼 분홍색의 입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입을 맞추는 건 소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표현이었다. 그가 입술을 대는 날이면, 오롯이 본인의 것이었을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행위였고, 아무도 불결히 여기지 못할 행위임이 틀림없었다.


소년은 그렇게 가 버렸다. 입을 맞추고, 내게 짐을 떠넘기고, 그렇게 가 버렸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크 서클이 진하게 내려온 눈을 하고 스웨터를 꿰입었고,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었다. 아침도 거른 채였다. 셔츠 아래로 숨겨진 몸에 비해 깔끔한 얼굴이 현관 앞 거울에 비쳤다. 그마저도 퀭한 걸 보면, 깔끔하게 살기는 그른 것 같았다.


학교로 가는 길은 험했다. 차가 달리는, 그리고 소년과의 밀회가 있는 도로변을 따라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스쿨버스를 타야 했다. 그래도 나는 그 도로가 마음에 들었다. 소년이 나에게 진실해지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겨우 그런 이유에 연연하며, 나는 매일 아침 같은 길을 걸었다.


스쿨버스는 굉장히 한적한 축에 속했다. 나와 같은 고교를 다니는 학생들 중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없기도 했거니와 멀어서 그럴 지도 몰랐다. 불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것을 느끼며 손에 턱을 괴었다. 창문 밖으로는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운전수가 불같은 성격을 지녔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지각보다는 나았다. 오늘부터는 시험이기 때문이었다.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불안하기는 했다. 어쨌든 시험은 긴장의 연속이었으니 말이다.




다니엘.

누구세요? 새로 오신 선생님이신가? 이름이……

맞아. 이름은 블레어고.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

네, 그러세요.



블레어 선생님은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문신이 새겨진 몸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유일한 선생님이었고, 동시에 이상한 분위기를 풍겨 경계심을 갖게 하기도 했다. 사람이 유하기도 유해서 아무리 까칠하게 굴어도 이해하려 들었고 살피려 들었다. 실제로 내가 호감을 가진 유일한 선생님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내 고등학교 생활의 종지부를 책임질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복종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통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제 간의 정이 쌓이는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오늘 시험이지? 공부는 좀 했어?

……그럭저럭요.

우리 반이 꼴찌만 아니면 되지, 뭐. 시험 잘 치길 빈다.

감사합니다.



스쿨버스가 자욱한 매연을 뿜으며 정차했다. 나는 크로스백을 고쳐 메고 버스에서 하차했다. 허벅지에 단단히 닿아오는 책의 감촉이 어색했다. 밑창이 네모 모양으로 각진 크로스백 안에는 여러 과목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서도 눈이 감겼다. 구태여 내게 감정을 떠넘긴 소년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으나, 굉장히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침 풍경이 유달리 불안하게 꿈틀거렸다. 맹독을 품은 뱀처럼, 또 날카로운 이빨을 품은 맹수처럼 꿈틀거리는 아침은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괜히 가슴께를 벅벅 긁었다.





*




첫 번째 시험의 날은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제일 못 치리라 생각했던 수학에서 C+라는 예상 성적을 얻었고, 항상 잘 쳐오던 사회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생각하며,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 앞 스쿨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교문을 막 통과하려는 순간, 익숙하고 불투명한 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너? 어떻게 왔어?

다니엘. 다니엘, 오늘 아침의 그 선생님이랑 같은 학교야?

오늘 아침? 응. 블레어 선생님 말하는 거면……

네게 부탁할 게 있어, 다니엘. 잠깐 따라와 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입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고, 더군다나 소년이 내 이름을 불렀다. 소년은 내 생각보다 뭔가를 더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의 죽음도, 소년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학교 뒤편의 산을 올랐다. 평소에 자살한 사람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걸음하지 않는 곳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솟아난 가지들이 다리를 찔러왔다.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소년은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았는데, 길을 가면 갈수록 얼굴에 비친 창백함이 역력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진 비밀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동정으로 시작된 발걸음이 내 자의에 따름으로 변하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년이 별안간 멈춰 섰다. 나는 실수로 그의 몸을 통과할 뻔 했으나, 겨우 멈춰서고 옆으로 돌아 올라갔다. 다른 지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곳이었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흙 위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나무에 고무가 덧대어진 삽 손잡이를 가리켰고, 이어 내 발 쪽의 어느 지점에 동그라미를 그었다. 내가 소년에게 무어냐 물을 새도 없이 소년은 말을 이었다. 두서없이 나열되는 내용들은, 소년이 공포에 질려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내 이름은 로빈 데이아나. 프랑스 사람이고, 호주에는 몇 십 년 전에 이주해 왔어. 여기는 내가…… 내가, 그러니까, 살해당한 곳이야. 아무도 모르게.

……뭐?

아무도 내가 죽었다는 걸 몰라. 다니엘, 마찬가지로 너 빼고는 아무도 날 보지 못했어. 너와 내가 참 대단한 인연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말이야…… 다니엘, 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해, 진정해 로빈.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

좋아, 지금 당장 핸드폰을 들고 경찰에 전화를 해. 이상한 걸 발견했다고.

이 안에 묻혀 있는 게 뭔데?




소년, 그러니까 로빈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함치듯 말을 받아쳤다.



내 입술! 유일하게, 유일하게 이 세상에 남은 내 입술!



나는 할 말을 잃고, 다만 핸드폰을 들었을 뿐이었다. 로빈은 부릅뜬 눈으로 입술이 묻힌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로빈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찰 출동 후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전화가 이어졌다. 경찰의 상투적인 인사를 들으며, 나는 최대한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여기 △△하이스쿨 뒷산인데 이상한 게 있어요!



아아, 나는 눈을 감았다. 로빈의 목소리가 공중에 흩날렸다. 잘 했어. 나는 보다 구체적인 위치를 알린 후 전화를 끊었다. 로빈의 목소리는 한결 나아져 있었다. 로빈은 평소의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있잖아, 다니엘, 범인이 누군지 알아?



나는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빈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허탈해 보이기도 했고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로빈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어깨에 두 팔을 둘렀다. 뻣뻣하게 굳은 내 귓가에, 로빈은 입술을 바짝 당겨 대고 속삭였다.


블레어. 블레어 리처드 윌리엄스.



로빈은 그 말만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에 없던 온기가 내 온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가 소년이 아니다’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소년은, 어쩌면 그는 소년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빈 데이아나 X 장 위안

로빈위안 꽃



붉은 물감을 머금은 붓은 어느새 물로 인해 투명하게 변해간다.

물은 어느새 휴지에 번지고, 이내 종이 위에 번지며 분홍빛으로 변해간다.

투명한 연분홍빛은 어느새 겹치고 쌓여 진한 선홍빛이 되어가고.

마지막으로 검은 선으로 그림밖에 없던 백색 종이에 숫자가 적히는 순간.

꽃이 하나 더 피어났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다정하게 묻는 로빈의 말에도 장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듯, 화난 듯 조용히 물통을 든 손으로 로빈의 팔을 쳐냈고. 조용히 물을 버렸다.

 쪼르륵.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꽤나 무안하게 들릴 때쯤, 로빈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이런 하루가 반복된 지는 꽤 오래전 부터였다, 로빈은 늘 위안에게 무슨 꽃을 그리냐고 물었고, 위안은 늘 대답하지 않았다.

 둘 중 한명이라도 물어보기를 포기하거나 대답해 줄 법도 하건만, 눈치가 없는 건지 냉정한 사람인건지, 이른 아침에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늘 반복되었다.

 사실 로빈은 눈치가 빠른 편에 속하고, 위안도 냉정한 성격이 아니다. 로빈이 늘 주머니 속에 쫓고 다니는 카드는, 장위안이 밤을 새가며 정성스레 그려나간 것이니 말이다.

 즉, 위안이 로빈에게 냉정해지는 이유는, 로빈이란 사람 때문도, 로빈이 하는 행동도 아닌, 로빈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때와, 상황에 있는 것이었다.


 

위안이 그림을, 어쩌면 꽃을 그릴 때만큼은 그 누구도 장위안을 건드릴 수 없다. 말을 거는 것도 못한다. 

 누군가가 보면 웬 미,친,놈이 다 있냐고,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할 것이다. 왜 꽃을 그리는데 무엇을 그리냐고 물어보지조차 못하는 것이냐,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냐고 하겠지만. 이 병원 사람들 중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위안은 정신지체증후군 환자였고, 또 천재였다.


 선천적으로 정신에 문제를 앓고 잇던 장위안은, 남들이 갓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달고 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병명이 적힌 목걸이를 걸고 병원에 들어갔다. 어머니 아버지가 없어져서. 위안은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이 병원으로 흘러들어왔다. 위안이 이 병원에 들어온지는 10년도 더 넘어가고 있었으니, 이제야 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지 4년이 되어가는 로빈보다 훨씬 선배인 것이다.


 어쩌면 4년도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로빈은 어느새 이 병원 안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었고, 모든 환자들도 로빈을 알고 살갑게 대해 주었으니까. 즉, 모든 환자들의 성격과 특징을 읊을 수 있는 로빈이, 분명이 위안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에게 그러한 장난을 치는 것은 눈치가 없어서가 아닌,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어린 소년의 철없는 장난기와도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위안씨, 아까는 왜 그랬어요? 나 되게 서운했어요. 물어봤는데 대답도 안해주고, 다음에도 그럴 거예요?”



 이제는 이렇게 장난도 칠 수 있게 되었지만, 로빈이 이런 장위안의 태도에 바로 정응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처음 로빈이 이 병원에 왔을 때였다. 로빈은 병원을 돌며 모든 환자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위안에게도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넸지만 로빈의 말을 못 들은 것 마냥 무시하는 위안에 로빈은 꽤나 많이 당황했고, 자신이 무언가 책잡힌 것이 있나 생각해보면서도 처음 만난 사이에 위안이 그러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에 빈정이 상했었다. 그날 로빈은, 자신의 동료 타일러에게 위안이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 이상한 사람이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어도 대답 정도는 해 줄수 있는거 아니냐며 불만들을 털어놓았지만, 타일러는 위로 대신 태연히 로빈에게 말했다. 


 “ 그런 사람이 있죠, 처음 보는 문제를 1분만에 풀어버리는 사람,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수식에 태연하게 답을 적는 사람, 광장의 거리를 그대로 베껴낼 수 있는 사람, 심지어 나이가 많지도 않죠. 8살 어린애가 마을 하나를 스케치북에 통째로 옮겨 그려낸 그림이 있고는 하니까요. 특히 이런 정신병원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보여요. 언어능력 또는 사회성을 포기하고 차마 믿을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저도 많이 봤어요. 장위안씨도 그중에 한명이고.”

 타일러는 잠시 차트를 정리한 뒤 말을 이었다. 

 “장위안씨는 언어능력이 많이 떨어져요, 사회성도 부족하고. 대신 위안씨는 미술에 재능이 있죠. 뛰어나죠. 잘 기억을 못할 뿐이지 학교에 그런 애들 한명쯤은 있지 않았어요? 분명히 성격도 좋은 앤데, 문제집 풀고 있을 때는 대답도 안해요. 근데 늘 물어보면 하는 말이 비슷해요. 안 들렸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마세요. 장위안씨 되게 착한 사람인데.”

 웃으며 자리를 떠나는 타일러에 로빈은 약간 무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분명 자신은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왔는데 되려 충고를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에도 로빈은 오해가 하나 풀린 기분이었고, 오히려 기쁘기까지 했다. 지금도 로빈은 그때 느꼈던 기분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안도감인지, 혹은 자신의 환자가 그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니라는 데서 오는 기쁨인지 혹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감정이였을지 아주 가끔 생각해 보곤 했다.


 로빈이 타일러의 말을 듣고 난 뒤로부터 로빈은 장위안에 대해서 많이 신경쓰기 시작했고, 타일러가 말해준 것들은 여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위안이 그리는 그림들은 대부분 꽃이었으나, 그 꽃의 형태는 각각 제각각이었다. 사진처럼 보일 만큼 실물에 한없이 가까운 사진부터, 무지개빛으로 이루어진 장미꽃. 꽃이 가득한 풍경 위에 누워있는 아이까지. 위안의 병실로 들어갈 때면 벽면 가득 위안의 그림이 붙어있었고, 다른 환자들도 하나씩은 위안의 그림을 갖고 있었다. 위안은 자신의 그림에 미련이 없었고, 할로윈데이 때는 사탕 대신 자신의 그림들을 뒤져서 나온 작은 프리지아를 주기도 했다고 들었다.

 로빈이 그림들 사이에 끼어있는 가장 작은 종이의 꽃을 들며 위안에게 ‘이 꽃 그림 가져가도돼요?’ 라고 묻자, 순순히 내어줄것이라 생각했던 로빈의 예상과는 달리 위안은 로빈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가장 작은 그림을 골랐는데, 그게 그렇게나 소중한 그림이였나? 혹시나 자신이 괜히 위안을 건드린 것은 아닐까 라는 고민을 며칠 간 하던 도중에, 위안이 자신에게 준 것은 상당히 뜻밖의 것이었다. 손바닥에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지만, 안에 들어간 수만은 꽃들은 매우 정교하고 수십가지 색채로 물들어있었다. 며칠 동안 스탠드 켜져 있는 것을 봤는데, 이 작은 종이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기쁘고, 뿌듯하고 그랬다. 그때부터 늘 볼펜 한자루 뿐이였던 로빈의 앞주머니에는 위안의 꽃 그림이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늘 반복되는 질문인데도 태연하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는 위안을 보면서, 로빈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가며 상처받은 연기를 하는 데 애썼다.

 “나 진짜 상처받았어요. 물어봤는데 대답도 안해주고, 지금 위안씨는 아무 말도 없고요. 나 정말 눈물날 것 같아, 어떡하지?”

정말 당황한 듯 눈도 못 마주치는 위안이 아주 작게 죄송합니다 같은 말만 반복할 때, 로빈은 침대 아래에 쭈그려 앉아 위안과 눈높이를 맟췄다. 

  “위안씨, 나 오늘 되게 많이 서운했거든요? 그러니까 내일은 물어보면 꼭 대답해줘야 돼요?

못하면 소원 하나, 알겠죠? “

 이미 결과는 눈에 훤했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소원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부린 꼼수로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위안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도 위안이 누군가의 말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기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고, 소원도 생각해두지 않았는데 이러한 방법을 쓰는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들뜬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하나, 그날 로빈은 하루종일 행복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로빈 데이아나 X 줄리안 퀸타르트

[로빈/줄리안] 외계인과 소년






지친 발걸음이 터벅거리며 깨끗하게 깔린 아스팔트 도로를 힘겹게 지난다. 온 몸을 짓누르는 피로에 채 들어올려지지 못한 신발 밑창이 바닥에 쓸리며 소름돋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바닥에 뭐 있어?"




환하게 밝은 목소리가 바로 앞쪽에서 들려와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췄다. 어린티가 팍팍 나는 소년이 두꺼운 은하수 패턴의 후드티에 반바지만 대충 걸친채로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은 재미없어. 위를 봐."




소년의 말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도시에 탁한 공기에 가려지지않은 별 한개만 간신히 빛날뿐 어두운 우주공간만 펼쳐졌다. 순간 솟구치는 짜증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형, 바쁘다. 다음에 놀자."




소년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옆으로 누르며 계속 걸었다. 어, 이럴리없는데? 당황한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어두운 거리에 울려퍼졌다.





"잠깐만...! 지금이야! 지금 다시 위를 봐!"




소년이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휘청하는 몸을 겨우 가누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한껏 키운채 소리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순간 펼쳐지는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대체 뭔데! 바쁘니까 귀찮게하지말ㄹ...!"




오로직 검기만 하던 하늘은 어디로 가고 형형색색의 하늘이 뒤섞인 한가운데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제 색을 빛내며 이어졌다. 그 어느 다큐멘터리 채널에서도 보지못했던 아름다운 광경에 넋이 나간채 멍하니 별들을 응시했다.




"멋있지? 저게 은하수다리야."




마치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도 되는양 가슴을 쭉 펴고 뿌듯해하는 소년의 모습이 우스웠다. 어느새 사라진 은하수풍경에 아쉬워 입맛만 다시다가 소년을 바라보았다.




"로빈 데이아나, 맞지?"





한번도 말한적 없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또박또박 발음하는 내 이름이 어색했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넌 대체 뭐야?"


"줄리안 퀸타르트, 외계인이야."




살짝 정신이 나간듯한 그 날밤이 줄리안과의 첫만남이였다. 그 후로 줄리안은 매일밤 어디든  내 앞에 나타나 나에게 자칭 은하수다리를 보여주었다. 늘 다른 모습에 다른 느낌, 다른 기분, 보면볼수록 황홀해지는 은하수의 색들을 한참동안 음미하며 줄리안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 어느 카페의 커피가 맛있다던가 오늘은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던가하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들 말이다. 가끔 이해할수없든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수있던 시간이였기에 19년 인생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였다.




"안녕, 로빈."


"안녕, 또 보네."




그날 밤은 다른 밤과는 다른 분위기의 줄리안이였다. 평소의 활기차고 해맑던 분위기는 어디로 보내고 음울한 분위기만이 줄리안에게서 뿜어져나와 우리의 주위를 감쌌다. 괜히 나까지 음울해지기에 줄리안의 곁에서 조금 떨어졌다. 줄리안은 뒷걸음질하는 나의 보폭을 바라만보았다. 엄청나게 어색해진 분위기때문에 쭈뼛거리며 서있자 줄리안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내 앞에서 꼼지락대다가 폭삭- 나한테 안겨오는 줄리안때문에 당황한 내 동공은 여기저기로 이동했고 손은 허공만 휘젓고있었다. 흑, 순간 들려오는 흐느낌에 놀라굳었다. 쌀쌀한 날씨에 꺼내 입은 니트가디건의 끝자락을 아슬아슬하게 쥐고 어깨를 자잘하게 떨며 고개를 푹 숙인채로 서럽게 흐느끼는 줄리안이 웅얼거리며 말을 했다.




"내, 내가 미안해...흑, 미안해. 로빈, 미안해...흐윽..."




계속 미안해, 미안해만 반복하며 울어제끼는 줄리안이 뭐가 미안하냐고 묻는 내 말에 툭 떨어져나가더니 내 어깨를 꼭 붙잡았다.




"절대, 절대 내일 집 밖으로 나가지마...절대로..."


"내일 학교가야되는데?"





약속해, 새끼손가락 걸어... 참 어린애같이 약속하라며 재촉하는 줄리안의 성화에 못 이겨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었다. 맞닿았던 손이 떨어지자마자 줄리안이 내 양 볼을 잡고는 이마를 살짝 닿게해 부볐다.




"이거 외계인사...무사하라는, 흑..."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줄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다가갔다. 줄리안의 뒷통수를 끌어당겨 입술을 맞대자 포근한 느낌이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것만큼 좋았다. 대고만 있던 입술을 슬슬 핥다가 삼켰다. 입술을 한번 빨아들이고 떨어지자 줄리안이 눈물을 한바가지씩 그렁거리며 나를 쳐다보고았다.




"내일 봐."




눈을 감았다가 뜨니 어느새 사라진 줄리안을 생각했다. 가슴 한 쪽이 시큰거리기에 줄리안을 향해 내뱉은 작별인사는 허공에서 분해되었다. 처음 만났던 날보다 더욱 정신이나간날이였다.




여느때와 같이 버스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무심코 옆을 보니 저 멀리서 줄리안이 걸어왔다. 이윽고 내 앞에서 걷기를 멈춘 줄리안이 붉어진 눈가를 하고는 말했다.




"갖가지 방법을 다 해봤어. 미안, 이게 마지막 방법이야."




줄리안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하며 멀지않은곳에서 달려오는 버스를 위해 지갑을 꺼냈다. 순간 재빠르게 지갑을 빼앗은 줄리안이 지갑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순간 화가 치밀어 줄리안을 향해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째려보다가 얼른 지갑을 향해 뛰었다. 겨우 지갑을 주우려는 순간 뒤에서 굉음이 들렸다. 귓전을 때리는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타들었다. 버스정류장이 불타며 오르는 연기가 먹구름처럼 내 주위를 감쌌다.




몇일을 방안에서만 보냈다. 숨만 쉬면 떠오르는 기억이 끔찍해서 숨을 그만 쉴까 생각도했다. 돌진하던 트럭고 그 트럭에 깔린 줄리안 몸이 다 으스러져 형태를 알아볼수없고 얼굴은 폭발로 일어나 불때문에 타버렸다. 이것보다 더 힘이 든것은 줄리안이 보고싶다는 점이다. 첫만남과 은하수, 그와 나눴던 얘기, 첫키스, 다 생생하게 기억이나다가 곧 뿌얘지는 눈앞에 생각을 그만뒀다. 가슴이 시큰거렸고, 마음이 허했다. 비극적인 엔딩이였다.





엄마의 부추김에 억지로 돈을 쥐고 마트로 향했다. 울렁거리는 시야에 바닥만 쳐다보며 걸었다. 몇일동안 식음을 전폐하니 몸에 힘도 없었다. 또 들끓어오르는 슬픔에 길거리 한가운데 멈춰서 눈물을 그렁였다.




"바닥은 재미없어. 위를 봐."




어린티가 팍팍 나던 소년과 닮은 내 또래의 아이가 두꺼운 은하수패턴의 후드티와 반바지만 대충 걸친채로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안녕, 로빈."


마크 테토 X 타일러 라쉬

소년의 블루




마크    x   타일러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새벽 5시. 타일러는 커튼으로 덮인 창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아직 동이 트려면 한참 이르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는지 타일러는 스탠드 불을 키고 어제 읽다만 철학책을 무릎에 뉘였다. 제법 단단한 손으로 책장을 잡아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은 페이지가 서서히 얇아지는 것도 잠시,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살랑거리자 타일러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이어 들려오는 차 소리와 부모님의 밝은 웃음소리에 타일러는 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커튼을 활짝 젖혔다. 그의 동그란 안경 밑으로 그려지는 호선은 푸르게 밝아오는 아침을 닮아있었다. 




드디어, 형이 왔다. 




 오랜만에 집안 분위기가 반짝였다. 어머니는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온 형을 위해 부엌에서 나오질 않으셨고 아버지는 재료를 사러 차를 끌고 나가셨다. 결국 형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랜만이라며 기뻐하는 형을 보며 나는 그저 씨익 웃으며 아무 말 없이 형이 내뱉는 말들을 경청할 뿐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환영식은 저녁 늦게 무렵에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아버지가 술을 꺼내 올 때 쯤 나는 가볍게 인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안 먹어? 의아한 듯 물어오는 형을 보며 고개를 휘휘 젓곤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힘이 풀려버린 다리에 나는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고 말았다. 쿵쾅 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조용히 읊조렸다. 마크 테토. 성부터 생김새, 성향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같은 것이 없는 내 후천적 형제. 항상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나에게 특유의 색체가 자리하기 시작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쪽빛을 머금은 푸른색은 날 물들이고 있었다. 








 어릴 때 그런 적이 있었다. 아트 시간에 뒷산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수업 중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무를 수채화 물감으로 조심스레 그려나갔다. 허나 나는 곧 눈물을 뚝뚝 떨구며 선생님에게 달려가 고쳐달라며 항의했었다. 붓 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던 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탓에 그림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물은 물감에 스며들어 자국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색은 갑작스레 일그러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것이 삶에도 적용이 되는 구나를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차 안을 매웠다. 가끔가다 옆 차들이 달리는 소리만 들렸지 어느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릴 적 내 그림을 망가뜨린 것이 물 한 방울이었다면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형이었다.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형은 그저, 비록 배다른 동생이지만 오랜만에 저를 배웅하러 학교에 왔을 뿐이었다. 거기까지는 순수한 형의 마음을 이해했겠지만 이상하게 배알이 꼴린 건 차 앞에 서있는 형을 보며 잘생겼다고 수군거리는 계집애들 때문이었다. 소유욕이라고 정의를 내려야하나 아니면 질투라고 해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결합되어 결국엔 ‘형이 학교에 온 것부터가 잘못되었다.’라는 결론이 나오자 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짜증까지 밀려와 나는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형을 뒤로 하고 그저 거세게 차 문을 열고 닫았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생소했던 탓에 형은 운전석에 앉아 조심스럽게 운전을 시작했고 지금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대화가 없자 형은 결국 차를 세웠다. 형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는지 입을 열고 내 이름을 불렀다. 



타일러. 

....왜. 

너 갑자기 왜 그래?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올 뻔 했지만 남자친구에게 삐져있는 계집애들이랑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아 괜히 더 화가 났다. 이 상태로는 어떤 말을 해도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아 내가 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다물자, 형은 오히려 그것이 반항이라고 판단한 듯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타일러, 나 봐. 

싫어.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마크, 난 할 말 없...

나보라고!!!



결국 화가 난 형이 그 큰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돌려진 목에 당황보다는 두근거림이 우선이었다. ‘자동차’라는 한정된 공간이 만들어 낸 입술사이의 좁은 간격 사이로 서로의 숨이 얽혔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가고 형이 그 상태로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며 내 볼을 찬찬히 어루만지자 나는 그대로 차에서 튕겨지듯 뛰어나와 그대로 내 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바지를 풀어 헤치고 특정 부위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마크 형이 생각났다.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고 날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형의 모습도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기분을 일일이 살펴보는 형의 힐끔거림과 그 초조함을 표현하던, 핸들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까지 생각해냈다. 마지막에 보인 건 바로 앞에서 나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형의 모습이었다. 결국 형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내 안을 채우던 욕망을 분출했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몰려오는 쾌감에 의자 위에서 그저 몸만 부르르 떨고 있던 차였다. 그제야 채 닫히지 못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들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했다.




아, 이런.



제대로 잠갔어야 했는데. 문고리를 잡고 나를 바라보는 형과 백택의 액체로 뒤 덮인 내 손의 조화란. 제대로 형의 표정도 살피지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감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짙은 푸름에 잠기는 몸을 느끼며 한 없이 그 색에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



타일러. 



귀를 파고드는 평생을 들어 익숙한 목소리, 내가 사랑하는 형의 목소리. 곧 순식간에 몰려오는 따스함과 황홀함. 서로 꼭 맞춰진 입술에 파고들어 느릿하게 내 혀를 옭아매는 형을 보기 위해 서서히 긴 속눈썹을 들었다. 뜨자마자 저를 반긴 건 바로 눈앞에 저를 바라보고 있는 두 개의 눈이었다. 분노와 기쁨, 공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섞인 그 눈을 본 순간 나는 고개를 기울여 더 깊게 키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잔뜩 더러워진 손을 맞잡아오는 형의 행동에 나는 짙음에서 빠져나와 밝은 색의 수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왜 말 안했어. 왜 날 갈구한다고 진즉 말하지 않았던 거니. 맞물린 살덩이 안에서 수많은 의문들을 전하는 그에 나는 입술을 떼고 손을 뻗어 형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색에 물든 걸 환영해.  




역시나 똑똑한 내 형은 나와는 똑 닮은 웃음을 따라 지었고 다시 한 번 입 맞췄다. 형과 나는 순식간에 모든 걸 벗어던졌고 그렇게 ‘우리’의 크나큰 푸름에 다시금 몸을 던졌다. 


벨랴코프 일리야 X 장 위안

일랴위안_그해 겨울


  전쟁은 끝도 없이 길게 늘어졌다. 또한 잔혹했다. 한 뼘도 안 될 듯한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냉혹한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전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가 벌어졌고 자연히 내가 할 일 역시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의과 대학을 갓 졸업하고 바로 전장에 투입된 서투른 군의관, 나의 손끝에서는 하루에 열 명도 더 되는 목숨이 다시 피어나거나 꼼짝없이 져서 스러지곤 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더 이상 정상이 아닌 몸뚱이나마 간수한 채 전장을 뒤로 하는 사람보다, 의약품과 인력의 부족으로 손도 못 쓰고 죽어가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은 말할 것도 없는 현실이었다. 피가 흘러넘치는 상처를 꿰매거나 틀어박힌 총탄을 찾아 생살을 헤집는 것, 지뢰를 밟아 발목이 날아간 다리에 붕대를 감는 것은 시간이 지나자 더는 어렵지 않았다.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극심한 고통과 향할 곳 없는 분노,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비탄이 가득 담긴 표정을 볼 때 나는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늘 괴로웠다.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지옥 속의 아수라장에서 수많은 젊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벌써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 군의관이라는 방패 아래에 숨어 있는 내 육체는 이 전장에서 가장 안전한 축에 들었으나 나의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지만 가망이 없는 환자를 죽은 것으로 치부하고, 진통제 한 알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 그의 고통을 덜어 줄 처치를 포기했을 때 나는 나의 죽음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다. 조선 인민군 군복을 입은 그는 죽기 직전까지 고통에 신음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말로 한참을 흐느끼던 그는 얼마 못 가 의무병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죽었다. 죽음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다 보면 결코 이 전쟁을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유언 한 마디마저 이 세상에 남길 수 없었던 바짝 마른 남자의, 울퉁불퉁한 뼈가 도드라진 손이 그 후로도 며칠을 내 소맷자락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못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러려고 군의관이 된 게 아닌데. 내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구경만 하려고 온 것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튀어나온 부상병들이 내 손발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하루 종일 온몸이 무거웠다. 하다못해 전투라도 잦아들면 그만큼 부상병들의 수도 줄어들 터였지만 전투는 잦아들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잦아져만 갔고, 그에 비례하여 부상병들의 숫자도 많아져만 갔다. 간이침대에나마 부상병들을 눕혀 놓을 수 있는 의료막사는 이미 포화상태였다. 치명적이지 않은 총상 한 두 개로는 환자 취급도 받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의료막사 근처에 임시로 마련해 놓은 천막 밑에 시체처럼 누워 있곤 했다. 잠깐 신경을 쓰지 못하면 그대로 시체가 되어 꽁꽁 얼어붙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소년 역시 천막 밑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천막 밑의 부상병들을 살피러 갔을 때였다. 머리를 깎은 지 오래 된 듯, 제멋대로 뻗친 검은 더벅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소년은 다 해진 중국 인민 해방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적군의 총검보다 날카로운 북방의 겨울바람에 홀쭉한 양 뺨이 헤집혀 빨갛게 얼어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생생했다. 눈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저런 눈빛을 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저런 눈을 하고 있다. 그건 전투에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눈이었다. 그런 눈을 하고 병상에 누운 사람들은 모두 전장에서 겪은 타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떨었다. 스무 살도 안 되었을 저 소년이 죽음에서 벗어나려 빗발치는 총알을 피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적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의 팔에 대강 감긴 붕대는 이제 붕대라고 하기도 무색할 정도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애의 팔을 살펴보려고 잡는 순간, 소년이 다치지 않은 팔을 뻗어 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도와주세요."


  발음이 약간 서툴긴 했지만 분명한 러시아어였다. 소년 주변의 중국인들이 그런 소년을 별난 놈 다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의무병 몇을 제외하면 이곳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중국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소맷자락에 매달린 소년의 손. 나는 그때 죽은 조선 인민군 병사를 생각했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그도 앳되어 보이기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소년과 마찬가지였다. 파리하게 질린 그의 얼굴이 소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죽음 직전에 놓여 있던 병사의 표정은 절망적이었고, 지금 나를 바라보는 소년의 표정은 절박했다.


  "왜 그러지?"

  "부대원들에게……."


  말을 하려던 소년이 잠깐 시선을 피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망설임이 꽤 오래 갔다. 나는 그 애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며 그의 상처를 살폈다. 그다지 깊지 않은 상처였지만 붕대는 갈아야 했다. 빳빳하게 굳어 버린 붕대를 풀어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소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성폭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소년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소맷자락을 잡아 온 손을 뿌리치고, 내가 알 바 아니라며 내칠 수도 있었다. 아마 몇 주 전만 같았어도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소년을 데리고 의료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애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기도, 내게 죽은 병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단지 그것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환자 앞에서 약을 쓰기를 주저하는 나의 정신이 이미 죽어 버린 것을 목격하고서도 여전히 그랬다. 소년을 빼내 온 것은 내가 죽고 말았다며 쉴 새 없이 나를 비난하는 내 양심에게 반박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소년을 내보이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의 전투는 일단 끝이 났다고 했다. 요즘 들어 언제나 그랬듯 우리에게도, 적들에게도 아무 소득이 없는 전투였다. 연합군이 밤을 틈타 기습을 해 오지 않는다면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싸움은 없을 터였다. 긴급한 처치를 요하는 환자가 들어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할 일은 반 이상이 줄어든다.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이 누운 병상 사이를 지나다니며 나는 내 뒤를 따라오는 소년에게 몇 가지를 물었고, 소년은 더듬더듬 그 질문들에 대답했다.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왜 군대에 왔냐고 묻자 그는 군대에 들어오면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자원입대했다고 했다. 2차 국공 내전 때 부모님을 잃어 애초에 갈 곳도 없었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소년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죽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죽을 텐데 굶어서 오래 고생하며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러시아어는 어디서 배웠느냐는 질문에는 러일전쟁 때 제 고향인 선양에 러시아군이 주둔했던 적이 있어서, 그곳에는 아직도 러시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으며 제 또래 친구들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길지 않은 소년의 인생은 온통 전쟁과 전쟁의 부산물로 점철되어 있었다. 소년은 내가 던진 거의 모든 질문에 대답을 했지만 어쩌다 부대원들에게 그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환자들을 모두 훑어보고 난 후 나는 소년의 팔에 난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피가 말라붙은 군복 소매는 이미 상처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상처에서 옷을 떼어내고 길게 찢어진 상처를 꿰매는 게 꽤 아팠을 텐데도 소년은 비명소리 하나 없이 잘 견뎠다. 처치를 끝내고 붕대를 새로 감아 주었다. 계속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고개를 돌려 제 팔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던 소년의 눈가에서 눈물이 길게 꼬리를 끌며 미끄러져 내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 채 코가 빨개져서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는 소년의 우는 모습이 말도 못하게 처연했다. 상처를 꿰맨 아픔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소년은 그동안의 설움을 토해내듯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울음마저 잠시 후에는 시작만큼 갑작스럽게 멎었다. 마치 우는 법보다 울음을 그치는 법을 먼저 배운 것 같았다. 조금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뜬 소년이 입을 열었다.


  “군의관님, 인생이 원래 이런 겁니까? 제게도 봄이 찾아올까요?”


  나는 소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되었지만 결국 전쟁터밖에 설 자리가 없었던 소년의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 대신 나는 소년의 등을 토닥였다. 툭툭 치는 것만으로도 척추 뼈가 만져질 정도로 야윈 그 애의 등에서는 딱딱한 소리가 났다.


  “날이 밝는 대로, 자네 부대로 가지.”


  삽시간에 소년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아마도 자신을 바로 돌려보내려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제야 가장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에게 시선을 맞추고 웃어 보였다.


  “걱정 마, 의무병으로 내 밑에 두겠다고 전하러 가는 거다. 너는 러시아어를 잘 하니까 핑계를 대기도 좋아. 혹시 가기 힘들다면, 어떤 부대인지만 알려줘도 괜찮고. 통역으로는 다른 의무병을 데려가도 되니까.”

  "아, 아닙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소년은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던 소년이 조심스레 제 손을 겹쳐 왔다. 그 나잇대의 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하고 거친 손이었다. 악수를 하며 우리는 시선을 마주했다.


  "소개가 늦었군. 벨랴코프 일리야다. 자네는?"

  "장위안입니다."


  위안. 소년의 이름은 위안이었다. 비록 그 이름에 담긴 뜻은 알지 못했지만 좋은 이름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입속에서 소리 나지 않게 위안의 이름을 두어 번 되뇐 나는, 맞잡은 손을 두어 번 위아래로 흔든 후에 위안을 내가 지내는 막사의 자리로 보내 재웠다. 의료막사의 좁은 간이침상에서 눈을 붙이면서도 나는 전혀 언짢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 밤에는 늘 나를 괴롭혀 왔던 악몽도 꾸지 않았다. 마치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밤이었다.


  이튿날 위안과 함께 찾아간 중국인 부대에서는 의외로 순순히 위안을 내게 일임했다. 중국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부대원들과 위안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보이는 표정과 어투뿐이었는데, 제 3자인 내가 보기에도 무례하고 저급한 태도를 보이는 그들을 위안은 차분히 상대했다. 다시 의료막사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넌지시 위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자들하고는 무슨 얘기를 한 건가?"

  "별 말 아니었습니다. 군의관님께서 신경 쓰실 가치도 없는 말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말을 하는 위안의 얼굴에서는 미처 숨겨지지 않은 수치심이 엿보였다. 나는 그 표정을 못 본 체 하고서, 손을 들어 위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장에서 군의관의 권력은 그리 크지 않다. 우리는 죽음 직전에서는 신처럼 떠받들어지지만 그 외의 상황에서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것이 이렇게 아쉽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동자를 색출해 내어 위안이 보는 앞에서 단단히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었는데. 대체 왜일까. 알게 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위안의 표정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석연치 않아하는 나를 달래며 위안이 화제를 돌렸다.


  "군의관님이 저를 거둬 주셔서 기쁩니다. 정말 영광이에요."


  말을 마친 위안이 빙긋 웃어 보였다. 처음으로 보는 제 나이다운 표정이었다. 사방에서 혹독한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봄이 온 건 아닌가 생각했다. 봄바람을 맞았을 때처럼 마음이 간지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위안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겨울이 모두 지나가기 전이었다. 부상병을 우리 진영으로 데려오려다 적군의 총탄에 맞았다는 위안의 차게 식은 몸은 생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작고 말라 보였다. 나는 제 인생에도 봄이 올까 물었던 작은 소년의 하얗게 질린 팔목을 가볍게 쥐고서, 전쟁터에 오고 나서는 한 번도 올리지 않았던 기도를 올렸다. 이 아이에게 봄을 보여주세요. 나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이게 끝이라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다는 위안에게 너무도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위안은 내가 직접 묻었다. 다른 무덤과 마찬가지로 무덤 위에 군모를 얹어 주려 위안의 군모를 벗겼을 때 나는 그 안쪽에 펜으로 적어 놓은 글씨들을 발견했다. 그 중에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내 이름 석 자 뿐이었다. 위안이 제가 직접 중국식으로 이름을 지었다며 한 글자 한 글자 연습시킨 글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글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문장이건 간에, 나는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 분명했으므로.


  우리는 그해 봄에 후퇴했고 그해 여름에는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이제는 다시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은 기억 속의 겨울보다 몇 배는 더 춥다. 위안이 살아남아 함께 이곳에 왔다면 어땠을까. 바람이 너무 불어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날이면 그런 생각이 머릿속까지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턱 끝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위안이 죽고 나서부터 눈물이 많아졌다. 어쩌면 우리는 이 겨울을 조금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해 겨울의 어떤 날처럼. 봄바람을 닮은 위안의 미소와 함께, 간질간질한 마음을 품고, 같이, 봄을, 기다리면서.


알베르토 몬디 X 로빈 데이아나

야간비행(夜間非行)

midnight delinquency.



 "아.. 빨리 너처럼 승진을 하던가 해야지,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그래도 너만큼 실전 경험 많은 사람 없어. 몇 번 나갔더라.. 프라하랑 트루아, 브뤼셀, 부쿠레슈티, 광저우, 그리고 그 뭐냐- 무슨무슨 스크?"

 "노브고로드."

 "오, 그래. 노브고로드."


 언더보스 이상의 간부들끼리 회의를 나누는 회의실 앞에 보초 근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벌써 두 시간 째 벌 세워진 것을 참다 못한 다니엘이 다소 불편하게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은 채 담배를 꺼내들고 불을 붙이며 짜증스럽게 이야기했다. 불씨가 새총에 묶인 고무줄을 타고 튕겨져 나가는 돌멩이처럼 사방으로 힘차게 튀어나갔다. 자그마한 불꽃이 하얀 담배 끄트머리를 겨우겨우 붙잡고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종이를 사각사각 갉아먹기 시작하자 블레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났다. 필사적으로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고개를 돌리는 그를 스윽 흘겨본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면전에다 담배 연기를 토해내었다. 너 그런다고 금연 못 해 인마. 다니엘이 한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내밀며 부러 학교 선생님들처럼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내뱉은 한 마디에 블레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 웃어댔다. 내 맥북 프로를 걸고서 말하는데 올해부터는 진짜 안 필 거야. 칼같은 블레어의 이야기를 들은체 만체 한 다니엘은 한 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리며 다시 담배를 들이밀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피운 게 쉽게 끊어지냐. 슬그머니 그의 눈길을 피하며 경계 태세로 빠릿빠릿하게 서 있던 블레어도 기 죽은 강아지같은 꼴을 하고서 쓸쓸하게 문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다니엘의 옆에 조심조심 걸터앉아 허공에서 덜렁덜렁 흔들리던 담배를 제 손에 옮겨잡았다.



 "네 책임자가 누구지? 프렌치 보이?"

 "그래. 다이애난가 다이아난가 하는 애. 그 재수 없는 년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언더보스야."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에 바닥으로 부슬부슬 떨어지는 재처럼 짙은 색의 담배연기가 섞여 나왔다. 그게 말이나 돼? 난 그 새끼 총 쏘는 거 , 임무 나가서 한 번도 못 봤는데 말이야. 블레어는 영 새해 금연 계획에 미련이 남는지 입술을 밀어넣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고만 있었다. 그의 작은 움직임에 맞추어 자그마한 흰 종이에 담긴 담배가 보슬비처럼 붉은 카페트에 흩어지고 다니엘은 완전히 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뒤 말을 마저 잇는다. 어떻게 그 계집애같은 게 언더보스지? 독한 연기를 조금씩 내뱉으면서 그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꿍얼거리는 것을 듣던 블레어는 주변을 스윽 살피고 황급히 다니엘의 입을 막았다.


 "다니엘, 제발 말 조심해! 다 들리겠다."

 "알 바 아냐."

 "알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네 입에 총을 쑤셔넣을 걸."

 "쏘고 나서 울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오 로미오, 오 로미오. 저 자식이 나보고 재수 없는 년이래!"


 불안감에 약간씩 떨리던 블레어의 눈이 잔뜩 주름을 그리며 휘어졌다. 헙 하고 제 입을 막으며 소리를 잔뜩 죽이지만 여전히 다 삼켜내지 못한 웃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다니엘은 어느덧 제 새끼손가락 두 마디정도 남은 담배를 담뱃갑에 다시 집어넣고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내 드립이 좀 찰지지? 나도 알아. 무덤덤하게 뱉어내는 농담에 다시 참았던 웃음이 빵 하고 터졌다. 뒤로 돈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다니엘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으드득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헐레벌떡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둘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숙인 채 제 옆을 관통하는 여러 개의 시끄러운 발소리만이 멎기를 기다렸다. 눈동자만 살짝 올려서 앞을 바라보자 평범한 회사원처럼 단정한 검은 양복 차림으로 보스의 뒤를 따르는 간부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장 키가 크고 왼쪽 허리춤에 제 다리만큼이나 긴 칼을 차고 있는 남자는 블레어의 상관,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채 권총 한 자루 만을 차고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는 아마 러시아 사람이었다. 다니엘이 그들의 머릿수를 세다가 한 명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는 총성과 차가운 바람이 귀를 날카롭게 헤집고 들어왔을 때였다. 본능적인 반사신경에 의해 부드러운 총알이 빗겨 지나간 귓불부터 발 끝부터 저릿저릿하게 소름이 돋았다. 다니엘은 제 귀를 차갑게 훑고 지나간 총알의 감촉에 전율하며 다니엘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시선의 끝에는 회의실 입구에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선 채 옅은 미소를 흘리고 있는 남자- 그러니까, 알베르토 몬디가 있었다.



 알베르토가 시퍼런 핏줄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손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천천히 제 옆으로 다가왔다. 옆에서 쥐 죽은 듯이 서서 가만히 상황을 곁눈질하는 블레어의 얼굴에도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키가 작은 다니엘과 그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알베르토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무감각하게 이야기했다. 인생은 한 번 뿐이야. 간부들 중 유일하게 로빈 데이아나에게 반말을 쓰던 이유, 선임들이 제가 그의 이름을 불만스럽게 내뱉을 때마다 눈치를 주었던 이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살짝 떨리는 입술을 겨우겨우 열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부러 복도를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제 태도를 비웃는 것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아까 떨어트렸던 담뱃재가 그의 구두굽에 뭉근하게 짓밟히며 붉은 카페트 위에 시커먼 자국을 남겼다.


 "무슨 일 있어?"


 등 뒤에서 짧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귓바퀴를 뜨겁게 핥아내리던 숨결이 천천히 멀어졌다. 구부정하게 굽혔던 허리를 피고 고개를 부드럽게 돌리자 얼음장처럼 차갑게 잠겨 있던 검은 눈동자에 짙게 배인 살기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다니엘은 구두굽이 부드러운 카페트에 먹먹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멎자마자 멈추었던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검게 쪼그라들어가는 꽃처럼 고개를 꺾은 채 살짝 눈동자만을 올려 앞을 쳐다보았다. 


  "아니요- 아닙니다."



 슬금슬금 허리춤의 베레타 손잡이로 향하던 손이 다시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잠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가 홱 돌아 앞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다시 짧고 강렬한 시선이 다니엘에게 닿았고그는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입술 사이에 대며 입모양으로 이야기했다. 입 닫아. 알베르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뒤로 돌아 권총의 탄창을 갈아끼웠다. 애인과 약속이라도 있는지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며 웃는 알베르토를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흘끔거리던 다니엘은 그들의 발소리가 길게 이어진 일자형의 복도 끝으로 멀어질 때까지 잔뜩 낙서된 손을 등 뒤에 놓은 채 손장난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블레어가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너-이제-죽었어. 다니엘은 퀭한 눈빛을 쏘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그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배짱있게 앞을 향해 세 번째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저 놈은 어딜 저렇게 살금살금 가는 거야?"

 "아마, 701호. 정기적으로 10시 27분만 되면 방문하시던데."

 "7층은 간부들 숙소잖아. 거길 왜 가?"

 "몰라. 사귀기라도 하나보지."


 블레어가 다니엘에게 흰 면장갑 한 짝을 내민 다음 어깨를 으쓱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맨날 쟤네 뒷처리는 우리가 한다니까. 장갑을 끼고 벽에 박힌 총알을 펜치로 뽑아내며 불만스럽게 내뱉은 둘의 한탄은 엘리베이터를 안내하는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묻혀 담뱃재처럼 바닥에 부스스 떨어졌다. 


-


 차가운 방 안에서 유유히 흔들리던 붉은 불꽃이 얇은 종잇장처럼 바람에 파르르 흩날렸다. 카드키가 두 번 긁히는 소리 다음으로 개 짖는 소리가 잠깐 들리는 것을 보니 줄리안이 아닌 알베르토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10을 살짝 넘어가서야 로빈은 손등으로 눈을 부비적이며 팔을 위로 쭈욱 뻗고 기지개를 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부터 기억이 없었으니까 10시간은 잤을까. 여느때와 다름없이 일어나려고 하자마자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끔찍하게 저려오는 발목의 통증에 저절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이질적인 벽지와 인테리어를 보며 그는 허리춤에 찼던 권총을 빼내려했지만 칼도 권총도 이미 줄리안이 빼 놓은 상태였다. 그제서야 로빈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에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어올랐다.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켜 옆에 세워진 거울로 언뜻 보이는 제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모습을 보자마자 로빈은 제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깁스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응급조치조차 하지 않은 발목은 뼈가 살을 찔러 잔뜩 부어 있었고 새하얀 뺨에는 푸르죽죽한 멍이 들어있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잠든 바람에 새로 사 온 와이셔츠는 잔뜩 구겨져있었고 얼굴에는 온통 불그죽죽한 생채기 투성이었다. 로빈은 보기 싫은 제 상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던 얼룩말 무늬 담요를 벗어던졌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조금 정리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대리석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붉은 색의 카페트를 사뿐사뿐 밟으며 현관으로 들어온 도베르만 둘이 근처에 놓여져 있던 자켓에 코를 박고 몇 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로빈을 보며 예의없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짖어댔다. 녀석들은 본능적으로 폭스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사냥개가 여우를 보고 컹컹 짖어대는 것도 이해할 만 했다. 기억대로라면 은색의 목걸이를 한 왼쪽이 알렉산드로, 목걸이를 하지 않은 오른쪽이 세바스찬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기르던 개였는데 몇 달이 넘도록 길들여도 사냥개의 본능 때문인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알베르토에게 넘겼다. 그 이후로 둘은 피 튀기는 서열정리 한 번 하지 않고 꼬리를 내린 채 알베르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게 되었다.



 로빈은 손에 들려있던 반쯤 읽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침대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다가 사납게 이를 드러낸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도베르만을 보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알베르토는 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바깥의 문고리에 목줄을 묶어놓고 호텔 객실의 문을 완전히 잠궜다. 로빈이 입고 있는 검정색의 얇은 브이넥 셔츠가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꼴을 보고있자니 제가 다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옆의 안락의자에 미련없이 제 트렌치코트를 벗어 아무렇게나 걸어놓고 로빈이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와 그의 앞머리를 위로 넘긴 다음 찢어진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사탕을 이로 으드득 씹어먹던 그가 눈을 살짝 올려 제 어깨를 감싸고 있는 알베르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벽에 걸린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베르토는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듯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천천히 푹 패인 등선을 따라 부드럽게 내리며 허리를 감쌌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그를 눕혀놓고 살짝 몸을 밀착하자 그의 목덜미에서 나는 페로몬의 냄새가 부드럽게 그를 자극했다.


 "천천히, 해."

 "미안해요."


 로빈의 위로 엎어진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입술을 가져다대던 알베르토는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의 몸에서 손을 떼고 부드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의 탁자에는 그동안 읽은 책이 잔뜩 쌓여있었다. 헝거게임이나 왕좌의 게임같은 가벼운 판타지 도서에서부터 제법 어려운 문학 작품 양장본이 램프의 키만큼이나 높게 쌓여있는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로빈 데이아나의 모습은 플루타르크나 유토피아를 읽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소년이 아닌 양 손에 산탄총 두 개를 든 채 루마니아의 밤거리를 활보하는 치명적인 죽음 그 자체 였기 때문이리라. 지금의 그는 너무나도 약하고 가녀린 꽃 따위에 불과했다. 작은 알약 두 개와 함께 따뜻한 물 한 잔을 단숨에 마신 로빈이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이야기했다.


 "그 독일인 기자, 네가 죽였지?"


 침대의 헤드에 기댄 채 가만히 누워있는 로빈의 뺨을 어루만지며 대강대강 서류의 빈칸을 채워넣던 알베르토의 눈빛이 로빈에게 닿았다.  다른 곳, 그러니까 자신만의 추측과 해석의 세계로 정신을 판 그가 삐뚤게 붙잡은 금색 촉의 만년필에서 짙푸른 색의 잉크가 꾸물거리는 느릿한 지렁이처럼 흘러나와 종이를 적셨다. 저와 꼭 닮은 검은 눈동자가 당최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핀볼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둥그러미 뜬 눈을 살짝 올려 그를 바라보던 로빈이 무표정 뒤로 감추고 있는 것을 모두 꿰뚫어보았다는 듯이 살풋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흘렸다. 칠칠맞게, 시계에 피가 묻었잖아. 항상 무감정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는 제 사적인 감정을 속이는 데 영 소질이 없었다. 


 "덕분에 보스한테 한 소리 들었죠."

 "왜 죽인 거야? 물론 매력적인 알파였지만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베타였으면 조금 미안할 뻔 했는데 알파라서 다행이네요."



 태연하게 손수건으로 시계에 묻은 피를 꼼꼼히 닦아내며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에 새삼 감탄하며 로빈은 알베르토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자신을 감싸오는 머스크향이 장식장 위에 놓아둔 싸구려 아로마 양초의 향기보다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그 남자, 그러니까 그 운 없는 남자는 자신이 국경 없는 기자회 소속이고 중동 지역의 내전 당시 찍은 사진으로 기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이라는 퓰리처 상을 받았다고 했다. 몇 번이고 다치고 납치당했지만 꿋꿋이 가지 말라는 곳만 가고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전형적인 독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럽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들어가지 않은 쓴 아메리카노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키던 그 사람은 저를 조직에 붙잡힌 아름다운 라푼젤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인지 꼭 백마를 탄 프린스 차밍처럼 굴었다. 입버릇처럼 그 곳에서 너를 꺼내주겠노라고 말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작은 지역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을 그의 의문사를 살짝 안타깝게 여기며 로빈은 작은 램프의 전원을 끈 다음 베개를 베고 누웠다. 이제는 양초의 불빛만이 남은-살짝 불그죽죽하게 물든 방 안의 분위기는 낭만적이었다. 알베르토는 로빈의 어깨를 부드럽게 팔로 감싼 채 짧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새끼가 당신 뺨을 만졌거든요."


 서류를 내려놓고 제 옆자리에 누운 채 콧대부터 뺨, 찢어진 입술과 턱선을 타고 천천히 손으로 몸을 훑어내려가는 알베르토를 마주본 로빈이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뜨거운 살이 맞닿았고 격동하는 심장의 움직임이 그대로 가슴을 타고 느껴지는 덕분에 로빈은 살짝 몸을 떨었다. 어차피 네 것도 아니잖아.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긴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날이 선 듯한 차가운 눈빛은 저를 마냥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유혹하는 것처럼 나른하게 내뱉은 로빈의 말에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고 침대의 매트리스가 약간 흔들렸다. 그대로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았고 로빈은 알베르토의 목에 팔을 감은 다음 천천히 그가 리드하는 대로 이끌려갔다. 뜨거운 혀가 얽혔고 진하게 서로를 탐미하는 행위에 숨이 막혀왔다. 여유있게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치열을 훑던 알베르토는 로빈이 그만하라는 듯이 눈을 찡그리며 와이셔츠를 붙잡자 아쉽다는 듯이 살짝 달아오른 입술을 떼었다. 가서 퀸타르트도 죽이지 그래? 손으로 와이셔츠 겉을 훑던 그가 짖궂게 이야기했고 알베르토는 살짝 몸을 숙인 채 귓가에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달링, 조금만 더 늦게 말하지 그랬어."


  창백한 피부에서 도드라지는 아치처럼 꺾인 짙은 눈썹 밑, 부러 흐트러놓은 듯한 흑발에 가려져 있는 순수해 보이지만 묘하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내도록 나태하게 풀려 있는 눈이 살짝 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위로 쓸어넘긴 검은 머리칼은 아래로 쏟아지고 아침에 고르고 골라 반듯하게 매었던 넥타이는 잔뜩 구겨진 값비싼 와이셔츠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알베르토가 살짝 우악스러운 손길로 진한 남색의 넥타이를 풀었다. 흰 벽은 이미 불그죽죽한 낭만으로 물들어 있으리라. 길고 곧은 우피치의 회랑처럼 늘어진 호텔의 복도에서 들린 총성은 마티스의 붓질만큼 짜릿하게 심장에 녹아들어 몸 구석구석까지 어린 아이가 바닥에 쏟은 우유처럼 전율을 흘려 보냈고 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가 이내 세상 물정 모르는 베르메르의 소녀처럼 천진한 웃음을 흘린다. 거짓말. 



 값비싼 카페트 위로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는 너무나도 섬세해서 가냘픈 눈길을 주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다.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러내리고 그것을 벗어던진 그가 양초를 불어 껐고 짙은 잿빛의 연기가 먹먹하게 흩뿌려짐과 함께 다시 한 번 입술이 맞닿았다. 창백하게 식은 그의 얼굴은 짙은 어둠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둘의 위로 힘없이 매달린 헨리 푸셀리의 악몽이 거실에 걸린 암막 커튼처럼 늘어진 팔을 뻗었다. 인형뽑기 기계처럼 저 팔을 밑으로 끌어 내리고 자켓을 붙잡아 조심성 없이 들어 올리면 툭 떨어질 터였다. 무언가를 천천히 해내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알베르토는 로빈의 차가운 뺨을 훑었다. Il est mort. 이탈리아어 억양을 섞은 짧은 프랑스어 한 마디에 손 안에 쥔 두 개의 세계는 막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미미하게 흔들렸다.


알로 무너지다







  곧 전등이 나갈 것 같은 공중 전화 부스가 시덥잖게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젖은 몸은 때를 모르고 달달 떨고 있었고 투명한 유리창으로 비춰진 내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구겨진 셔츠, 물기를 머금은 자켓과 허옇게 질려 푸르뎅뎅한 입술과 언뜻 보이는 까슬한 수염을 보는 바에 눈을 감아버렸다. 



  눈꺼풀 너머로 늬엿 누런 녹이 슨 벽이 보이는 듯 했다. 귓가에는 칼바람이 부는 겨울임에도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곤두박질 치는 소리가, 코로는 그 특유의 비릿내가 진동을 했다. 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공중 전화 부스 안의 먼지 냄새 역시 지지 않고 코를 찔러왔다. 혀끝은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지는 듯 했다. 침 냄새가 나는 것이 물을 마신 지가 언젠 지 까마득 했다. 그리고는 내 체온을 앗아가버려 창백해진 피부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물기와 물 먹은 섬유가 나를 누르는 무게, 얼굴을 쓸어넘기는 나의 손. 생각보다 나는 평탄한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꽤나 부드러운 것이 굳은살이 촘촘히 박힌 두터운 손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리고 오늘따라 족쇄처럼 나를 채우는 신발의 압력도 느겨졌고, 전신에서 느껴지는 근육통과 가슴이 유난히 뻐근한 것이 주먹으로 몇 대 친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감각 즉, 육감 너머로 내비치는 너의 형상이 나를 옥죄어왔다. 너의 눈은 죽어있었다. 비 내리는 거리를 애써 담고 있는 너의 눈은 탁했고 앙다물린 입술은 비밀을 알아버린 천진한 아이의 동심과도 같았다. 눈에 띄게 떨리는 손끝이 정처없이 떠돌다 결국은 축 처지고 만다. 텅 빈 새벽 거리에는 너와 나 뿐이었지. 곧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너와 정신 없이 너를 찾는 나는 우습게도 네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로빈, 로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목이 쉬어갈 때 쯤이었나, 유난히 바빠보이던 택시 한 대가 지나갔었지 아마. 



  그 후의 장면은 너무나 끔찍해서 기억에서 없애버리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가장 찬란하던 너는 한낮 고철덩어리의 빛에 휩싸이고 말았고 나와 마주친 두 눈은 텅 비어있었다. 그 어떤 것도 담지 않은 눈은 나의 뇌리에 박혀 쇠사슬처럼 나를 엮어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멈추었지. 너는 아마 내게 이렇게 말 했을거야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당신이랑 나는 너무 안 맞았던 것 같아. 애초부터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면 나는 넋을 잃고 너를 바라보겠지. 비실비실 웃는 너는 더이상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이하던 데이아나가 아니었다. 사랑을 갈구하는 꼬마 역시 아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어때요? 청첩장은 언제 만든건데? 나한테는 언제 말 할 거였어요?'


 

  언제 만난건데? 언제부터? 어떻게?

   ...왜? 왜? 왜? 






  멈춰버린 시간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회로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나의 너는 그 상태 그대로 남아있어서, 내 기억 속 너의 마지막은 이것이다. 결말을 10분 남겨 두고 일시정지한 영화. 기어코 너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 상태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어서 나는 너를 몇 번이나 품었지만 품을 수 없었다. 




  느릿하게 눈을 떴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삼면이 가로막힌 공중 전화 부스의 입구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릎을 올리고 앉아 있는 내 시선에서는 하염 없이 올려다 보아야 하는 터여서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도, 비 비릿내에 씻겨내려간 체향이 느껴지지도 않는데 지독하게 풍기는 너의 존재감이 나를 가득 매웠다. 창백한 손목이 시야에에 들어찼고 곧 내게 손을 내민다. 





  '이제 돌아가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게 건넨 용서를 끌어안고 나는 울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엉엉 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네 앞에서는 강인한 척 했던 나인데 소리내서 울며 빌었다.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환하게 웃어보인다. 빗물이 얼굴을 적시는데도 빛을 내며 웃는다. 살며시 접히는 눈매가 눈에 익어 마주하려니 내 눈을 손으로 가로막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울부짖었다. 




  공중 전화 부스에서 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몇몇 보이는 사람들은 나를 취객으로 보았고 나 역시 개의치 않았다. 무릎 관절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고꾸라질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걸으려 노력했다. 그 역시 반대편에서 터덜거리며 걷는 너를 보기 전의 일이었다. 




  "로빈! 로빈!"




  뒤를 돌아보았다. 무채색의 눈은 온전히 나를 담고 있었다. 빗방울도, 간헐적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아닌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걸음씩 그를 향해 내딛다 걸음이 자츰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나에게 고정된 시선을 놓칠새라 찰박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기도 전에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굳이 그곳을 지날 필요가 없던 젊은이들의 환희로 가득한 멋들어진 자가용이 하필이면 내 오른쪽에서 빠른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고, 불행히도 나는 거무스름한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면서도 고개를 돌려 너를 보았다. 




  나는 무너졌다. 너의 인생을 무너뜨리고 나 역시 똑같이 무너져내렸다. 자, 로빈. 이제 너와 나는 같아졌어. 더이상 누가 용서를 구할 필요도, 할 필요도 없어진거야. 이마 위에서 흐르는 피가 따뜻해. 너도 그랬겠지. 아마.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너는 웃고 있었던가. 




  안녕, 데이아나. 이따가 보자.  


알베르토 몬디 X 장 위안

어, 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뜬 남자가 눈 앞의 인영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알베르토?”


[알베위안] 당신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뭐에요. 자다 일어나서 내가 누군지도 잊었어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까 퇴근하지 않…았나?”

“뭐 좀 놓고 간 게 있어서 가지러 왔어요. 위안 씨는, 일은 다 했어요?”

손을 뻗어 위안의 눌린 머리를 정리하는 손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위안이 알베르토를 올려다 본다.

“어… 급한 건 다 했어요. 잠깐만 쉬다 가야지 했던 게 잠들었다.”

“그럼 같이 가요. 내가 태워다 줄게.”

“그럼 고맙죠! 잠깐만요, 나 자리 정리 좀 하고 올게요.”

옆 자리 여사원 몰래 빌려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내고 일어서 가방을 챙기러 걸어 가는 위안의 뒤로 알베르토가 담요를 접어 주인인 여사원의 의자 위에 올려놓는다. 뭘 그렇게 흩뜨려 놨는지 물건의 홍수 속을 뒤지는 위안을 귀엽다는 듯 보며 흐흐, 하고 웃은 알베로트가 폴짝, 뛰어 옆 사원의 책상 위에 올라 앉아 메고 있던 갈색 가죽 크로스백을 뒤진다. 그러다 원하던 걸 찾았는지 작은 봉투를 손에 쥐고 몇 번 괜히 탁탁, 책상에 쳐보기도 하고 큼큼, 헛기침을 해보기도 하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목소리로 위안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 집 앞에 와인바가 새로 생겼는데, 오픈 이벤튼지 뭔지 한 잔 공짜로 주는 쿠폰을 나눠주더라구요. 오늘 가는 김에 같이 가볼래요? 남자 혼자서 마시는 건 너무 처량하잖아, 응?”

‘바가 새로 생겼다’는 대목에서부터 귀가 쫑긋 열린 (아는 사람만 아는) 와인바 마니아 위안이 알베르토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름 어렵사리 꺼낸 말인데 이렇게 쉽게 허락 받으니 좋기도 하고, 역시 나를 연애 상대로는 절대 보지 않는 건가 하는 체념이 들기도 하고, 복잡미묘한 감정에 얼굴이 어두워진 알베르토가 마른 세수를 하는 척 손으로 표정을 가리고 다시 책상에서 폴짝, 뛰어내린다.

“그럼, 난 차 빼놓고 있을게요. 정문 앞에서 봐요.”

“네, 네. 빨리 내려갈게요!”



“아니이-, 분명히 자기가 표 지우라고 해놓고서어-, 지웠더니 이건 왜 사라졌냐고 윽박을 아주우-!”

“곽 부장 만날 그러죠. 시츄는 무슨, 기억력만 보면 붕어야 붕어.”

“그니까아-! 내 보고서가 맘에 안 들면 지가 쓰든가아-!”

바 분위기가 좋다며 연신 옹알옹알 대면서 한두 모금씩 홀짝홀짝 하던 게 어느새 꽤 쌓였는지 취한 듯 말꼬리가 늘어진다. 흐음… 요새 많이 피곤했나. 평소엔 이것보다는 좀 더 마셨던 것 같은데. 사소한 변화에도 위안에게 기민하게 반응하는 알베르토가 귀엽다는 눈빛으로 위안을 쳐다보다가도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린다. 자신이 미간을 찌푸리자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찾겠다는 듯 끙끙대며 얼굴 구석구석을 훑어보는 눈길-직업병이다. 위안은 세일즈맨이기 때문에-이 사랑스러워 찌푸려진 미간을 풀고 정수리를 도닥도닥하자 금세 헤실헤실 풀어져 잔을 홀짝댄다.

“위안 씨, 오늘은 이 잔까지만 마시고 가요. 이건 내가 킵, 해둘 테니까 다음에 와서 또 마시고.”

“그래요, 그래애-. 알베에-, 덕에 맛있는 거 먹었어요오-. 고마워요오-.”

“아니에요, 내가 혼자 마시기 싫어서 데려온 건데. 내가 고맙죠.”

위안에게 감사 인사를 되돌리며 손짓으로 바텐더를 부른 알베르토가 자기 카드를 꺼내 위안의 잔까지 계산한다. 잔 바닥에 살짝 남은 술을 원샷한 위안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면 맡겨 둔 코트를 들고 가까이 다가온 웨이터에게서 위안의 것을 먼저 받아 들어 입힌 후, 자신의 코트는 그저 팔에 걸쳐 든다.

바 밖으로 나와 발렛을 기다리고 있으면, 약간 쌀쌀한 날씨에 위안이 움츠러든다. 알베르토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있던 위안의 허리를 살짝 당겨 안으며 앞의 코트깃을 여며 준다. 얼마 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나온 차에 위안을 먼저 태운 알베르토가 빠르게 운전석에 올라타 자신과 위안의 안전벨트를 매고 출발한다.




불빛이 번쩍이는 불금의 시내를 벗어나면, 은은하게 비추는 가로등과 자동차의 엔진 소리 외엔 둘의 공간을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한 위안의 동네가 나온다. 그의 집 앞에 도착한 알베르토가 어느새 색색대며 곤히 잠든 위안의 얼굴을 슬쩍 웃으며 쳐다보다가 시계를 보고는 아쉬운 듯 위안을 도닥여 깨운다.

“위안 씨, 집에 다 왔어. 일어나. 들어가야지?”

“으응-, 벌써어-?”

“응, 다 왔어. 들어가서 옷 벗고 편하게 자.”

집에 다 왔다는 말에 반응한 위안이 잠인지 술인지 모를 것에서 깨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지만, 그러고서도 여즉 흐릿한 눈으로 알베르토를 쳐다본다.

“으으, 고마워요오-. 내일 뵙겠습니다아-.”

“위안 씨, 내일은 토요일. 월요일 날 봐요?”

“아, 네에, 네에, 월요일 나알-, 봐요오-.”

달칵-, 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위안의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알베르토가 위안이 아파트 문을 열고 사라진 후에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일 분, 이 분, 삼 분. 흐음, 하며 어쩐지 아쉬운 듯한 신음을 흘린 알베르토가 다시 벨트를 매고 출발할 준비를 한다. 그 때, 느릿하게 열리는 문에 알베르토의 시선이 고정된다. 그럼 그렇지, 다시 비척비척 걸어나오는 그 느릿한 발걸음에 알베르토의 입이 호선을 그린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창가로 다가오는 그 발걸음에 알베르토가 짐짓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창문을 내린다.

“위안 씨? 왜요?”

“창무운-, 더, 더 내려 봐요오-.”

눈동자에 가득 담긴 즐거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위안이 답답하다는 듯 창문을 탁탁 치면, 알베르토가 얼굴이 드러나도록 창문을 연다.

“내렸어요. 왜요?”

으으음-, 웃고 있는 알베르토의 귀 가까이에 고개를 내린 위안이 ‘고마워요오-,’하고 속삭인 후 볼에 살짝 키스한다. 짧은 시간 닿고 떨어지는 온기가 아쉬워 괜히 볼가를 문지르던 알베르토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위안을 재촉한다.

“에이, 뭐에요. 고맙다고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얼른 들어가요. 감기 든다.”

“으응-, 그럼, 잘 가요오-.”

말은 잘 가라고 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위안에 또 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담은 알베르토가 눈을 휘며 손을 흔들면, 위안이 아까보다는 살짝 빨라진 걸음으로 총총-, 아파트 안으로 사라진다. 위안이 사라지고서도 한참, 그 자리에 앉아 여운을 느끼던 알베르토가, 자정을 나타내는 시계 소리에 눈을 뜨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 차를 출발시킨다.

‘그래, 내가 이래서 당신을 못 놓지-.’

라고 생각하며.


알베르토 몬디 X 줄리안 퀸타르트

[알베르토x줄리안/알줄] 마지막 임무, 그를 지켜라.





줄리안은 서둘러 밖을 나섰다. 실수로 알람시계를 꺼버리는 바람에 지각할 위기에 놓여버려 아침이고 뭐고 대충 옷을 걸치고 밖을 나섰다. 매일 아침 비담아파트 앞에서 따뜻한 커피와 차를 파시는 아주머니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아주머니, 한 잔요!”

“아이구, 총각. 오늘은 좀 늦은 모양이네. 얼른 만들어줄게.”

아주머니는 익숙한 듯 줄리안을 보고 중형 사이즈의 컵에 따뜻한 커피를 채워 넣고 뚜껑을 덮은 뒤 줄리안에게 건네주었다. 줄리안은 커피를 받음과 동시에 1000원을 내밀었다. 늦어서 바쁜 출근길에도 빼먹을 수 없는 아주머니의 커피는 양도 많고 맛있으면서도 천원밖에 하지 않았다.

“어? 이 로고는 뭐에요?”

“아, 그거? 내가 이래도 몇 년 동안 여기서 팔아왔는데 이름 하나 없으면 섭섭하잖어. 그래서 만들어봤지. 미연네 커피.”

“아주머니 이름을 따서 만든거네요!”

“호호, 그렇지.”

줄리안은 아주머니께 미소를 짓고 나서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빼먹지 않고 말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자 벌써 8시 32분이었다. 회사까지 가려면 40분은 넘게 걸리고, 출근시각은 9시까지였다. 줄리안은 손에 든 커피를 홀짝 마셨다. 아쉽지만 한 모금으로 만족하고 줄리안은 뛰기 시작했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5분, 뛰어서는 2분정도였다. 평소에도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덕에 뛰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고, 항상 커피를 들고 뛰기 때문에 커피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다만 문제가 있다면 줄리안이 실수로 안경을 벗고 왔다는 거였다. 너무 바빠서 아침에 안경을 쓰지 않았고, 시력이 매우 나쁜 편은 아니어서 줄리안 자신도 몰랐던 게 문제였다면 문제였을까. 줄리안은 스크린 도어에 붙어있는 안내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글자를 읽으려 가까이 다가갔을 때, 누군가와 부딪혔다.

“앗!”


커피가 엎질러져서 부딪힌 사람의 양복에 흐르고 있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살짝 험상궂은 외모를 가진 그 사람은 웃지도 않고 줄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뜨거울 텐데, 그 남자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이거 비싼 건데.”

 커피는 남자의 양복을 따고 뚝뚝 떨어져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줄리안은 손수건을 꺼내들고 닦으려했지만 저지당했다. 남자는 명함을 내밀고 ‘오늘 일 끝나고 봅시다.’라는 말과 함께 역을 빠져나갔다. 잠시 넋을 놓았던 줄리안은 자신이 타야하는 지하철 안내방송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 샌가 손에 쥐어진 명함에는 ‘NSM Company, CEO Alberto’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알베르토?’

줄리안은 무엇인가 익숙한 그 이름이 뭔가 찜찜했지만 생각을 접어두고 지하철에 올랐다. 역시 눈에 띄는 빈자리는 없었고, 줄리안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가는 내내 찜찜한 기분에 결국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Julain:나 오늘 출근길에 커피 쏟았다ㅠㅠ. 근데 내가 커피 쏟은 그 사람이 명함이랍시고 줬는데 이름이 알베르토야. 뭔가 익숙한데 누군지 모르겠어. 아는 사람인가?

Robin:? 알베르토?

Julian:응응, 알베르토. 누군지 알아? 비싼 양복에 쏟았다고 오늘 일 끝나고 보자더라...

Robin:헐, 방금 알베르토라고한겨? 진짜 모름?

Julian:모르니까 물어본 거잖아ㅠ

로빈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늘 아침에 봤던 그 사람이었다.

Julian:헐? 이 사람 사진 어떻게 구했어? 유명한 사람이야?

Robin:하...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이 사람이야?

Julina:사진보니까 맞는데, 왜 누군데 그래?

Robin:너 이제 망했다.

Julian:뜸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 왜왜.

Robin:그 사람 유명한 조직보스임.

Julian:ㅇ?

Robin:아, 마피아라고! 마피아 보스라고!

Julian:......뭐?

Robin:가서 싹싹 빌어, 잘못했다고. 아, 바보야. 비싼 양복에 왜 커피를 들이부어!

Julian:아, 들이붓긴 누가 들이부었대! 실수로 부딪힌 거란 말야ㅠㅠㅠㅠㅠ

줄리안은 당장 지하철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안경을 쓴다거나 아니면 오늘은 커피를 사지말걸, 아니면 바보같이 안내문을 읽으려고 앞으로 뛰쳐나가지 말걸.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 속에서 줄리안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에는 반쯤 쏟겨진 커피 잔이 들려있었다. ‘이 커피 때문에…….’ 줄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빈의 말대로 싹싹 빌기만 한다면 알베르토라는 그 무서운 사람이 자신을 죽이거나-혹은 때리거나-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리 비싼 양복이라도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진 않을 것이라며 합리화를 해보았지만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일하기 글렀다.

다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켜고 회사로 곧장 뛰었다. 왜 이 빌어먹을 회사는 문을 회전문으로 해놓았는지, 늦은 마당에 더 늦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연타하고 시계를 보자 9시 12분이었다. 하필이면 엘리베이터는 12층에 있어서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는지, 오늘은 정말 운수가 없으려나싶었다. 지옥 같던 1분이 흘러가고 땡!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줄리안은 8층을 재빨리 눌렀다. 문이 닫힐 때쯤 누군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지만 줄리안은 못 본 척 닫기 버튼을 눌렀다. 8층에 도착하고, 줄리안은 재빨리 뛰어 자신의 자리로 돌진했다.

“줄리안, 늦었네?”

“헉, 헉. 알람을 실수로 꺼버려서요.”

기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줄리안은 기욤의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항상 회사에 1등으로 도착해서 늦는 사원들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장 팀장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팀장님은요?”

“아까 무슨 일 있다고 내려가셨는데?”

줄리안은 불현 듯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1층에서 누가 급하게 달려왔었는데 그게 장 팀장님이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줄리안은 애써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곧 띵-하는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도착한 사람은 장 팀장이었다. 무엇인가 화가 잔뜩 나보이는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장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줄리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늦었다는 사실을 알려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욤 형, 제가 나중에 한우 사드릴 테니까 늦은 거 절대 알리면 안돼요!”

“당연하지.”

기욤은 엄지를 척 내밀었다. 줄리안은 기욤은 믿을 수 있겠다싶어서 환하게 웃었다. 책상에 수그려서 작게 속삭이던 줄리안은 책상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미소를 거뒀다.

“줄리안?”

“...네?”

“잠깐 이리로 와줄래요?”

하아, 줄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잠깐의 틈사이로 나를 본 건가. 팀장실로 끌려가는 줄리안을 기욤은 안타까운 듯 바라봤다. 기욤이 입모양으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응? 뭐라고?’

‘한-우-는-쏘-는-거-다?’

‘...’

줄리안은 엿을 날릴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장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팀장 장 위안’이라는 명패가 놓인 커다란 책상 앞에 초라하게 놓여진 작은 의자에 줄리안은 앉았다. 저절로 허리가 숙여지고, 어깨가 작아지는 자리였다.

“오늘 늦었죠?”

“아, 네. 팀장님 죄송합니다. 알람시계가 고장나버려서…”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었다. 줄리안은 조심스럽게 장위안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찌푸린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줄리안은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1층에서 저를 봤습니까?”

“예? 아뇨, 못 봤습니다.”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뛰어오면, 열림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주는 게 예의죠, 줄리안?”

“네. 그렇죠, 그렇죠.”

“저는 예의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네네.”

“더불어 거짓말 하는 사람도요.”

줄리안이 장위안을 보지 못 한건 사실이었지만, 뛰어오는 사람을 무시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장위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제 나가봐요.”

10여분이 넘는 설교 끝에, 줄리안은 팀장실을 나갈 수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억누르고 최대한 밝게 웃으며 팀장실을 나왔다. 닫힌 문 뒤로 엿을 날리고 한 발짝 다리를 뗀 순간, 줄리안은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 했다.

“야, 줄리안!”

“윽, 나 넘어질뻔 했잖아, 로빈!”

“이 정신 나간 놈아, 그런 사람한테 커피를…읍”

줄리안은 황급히 로빈의 입을 막고 탕비실로 향했다. 로빈은 아주 쉽게 줄리안의 손을 떼어내고 말했다.

“너 안경은 어따 팔아치웠어?”

“집에 두고 왔어, 일단 탕비실에 가서 얘기해.”

“아오.”

탕비실에 도착하자마자 줄리안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로빈은 줄리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안경 벗지 말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래서 여태껏 잘 쓰고 다녔잖아.”

“그러니까 오늘도 잘 썼어야지! 누가 네 얼굴보고 반하면 어떡하려…”

“쉿, 조용히 해!”

탕비실 밖으로 여자 사원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수다 중이라 듣지못한 듯 보였다. 로빈은 답답하다는 듯 줄리안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이제 어쩔 셈이야?”

“몰라... 일단 일 끝나고 보자고 했으니 회사 끝나고 생각해봐야지.”

“아, 진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로빈은 시계를 보더니 가야할 시간이라고 말하며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줄리안은 커피를 타먹을까 생각하다가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리곤 그만두었다. 로빈은 다른 부서라서 사내연애하는 것을 들킬 일은 없었지만, 줄리안은 항상 조심하고 조심했다. 혹여 누가 들을세라 자신은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로빈은 마구 내뱉어서 스트레스였다. 줄리안은 녹차를 타고 자신의 자리로 갔다.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가 올려져있었다. 기욤의 자료랑 다니엘의 자료였다. ‘이게 왜 내 책상에 있지?’라고 생각할 때쯤 스친 생각.

“아, 맞다! 오늘 프레젠테이션!”

아주 중요한 발표가 있는 날인데, 오늘 준비를 하나도 못했다. 줄리안은 다급하게 시계를 쳐다봤다. 9시 47분. 발표시간은 10시였다. 줄리안은 서둘러 자료를 점검하고, 발표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방대한 자료에 줄리안은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0분 안에 점검하는 것은 무리였다. 줄리안은 좌절한 채 엎드렸다. 오늘 운수가 없으려고….

“줄리안, 발표 준비 다했어?”

그 와중에도 기욤은 해맑게 묻고 있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빼끔 들고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덕에 기욤은 먹던 에너지 드링크를 쏟을 뻔했고, 줄리안은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하아아.”

연습한 것이라곤 고작 3일이 전부였다. 그것도 밤에 잠깐잠깐 연습했던 거라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줄리안은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52분! 줄리안은 재빠르게 자료를 읽어나갔고, 자신의 요약된 자료도 훑었다. 뭐라도 읽으면 도움이 될 거야. 줄리안은 아주 빠르게 읽어나갔으나, 57분. 다시 엎드린 채 울었다. 난 망했어.

결국 발표는 어버버, 거리며 끝났고 줄리안은 완전히 좌절했다. 어떡해, 다니엘 형이랑 기욤 형이 열심히 만들어 준건데. 오늘은 정말 운수가 없는 날이다. 회사일도 망치고, 난 이제    짤릴지도 몰라. 줄리안은 오열 아닌 오열을 하며 동동 굴렀다. 기욤은 살짝 토닥여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약속도 미루고 열심히 만든 건데.

“기욤 형.”

“왜?”

“아니에요.”

줄리안은 그날 하루 종일 일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때우고 넋이 나간채로 모니터만 바라보는 모습에 기욤이 걱정했지만 물으면 얼빠진 얼굴로 ‘네?’만 반복하는 통에 기욤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6시. 퇴근시간이 되고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퇴근하는데 아직도 얼빠진 얼굴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는 줄리안을 기욤이 흔들었다.

“줄리안, 퇴근할 시간이야.”

“네?”

“줄리안. 퇴근.”

“네?”

“줄리안!”

결국 기욤이 뺨을 한 대치고나서야 정신을 차린 줄리안은 기욤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요, 형?”

“퇴근할 시간이야.”

“아?”

줄리안은 시계를 쳐다봤다. 퇴근할 시간이네, 줄리안은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들고 영혼 없는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로빈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꼴을 보니 하루 종일 일도 못 했겠구만.”

“나 이제 어떡하지?”

“또 왜?”

“중요한 발표가 있었는데, 내가 다 망쳤어.”

“잘하는 짓이여.”

“팀장님한테 미움을 샀지.”

“잘하는 짓이여.”

“기욤 형한테 한우도 사야해.”

“허?”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줄리안은 비틀비틀 올라탔고, 그런 줄리안을 보고 로빈은 걱정스러운 듯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위로했다.

“정신차려, 임마.”


*


줄리안은 명함을 꺼내들었다. 로빈이 같이 가겠다고 하는 것을 말리고 줄리안은 택시를 탔다. ‘저 아침에 봤던 사람입니다. 일이 끝나서 연락드렸습니다.’라고 보내자 짤막하게 돌아온 답장은 장소였다. ‘NSM Cafe, 5층.’ 심플한 답변에 줄리안은 ‘네’라는 짤막한 답을 보내려다가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라고 바꾸어 보냈다. 이러면 좀 더 좋아하지 않을까?, 나를 좀 더 좋게 봐주지 않을까?

택시가 도착한 곳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예쁜 건물이었다. 카페라더니, 정말 고급스러웠다. 뻥 뚫린 유리창 너머로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총 5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었고 줄리안은 4층과 5층은 어두운 것에 당황했다. 사람들은 3층까지만 있었고 4층과 5층은 블라인드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줄리안은 아침에도 자신을 괴롭혔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버튼을 눌렀다.

도착한 곳은 굉장히 어두웠다. 폐건물마냥 불이 하나도 켜져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뗀 줄리안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 넵.”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며 줄리안은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남자는 잘도 걷고 있었다. 복도 끝에는 살짝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문이 있었고, 남자는 줄리안을 그곳까지 이끈 뒤 멈춰섰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줄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무엇이 있을까, 검은 양복을 입고 늘어선 사람들? 아니면 고급스러운 소파와 경치 좋은 테라스? 줄리안은 최대한 밝게 웃으며 들어섰다. 그렇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알베르토는 책상에 앉아서-그것도 아주 평범하고 흔한 책상-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물론 뒤에 경치 좋은 유리창이 있긴 했지만, 마피아의 보스치고는 꽤나 수수했다. 고풍스러운 소파도 없었고 넓은 방 안에는 그저 책상과 책장뿐이었다. 아, 소파가 있긴 있었지만 그냥 흔한, 검은 소파였다. 줄리안은 소파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알베르토의 손짓을 보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 앞 작은 테이블에는 양복이 올려져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쏟은 커피향이 나는 양복.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아, 아뇨, 없습니다.”

“이래봬도 여기 카페에요. 이봐, 세바스찬.”

알베르토가 책상 위에 버튼을 누르며 말하자 말끔한 웨이터 복을 입은 남자가 메뉴판을 들고 들어섰다.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반대편에 앉았고, 메뉴를 고르라는 듯 재촉했다. 결국 줄리안은 유자차 한 잔을 주문했고 알베르토는 간단하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웨이터는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뒤 빠져나갔다.

“저, 보상을 원하시는 거면 얼마 정도 드려야할까요?”

“돈으로는 해결이 안될텐데요.”

“예?”

“이거 전 세계에 딱 10벌만 있는 양복입니다.”

“허……”

“값으로 따질 수가 없는 양복이죠.”

줄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진짜 운수가 없으려고, 하필이면 전 세계에 10벌 밖에 없는 양복에다 커피를 쏟고 그것도 모자라서 범죄조직의 보스한테! 똑똑, 웨이터가 유자차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시 인사를 하고 나갔다. 줄리안은 유자차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갈색으로 변한 와이셔츠와 얼룩진 재킷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어…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음, 장기라도 파실래요?”

“예? 아, 네?”

“농담이고. 진짜 어떡하실래요?”

줄리안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유자차를 집어 들었지만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안 뜨거워요?’ 알베르토가 다정하게 물어왔지만 줄리안은 그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했다. 혀가 좀 아린 것 같기도 한데, 제가 미각을 잃었나 봐요.

“제가 월급쟁이에다가 항상 적자거든요, 아직 결혼도 못했고… 돈으로 못 갚으면 몸으로라도 때우겠습니다. 제가 젊으니까, 몸으로 하는 거면 다 할 수 있어요.”

“몸으로 때우는 거라면 어떤거?”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아…”

알베르토는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살짝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럼, 내 애인 역할 좀 해주겠어요?”

“푸웁-, 네?”

줄리안은 먹던 유자차를 뿜어냈다. 애꿎은 양복은 노란색 유자차로 또다시 더렵혀졌고 알베르토는 얼굴을 찡그렸다. 드라이 맡기려고 했는데, 뭐하는 짓이야.

“그건 봐드릴 테니, 1년간 저랑 연애하죠?”

“왜, 왜요? 저는 남자고 아니 무엇보다 왜요?!”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요. 왜요, 싫어요?”

“어…”

‘싫으면, 돈으로 때우시던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알베르토에 줄리안은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알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로빈이 떠올랐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줄리안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은 착각에 눈을 비볐다. 알베르토는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이름, 집 주소, 회사, 주민번호 다 적어요.”

“이건 왜…”

“애인끼리 기본적인 건 알고 있어야죠?”

줄리안은 결국 떨리는 손을 최대한 감추며 종이에 적어나갔다. 알베르토는 종이를 회수해갔고 줄리안에게 휴대폰을 내밀라고 말했다.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휴대폰에 무엇인가를 톡톡 쳐 저장했고 전화를 걸었다.

“이제 전화번호 교환도 됐네요. 그럼 내일 보죠.”

“내일 또요?”

“일 끝나면 차가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줄리안은 대기하고 있던 차에 몸을 실었다. 집 주소를 벌써 알려줬는지 기사는 말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고 집에 들어섰을 때 줄리안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으아, 오늘 하루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줄리안이 이 모든 것이 무엇 때문에 꼬인 것인지 곱씹어봤다. 그래, 빌어먹을 알람시계 때문이었다. 줄리안은 알람시계를 박살내고 다시는 알람시계 따위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문자가 왔다.

[잘 들어갔어요, 줄리안?]

네, 빌어먹게도 잘 들어갔답니다. 인생이 꼬여가는 기분이 들어요. 줄리안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서 맥주 한 잔을 마시니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다행이네요. 내일봐요, 내 사랑] 

…줄리안은 핸드폰을 집어던질까 심히 고민했다. 만난 지 하루만에, 아니 그것도 정상적으로 만난 것도 아닌데 ‘내 사랑’이라는 표현을 썼다. 알베르토,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신과 사귀자고 한 건지 1%도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양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었나?’ 로빈과 사귀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하지만 아까의 행동을 돌이켜봤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로빈과의 사이는 모르는 듯 했다. 줄리안은 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여보세요, 줄리안?」

“응, 로빈. 나야.”

「어떻게 됐어? 그 사람이 해코지하든?」

“아니 그렇진 않았는데, 화내지 말고 잘 들어.”

「응, 말해봐.」

“그러니까.”

「응.」

“그 알베르토라는 작자가 나랑 1년간 연인이 되어 달래.”

「…」

수화기 너머로는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뒤늦게 터져 나왔다. 줄리안은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뭐? 그 이 너랑? 와, 도둑놈의 XX,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돈으로 안 되면 몸으로 때우겠다고 했지.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

「오, 마이, 갓. 넌 애인을 두고도 그런 말을 했단 말야?」

“어쩔 수가 없잖아. 그 양복이 전 세계에 10벌밖에 없는 거랬어. 돈으로 어떻게 갚냐? 그냥 1년 동안 애인인척 해주면 되는 거잖아. 우리 딱 1년 동안만 참자. 몰래 연애하고.”

「하아아…. 내가 너 때문에 못산다, 진짜.」

“나도 내가 한심해.”

「1년이랬지?」

“응.”

「어쩔 수 없지 뭐. 하…. 그 변태새끼가 건드리면 전화해, 당장 달려갈게.」

“알았어.”

마피아 보스를 상대로 로빈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만은, 줄리안은 알겠다고 답했다. 마음만이라도 고마웠다. 자신을 아껴주는 애인이 있어서. 줄리안은 힘든 몸을 침대에 뉘였다. 긴장이 풀리자 잠이 몰려왔다.


“줄리안님, 타시죠.”

줄리안은 여느 날과 같이 출근준비를 하고 밖에 나선 참이었다. 평소처럼 커피를 사고 정문을 나선 순간 검은 차 한 대가 자신의 앞에 멈춰섰다. 창문이 열리고 운전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줄리안에게 다짜고짜 차에 타라고 했던 거였다. 보나마나 알베르토가 보냈을 것이 분명하지만 줄리안은 묻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반가워욥.”

“아침부터…네, 반갑네요.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알베르토도 손에 커피 한 잔을 쥐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줄리안이 앉고 안전벨트까지 맸을 때 비로소 출발했다. 차는 부드럽게 굴러갔다.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건너편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줄리안은 자신이 마시는 커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커피, 안 마셔요?”

“전 원래 뜨거운 거 잘 못 마셔서요.”

게다가 이 커피는 어제 당신의 양복에 쏟은 커피이기도 하구요, 마시기가 좀 껄끄럽네요. 줄리안은 뱉지 못한 말을 담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실 오늘은 커피를 마시지말까 고민했었는데, 결국 마시고 있었다.

“미연네 커피? 자주 마셔욥?”

“네, 매일 아침마다.”

“그 커피가 내 양복에 쏟은 커피?”

“…네, 그렇죠, 뭐…….”

줄리안은 또 다시 미각을 잃는 기분이었다. 왜 항상 맛있던 아주머니의 커피가 오늘따라 느껴지지가 않는 걸까. 줄리안은 창가 쪽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날씨는 참 좋았다. 날씨도 그리 춥지도 않고, 구름도 별로 없고, 참 좋은 날씨였다. 제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부담스러운 눈길을 주고 있는 알베르토만 제외하면 참 좋은 날인데.

“그런데 우리 호칭정리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호칭이요? 어떤 식으로요?”

“제가 줄리안보다 3살 더 많아욥.”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네요?”

마피아 보스래서 40살은 된 줄 알았건만 어쩐지 젊어 보인다했더니. 알베르토는 겨우 자신보다 3살 많았다. 3살 더 많은데 누구는 월급쟁이고 누구는 거대한 조직의 보스고…. 줄리안은 자신을 깎아내리기를 그만뒀다. 생산성이 없는 일이야!

“반말, 써도 되죠?”

“저는 존댓말 그냥 쓸래요.”

“…그럼 저도 존댓말 쓰겠습니다. 가끔가다 섞어서 쓰죠, 뭐.”

“넵.”

“……”

“……”

“그래서 호칭은 뭘로 할까요?”

“저는 알베르토 씨…?”

“그럼 저도 줄리안 씨라고 할게요.”

정말 빌어먹게 어색했다. 만난 지 겨우 이틀째, 호칭정리와 나이 정리를 끝냈다. 서먹하고 서먹한 느낌이 드는 알베르토 씨와 줄리안 씨라는 호칭. 줄리안은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을 겨우 억눌렀다.

“도착했네욥. 잘가욥.”

“네, 감사합니다.”

줄리안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는 다행히도 별 탈없이 떠나갔고 줄리안은 아침부터 힘든 표정을 애써 감추고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알베르토는 매일같이 줄리안의 아파트 앞 정문에서 기다렸고, 줄리안은 원튼 원치않든 그 호의에 응해야했다. 그리고 주말, 줄리안은 푹 쉬려고 계획한 일-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지만-들이 알베르토의 문자 하나로 인해서 와르르 무너져내림을 느꼈다.

[주말에 데이트하지 않을래요?^_^]

저 깜찍한 이모티콘은 뭐람, 줄리안은 순간적으로 나오는 욕을 억눌렀다. 시간은 아침 9시 42분, 푹 자려고 했는데. 카톡도 아니고 문자라서 모른 척 잘까 생각해봤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줄리안은 결국 짜증을 내면서 일어나야했다.

[무슨 데이트요?]

[음,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아뇨, 딱히 없어요.] 

폰만 붙잡고있는 건지 답장은 정말 빠르게 왔다. 줄리안은 서둘러 잠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듬었다. 느낌으로 봐서는 집 앞에서 대기 중인 것 같은데.

[그럼 시내에서 데이트라도 할까요?]

[네. 그러죠. 몇 시에 만날까요?]

[지금 당장 만나고 싶은데 너무 이르죠? 10시 30분 어때요?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차타고 데이트하기는 싫은데. 걷는 게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죠. 시내까지만 타고가요.]

대기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줄리안은 놀려줄 작정으로 아예 12시로 시간 약속을 옮길까도 생각해봤지만 생각해보니 너무 안쓰러운 것 같아서 그만뒀다. 대충 옷장에서 밝은 느낌의 셔츠와 니트를 입고, 머리를 다듬고 나자 대충 10시였다. 줄리안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는 삭막하게도 맥주 2캔, 김치 조금, 먹다 남은 크레페 조금이 남아있었다. 줄리안은 크레페를 살짝 데워서 아침을 때우고, 완전히 준비가 끝났을 때 10시 23분이었다. 줄리안은 시계를 보면서 한숨을 살짝 내쉬고, 밖을 나섰다.

예상대로 알베르토는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모르는 척 뛰어서 가야하나?

“일찍 오셨네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욥.”

“어? 오늘은 알베르토 씨가 운전하는 거에요?”

“데이트니까욥. 아무도 없는 게 좋죱.”

줄리안은 알베르토의 옆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부드럽게 엑셀을 밟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알베르토에 줄리안은 살짝 당황했지만. 향수냄새가 옅었다. 진하지도 않고 편안한 향수. 아무래도 오늘 데이트 한답시고 많이 꾸민 듯 했다.

“아, 갑자기 생각났어요.”

“뭔데욥?”

“오락실 가고싶어요! 오랜만에.”

“오락실? 그게 뭐에요?”

“게임방 몰라요? 아, 모르실수도.”

“게임하는 곳?”

“대충 비슷한데, 좀 옛날 게임들요.”

갑자기 오락실에 가고 싶어진건 아니고 며칠 전부터 가고 싶어져서였다. 친구 놈이 SNS에 자기 게임하는 걸 올렸는데 옛 추억이 생각나서 가고 싶었다. 줄리안은 알베르토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을 거라고 예상하고 말하자면 특별한 이벤트 겸으로 가자고 한 것이었다.

“어딘지 설명해줄래욥?”

“저기, 저기로 가서 여기 골목으로 빠지면 되요.”

도착하자마자 줄리안은 동전을 교환하고 어린애마냥 뛰어다녔다. 알베르토는 처음 오는 오락실에 멀뚱멀뚱히 서있었고, 줄리안은 알베르토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격투 게임 앞에 선 줄리안은 동전을 넣고 알베르토를 이끌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알베르토는 얼떨결에 앉기는 앉았지만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어둡고, 공기도 좋지 않고, 시끄럽고, 많은 사람들이-어린 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오락실이었던 것인가. 그 사이에 수트를 빼입고 한껏 치장한 알베르토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줄리안은 개의치 않고 START버튼을 눌렀고, 대충 조작법을 알베르토에게 설명했다. 조작법이고 뭐고 막 누르는 알베르토는 당연히 줄리안에게 질 수 밖에 없었고 줄리안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 알베르토 씨 진짜 게임 못하네요!”

“...처음이었어욥.”

“그래도 처음치고 잘했어요. 저를 상대로 2번이나 쳤잖아요.”

“…한판 더 해욥.”

“한판 더 하는데 이거 말고 다른 거.”

줄리안은 알베르토를 끌고 DJ 게임기 앞에 섰다.

“제가 이 게임 고수에요. 여기 랭크에 내 이름 있을걸?”

진짜였다. 알베르토는 랭킹에 버젓이 쓰여 있는 ‘JQ’를 보고 짝짝, 박수를 쳤다. 줄리안은 박수까지 칠 필요 없다며 말렸지만.

“요새는 별로 안 해서 실력 많이 죽었을 거에요.”

“보고싶어욥, 하는 모습.”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줄리안은 스트레칭을 하더니 심호흡을 하며 동전을 넣었다. 땡그랑-맑은 소리가 울려퍼지고 줄리안은 START 버튼을 힘껏 눌렀다. 알베르토도 2p로 참가했다.

“음악은 뭘로 할까나, 알베르토 씨는 처음이니까 중간난이도로!”

이 게임 역시 조작법을 대충 설명해준 줄리안은 화면에서 노트가 떨어지마자 무섭도록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알베르토는 모든 게 처음이라 박자는 물론이고, 간신히 노트를 맞추는 정도였고 줄리안은 온 몸이 게임과 하나가 된 듯 콤보를 놓치지 않았다. 결국 줄리안은 월등한 실력으로 게임을 마쳤고, 알베르토는 게임을 하다 중간에 포기하고 줄리안의 모습을 바라봤다. 마치 진짜 DJ라도 된 듯 날아다녔다.

“와, 줄리안 진짜 잘하네욥.”

“하하. 알베르토는 재미없었죠? 자동차 게임도 한판해요.”

그렇게 게임을 즐길 무렵, 알베르토의 전화벨이 울렸다. 한창 게임에 빠져서 즐기고 있던 알베르토는 수신인을 보고 얼굴을 굳혔고, 그에 줄리안 역시 게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토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줄리안에게 게임하고 있으라고 말한 뒤 나갔다. 잠깐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알베르토는 웃으며 돌아왔고, 무슨 일이냐는 줄리안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뭐, 심각한 일은 아니길 바래요. 이번엔 총 게임 어때요?”

좀비 죽이는 게임인데, 서로의 역할이 중요한 게임이에요. 줄리안은 직접 시범을 보였고 알베르토는 총 쏘는 게임이라 그런지 금방 잘 따라했다. 줄리안은 동전을 넣었고, 게임이 시작됬다. 알베르토는 처음에는 살짝 당황하는 듯 했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좀비를 죽여나갔고, 후반에는 결국 알베르토 덕분에 보스까지 깰 수 있었다.

“와…진짜 감탄했어요. 진짜 잘해요.”

“이정도야 뭘, 항상 있…, 아니 쉬운 일이죠.”

“아, 그래요?”

알베르토는 말실수라도 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고, 줄리안은 대충 넘어가주었다. 어느새 오락실의 모든 게임을 다 돌 때쯤이었다.

“그런데 우리 뒤에서 졸졸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뭘까요?”

“아. 경호원이욥.”

“아까 말할 때는 ‘데이트할 때는 둘만 있어야 된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최소한의 안전은 지켜야죱.”

“오락실에서 안전은 무슨, 게임기가 폭발이라도 하려구?”

줄리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신경 쓰지않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래봤자 겨우 두 명이었기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쳐다봤더니 여학생들이 꺅꺅거리며 스티커사진을 찍고 있었다. 줄리안은 알베르토를 이끌었다. 우리도 저거 찍어요!

“이, 이게 뭔데욥?”

“스티커사진! 안 찍어봤어요? 꽤 재밌어요.”

뒤에 연인끼리는 다 하는 거에요, 라는 말을 덧붙이자 알베르토는 아무말없이 줄리안을 따랐다. 결국 둘은 스티커사진까지 찍게됬다.

《정면을 바라보세요.》

“뭐해요, 포즈 안취하고!”

《하나, 둘, 셋, 찰칵!》

이상한 포즈를 취하다 말은 알베르토 때문에 첫 컷은 망쳐버렸다. 줄리안은 다급하게 포즈를 취했다.

《측면을 바라보세요.》

“아잇, 어딜 보는거에요! 여기요, 여기!”

《하나, 둘, 셋, 찰칵!》

두 번째 컷은 알베르토가 이상한 곳을 쳐다보고 있어서 망쳐버렸다. 줄리안은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포즈를 취해야했다.

“이번엔 제대로!”

《위쪽을 바라보세요.》

“여기? 알았어욥!”

《하나, 둘, 셋, 찰칵!》 

처음으로 제대로 찍힌 컷이었지만, 알베르토의 표정이 부자연스러웠다. 줄리안은 절망하긴 이르다며 알베르토에게 위로를 건넸고, 심기일전해서,

《정면을 바라보세요.》

《하나, 둘, 셋, 찰칵!》

《하나, 둘, 셋, 찰칵!》

《하나, 둘, 셋, 찰칵!》

자유사진 3컷은 그나마 봐줄만했다. 물론 알베르토의 표정은 여전히 썩어있고 포즈역시 부자연스러웠지만, 베스트 컷이었다.

《배경을 선택해주세요.》

《사진을 꾸며주세요.》

뒤쪽으로 돌아나간 줄리안은 펜을 들고 사진을 꾸미기 시작했고, 잘 모르는 알베르토는 멀뚱히 서있었다. 그에 줄리안은 답답하다는 듯 꾸미라고 독촉했고, 그제서야 펜을 든 알베르토는 뭐가 뭔지 몰라서 대충 그려 넣기 시작했다.

‘알베르토와 줄리안, 첫 데이트’

그리고, 화려하게 꾸며진 줄리안의 사진과는 다르게 알베르토는 글씨가 전부였다.

‘나. 너.’

‘사랑해요.’

‘이거 너무 못나왔어.’

글자가 전부였다, 정말로. 줄리안은 애써 알베르토에게 칭찬을 했다.

“와…잘했어요…….”

“그래욥?”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말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이 인화되어서 나오고, 줄리안은 알맞게 사진을 잘라서 알베르토에게 내밀었다.

“가져요! 어디 붙여도 되고.”

“붙일 수 있어욥?”

“‘스티커’사진이니까요. 뒤에 떼서 붙일 수 있어요.”

어디에 붙이지……, 잠깐 고민하던 알베르토는 지갑을 꺼내더니 정성스럽게 사진을 붙였다. 또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휴대폰 케이스에 한 장을 붙였다. 줄리안은 그냥 지갑에 쑤셔 넣었지만.

“첫 데이트, 나름 재밌었어요.”

“저도 새로운 경험이에요. 스티커사진이라는 것도 처음 찍어보고.”

집에 돌아간 줄리안은 사진을 정리하다 피식 웃었다. 정말 가관이었다. 알베르토의 표정하며, 포즈하며……. 안쓰러운 수준이었다. 다음에 찍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야지. 줄리안은 사진을 보며 한참이나 웃다가, 카톡이 온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제대로 앉았다.

Robin:Yo, 오늘 하루 종일 뭐했어?

Julian:그 알베르토 씨랑 데이트함^_^v

Robin:헐, 이 사랑스런 애인님을 놔두고 바람 핀거여?ㅠㅅㅠ

Julian:네, 그렇습니다^^

Robin:나쁘다, 너. 오늘 밤에 놀러오라고 할라 그랬는데.

Julian:무슨 파티라도 하는겨?

Robin:(끄덕끄덕)파비앙도 온댔어.

Julian:조금 피곤한데... 알써, 간다.

Robin:오키오키, 그럼 기다린다. 마지막엔 알지?

Julain:응큼한 자식.

Robin:빨리 오기나 해.


*


지친 몸을 이끌고도 파티에 가면 기운이 넘쳤다. 줄리안은 로빈의 집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주말을 즐겼다. 파비앙은 먼저 집에 갔고, 다른 프랑스 친구들 역시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로빈은 기다렸다는 듯 줄리안을 침대로 불렀고, 둘은 밤새도록 즐겼다.


*

“하아암.”

“피곤한 얼굴이네욥. 어제 뭐 했어요?”

누가 봐도 피곤한 얼굴로 알베르토의 차에 탄 줄리안은 거의 반쯤 자다시피, 하품을 쩍쩍 해대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굳은 표정으로 줄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그냥 뭐…….”

“어제 누구랑 놀았어욥?”

“아뇨, 집에 있었는데…….”

“아, 그래요?”

알베르토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줄리안은 피곤한 듯 눈을 주물렀고 그런 알베르토의 표정변화를 보지 못했다. 오늘따라 알베르토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아 보이는데, 착각인가?

“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봐요.”

알베르토는 사진을 들이밀었다. 건네받은 줄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진은 자신이 로빈의 집에서 파티를 벌일 때 찍힌, 파비앙과 같이 찍힌 사진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로빈이 창문 너머로 같이 있는 사진이었다. 두 번째 사진은 적나라하게 찍히지는 않았어도 충분히 의심이 갈만한 사진이었다. 사진을 잡은 줄리안의 손이 떨려왔다.

“오늘 회사에 연락해뒀어요. 어디 갈 생각 하지 마요.”

줄리안은 본능적으로 차문을 쳐다봤다.

“뛰어내리게? 안될걸요? 이봐, 속도 높여.”

알베르토의 명령을 받은 운전기사는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고 출근길로 막힌 도로가 아닌 외진 곳으로 가고 있었다. 줄리안은 해명하려 입을 열었지만 알베르토의 굳은 표정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절 감시한 거에요?”

“이 남자가 누군지 말해요.”

“절 감시했냐구요.”

“얘기 안해도 전화 한 번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줄리안 입으로 듣고 싶으니까 참는 거에요.”

그 남자가 누군지, 어떤 관계인지 밝혀요. 알베르토는 낮게 그러면서도 명확하게 말했다. 줄리안은 생각하기에 바빴다.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만약에 로빈이 연인관계라는 걸 들키면 로빈은 무사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건드리지 않을까?’

“잔머리 굴릴 생각 마요. 솔직하게 말해요.”

알베르토의 곧은 시선은 줄리안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줄리안은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시선을 살짝 빗기며 말했다.

“친한 친구에요. 그 친구가 파티를 하재서 간 거였고.”

“친한 친구끼리 뒹굴기도 하나 보죠?”

“뒹군거 아니에요. 술 마시고 취해서 서로 멋모르고 그런 거죠.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한 짓 하지도 않았어요.”

줄리안은 입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불안에 떠는 마음과는 다르게 거짓말은 술술 튀어나왔다. 입 하나는 복 받은 것이 분명했다. 알베르토는 여전히 줄리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줄리안. 믿어도 되는 거예요?”

“연인이라면 믿어야죠.”

“마지막으로 한번더 물을게요. 진짜 믿어도 되는 거죠?”

“……네.”

“…줄리안이 자초한 일이에요.”

알베르토는 차가운 표정으로 기사에게 멈추라고 말했다. 알베르토가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부하 두 명이 차에 올라탔고 알베르토는 다른 차에 올라탔다. 알베르토의 부하는 줄리안 앞에 앉았고 운전기사는 다시 운전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어딜 데려가…”

줄리안은 말을 맺기도 전에 배로 몰려오는 아픔에 몸을 수그려야했다.

“크윽,”

“도착할 때까지 말할 수 없습니다.”

줄리안은 배를 부여잡고 앉았다. 부하 두 명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앉아있었고 줄리안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SOS, 친구든 로빈이든 누군가에게 알려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꺼내듦과 동시에 부하는 줄리안의 휴대폰을 빼앗아 조수석에 앉아있는 누군가에게 건넸고 줄리안의 유일한 연락수단이 사라져버렸다.

“연락, 통화는 안 됩니다.”

“제꺼잖아요. 돌려줘요! 악,”

“계속 말하시면, 당신을 기절시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로봇과 같은 딱딱한 말투로 줄리안에게 말했다. 줄리안은 몇 번의 저항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더 이상의 에너지 소모는 하고싶지 않아졌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나마 창문이 살짝 열려있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보였다. 창밖을 보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는 창문을 아예 닫아버렸고 이제 검게 썬팅된 창문은 비치는 자신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줄리안은 불안감에 엄지를 꽉 쥐었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차에 탄 알베르토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옆에 앉은 여자는 시비르로 알베르토의 최측근이자 비서였다. NSM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로,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지.”

“이런 방식으로요?”

“난 확실한 게 좋아.”

“저도 그렇습니다만,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

알베르토는 폰을 매만졌다. 줄리안의 휴대폰을 입수했다는 문자가 와있었다. 알베르토는 ‘조사해. 추적기도 달고.’라는 답장을 보냈다. 시비르는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일반인이에요. 이런 일은 처음 겪을 테구요. 당신을 무서워하게 될 수도 있어요.”

“조심할수록 좋은 거잖아. 살짝 겁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그분이 바라신 건 이런 게 아닐 텐데요.”

“시비르, 말을 아껴.”

알베르토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시비르의 말을 막았다. 시비르는 입을 떼려다가 도로 다물었다. 얘기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애초에 애인으로 만든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건 나도 바랐던 결과는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처음부터 거두지 그랬어요, 이제 와서 보호한답시고 가둬버리고……. 말하자면 위험에 빠뜨린 거잖아요, 애인으로 둠으로써.”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시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저조차도 이제는 잘 모르겠네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알베르토는 그 말을 끝으로 말을 아꼈다.

띠리리-

시비르의 이어폰이 울리고, 시비르는 한쪽 귀에 손을 대었다. 말을 전해 받은 시비르는 침착한 톤으로 말했다.

“방금 제이씨(JC)의 조직원 중 한명이 줄리안의 회사에 들렀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벌써 퍼진 거야? 조심한다고 했는데.”

알베르토는 입술을 짓이겼다. 경쟁 상대이자 위험한 적인 JC에서 줄리안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지만, 생각보다 JC는 재빨랐다. 지금 줄리안을 데려가는 곳도 사실은 며칠 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알베르토는 JC와 만남을 위해 시비르와 함께 유성빌딩으로 가는 중이었다.

“제이씨의 스파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스파이라…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긴 하죠.”

시비르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염탐하는 모습이라. 알베르토는 일부러 남겨두었던 제이씨의 조직원이 정보를 넘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제거해야할 타임이군.’ 알베르토는 블레어에게 문자를 남겼다.

‘나머지 제거해’


*


“일어나시죠.”

남자는 줄리안을 흔들어 깨웠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몸이 찌뿌둥했다. 줄리안은 기지개를 켜려다 재촉하는 남자에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도착한 곳은 큰 주택이었다. 꽤 좋아 보이는 주택이었고 주변에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어?”

줄리안은 주택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남자는 감탄하고 있는 줄리안을 이끌고 주택으로 향했다.

“이럴 시간 없습니다.”

“으아, 잠깐만 신발 끈이 풀려…”

“들어가서 묶으십시오.”

줄리안이 신발 끈을 묶으려고 자꾸 몸을 숙이자 남자는 짜증났는지 줄리안을 번쩍 들어 올리고 가기 시작했다.

“우억, 잠깐만요, 나 고소공포증 있어!”

줄리안은 갑자기 몸이 들어올려짐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도 주택에 들어선 남자는 줄리안을 소파에 내려놓았고 줄리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줄리안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알베르토가 왜 나를 여기에 데려왔을까?’

내부 장식은 화려했다. 거실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있고, 주방 역시 좋아보였다. 계단이 있는 걸로 봐서 2층이 있는 것 같았다. 줄리안은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집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줄리안이 주방을 돌고 있을 무렵 정갈하게 옷을 빼입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와 말했다. 사내는 자신이 제임스라고 소개하며 줄리안을 보좌하기 위해 왔다고 설명했다. 줄리안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가 필요한건 자유라구요.

“밖에 나가도 되요?”

“안됩니다.”

“안 되는 이유가 뭐에요?”

“위험합니다.”

“제가 위험하다구요? 왜요?”

“말할 수 없지만, 위험합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셔야할 겁니다. 회사는 휴가를 냈으니 걱정 마세요. 아, 그리고 여기 휴대폰.”

제임스는 품에서 줄리안의 휴대폰을 꺼냈다. 줄리안은 휴대폰을 받아들고 대충 확인했다. 달라진 점은 없었다.

“경찰이나 기타 등등, 도움을 요청하면 줄리안 씨만 힘들어질 겁니다. 그들은 줄리안 씨를 보호할 수 없어요. 저희가 더 안전합니다.”

“무슨 싸움이라도 난거에요?”

제임스는 줄리안의 말에 답하지 않고 물러났다. 줄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갇힌 건가?’ 


*


“미안해.”

블레어는 총구를 겨눴다. 남자는 죽음을 직감한 듯 눈을 감았다. 저항의 흔적, 이리저리 널부러진 가구들 사이에서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친해졌는데, 아쉽다.”

타앙-

남자는 쓰러졌다.


*


“애인은 잘 계신가?”

처음부터 정곡을 찔러오는 말에 알베르토는 차를 들던 손을 멈칫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도 알거라 생각했는데, 시치미 떼긴가?”

“…….”

알베르토는 차를 들이켰다. 씁쓸한 맛이었다.

“자네가 우리 부하를 죽였더군.”

“스파이를 제거한 게 문제가 됩니까? 당신도 우리 조직원을 제거했으니 피차일반이죠.”

“이제 더 이상 눈치싸움은 그만두지.”

JC의 회장인 전유성은 지독히 뱀 같은 인간이었다. 그 역시 차를 들이키며 여유를 부리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베르토는 알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는 누가 먼저 꼬리를 내리느냐, 그것이 중요했다.

“우리 조직엔 아직 자네 부하가 남아있어.”

“…”

“그리고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우리 조직원은 완전히 제거 당했고.”

아끼던 아이들이었는데 말이야…, 전유성은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자네도 부하를 아낄 거라 생각하네. 나는 자비를 베풀지. 그들을 돌려보내주겠어.”

“죽이지 않겠다?”

“난 자네처럼 냉철하지 못해. 여기 있으면서 정이 들었거든.”

알베르토는 전유성이 무슨 속셈인지 파악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혹시 우리 조직원들을 매수했나? 아니다, 충성심이 강한 아이들로 보내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는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부하들은 지하에 있네. 데려가도록 하게.”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베르토는 시비르에게 지하에 있는 조직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한뒤 차에 올라탔다. 시비르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알베르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줄리안이 있는 곳.”

“알겠습니다.”


*


줄리안은 거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제임스는 현관문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 들어갔고 언제든지 줄리안이 부르면 오겠다고 했다. 줄리안은 앞으로 얼마나 회사를 나가지 않아도 되는지 생각했다. ‘위험하다고 했으니 일주일은 되려나?’ 애매했다. 로빈이 걱정할 텐데, 회사 다니는 것도 로빈 덕에 재밌었고. 줄리안은 시선은 TV에 고정했지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알베르토가 들어왔다.

“줄리안?”

‘로빈이 많이 걱정할 텐데.’

“TV보네욥, 줄리안.”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할까?’

“저기, 줄리안?”

‘아, 집에서 옷 가져와야 되는 거 아니야? 짐 챙기라고 안했으니까 며칠만 머무는…’

“줄리안!”

“네?!”

“저 왔어욥.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욥?”

“아, TV가 너무 재밌어서….”

지금 광고 나오는 데…, 알베르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요?”

줄리안은 의아한 듯 알베르토에게 물어왔다. 알베르토는 잠깐 생각하는듯 하더니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말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 물론 화 났었죱. 그래서 말인데, 줄리안. 나한테 약속 하나 해욥.”

“뭔데요?”

“로빈이랑 많이 친하죱? 용서해줄테니 빨리 정리해줬으면 해욥.”

“…”

“약속해욥. 안 그러면 로빈이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못하니까욥.”

“…정리할게요.”

알베르토가 오자마자 꺼낸 이야기는 로빈에 관한 것이었다. 그냥 찔러보는 것이라기에는 알베르토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확신에 차서 줄리안에게 말했고 줄리안은 받아들여야했다. 로빈과의 관계가 들켰는데도 로빈이 무사하다는 것은 알베르토가 많이 참았다는 것이었다. 줄리안은 소파에 앉은 알베르토를 바라보았다. 초조한 듯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제임스가 말한 그 ‘위험하다’라는 게 진짜인 것 같았다.

“알베르토, 물어볼게 있어요.”

“뭔데욥?”

“무슨 일 있는 거죠? 불안해보여요. 나도 솔직하게 말했으니 알베르토도 솔직하게 해줘요.”

“…”

알베르토는 살짝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줄리안은 끈기 있게 알베르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알베르토는 힘겹게 입을 뗐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에욥.”

알베르토는 제임스에게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제임스는 즉시 따뜻한 차를 내려놓았고, 줄리안은 필요한 것이 있냐는 제임스의 질문에 괜찮다고 답했다. 알베르토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경쟁조직이 있어욥. JC라는 조직이에요. 겉보기에는 건물 짓는 회사나 그냥 대기업으로 보이죠, 우리 회사처럼. 하지만 줄리안도 알다시피 나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회사인 NSM Company, 그리고 JC Construction 이에요.”

줄리안은 알베르토가 하는 말을 대충 이해하고 있었다. 워낙 그쪽에 관심이 없는지라 NSM 회사도 처음 알았고 JC 건설이 검은 조직이라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그저 JC 빌딩을 보면서 ‘와, 크고 좋은 건물이다’라고만 생각했었고 전국에 있는 NSM 카페나 다른 NSM 관련 자회사를 보면서 대기업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알베르토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이었다.

“어두운 일도 하는 만큼 우리는 서로 스파이가 있어요. ‘보스가 애인이 생겼다’라는 말이 JC 쪽으로 들어간 것 같아욥. 시기도 시기인지라, 줄리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서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이건 안전가옥이고 트랩도 있어욥. 말하자면 여긴 내가 머무는 요새인거에욥,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아……. 알베르토에게 질문이 있는데요.”

“말해욥.”

“왜 이런 시기에 저를 애인으로 삼은 거예요?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하아아-, 알베르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하지? 밝혀야하는 건가? 알베트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은 일렀다. 줄리안에게 알려주기에는, 너무 이른 타이밍이었다. JC의 움직임도 재빨랐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욥. 충동적이었어욥, 그건.”

“그럼 나랑 만나자고 했던 게 충동적인 거였어요? 그래서 내 인생은 지금 X 된 거고?”

순간적으로 나오는 욕에 줄리안은 입을 틀어막았다. 아차, 싶어서 알베르토의 안색을 살폈지만 알베르토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난 줄리안을 보호하는 거예요. 망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일이 끝나면, 꼭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게 해줄게요.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만 여기 있어줘요. 날 믿어줬으면 좋겠어욥.”

말을 마친 알베르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나서는 알베르토의 뒤에서 줄리안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듣지는 못했다. 알베르토는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 줄리안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베르토는 창을 올렸다. 시야와 소리가 차단되자 조용해졌다.



“줄리안은 받아들이던가요?”

“아니, 전혀.”

“언젠가 설명해야할 거예요.”

“그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 아직은 너무 일러.”

“곧 밝혀지겠죠, 보스.”

“조직원들은 무사해?”

“네, 일리야가 모두 구출했어요.”

시비르는 알베르토가 떠난 뒤 곧장 일리야에게 연락해서 조직원들을 구출해 내고, 즉시 알베르토에게 간 것이었다. 일리야는 구출된 조직원들에게 심문을 하고 있다고 시비르가 말했다.

“보스가 말한 것처럼, 이중스파이거나 완전히 돌아섰을 수도 있어서 한동안 작전에 넣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사실, 휴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심문이 끝나면 모두 휴가 처리해. 멀리 보내버려.”

“일리야에게 바로 알리죠.”

시비르는 인이어(In-Ear)로 일리야에게 연락을 하고 말을 전달했다. 알베트로는 머리를 짚었다.

“어디 아프세요?”

“그냥…생각하는 중이야. 머리가 살짝 아파서.”

“그럴 만도 하죠. 보스, 돌아가면 좀 쉬어요. 요새 도통 쉬질 않으시니.”

“알겠어, 잔소리꾼.”

시비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베르토는 정말 쉬고 싶은 듯 시트에 몸을 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베르토는 잠에 빠진 듯 새근새근 숨소리를 냈다.

“불쌍한 인생이라니까요, 보스와 그 청년, 둘 다.”


*



기욤은 걱정스런 눈길로 줄리안의 자리를 쳐다봤다. 줄리안이 오늘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한우를 사주겠다는 약속도 해놓고서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지. 물론 한우보다 걱정되는 것은 줄리안이었다. 기욤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팀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지금 바빠, 나중에.”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렇지만 줄리안과 관련해서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기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들어와.”

기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장위안은 테이블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안경을 끼고서 일하는 중이었다. 장위안은 기욤이 들어와 의자에 앉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서 손짓으로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그제 서야 방황하던 기욤은 자리에 앉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큼큼, 오늘 줄리안이 회사를 오지 않은 이유를 혹시 아시는지…궁금해서요.”

“그게 왜 궁금한지 물어봐도 되겠어?”

“회사에서 제 옆자리이기도 하고…. 친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도 친애하는 동생입니다.”

장위안은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깍지를 끼고서 잠시 고민하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그냥…긴 휴가를 떠났다고 생각해. 더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지만 줄리안은 말도 없이 휴가를 떠날 애가 아닙니다.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줄리안이 얼마나 성격 좋고 착한 애인지. 어느 날 훌쩍 말도 없이 떠날 아이가 아닌 것, 아시잖아요. 게다가 연락도 안 되는 데. 기욤은 장위안에게 끈질기게 물었지만 장위안의 고집 역시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쫓겨나듯 팀장실을 나온 기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기욤을 돌려보낸 장위안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줄리안이 또 지각을 하나 싶어서 이번엔 단단히 혼내줘야지, 벼르던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는 ‘줄리안이 회사를 당분간 나오지 못할 것이고, 이 이상 알려고 하면 불이익이 있을 것이다’라는 일종의 협박과도 같은 짤막한 말을 남기고 끊어졌다. 무엇이 뒤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세력임이 분명했고 장위안은 그 말을 지키는 중이었다. 기욤에게 말해주지 못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자주 웃던 기욤은 무뚝뚝하게 업무를 하고 있었다. 줄리안이 옆에 있을 때는 자주 떠들어서 혼나곤 했는데.


한편 기욤은 자리로 돌아와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줄리안의 빈자리가 꽤나 큰 것 같았다. 항상 점심도 같이 먹고, 수다도 떨고, 탕비실에서 커피도 같이 마시곤 했는데. 회사에서 제일 친한 친구이자 동료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셈이었다. 혹시 어디 다친 것은 아닐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으러 갔나, 여러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래도 나오는 결론은 줄리안은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무정한 아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욤은 한숨을 내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시 일에 집중해야지. 모니터 옆에 붙은 포스트잇이 신경 쓰여서 결국 떼어 휴지통에 버렸다. 그까짓 한우가 뭐라고. 기욤은 여전히 숫자가 지워지지 않은 카톡을 확인하고 이내 폰을 뒤집었다.



*



줄리안은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줄리안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소파에 앉았다. 알베르토가 말한 그 안전이 보장되는 날이 언제인지, 자신과 진지한 관계를 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충동적이라고 답한 알베르토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알베르토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편으로 느꼈던 것은 알베르토가 무언가를 숨기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줄리안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다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자신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카톡-

“아, 그러고 보니 돌려받았지.”

카톡을 확인하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로빈과 기욤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제일 친한 친구라고 연락이 두절되자 걱정됬나보다. 줄리안은 먼저 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거는 도중에 보낸 카톡을 확인하자 ‘어디야, 왜 오늘 회사에 안 나왔어?’, ‘슬슬 걱정된다. 혹시 알베르토 그 XX한테 붙잡혀 있는 거 아니지?’, ‘오늘 점심에 기욤 형이랑 밥 먹었다. 형도 너 걱정하더라.’, ‘젠장. 사지 멀쩡하면 답장이라도 좀 해줘, 걱정되니까. 짧게 ㅇ하나라도 보내면 만족할게, 응?’. 줄리안은 로빈의 카톡을 읽으면서 왠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짜식이, 그래도 애인이랍시고 걱정도 해주고. 줄리안은 눈물을 조금 훔치고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달칵.

예상대로 로빈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너 지금 어디야! 너 이 XX,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지금이 몇 시냐고, 왜 이제 와서 전화 받는데! 응?! 아오! 너 돌아오면 죽는다, 어?」

으악, 줄리안은 받자마자 고성을 지르는 로빈 때문에 전화를 귀에서 떼야했다. 로빈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고 줄리안은 로빈이 진정하기를 잠깐 기다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빈, 미안해. 다 설명해줄게.”

「너 단순히 늦잠잔거라고 하면 한 대 맞을 줄 알아.」

“하하. 그래, 네 말대로 늦잠은 아니고.”

「응. 말해봐.」

수화기 너머로도 초조함이 느껴졌다. 줄리안은 어떻게 말해야하나 싶어 잠시 고민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로빈과의 관계를 정리해야하다니. 줄리안은 눈을 꾹 눌렀다.

“저기, 로빈. 나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데, 꼭 해야 되는 말이 있어.”

「아니, 하지마. 듣고 싶지 않아.」

“미안해, 로빈. 우리…끝내야 할 것 같아.”

「…….」

“알베르토가 알지만 참은 것 같아. 더 이상 우리가 계속하면, 로빈 네가 위험해져. 그리고….”

줄리안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나 당분간 여기 있어야 돼. 어디인지는 묻지마, 나도 모르니까. 로빈,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사랑해, 로빈. 그리고 정말 미안해.”

「…몸 다치지 말고 건강해. 그래도 우린 친구니까 무슨 일생기면 꼭 연락하고. 이만 끊을게.」

뚝-

줄리안은 눈물을 삼켰다. 수화기너머로도 로빈이 흐느끼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참아내야 했다. 고통을 견디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로빈과 함께할 수 있었다. 줄리안은 한동안 끊긴 전화를 내려놓지 못하고 부여잡고 울었다.


“….”

그리고 줄리안의 전화 통화를 엿들었던 알베르토 역시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것 참. 내가 악마가 된 것 같군.”

“이로써 로빈과의 관계는 정리된 것 같군요.”

줄리안의 폰에 도청장치를 달아놓은 것이 좋은 판단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알베르토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강제로 떼어놓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줄리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 기욤 형.”

줄리안은 다시 울리는 카톡 알람에 울음을 그치고 폰을 내려다봤다. 기욤은 이제 곧 퇴근시간이라서 다시 카톡을 보내는 것이라고 하고 있었다. 줄리안은 전화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정상적으로 말하는 게 힘들었다. 기욤은 숫자가 사라지자마자 톡을 보내왔다.

Guillaume:오늘 회사 지각이네? 얼른 와. 팀장님이 벼르고 계셔.

Guillaume:너 왜 전화도 안 받고….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아프면 팀장님한테 얘기할게.

Guillaume:뭐야, 팀장님이 방금 네가 휴가 갔다고 하던데.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파티하고 놀던 네가 말도 없이 여행을 떠날 리는 없고. 무슨 일 있는 거야?

Guillaume:혹시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톡 보면 연락 좀 해줄래? 슬슬 걱정돼.

Guillaume:내가 한국에서 가장 친한 형이기도 하고…. 걱정된다. 이제 곧 퇴근시간이야. 살아있으면 제발, 연락이라도 해주겠어?

Guillaume:어? 줄리안?

Guillaume:줄리안! 신이시여, 다행이다! 괜찮은 거야?

Julian:네, 형. 저 괜찮아요.

Guillaume: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늘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Julian: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 저 괜찮으니까 걱정마세요ㅋㅋ

Guillaume:너 지금 어딘데?

Julian:그냥 멀리 여행 왔어요. 생각 좀 정리할 겸. 갑자기 떠나서 놀라셨죠? 저 지금 해외여행중~ 와이파이 터지는 곳 겨우 발견해서 연락하는 거예요. 여기 되게 예쁜 곳이에요. 나중에 같이 가요!ㅎ

Guillaume:...믿어도 되는 거지?

Julian:네, 형. 제가 거짓말 할 사람이에요? :D 의심하면 섭섭하죠.

Guillaume:하, 알았어. 여행 잘 갔다 오고. 갑작스럽게 떠나서 당황스럽긴 한데, 무사해서 다행이다.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 형이 달려갈게 :)

Julian:ㅋㅋㅋ네. 고마워요, 형. 퇴근길 조심하세요!

줄리안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착하고 순진한 형한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면 앞뒤 잴 것 없이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해외여행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 줄리안은 혹시 몰라서 로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로빈은 흔쾌히 거짓말에 동참해주겠다고 답했다. 줄리안은 안심하고 카톡을 껐다.

‘엄마 보고 싶다.’

줄리안은 갤러리를 눌렀다. ‘famille’ 폴더를 누르자 보고 싶은 가족의 얼굴들이 있었다. 엄마랑 같이 와인마시는 사진, 아빠랑 바닷가 놀러갔을 때 사진, 형이랑 누나랑 캠핑 갔던 사진, 가족이랑 다 같이 파티 했던 사진……. 온갖 추억들이 녹여져있는 사진들을 보자 다시 눈물이 났다. 줄리안은 또다시 훌쩍이다가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빨리, 정리됐으면 좋겠다.’

피곤한 듯 눈꺼풀이 무거워져 왔다. 줄리안은 폰을 손에 꼭 쥐고 잠이 들었다. 꿈에서는 가족이 나왔다. 다같이 여행을 떠나는 꿈…….



*



“일어나십시오.”

으윽, 줄리안은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제임스가 커튼을 치고 있었다. 밤사이에 울다 잠들어서 그런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게다가 너무 일찍 잠들어서 저녁을 먹지 못했다.

꼬르륵-

“식사가 준비되어있습니다. 식탁으로 가시죠.”

울고 나면 배가 더 고픈 법이었고, 저녁도 먹지 못한데다가 향긋한 밥 향기는 줄리안의 위장을 더욱더 자극했다. 줄리안은 대충 얼굴을 씻고 나서 주방으로 달려갔다. 아침식사는 예상대로 화려했다. 게다가 요리에는 벨기에 전통음식들도 간간히 보였다. 줄리안은 자리에 앉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웨이터가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곧 있으면 프렌치프라이가 후식으로 나올 것입니다.”

“예? 프렌치프라이?”

“네.”

“하하, 저기요. 프렌치프라이라뇨. 그거 벨기에 음식이니까 벨지언 프라이라고 해주세요. 아니면 감자튀김! 이런 좋은 말이 있는데 왜 굳이 ‘프렌치프라이’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아침부터 화나게.”

줄리안은 식사를 하려다가 화가 나서 프렌치프라이의 어원부터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음식은 벨기에에서 처음으로 만든 건데 군인이 프랑스음식으로 오해해서 그렇게 굳어진 거라구요! 그러니까 이건 벨지언 프라이가 더 정확한 말이에요!

당연하게도, 서빙을 맡은 웨이터는 당황해서 줄리안의 말에 네, 네, 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프렌치프라이라고 하니까 그런 거지, 줄리안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며 해명했지만 줄리안은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앞으로는 잘 알고 말해요, 알았죠?”

“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벨기에 사람으로서 화나거든요. 이제 가보셔도 되요.”

“와, 달링. 성질이 장난 아니네?”

“아…알베르토? 언제 왔어요?”

“음, 아침 같이 먹으려고 방금 왔죱. 그런데 우리 줄리안을 화나게 한 사람이 누군가 해서 듣고 있었더니 프렌치프라이 때문에 그런거예욥?”

“아, 진짜. 프렌치프라이 아니라구요! 차라리 감자튀김이라고 해요.”

“하하, 알았어욥. 감자튀김.”

알베르토의 등장으로 웨이터는 더 땀을 뻘뻘 흘렸다. 알베르토가 그만 가보라며 손짓하자 웨이터는 안심한 듯 인사를 하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다음부터는 음식 메뉴를 말할 때 검색하고 해야지, 웨이터는 ‘벨기에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검색하며 중얼거렸다.

“잘 잤어욥? 눈가가 부어있네. 운 거예욥?”

“아, 아뇨! 울긴 누가 울어요! 저 원래 아침에 잘 부어서 그래요. 알베르토는 잘 잤어요?”

“저는 뭐…이런저런 생각에 좀 설쳤죠. 오늘은 줄리안이랑 있을 거예욥.”

“오늘은 한가한가 봐요? 바쁜 것도 좋은데.”

“아벨라, 오늘은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알아가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욥.”

“위험한 것만 해결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욥.”줄리안은 거의 흡입하듯이 먹으면서도 말은 잘했다. 수다쟁이의 내공이라고 해야 하나, 발음하나 새지도 않고 말하고 있었다. 그 덕에 알베르토는 겨우 스프 두 스푼을 떠먹었을 뿐이었다.

“알베르토, 얼른 먹어요. 저는 다 먹어가는 데.”

“아벨라가 말을 참 잘해서욥. 저도 빨리 먹을게욥.”

알베르토는 스프를 먹기를 포기하고 빵을 집어 들었다. 배부르게 먹는 건 포기해야겠는 걸?

“아,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봐욥. 답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답해줄게욥.”

“어떻게 보스가 된 거에요? 항상 그런 거 보면 궁금했거든요, 막 싸움을 잘해서 이 자리에 올라갔다거나 돈이 많아서 그렇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서 후계자가 됐다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궁금해요, 아벨라? 음, 나는 후계자나 돈이 많았던 건 아니에욥.”

“오호!”

“…나는 이 자리에 올라섰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에욥. 난 버려진 아이였어욥.”

알베르토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던 과거를 털어놓는 게 살짝 두려운 듯 보였다. 줄리안은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알베르토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분이 절 거둬주셨죱. 나는 그분에게 일을 배우면서 자라났어욥. 저는 그분을 아버지처럼 따랐고, 충실히 일을 수행했죱. 그렇게 자라면서 저는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었죱. 그리고 그분은 결혼도 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어욥.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정해야 했죱.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건 내가 되었어욥. 그분이 돌아가실 때, 저는 처음으로 펑펑 울었어욥.”

알베르토는 속에 깊이 담아두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덕에 살짝 눈물이 차올랐고, 그런 알베르토를 보면서 줄리안은 침묵으로 위로를 건넸다. 줄리안도 눈물이 살짝 고였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비밀을 털어놓으셨죱. 자기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다고. 지금껏 몰래 도와주고 있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그 아이를 보살필 수 없으니, 그 아이를 지켜달라고. 그 아이는 여행 도중에 자신의 실수로 생긴 아이였지만 굉장히 아낀다고. 그리고 주소가 적힌 종이와 그 아이의 이름을 건네주고, 세상을 떠나셨어욥.”

“아…마지막으로 임무를 준 거네요.”

“네, 그런 셈이죱.”

“그 임무는 잘 수행하고 있어요? 그 아이, 잘 보살피고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잘 수행하고 있는 건지….”

“아아.”

알베르토는 고개를 살짝 떨궜고 줄리안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직은 알베르토가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줄리안은 감자튀김을 다 먹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아침식사 고마웠어요. 맛있네요.”

“아, 그래요. 저도 다 먹고 따라갈게욥.”

알베르토는 웨이터에게 차를 주문하고 2층으로 뛰어올라가는 줄리안을 바라봤다. 알베르토는 빵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띠리리-

‘시비르?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보스, 우리 조직원들, 그러니까 전유성에게 붙잡혔던 아이들이,」

시비르는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조직원들을 죽이고 있어요. 휴가를 보냈는데 출국 확인 중에 사라져버렸죠. 반쯤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어요! 약에 취한 사람마냥.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사장실 문을 막고 버티고 있어요, 저 혼자서는 무리에요.」

“젠장, 알겠어! 시비르, 꼭 버텨내.”

알베르토는 재빨리 외투를 걸치고 제임스에게 말했다.

“제임스, 줄리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난 지금 빨리 조직으로 돌아가 봐야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알베르토를 경호하며 차에 올라탔다. 차는 곧장 알베르토의 회사로 달려갔다.

‘전유성, 이 자식. 이런 꿍꿍이였나?’

알베르토는 입술을 짓이기며 차갑게 장갑을 꼈다. 안 쓰려고 했는데, 알베르토는 총을 꺼내들었다. 배신자들에게 죽음을.



*



「치지직, 작전 성공인 것 같습니다. 신호하면 들어가겠습니다.」

“지금이야.”

「치지직, 출동하라, 치지지직」

전유성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는 나보다 한수 아래일세.

줄리안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알베르토는 안타깝게도, ‘한명’의 스파이를 알아내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한명의 스파이는 줄리안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전유성은 함정을 팠다. 회사에 도착해서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때일 걸세, 알베르토.



*


“응? 알베르토가 어딜 갔다구요?”

“예.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쳇. 오늘은 같이 있겠다면서. 알겠어요, 제임스.”

줄리안은 뾰로통해져서 계단에 주저앉았다. 2층에서 체스를 발견해서 같이 두려고 가져왔더니, 이게 뭐야? 그사이에 사라져버리고. 제임스는 차를 건네 왔다. 줄리안은 차를 손에 쥐었다.

“하아아, 오늘은 또 뭘 하고 놀지.”

다 큰 어른보고 집에 있으라고 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지루했다. 클럽이나 가고 싶다, 줄리안은 아쉬운 듯 차를 홀짝 들이켰다. 심심해.

“그런데 제임스는 언제부터 근무한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하던 일을 이어서 하는 중이죠. 저희 아버지는 현재 보스가 취임하기 전부터 근무했었습니다. 제가 일한 지는 몇 년 안됐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포스가 아주 그냥, 몇 십 년 일한 사람 같아요.”

줄리안은 차를 다시 홀짝 들이켰다. 그리고 계단에서 일어나 내려가려는데,

“어…어지러워….”

“괜찮으십니까?”

“아, 아뇨, 저 좀 붙잡아주시…”

제임스가 줄리안을 붙잡아주자 줄리안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제임스는 줄리안을 업어 아래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에게 줄리안을 넘겼다. 사내는 줄리안의 팔과 다리를 묶고 차에 태워서 사라졌다. 제임스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미션 완수.”

그리고 제임스는 머리를 벽에 부딪히고 계단에서 스스로 굴렀다. 그리고 기절했다.



*



“시비르, 괜찮아?”

“예? 보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멀쩡…”

사장실에 총을 들고 들이닥친 알베르토는 시비르를 보자 달려들어 포옹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비르는 어정쩡한 자세로 알베르토의 포옹을 받고 말했다.

“왜 그러세요, 보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뒤에 조직원들도 데려오고….”

“무사해서 다행이야. 네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왔어.”

“무슨 연락이요, 보스? 저는 아무 연락도 하지…. 보스, 저택에 줄리안을 혼자 두고 온 거에요?”

“네가 연락을 안 하면 누가…. 설마….”

알베르토는 재빨리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만 계속될 뿐 제임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젠장, 함정이야! 저택으로 빨리!”

함정인 것을 깨달은 알베르토는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며 올라서는 운전기사를 밀어냈다. 알베르토는 엑셀을 세게 밟았다.

‘줄리안, 무사해야해! 마지막 임무란 말이야.’



*



「치직, 획득했습니다, 치지직」

“수고했다.”

「네.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치직」

전유성은 화면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알베르토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하하, 웃었다. 어린놈이 보스가 된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지. 이런 함정에도 쉽게 빠질 정도라니. 흐흐흐, 전유성은 술을 한 잔 마시며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 했다.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퀸타르트, 자네가 세웠던 회사도 이제 끝일세.”



*


저택에 도착한 알베르토는 문을 걷어찼다.

“제임스, 제임스! 있으면 말해! 줄리안!”

저택 안은 조용했다. 잠긴 문을 걷어차던 알베르토는 뒤늦게 알베르토를 쫓아 온 차에서 내린 조직원이 열쇠로 문을 열자 저택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리고 보인 것은 쓰려져있는 제임스였다.

“제임스?! 괜찮아?”

제임스에게 달려간 알베르토는 상태를 살폈다. 이마가 부어있었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제임스의 상태를 살펴봐. 나는 줄리안을 찾겠어.”

알베르토는 말을 마치고 2층으로 뛰어갔다. 계단에는 깨진 찻잔과 체스판이 놓여져 있었다. 알베르토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줄리안은 무사할거야, 어딘가에 숨어 있을거야.

그렇지만 2층을 모두 뒤져도 줄리안은 없었다. 알베르토는 발을 세게 걷어찼다. 그덕에 얌전히 놓여있던 화분이 떨어져 깨졌다.

“보스!”

시비르가 달려와 알베르토의 상태부터 살폈다. 알베르토의 주먹 쥔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비르는 즉시 붕대로 알베르토의 손을 감으며 말했다.

“이 저택은 트랩이 있어요. 그 모든 트랩을 밟지 않고 줄리안을 납치했다는 건 내부에 스파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알베르토는 허공을 바라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시비르는 알베르토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차려요! 그분의 마지막 유언을 지켜야죠!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구요, 우리가 제거하지 못했던 스파이가 있었어요.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돼요!”

뺨을 후려갈긴 시비르의 손을 알베르토가 꽉 잡으며 말했다.

“그 스파이가 시비르, 너야? 너 때문에 회사로 가야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저도 몰랐다구요, 그건! 알베르토, 저는 당신에게서 가장 가까이 보좌해왔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스파이는 저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죠. 그 안전가옥은 저도 잘 알지 못해요. 몇 가지 트랩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렇다는 건 당신과 가까운 인물이면서도, 줄리안의 곁을 지키는 인물이겠죠. 그러면,”

“……젠장, 제임스였어.”

알베르토는 당장 달려 나갔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조직원들이었다. 제임스는 차를 타고 벗어난 뒤였다.

“크윽, 제임스가…배신을 했어.”

“조심했어야 했는데.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 일거에요. 아버지의 동선을 밟고 싶지 않아서 JC와 접촉한 것 같아요. 그는 처음부터 스파이였던 거예요, 가장 믿었던, 믿음직한 스파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만한.”

시비르는 주저앉은 알베르토를 일으켜세웠다.

“제임스를 뒤쫓아야 해요. 그 아이를 되찾아야죠! 그분이 남긴 마지막 임무, 해내야죠!”

알베르토는 거의 이성을 상실한 듯 보였다. 시비르는 알베르토를 간신이 끌어서 자신의 차에 태웠다. 그리고 일리야에게 연락했다.

“일리야, 이판사판이야. JC를 치러 간다. 모두 소집해.”

시비르는 전화를 끊고 기어를 올렸다.

“알베르토, 이제 복수의 시간이에요.”

부아아앙-

빨간 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 나갔다.



*



“블레어, 준비됐어?”

“드디어 원수 같던 JC를 치러가는 거야? 신난다!”

블레어는 신나서 총구를 닦고 있었다. 일리야는 조직원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리고 무기를 챙기는 중이었다. 블레어는 유별나게 총을 좋아했고, 총을 늘어놓고 슥슥 닦고 있었다.

“그럴 시간 없어. 대충 몇자루 챙기고 빨리 와.”

일리야는 무기창고를 나서며 말했다. 블레어는 툴툴대면서도 총을 쓸어 담아 가방에 담고 일리야를 따라나섰다.

“어쨌거나, 원수 같은 애들을 없애러가는 거니까! 두둑이 챙기면 좋지.”

블레어는 싱글벙글하며 일리야보다 앞서 뛰어갔다. 일리야는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가방은 가벼웠지만 또한 무거웠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만 죽이자.’

일리야는 가방을 꼭 쥐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본 뒤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자신의 실수로 죽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살인은 하지말자. 그 이후로 좌천되어 잡다한 업무를 맡았지만 일리야는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마지막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였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일리야는 자신의 목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다가 탁, 소리나게 닫았다. 차에 올라타면서 목걸이를 벗고 상자에 넣었다. 블레어가 호기심을 보이며 물어왔지만 일리야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안 돼. 이번 일이 끝나면 알려줄테니까.”

일리야는 상자를 차 문 옆에 넣고 시동을 걸었다. 블레어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준비 됐지? 휩쓸어보자!”

“예!”

우렁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들 신입이라 그런지 패기가 넘쳐. 재밌는 싸움이 되겠는 걸?”

블레어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일리야는 엑셀을 세게 밟았다.



*



“깨어나셨네, 알베르토의 애인 씨.”

목소리가 울렸다. 줄리안은 눈을 떠도 흔들거리는 시야에 머리를 제대로 겨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제임스를 봤던 것 같은데….

“기분이 어때? 좋지 않나? 당신을 위해 준비한 코카인이었어.”

“으웁, 욱,”

결국 줄리안은 토를 했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뒤로 살짝 물러섰다. 바닥을 닦으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친구가 좀 많이 탔나보네. 마약은 처음 해보겠지, 안 그래?”

더러운 건 질색이야, 제대로 닦아. 줄리안은 울렁거리는 속과 헤롱헤롱거리는 머리, 그리고 왠지 기분이 업 되는 느낌이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전유성이라고 하네. 자네 이름은 뭐, 줄리안 퀸토겠고.”

“전…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줄리안은 욱신거리는 머리가 목소리 때문에 더 아파오고 있었다. 결국 다시 토를 하자 목소리가 물러섰다. 그리고 누군가 줄리안의 머리채를 잡고 주먹을 날렸다.

“끄윽, 끅,”

“네가 날 모르는 건 상관없어. 말대답을 바란 게 아니라네.”

자신을 전유성이라고 소개한 그 목소리는 의자에 앉는 듯, 털썩 소리가 났다.

“우리 줄리안 씨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해주면 되겠어, 알베르토의 발광하는 모습을 말이야.”

꽤나 재미있거든, 전유성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줄리안은 그 와중에도 몇 대 더 맞아서 볼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흑, 저한테 왜…이래요….”

줄리안은 터진 입술에서 배어나오는 피 맛을 느꼈다. 여전히 머리채를 잡혀서 당겨왔다.

“왜냐고? 그거야 당연하지.”

전유성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알베르토의 애인이니까.”

그리고 줄리안은 명치를 세게 얻어맞았다. 숨이 컥 막히는 기분이었다.



*



시비르는 JC에 도착하기 전에 차를 세웠다. 알베르토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손에 쥔 권총을 만지작거리면서 그저 퀸타르트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분이 부탁했던 일,”

시비르는 알베르토의 손에 쥐어진 권총에 손을 얹었다. 알베르토는 시비르의 눈을 바라봤다.

“꼭 해내겠다고 다짐했잖아요.”

“….”

“그리고 지금 그분의 아이가, 저기에 잡혀있어요.”

시비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구하러가야죠, 보스.”

알베르토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권총을 내려다보고 시비르를 다시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시비르.”



「시비르, 도착 직전이야.」

“좋아. 우리도 진입하겠어.”

시비르는 인 이어에서 손을 뗐다. 전유성이 대비를 해놓은 것인지 두, 세 명 정도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시비르는 차갑게 총을 꺼내들었다.

“잠깐, 내가 하지.”

알베르토는 총을 겨누는 시비르를 막고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무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시비르는 당황해서 알베르토를 따라 나섰다. 알베르토는 이미 저만치 가고 있었다.

“네 보스에게 전해라.”

알베르토는 소음기가 달린 총을 꺼내들며 방아쇠를 당겼다.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경비들은 픽픽 쓰러졌고 한명은 총을 꺼내다가 알베르토에게 걷어차이고 쓰러졌다.

“애인 찾으러 알베르토가 왔다고.”

알베르토에게 걷어차인 남자는 덜덜거리며 일어나서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시비르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알베르토는 어서 가자며 재촉했고, 시비르는 알베르토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한편 일리야는 알베르토의 총격전을 목격하고 차를 세웠다. 시비르와 알베르토가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리야는 블레어에게 애들 데리고 잘 따라오라는 말을 하고 차에서 내려 알베르토에게 달려갔다.

“보스!”

“어, 일리야. 빨리도 왔네.”

뒤쪽에 블레어가 신참들을 데리고 오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싱긋 웃으며 일리야의 어깨를 두드렸다.

“애들 관리하느라 수고가 많았어, 일리야. 오늘이 네게 있어서는 마지막 싸움이 될 거야. 이 일이 끝나면 그만둬도 상관하지 않겠어.”

“고맙습니다, 보스.”

일리야는 비장하게 각오를 새기고 건물로 들어섰다.



“네 애인 오셨다.”

줄리안은 한쪽 눈이 부어올라있었다. 전유성은 알베르토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를 찾으러 왔지. 우리 쪽에 벌써 경고를 했더군.”

전유성은 의자에 묶여있는 줄리안에게 다가갔다.

“줄리안, 네가 많이 소중한 모양이더군.”

“크윽, 무슨, 짓을, 하려고….”

전유성은 줄리안의 뺨을 쓰다듬다가, 세게 후려쳤다. 그 덕에 줄리안의 고개는 홱 꺾였다. 볼이 얼얼해져왔다.

“죽여 달라고 호랑이 굴에 왔는데, 잡아먹어야지.”

줄리안은 엉망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안 돼, 알베르토, 오지 마요!



픽-픽-.

총알이 심장을 꿰뚫고, 팔을 꿰뚫고, 머리를 꿰뚫었다.

한층, 한층 올라가면서 알베르토는 무섭게 적들을 죽이고 있었다. 시비르는 살짝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알베르토, 조금 살살해요.”

“빨리 가야해. 줄리안이,”

“우린 충분히 빨라요.”

함정을 파던 JC의 움직임은 재빨랐지만, 지금 대응하는 속도는 굉장히 느렸다. 조직원들도 듬성듬성 모여서 달려왔고, 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일리야를 비롯한 무리는 너무나도 쉬운 싸움에 거의 즐기듯이 해치우고 있었다.

“지원 요청한다, 크악!”

알베르토는 연락을 취하는 조직원에게 인정사정없이 총을 쐈다. 전화를 걸던 조직원은 맥없이 쓰러졌고 피가 흘렀다.

‘아무래도 너무 쉬워.’

시비르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치밀한 인간이 어째서 이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시비르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는 알베르토를 제지시키고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다들 이건 너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아?”

“쟤들도 이렇게 나올 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여자라서 잘 모르겠군, 싸우는 재미를 말야.”

“입 조심해, 마이클. 신입주제에 나대는 군. 작전을 바꾸겠어.”

시비르는 무리를 반으로 나누며 말했다.

“반반씩 간다. 너희는 저쪽으로, 너희는 우리와 함께 간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누어진 무리는 일리야 팀과 블레어 팀으로 나누어졌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말하며 시비르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몇 초 지났을까,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악!”

“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가 흐르고, 정적이 흘렀다.

“너, 가서 확인하고 와.”

일리야가 끝에 있는 조직원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돌아온 조직원이 혼비백산하며 말했다.

“모…모두 죽었습니다. 트랩이었어요.”

그리고 뒤쪽에서 몰려오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시비르는 앞으로 달리라며 알베르토에게 소리쳤고, 다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총성이 들려오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악,”

계단에 도착하고 올라가고 있을 무렵 총성이 더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미처 들어오지 못한 조직원들이 문을 열어달라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알베르토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하다, 잭.”

일리야는 계단 문을 막는 중이었다.

“네 부모님에게 보상을 꼭 해줄게, 잭.”

“흑흑, 대장.”

“미안해, 잭. 영광스럽게 죽어줘.”

흐느끼던 잭은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소리와 함께 묻혀 사라졌다.

곧이어 문을 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일리야를 비롯한 몇 명이 문을 막고 있었다.

“저희가 막을 동안 가십시오, 보스.”

알베르토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랐다.

문을 열고 시비르와 함께 들어섰을 때, 아래쪽에서 큰 총성이 몇 발 울리고 곧 조용해졌다. 시비르는 문을 꽉 닫았다.

“여긴, 조용하네요.”

이 층은 병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조용하고, 외벽이 하얀색이었다. 그리고 마치, 여기로 오라는 것처럼 하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알베르토는 총을 꽉 쥐고, 커브를 돌았다.

복도 끝에는 문이 있었다. 시비르는 자신이 앞장서겠다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복도 끝에 다다라 문을 열었을 때,

“시비르!”

“으윽,”

시비르는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피하지 못했다. 시비르는 입구에서 풀썩 쓰러지며 말했다.

“보스, 들어가요. 저는 괜찮아요. 뒤 따라 가겠습니다.”

“……수고 많았어, 시비르.”

알베르토는 시비르에게 프랑스식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으로 손을 꽉 잡았다.

“네 아들은, 꼭 찾을게.”

시비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말했다.

“나 아직 안 죽었어요. 겨우 피를 조금 흘린다고…,”

타앙-

피가 튀었다. 시비르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알베르토는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예쁜 아가씨인데, 안타깝게 됐어.”

“…시비르였어.”

알베르토는 차갑게 뒤돌아섰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셋, 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전유성, 그리고 화면으로 보이는 줄리안이 있었다.

“…줄리안을 어쩔 셈이야.”

“그 아이를 진짜로 아끼나 보군?”

시시콜콜한 애인인줄 알았더니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가? 전유성은 와인을 벌컥 들이켜고 말했다. 알베르토는 전유성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알베르토를 위협했다.

“아니, 그러지 말게. 여기 와서 앉아.”

알베르토는 전유성의 반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여전히 남자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거야, 뻔하지. 안 그런가?”

전유성은 알베르토에게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알베르토는 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조직의 붕괴.”

“껄껄, 맞네. 이 이상 세력이 커지면 나도 부담스러워서 말일세.”

퀸타르트도 참 복이 없지, 길거리에서 주운 애가 자기가 세운 조직을 망하게 하리라고 예상이나 했겠어? 전유성은 농을 지껄였다. 알베르토는 잔을 든 손이 떨렸다. 그분의 이름이 저 더러운 입에서 나오다니.

“퀸타르트 씨를 모욕하지 말아주세요. 제 은인입니다.”

“은인이면, 은혜를 갚아야지. 이게 무슨 꼴인가, 애인 하나 때문에 조직이 휘둘리는 꼴은.”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죽어줬으면 좋겠네.”

알베르토는 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권총을 부여잡았다.

“그런데, 자네 애인을 보니까 재미가 생겨서 말이야.”

알베르토는 눈을 부릅떴다. 전유성은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줄리안이 있는 곳에는 폭탄이 있지. 앞으로 5분 뒤면 터질 거야. 선택권을 주겠네. 줄리안이 죽거나, 자네가 살아서 조직을 계속 이끌어가거나.”

전유성은 일종의 모험수를 둔 것이었다. 알베르토가 진심으로 줄리안을 사랑한다면 대신 죽을 것이고, 죽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에게 위험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재미난 게임을 좋아하는 전유성은 자신의 판에 모험수를 둠으로써 게임을 더 위험하고, 재미있게 만든 것이었다.

“선택하게. 줄리안은 저기, 문 보이지? 저 안에 있네.”

모니터에 떠있는 줄리안의 의자 아래에는 폭탄이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저 폭탄은 무게에 민감하네. 의자에서 누군가 일어서고 10초가 지나도록 다시 앉지 않으면 바로 터지지. 그리고 저 방은 10초안에 나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니네. 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줄리안을 구하려면 자네가 죽어야한다는 뜻이지.”

전유성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자네가 죽으면, 줄리안을 무사히 보내주겠네. 당신의 조직원들도 모두.”

전유성은 리모컨을 조정해 다른 화면을 틀었다. 그곳에는 피를 흘리고, 다친 자신의 조직원들이 있었다. 많이 다쳤지만 죽지는 않았다. 블레어는 멀쩡하게 살아있었고, 일리야는 오른팔을 다쳤지만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보스.”

알베르토는 일리야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일리야. 괜찮아 보이네.”

그 말에 일리야 역시 피식 웃다가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돌려 전유성을 바라봤다.

“폭탄은 몇 분 남았지?”

“이제 2분 30초정도. 선택했나?”

알베르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줄리안이 갇혀있는 문으로 다가서자, 안쪽에 줄리안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알베르토는 문을 열었다.



“줄리안, 나야.”

“으, 알베르토?”

알베르토의 목소리에 줄리안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줄리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부어 터져서 피가 흐르는 입술, 붉게 부은 볼, 퉁퉁 부은 오른쪽 눈. 알베르토는 조심스럽게 줄리안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줄리안은 아픈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날 구하러 온 거에요?”

“그래. 널 구하러.”

“저 사람말로는 여기에 폭탄이 있대요, 얼른 나가요, 알베르토.”

알베르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줄리안의 결박을 풀었다. 다리에 묶인 밧줄을 풀고, 왼손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오른손의 결박을 풀고 일어나려는 줄리안을 다시 앉히며 알베르토가 말했다.

“일어나면 안 돼. 일어서면 터지는 폭탄이야.”

“네?!”

그 말에 놀란 듯 줄리안은 도로 앉았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가요? 줄리안이 눈을 크게 뜨고 물어왔다. 알베르토는 힘겹게 운을 뗐다.

“줄리안. 이제 와서 말하는 게 미안해, 나를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

알베르토는 줄리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를 거둬주셨던 분의 이름은 존 퀸타르트야. 그리고 그분의 숨겨진 아들의 이름은,”

알베르토는 어리둥절해하는 줄리안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줄리안 퀸타르트야.”

“…줄리안?”

내 이름이랑 똑같네, 우연의 일치인가. 줄리안이 중얼거렸다. 알베르토는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줄리안 퀸타르트를 나는 뒤에서 도와왔어. 그러다가, 욕심이 생겨버린 거야. 내 임무는 보호하는 거였는데, 사랑에 빠져버렸거든. 그래서 줄리안을 보호하지 못했어.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 거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됐어.”

말을 마친 알베르토는 줄리안을 밀어내고 의자에 앉았다. 바닥에 내팽겨쳐진 줄리안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알베르토에게 다그쳤다.

“알베르토, 그럼 내가, 내 진짜 이름이,”

“넌 벨기에의 어떤 가정으로 보내져서 길러졌어. 그 가정은 퀸타르트 씨의 은퇴한 조직원이었고, 크리스 퀸토씨였지. 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분이 아빠라고 생각하며 자란거야. 네 진짜 이름은 줄리안 퀸타르트야.”

알베르토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줄리안 역시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알베르토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어서 나가. 내 마지막 임무는 너를 지키고 살리는 거니까. 폭탄이 곧 터질 테니, 얼른!”

그러나 줄리안은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줄리안은 울면서 알베르토에게 다가갔다.

“알베, 르토, 알베르토,”

“얼른 나가! 줄리안 퀸타르트, 어서!”

“흑, 흑, 고마, 워요, 알베르토, 잊지 않을, 게요.”

줄리안은 알베르토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눈물을 닦아줬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해서 죄송합니다, 퀸타르트 씨.”

벌은 죽어서 달게 받겠습니다. 알베르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폭탄이 터졌다.











*











 

 

“줄리안!”

“로빈!”

어느새 해를 돌아 다시 겨울이 되었다. 밖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줄리안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로빈이 카페에 들어서며 줄리안을 반겼다.

“와, 진짜 춥다.”

“그러게.”

줄리안은 미리 시켜놓은 핫 초코를 마시며 말했다. 로빈은 자신의 앞에 있는 라떼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시간은 귀신같이 맞춘다니까. 나 올 줄 어떻게 알고 미리 시켜놓는 거야, 매일.”

“너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도착하는 시간은 다 알지.”

줄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로빈은 추위에 붉어진 얼굴을 라떼 잔을 볼에 대고 녹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꺼내 줄리안에게 내밀었다.

“어? 여권 이름표?”

“오다가 네 생각나서 샀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아, 그건 어떻게 알았어?”

“네 니콜라스한테서. 섭섭하게, 나한테 먼저 말하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조직보스가 사라져버린 NSM은 퀸타르트의 아들인 줄리안이 물려받았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로빈에게 들켜버려서 로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로빈은 적잖이 놀라면서도 줄리안을 위로해줬다.

“너 니콜라스랑 너무 친해지는 것 같아.”

“그럼 나랑 자주 만나던가! 너보다 니콜라스랑 만나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로빈은 삐진 척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줄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빠서 미안. 아무튼 너는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 없어?”

“가족도 없는데 뭘. 혼자 계시던 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셨어.”

로빈은 씁쓸하게 말했다. 줄리안은 로빈의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마 프랑스에서 혼자 암 투병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슬프지 않아?”

“나를 애초에 좋아하시지도 않았는데 뭘. 젊은 나이에 담배나 피워대니 일찍 죽는 거지.”

로빈은 그립지 않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은 무척이나 가보고 싶었을 거였다. 줄리안은 벨기에에 같이 가자며 로빈을 꼬드겼다. 로빈은 결국 못이기는 척 알겠다고 답했다.

“가는 길에 프랑스에 들려서, 너희 아버지도 한번 보고.”

“…그래.”




줄리안은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알베르토가 죽고 나서 NSM의 모든 곳은 가봤지만 딱하나 가보지 않은 곳이 있다면, 바로 알베르토가 머물던 이곳이었다. 차마 알베르토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사장실은 조직을 정리하고 본부도 옮길 겸, 청소가 한창이었다. 줄리안이 들어서자 청소하던 사람들은 인사를 하고 나갔다. 줄리안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알베르토가 앉았었고, 우리 아빠가 앉았었던 자리.’

줄리안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알베르토는 자신보다 3살이 많았고, 아마도 아버지는 키울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서 알베르토를 애지중지 키운 것 같았다. 자신의 아들처럼. 그러다가 ‘나’를 떠올리고는 조사를 지시해서 찾아냈고, 마침 나는 어머니가 죽어서 고아원으로 보내질 참이었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 퀸토의 가정으로 보내져서 키워졌다. 아버지라고 믿으며.

줄리안은 테이블 옆에 무수히 쌓여있는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한 장의 서류는 붉게 강조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자세히 쳐다봤다. 웬 여자?

그리고 읽어내려 가던 줄리안은 황급히 종이를 들고 문을 나섰다.



‘시비르 데이아나’


‘아들 찾음, 로빈.’




*




“시비르.”

시비르는 병실에 누워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알베르토가 줄리안 대신 죽고, 시비르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죄책감으로 시비르는 줄리안을 ‘모른 척’ 했다. 그녀의 충성심은 퀸타르트보다는 알베르토에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걷지 못한다.

“당신의 아들을 찾았어요.”

그리고 항상 줄리안의 말을 듣지 않았던 시비르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줄리안의 눈을 쳐다봤다.

“만나러 가시겠어요?”

시비르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줄리안,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엄마 찾았어. 살아계셔.”

「그러니까, 그게 무슨…소리야.」

“만나면 알아, 지금 당장 비담공원으로 나와.”





*




줄리안은 조용히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신이 어린 시절, 자랐던 이곳은 이제 자신밖에 없었다.

크리스 퀸토 씨는 이사를 가버려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던 이 집을 사고, 청소를 말끔히 하자 꽤나 옛날과 비슷해졌다.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아빠.”

줄리안은 탁자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어린 시절 많이 읽었던 책, ‘집 없는 아이’였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줄리안은 책을 뒤적거렸다. 슬프게도 펼친 페이지는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죽는 장면이었다. 줄리안은 페이지를 넘겨서 마지막장을 읽었다.

‘잃어버린 아들 레미를 다시 찾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줄리안은 책을 덮었다.

알베르토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말하던 모습도.


이탈리아어로 사랑해가 뭐였을까.


줄리안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Fin-


장 위안 X 테라다 타쿠야

+ 옅은 오메가 버스 기반 육아물. 임신의 가능성과 특유의 향만을 염두에 두고 잡은 설정입니다.


+ 육아물이지만 사실 실제 아동들의 언어나 행동 수준을 다룸에 있어서는 미숙합니다8ㅅ8 

직접 아가들을 키워보거나 가르쳐 본적이 없는 터라..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S2


 




# 다섯 살, 장한울.




안녕하세여! 

저는 오치리 유치원 정상 반, 다서쌀 장하눌 인니다!



우리 가족은 네명인니다! 

세상에서 제에에일 나쁜 아빠랑, 세상에서 제에에에일 예쁜 엄마랑, 세상에서 제에에에일 못쌩긴 하느리랑 살고 이써요. 



어.. 아빠는 진짜진짜지이이인쨔 나빠여. 맨날 엄마 데려가서 뽀뽀하고, 막 그런다요? 그래도 우리 엄마느은- 지인짜 예쁘고 차캐요. 아빠보다 내가 백배는 더 좋다고 해줘써여! 

그리고오, 하느리이는 진짜진짜 못쌩겨써여. 내 동생인데요, 짱짱 못쌩겨써요!! 그런데도 맨날 엄마가 뽀뽀해준다요? 나는 잘쌩견는데 마니 안해주면서!! 



그래서- 으음, 그거는 쪼끔 슬프지마는, 그래도 우리 엄마는 마니마니 예쁘니까 괜차나요! 헤헤.




# 세 살, 장하늘.




쁘하! 자하느!



아바, 조하. 어마, 더어 조하. 쟈하누우- 시러!!!









[Oh, My Baby!]






이유도 없이 모두의 가슴을 콩닥대고, 자꾸만 두근거리게 하는 봄의 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다.

우리의 사랑이 반쯤은 굳건해졌고, 아직 반쯤은 불투명했던 그 즈음. 



한울이는 기적처럼 찾아와, 우리에게 견고하고 단단한 '가족'이라는 이름을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 년. 

공주님을 보고 싶다던 남편의 소원 덕분인지, 천사 같은 하늘이도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



언제나 예쁘고, 언제나 사랑스러운 아가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해두고자 이 글을 쓴다.



2015년, 겨울의 가운데에 서서. 





*





"…으아아앙-! 어마, 어어어어마아아ㅏ!!!!!!"


"으이, 야, 너 울지마!!! 장하느을, 너 울지마아!!!"


"으흐, 으끄, 으아아앙!!!!!!!"


"한울아, 하늘아, 무슨 일이야!!"




주방에서 허겁지겁 달려 나와보았건만, 어느새 하늘이의 얼굴은 시커먼 크레파스 범벅이 되어있었다. 어휴, 내가 못 살아, 정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주부들의 단골 멘트에, 새삼 아이를 키운 지도 오 년이나 되었구나- 하는 찰나의 생각도 잠시. 흉하게 칠해진 까만 얼굴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을 뚜욱뚝 흘리고 있었다.



빽빽거리며 울어제끼는 하늘이를 안아 올려 엉덩이를 토닥이며 왜 울어. 응? 왜 울어, 공주님. 하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서투른 발음으로 그런다. 




"우, 흐으, 어마아아… 허헝, 자하누!!!! 쟈하누우, 히끅,"


"한울아, 동생 괴롭히지 말라고 했지. 응?"


"아냐!! 엄마, 하느리, 내가 안 개로폈어!!"


"으흐아앙- 장하누우우!!!!"


"아니야아!! 하느리가 자기 얼굴에 그림그려써, 그래서, 내가 하지말라고 해딴마리야!!! 이상하다고, 거울, 거울 보여줘써!!!!"


"으어어엉, 흣, 흐아앙!!"





대강 상황은 이런 듯 해 보였다. 하늘이가 크레파스를 쥐고는 제 얼굴에 마구 칠해댔고, 한울이는 그 얼굴이 망측하다며 하늘이의 눈앞에 거울을 들이댔겠지. 하늘이는 제 모습을 보고 저가 놀랐겠고. 어휴, 이 사고뭉치들.



울음소리며 한울이의 변명이 섞여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집 안에 머리가 다 지끈지끈 아파왔다. 어느 정도야 익숙해졌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울고, 다투고, 떼쓰고. 




"알았어요, 한울아. 조금만 이따 얘기하자. 하늘이도 얼른 뚝. 응?"




일단 급한 불을 먼저 끄는 게 낫겠다, 싶어 거실에 한울이를 두고는 하늘이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꺽꺽 대며 서럽게 울어대는 등을 느리게 토닥이며 달래니 금세 울음을 그치는 하늘이. 잠시 더 얼러주자 피곤했는지 금새 새액색 숨을 내쉬는 속눈썹에, 가늘게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으구, 잘 때보면 이렇게 예쁜데 말이야. 응? 하늘아." 



하늘이를 조금 더 품에 안고 있다, 침대에 눕히고는 물티슈를 가져와 덕지덕지 묻은 크레파스를 닦아냈다. 금새 뽀얗게 드러나는 맨 얼굴. 이렇게 천사 같은 아이가 왜 제 오빠를 싫어하는지는 참 모를 일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코끝에 쪽, 입을 한번 맞추고는 방을 나왔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남겨졌을 한울이가 많이 신경 쓰였건만,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한울이는 벌써 꿈나라로 향한 뒤였다. 거실 불을 스위치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눌러 끄고, 소파 맡에 턱을 괴고 앉아 한울이를 바라보았다. 새근새근 내쉬는 숨에 따라 미약하게 들썩이는 가슴팍과, 오동통한 볼.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제 아빠를 꼭 닮아 곧게 뻗은 콧날과 깔끔한 입매.



평화, 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매일매일이 전쟁 같은 두 아이들과의 삶 속에, 간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적막. 이제야 물밀듯이 밀려오는 피로감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지는 듯 했다. 한울이 아빠는 언제나 오려나. 



전화를 해볼까, 싶어 앉은 자리에서 거실의 앉은뱅이 책상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쥐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많이 바빠 보이던데, 괜히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는데. 물을 먹은 솜마냥 축축 늘어지는 몸이 무거웠다. 




..잠깐만 자고 일어날까? 




*



타쿠야는, 정말 나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저도 잠이 많으면서 꼬박꼬박 일어나 아침밥을 해주고, 어렵게 타지에서 시작한 가수 생활도 그만두면서까지 나의 곁을 지켰다. 내가 싫다면 그게 무엇이든 하지 않으려 하고, 결혼을 한 뒤에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며 가장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그건 분명 타인에게 무엇이든 맞추어주려는 타쿠야의 천성이기도 했지만, 훨씬 더 많은 노력이 깃들어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 예뻤다.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예뻤고, 지금까지도 예쁘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하게 된 방송에서 만난 타쿠야는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배려가 내게는 더 많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때부터. 그래, 나도 타쿠야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나만을 향하던 네 눈길이 나의 것과 맞닿았고, ‘타쿠야. 내 아이를 낳아줘.’ 라는 서툰 고백이 이어졌다. 그리고, 타쿠야는 울었다.



적당히 예쁘게 휘어져있던 눈꼬리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리고, 결국에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다 가린 채 어린 아이라도 된 것 마냥 펑펑 서럽게 울어대던 타쿠야는 잔뜩 물기가 어린 목소리로 조그맣게 그랬다.




"고마워요…"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는, 듣지 않고도 알 만한 것이었다. 나를 향하던 그 시선은 꽤나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으니까. 그저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떨군 그의 예쁜 손가락 사이로 맺힌 눈물 방울들이 바닥으로 똑, 떨어졌다.



가련히 떨리는 어깨를 당겨 내가 안기다시피 끌어안은 타쿠야는 보기보다도 더 마른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허리께를 스친 손에 파득, 눈에 띄게 놀란 타쿠야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끌어안은 그 목 언저리에서 언뜻, 달콤한 복숭아 향이 났다.





*





그는 번식욕이 강한 알파였고,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오메가였다. 



바쁜 부모님의 밑에서 홀로 텔레비전을 보고 자란 그와, 어머니와 떨어져 살며 당신을 대신해 동생들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나. 



우리는 어린 시절의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제대로 된 '가족'이 필요했다.



이 이상으로 더 필요한 말이 있을까- 싶다.





*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문밖에서부터 작게 들려오는 소리들이 있다. 



울음소리라든지, 아가, 아가. 하며 잔뜩 당황한 타쿠야의 목소리라든지.



이상하게도 그런 것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묘하게 느껴지는 불길하고 위협적인 예감. 

알파의 그것은 헛되이 존재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문을 열고 들어간 집안에는 조용한 적막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순간, 온 감각을 마비시킬 만큼 달콤한 향이 훅 끼쳐왔다. 




곧 익숙해진 향에 긴장이 풀린 목덜미가 뻐근해져 왔다. 내가 지켜야 할 처자식이 생긴 후로 나는 모든 사소한 것들에도 날을 세우고, 경계했다. 나의 가족은 무엇보다도 사랑스럽고 소중하기에. 그것은 본능이고, 의무였다.



나의 사람들을 지켜내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새기며 현관을 지나 거실에 들어선 순간,




웃음이 피실, 새어 나왔다.



소파 아래의 마룻바닥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운 타쿠야와 소파 위에서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한울이. 



누가 보아도 모자의 관계가 느껴질 법한 모습이었다. 나의 외모와 성격을 꼭 빼 닮은 한울이였지만, 그 행동에서는 지금처럼 가끔씩 타쿠야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한울이는 더 기대가 가고 애정이 가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하늘이가 덜 예쁜 것은 아니었다. 바라던 대로 공주님 같은 딸 내미는 다른 사람에게는 도도하고 까칠하게 굴면서도 제 부모에게는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얼굴도, 성격도 타쿠야를 많이 닮은 하늘이는 정말이지 천사 같았다.



거실에 두 사람이 있으니 하늘이는 안방에 있을 터였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살금살금 걸어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불을 켰다. 아기침대 위에 누인 조그만 몸이 퍽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조그마한 얼굴에 오밀조밀 예쁘게도 자리잡은 이목구비와 작은 손발은 언제 보아도 신기한 것이었다. 한참이나 하늘이를 바라보다가, 울었는지 조금 달아올라있는 눈두덩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접었던 허리를 세웠다.



필히 타쿠야가 정리해 두었을 침대 위에 잘 개어져 있는 검은 반팔 티와 추리닝 바지를 대충 입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잠들어있는 예쁜 아내와 아들. 곤히 잠든 모습이 많이 피곤해 보여 안쓰러웠지만, 바닥에 웅크려 자면 근육이 뭉칠 듯 싶어 타쿠야를 깨우려 고개를 숙였다,




“타쿠야, 일어나.”


“…..”


“타쿠야.”


“..으음..”




귓가에 조용조용 속삭이자 뒤척이며 벌어진 발간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살짝 보였다. 충동적으로 그 입술에 입을 쪽, 맞추자 타쿠야는 그제야 느리게 눈을 떴다. 




“…아, 여보.”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가 달큰하게 귓가를 파고 들었다. 어쩜 방금 자고 일어나 부어 오른 눈꺼풀마저 예쁠까. 상체를 일으켜 앉은 타쿠야는 서있는 나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어라, 평소에는 잘 부리지도 않던 애교를.




“여보오.. 많이 힘들었죠?”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는 허벅지에 얼굴을 부비며 대뜸 하는 소리가 힘드냐는 물음이었다. 네 생각만 하면 힘들지 않아, 라는 다정한 말을 애써 삼키고는, 조금 더 애교가 보고 싶어 부루퉁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 힘들어.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들어왔더니만. 반겨주지도 않고.”.




내 말에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은 타쿠야는 내 다리를 더 바투 끌어안았다. 아, 여보오. 애들이 너무 칭얼거려서 피곤해서 그랬어요. 응? 기분 풀어요. 조금 비음이 섞인 앙탈을 부리는 모습은, 아이를 둘 씩이나 낳은 엄마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오메가는 오메가야. 잠결이라 조절을 못하는 건지, 고의적인 건지. 좀 더 농도를 더한 복숭아 향이 거실 바닥을 따라 깊게 퍼졌다. 



다리에 기댄 머리칼을 손으로 부스스 흩뜨리며 그제야 웃어 보이니 잇몸이 활짝 보이도록 따라 웃은 타쿠야는 어, 웃었다. 기분 풀린 거 맞죠? 그렇지? 하며 헤실거렸다. 꽤나 오랜만에 느껴지는 신혼의 기분. 밀려있는 설거지 감이나 빨래는 분명 한마디 할법한 것이었는데, 그 웃음에는 모든 것이 무장해제되고 마는 나였다. 하긴. 얼마나 피곤했으면 마룻바닥에 대강 엎드려서 잠들었겠는가.




“..많이 힘들었지? 하늘이 많이 울어?”


“응. 나 요즘 힘들어요. 많이.”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정말 힘든가 보구나 싶었다. 평소에는 잘만 자기 감정을 숨기는 아이인데 .




“왜. 오늘도 무슨 일 있었어?”


“음, 뭐 별일은 아니지만.. 아니, 글쎄, 하늘이가 자기 얼굴에다가 크레파스를 막 벅벅 칠한 거에요. 한울이가 그걸 보더니, 세상에.. 큭큭, 너 못생겼다고, 이상하다고 막 거울을 들이댄 거 있죠? 하늘이는 자기 얼굴보고 놀래서 엉엉 울고. 한울이는 울지마아! 이러고 있구.”




퍽 안쓰러워 하루 동안의 일을 묻자 신나서 종알거리는 타쿠야는, 첫째를 낳은 뒤에 말이 부쩍 많아졌던 것 같다. 아무리 피곤해도 예쁜 제 아이들을 보면, 얘기를 하면 힘이 나는 건지.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가를 접어 웃어주니 더욱 신이 나서는 한울이가 어쨌고..하며 말을 이어간다. 



오늘따라 유난히 말라 보이는 어깨와 하얀 니트 틈새로 언뜻 비쳐 보이는 푹 파인 쇄골. 안쓰럽도록 얇은 손목이나 발목이, 자꾸만 눈길을 잡아 끌었다. 아무리 모성이 강한 오메가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자기 건강에 신경도 안 썼을 줄이야. 요즘 일에 바빴다지만, 신경을 써야 했을 나 또한 타쿠야에게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싶었다. 순간 고마움과 미안함이 그득히 차 올라서,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




"타쿠야."


"응?"


여즉 다리를 끌어안고는 올려다보는 예쁜 눈에 맺힌 속커풀이 퍽 예뻤다. 촉, 입을 맞추자 놀란 듯 두어 번 깜빡이다 다시 부스스 웃어보인다. 




"평소답지 않게 왜이래요, 당신?"


"…예뻐서."




사람 민망하게. 빤히 보면서 그러면 부끄러워지잖아요. 하며 타쿠야는 짐짓 당황스러운 내색을 비췄다. 슬그머니 팔을 풀고 일어서려는게 야속해서, 반쯤 몸을 일으키려던 타쿠야의 턱을 두손으로 붙잡고는 코에 다시 쪽.




"..여보, 여보, 잠깐만,"




엉거주춤 일어서다 턱언저리를 쥐어오는 악력에 다시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타쿠야는, 그마저도 귀여워서. 그래서 반쯤 벌어진 입술에 다시 쪽. 쪽, 쪼옥.




"으음, 여보오."




말로는 거부하면서, 막상 붉은 혀로는 앙큼한 고양이 마냥 입가를 살짝 핥아내는 게 여간 잔망스러운 게 아니다. 




"예쁜 아내는 상을 줘야지. 쪽."


"푸흐, 뭐예요. 한울이만 방에 데려다, 읏, 뽀뽀하지 말아봐요!"


"뭐긴 뭐야. 촉, 하늘이도 벌써 두살인데. 셋째 가질까? 쪽."


"아이, 미쳤어요? 아,잠시만. 여보, 옆에 한울이…"


"자는데 뭐 어때. 타쿠야, 셋째는 이름 뭘로 할까. 응?"




짖궂게 말하며 반쯤 뒤로 누운 타쿠야를 바닥에 완전히 밀어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보기좋게 잡혀있던 잔근육 대신 빼쪽 마른 허벅지가 손에 잡혔다. 여전히 골반은 탄탄하다만. 




"여보, 으응, 진짜 잠깐만. 바닥에서는 안돼요. 응? 한울이도 있구, 나 허리 아파. 여보, 여보?"




정말 여기서 눕힐줄은 몰랐는지 타쿠야는 놀란 토끼눈을 해보였다. 애써 어깨를 슬쩍 밀어내지만, 하루종일 가사와 육아에 지친 몸에 힘이 들어갈리 없다. 그저 진하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신하니, 어깨를 콩콩 두드리다가 금방 포기한 듯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내 고집을 아는 탓이리라.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은 오늘따라 유독 길고 예뻤다.




허리를 틀어 조금 더 몸을 밀착시키고, 타쿠야의 윗옷 끝자락을 잡아 위로 벗겨내려는 그 순간-




"으음, 우으.."




…아아,




"어, 어어-???" 




망했다.




"아빠아아!!!!!!!!! 엄마 개로피지마아!!!!!!!!!!!! 왜 엄마 개로펴!!!!!!!!!!!!!!!"





*





한울이가 빼액- 소리를 질러대니 곧 안방에서도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으휴, 내가 진짜 못살아! 피곤해보여서 끼 좀 부려줬다고 한울이까지 있는 옆에서-그것도 마룻바닥에서!-눕히는건 도대체 무슨 짓이람, 나보다 몇 살은 더 많은 사람이 참을성 없는 하늘이 마냥...


한울이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그저 낭패라는 듯이 표정을 잔뜩 구긴 그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러펴주며, 내 화도 꾹꾹 눌러담았다. 으휴, 내가 참아야지. 여보는 하늘이 달래줘요. 한울이는 당신 안 좋아하잖아. 




"타쿠야, 한울이도 나 좋아하거든?"


"아니야아!!!!!!! 엄마 개로피는 아빠, 나아~쁜 거라고 우리 성생니이 그래써!!!!!!!!!! 아빠 나빠!!!!!!! 아빠 안조아!!!!!!!"


"장한울, 너 그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성생니!!!!!! 엄마, 개로피지마!!!!!!!"


"어허, 그래도!"


"으아아아아!!!!!! 엄마 개로피지말라고오오오!!!!!!!!!!"


"야!!!!! 이게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있어!!!!!"




이 인간들이, 진짜..!



“에베베베베, 안 들려! 안 들려!!! 엄마 개로피는 아빠는 나쁜 아빠야!!!!!!”


"장한울, 아빠가 너한테 아빠 싫다고 바락바락 소리지르라고 가르쳤…"


“에베베베…”





"다!!!!!!!!!!!!!!! 시끄러워!!!!!!!!!!!!!!!!!!!!!"





*





으음, 그래서 그날 어떠케 댓냐면뇨, 

엄마가 지인짜 진짜 무지무지무지 화가 나써요. 그래서 막 시끄러어!!!!!!!하고 소리 질렀는데, 저는 엄마가 그러케 화내는거를 본적이 없어서, 마니마니 놀라써요. 그래서 막 이케, 이케, 저도 모르게 막 눈물이 났다요? 



그래떠니 엄마가 화난 얼굴에서 엄청 미아난 얼굴으로 바끼면서 아빠한테는, 하느리 보라구 하고, 저한테 와서 막 꼬옥- 안아줘써요.



그래도 제가 께속 께속 우니까는, 엄마가 하눌이 왜 우러, 울지마. 그렇게 물어봐서, 아빠가 엄마 개로피는거 실타고해써요. 그래서 하지말라구 핸는데 엄마가 화내서 무서었다구.. 



그래더니 엄마가,




"..미안해, 한울아. 요즘 엄마가, 많이 피곤해서, 그런데 아빠랑 한울이랑 마악, 시끄럽게 하니까 갑자기 화가 많이 나서 그랬어. 응? 울지마. 그리고, 엄마는 한울이한테 정말정말 많이 고마워. 아빠한테서 엄마 지켜줘서 진짜 고마워어. 응? 그러니까 울지마. 한울아. 뚝, 해. 뚝!"




하면서어, 엄청 차카게 달래줘찌롱요!



아, 마따. 그리구, 제가 다 울고 나니까, 조금 부끄러어져서 엄마한테 폭 안겼어요. 그랜는데요, 엄마 귀가 엄청 빨간거에여! 그래서 엄마, 왜 귀가 빨개? 하고 무러보니까, 엄마가 한~참 조용히 하고 이따가 이상한 말만 해줘써요. 근데, 이게 무슨말인지 모르겠다요? 






*





…그런데 한울아, 혹시 다음번에 엄마랑, 아빠랑 안방에서. 그러니까 침대위에서 아까처럼 하고 있으면은, 그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게 엄마 도와주는거야. 알았지? 응?



실종



여러분, 장위안입니다.

제가 아끼는 동생 타쿠야가 어서 가족과 친구의 품으로 돌아오길 빕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 타쿠야 어떡해요ㅠㅠ 오빠도 힘내세요.


- 분명 돌아올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 두 분 사이좋은 모습 보기 좋았는데……. 아마 방송으로 다시 볼 수 있겠죠?


저 짧은 문장이 뭐라고, 그새 수많은 댓글이 쏟아진다. 위로하고 응원하는 댓글이 대부분이고, 가끔 한두 개씩 악의적인 댓글도 보인다. 그마저도 애도의 홍수 속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고, 그 비난조의 댓글을 비난하는 댓글이 몇 개씩 달린다. 내 SNS는 곧 ㅠ와 ㅜ가 넘실대는 바다가 되어버렸다. 그 위로 미역처럼 흐물흐물 떠다니는 이름, 타쿠야. 그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뉴스에서도, 신문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기는 쉬웠다. 아무렇게나 채널을 돌릴 때마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 아래에, 타쿠야의 행방을 아시는 분은 부디 제보해달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슬픈 문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진 속의 그는 이까지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내가 녹화 때마다 보던 얼굴이었다. 나를 향해 웃으며 위안이 형, 하고 이름을 부르던 사랑스러운 동생. 나는 텔레비전 속의 그와 눈을 마주하다가 소매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았다. 내 옆에 앉은 줄리안은 내 어깨를 다독여주면서도 나보다 더 많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타쿠야가 사라진 뒤, 비정상회담 녹화는 자연스럽게 기한도 없이 정지되었다. 원래 녹화하기로 했던 당일, 알베르토가 다 같이 모이자고 타일러의 집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었을 것이다.


“타쿠야는 말도 없이 스스로 사라질 애가 아닌데.”


줄리안이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내가 짧게 대꾸했다. 나도 그 애가 어떤 애인지 잘 안다. 자신이 맡은 일이라면 최선의 노력으로 묵묵히 해내는 성격. 유독 책임감이 강해서 어쩌면 지금도 녹화를 걱정하고 있을 아이다. 제가 빠질 때마다 나쁜 일이 생겼다면서요. 이제부터 빠지면 안 되겠어요. 언젠가 작가가 건넨 농담에, 타쿠야도 가볍게 웃으며 받아쳤던 기억이 났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절대 빠지지 말라고 진심 어린 당부를 건넸더랬다.


“제 생각에도 타의로 납치된 게 맞아요. 핸드폰도 꺼진 채 발견되었다면서요?”


타일러가 상기된 얼굴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차라리 돈을 요구하지, 왜 아무 소식조차 없는 거야." 줄리안이 울먹이며 중얼거리자 알베르토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대답했다.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닌 것 같아. 어쩌면 돌려보낼 생각도 없을 수 있어." 그 말에 줄리안이 발끈하며 쏘아붙이려고 하자 알베르토가 재빨리 덧붙여 설명했다. "내 말은, 범인이 타쿠야를 돌려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경찰이 먼저 범인을 잡는 게 빠를 것 같다는 거야."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벌써 실종된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수사엔 진척이 없었다. 아마 이대로 한 달만 흘러도 사람들의 관심은 사그라질 것이고,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일본인 아이돌 실종 사건은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힐 것이다.


“뭐든 해도 좋으니까,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기욤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멍한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뉴스에서 비정상회담 자료화면이 나가고 있었다. 형, 좋아해요! 마침 하얀 가디건을 걸친 타쿠야가 간절한 눈빛으로 고백하고 있었다. 저 날 참 예뻤는데.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심장이 덜컹 하고 내려앉았다. 내게 말을 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아이는 사개월 전부터 내게 마음껏 화를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나를 상대로 화를 내고 싶다는 말에, 화가 난다기보다 예전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타쿠야와 아직 어색할 때의 시절 이야기다.




그 당시엔 개인적인 이미지보다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로 다가오는 게 많아서 딱히 호감이 있진 않았다. 어딘가 긴장한 얼굴, 눈치 보느라 바쁜 눈, 말을 우물우물 뱉다가 기어코 닫히는 입. 내가 그에 대해 기억하는 건 이것들뿐이었다. 세윤 형이 장난 식으로 타쿠야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이 토론 정글에서 벌벌 떠는 한 마리의 애기 사슴. 그 바람에 모두들 큰 소리로 빵 터지고 말았다. 아마 그들이 웃었던 이유는 타쿠야가 그 사슴과 제법 잘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에 혼자 동의하지 못하는 타쿠야는 살짝 찢어진 눈으로 흘기면서 “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고 되받아쳤다. 그러나 다들 소리 내어 웃느라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았다. 오직 나만 웃지 않았다. 그저 타쿠야를 물끄러미 바라봤을 뿐이었다. 타쿠야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씩씩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어색하게 돌렸다. 그건 가엾게도, 영락없는 사슴의 모습이었다. 


그나마 녹화장 밖의 그는 그보다 훨씬 앳되고 어려 보여서 모질게 대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따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떠올리게 만들곤 했다. 방송 중에 토론할 때와 달리 내가 다정하게 챙겨주면 그 아이는 낯선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엄마가 혼낸 뒤 달래주면 어린아이가 으레 짓는, 그 기묘한 표정으로.


“타쿠야, 천천히 마셔도 돼.”


오랜만에 타쿠야가 참여하는 회식자리. 적어도 대여섯 살은 많은 형들 틈에서 타쿠야는 자신에게 주는 술마다 꼬박꼬박 받아 마시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그의 팔뚝을 잡으며 말리자 현무 형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아니, 녹화할 땐 제일 괴롭히면서 여기선 왜 잘해주는 척이야.” 그의 악의 없는 농담에 타쿠야는 날 힐끗힐끗 쳐다보며 조그맣게 “아니에요.”라고 중얼거렸다. “나 너 안 미워해.” 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이 어린애를 보며 나도 모르게 달래듯 한 마디를 뱉었다. 그러자 바닥으로 내리깔던 눈이 일순간 동그랗게 떠지며 날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알아요. 저 괜찮아요.”


그러고는 살풋, 입꼬리만 올려 웃는 것이다. 그것이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하는 말인지, 일본인 특유의 배려하는 화법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타쿠야가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더 예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타쿠야가 내게 경계가 풀렸다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날 무서워하지 않았고, 스스럼없이 농담도 건넬 줄 알게 되었다. 이제 타쿠야는 사슴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그 초기의 모습이 그립기도 했다. 나와 마주칠 때마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과,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던 눈동자, 내 말에 반박 대신 한숨만 씹고 말던 입, 내가 말할 때면 긴장감으로 비틀리던 턱, 그리고 그 근육을 따라 움직이던 점까지. 내게는 그게 좀 아쉬웠다.



  


“그 애, 참 착했는데.”


각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나는 알베르토와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알베르토는 차로 날 집에 데려다주는 내내 의미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타쿠야가 얼마나 착한 애였는지,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타쿠야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지 등등 의문형을 띈 혼잣말이었다. 나는 이따금 그의 말에 동조해주었다. 사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그의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타쿠야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들어가서 차라도 마실래?”


집 앞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기 전, 알베르토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냐. 오늘 와이프랑 외식하기로 했어.” 알베르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한번 던져본 말이라 그다지 아쉽진 않았다. 나는 차가 출발하여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차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외식이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팔자도 좋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녀왔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나는 싱겁게 웃고 말았다. 


현관문 앞에, 타쿠야가 의자에 꽁꽁 묶인 채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날 힘겹게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반갑게 맞아줄 줄은 몰랐네.”


나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테이프로 입이 막힌 타쿠야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쳤다. 땀으로 푹 젖은 이마에 앞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이 안쓰러워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넘겨주었다. 그러자 이윽고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그리고 곧,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검게 멍든 뺨을 적셨다.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다. 아, 또다시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가학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욕구를 애써 다독이며 나는 속과 다르게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땀이 많이 났네. 조금만 기다려. 옷 갈아입고 바로 씻겨줄게.”


내 말에 그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그것을 못 본 척 하며 일어서서 그를 그대로 지나쳤다. 등 뒤에서 꽉 막힌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그건 사자에게 목을 물린 사슴의 단말마 비명과도 같았다.


  


“오늘 알베르토는 외식하러 간다더라.”


타쿠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물줄기를 맞고 있었다. 축 처진 어깨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그는 빨랫감처럼 욕조에 구겨진 채 앉아있었다. 일부러 손만 묶어둔 채로 발목도 풀어주고 테이프도 떼 줬지만 그는 내가 씻겨주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의 나체를 정성스럽게 씻겨준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코를 가까이 가져다대자 그의 몸에서 나와 같은 향기가 났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수건으로 다 닦고 나서 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타쿠야는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옷까지 갈아입힌 뒤에 그를 식탁으로 끌고 와 앉혔다. “저녁 먹자. 뭐 먹고 싶은 게 있어?”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도 안 한 터라, 그냥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스파게티 면을 삶는 동안 나는 평소처럼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줄리안이 어떻게 울었고, 알베르토가 뭐라고 말했고, 기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러자 비로소 타쿠야의 얼굴에 어떤 표정 하나가 떠올랐다. 저걸 절망이라고 읽어야 하나, 아니면 반대로 희망이라고 읽어야 하나. 어쨌든 그가 무슨 반응이라도 보인다는 게 기분이 좋아서 나는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 하나를 던졌다.


“타쿠야, 뭐 필요한 건 없어? 내일 장을 볼 생각인데.”


나는 싱크대에 기댄 채 이번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테이프 때문에 부어터진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가 반복하다가 짧은 대답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풀어주세요.”


그건 내가 원한 대답이 아니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갈수록 타쿠야의 몸이 점점 움츠러든다. 식탁을 사이에 둔 채로 서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어깨가 젖어갔다. 아, 다시 씻기기 귀찮은데. 그렇지만 이렇게 넘어갈 수 없다. 몇 년간의 강사 생활로 얻은 교훈 하나가 있다면, 뭔가를 가르칠 때는 가끔 매도 들어야 한다는 것. 나는 손바닥을 높이 들어올렸다.


“어제도 내가 말했잖아. 그런 못된 말 하면 맞아야 한다고.”


짝.


타쿠야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겨우 멍이 가라앉던 뺨에 다시 손바닥 자국이 부풀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타쿠야가 꽁꽁 묶인 두 팔로 얼굴을 가리려고 애쓰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냐, 너는 한 대 맞아선 절대 정신 못 차려. 나는 그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며칠 사이로 바싹 마른 몸이 힘없이 넘어가 바닥 위를 데굴 구른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발로 힘껏 찼다. 타쿠야의 고개가 푹 젖혀지면서 곧바로 억,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는 분에 못 이겨 그를 몇 번 더 밟았다. 타쿠야는 입술 새로 질질 흐르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내 발목을 잡고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위안이 형,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래. 이래야 너답지. 너는 원래 이렇게 겁에 질린 모습이 더 어울려. 기가 살아서 어깨 펴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나는 내 발 밑에서 부들부들 떠는 사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피가 몰려 붉어진 얼굴이, 참 예쁘다. 여기다가 눈물까지 매달면 더 예쁠 텐데. 슬그머니 발을 거두었다. 그러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고 타쿠야가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내가 가만히 서 있자 타쿠야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동공이 떨리는 게 똑똑하게 보인다. 


“아냐. 말 안 들어도 돼. 어차피 너는 아파야 하거든.”

  

타쿠야의 시커먼 눈동자 너머로 이름 모를 맹수가 비쳤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네 앞에만 서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허기를 느꼈던 것은. 나는 사냥감 앞에서 활짝 웃었다. 그러자 맹수의 입이 벌어지고 이빨이 흉하게 드러났다. 밖에 있는 동안 이빨을 감추느라 꽤나 힘들었다. 심지어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눈물까지 짜내야 했다. 덕분에 용의자인 내게 위로와 동정이 쏟아졌다. 

​타쿠야, 내가 이런 고생까지 감행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그래야 네가 울지. 너는 울어야 예쁘잖아.”


이미 붉게 부어오른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맺힌다. 그래, 그렇게 내 곁에서 영원히 울어야 해. 그가 오직 나 때문에 운다는 사실에, 저녁을 먹지도 않았는데도 허기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줄리안 퀸타르트 X 테라다 타쿠야

애열(愛悅)



 먹는 것, 입는 것, 필요한 것, 지금 당장 손을 뻗어 만져지는 것까지. 그것들은 모두 돈으로 환산되어 가치를 가지는 것들이었다. 그 돈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것은 쉬이 알고 있었으나 그리도 간단하게 제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던 타쿠야는 멍하니 눈을 감고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집중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웅웅 거리며 어렴풋이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 정적만이 가득하던 병실이 드디어 소리를 머금자, 타쿠야는 그제서야 몽롱했던 잠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야 돌아왔구나. 담담히 생각하다가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컥함이 갑작스레 와락, 찾아왔다.



 " 타쿠야, 다녀왔어. 많이 기다렸, "

 " 뭐 하느라 이제 와? "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밝은 목소리의 줄리안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으나 제가 생각하기에도 모난 목소리가 툭, 말을 끊고 튀어나왔다. 날이 서 있는 어투에 걸맞은 못난 얼굴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신경질을 내고 있을 텐데도 줄리안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 물이 다 떨어져서 물 채워 오는 김에 과일도 사가지고 왔어. 귤, 좋아하잖아. "



 애정기가 가득히 들어있는 목소리임에도 탐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경을 잔뜩 거슬리는 기분에 타쿠야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 과일을 즐기는 편이 아닌 줄리안이 굳이 밖으로 나가 과일을 사온 이유가 저 때문인 것을 알면서도 누그러지지 않는 예민함이 끊임없이 타쿠야를 자극했다. 시끄럽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원인 모를 소음이 끔찍했다. 밖의 차가움을 가져온 줄리안의 냉기가, 어렴풋이 맡아지는 바람 내음이. 그 모든 것이 거슬린다. 평온하던 병실이 불편함을 머금기 시작했다. 서서히 팽팽하게 당겨지던 신경이 귤 외에도 갖가지 과일을 사온 것인지 사각사각, 하며 껍질을 깎아 들리는 소리에 타쿠야는 결국 화를 터트렸다.



 " 시끄럽잖아! "



 제 손에 고이 쥐고 있던 베개를 집어던지며 타쿠야가 소리쳤다. 피하지도 않고 맞은 것인지,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고 그 이후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갖 화를 담아 던진 터라 아플 것이 분명함에도 줄리안은 미약한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타쿠야의 신경을 건드린 과일 깎는 소리도 그대로 멈추었다. 헌데도 속이 울렁거렸다. 더불어 머리는 더욱 지끈거리는 느낌에 타쿠야는 제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줄리안은 그저 조용히 베개를 주워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숨소리까지 죽인 채, 천천히 병실 침대로 걸음을 옮겨 조심스레 침대 위에 베개를 올려놓았다. 조용하고도, 조용한. 지독히도 숨 막히던 병실의 틈에서 결국 타쿠야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 ……나, 수술 못 한대. 다른 환자가 먼저 받는 걸로 순서 바꿨대. 그 환자가 돈이 많아서 그러기로 했대. 누구는 벌써 몇 년째인데…… "



 증오를 담았던 목소리에서도 미처 감춰지지 못 했던 떨림이 마침내 흐느낌으로 변해 버렸다. 왜 하필 자신의 차례여야 했을까. 이런 처지에 화가 나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 격렬하게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고, 허탈해하고, 약자의 처지에 있는 것이 너무 억울해 속이 터질 것 같아도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사자에게 향할 수 없는 원망은 제 곁에 있는 유일한 이에게 향했다.



 " 타쿠야. 곧, 차례가 올 거야. 내가 이번에는, "

 " 그래, 오겠지. 그리고 다시 뺏길 거야. 그렇게 다시 몇 년이 그냥 지나고 나면 결국 줄리안도 떠날 거지? 귀찮아서, 힘들어서 버릴 거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갈 거잖아! "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마! 파들파들 떨리는 몸으로도 타쿠야는 끊임없이 독한 말을 쏟아내었다. 그 말이 얼마나 줄리안에게 상처가 되는지, 저에게도 숨 막힐 만큼의 고통을 입히는 말인지를 알면서도 내뱉는 그 일방적인 힐난은 평소에 수십 번도 넘게 생각이라도 한 것인지 막힘없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인 짓인 지를 알면서도 한 번 쏟아내기 시작한 어두움은 그동안 감춰왔던 제 존재를 한껏 보여주고 싶어 했다.



 " 들었잖아. 옆방의 환자, 보호자가 결국 버렸다며? 편지 남기고 사라져서는 연락도 안 된다고. 외국으로 간 것 같다고. "



 사실이 드러났다. 지독히도 감추고 싶었던 어두운 생각. 저와 똑같은 처지의 환자, 그리고 먼저 버림을 받은 환자. 당연한 수순, 어스름한 새벽이면 가끔씩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비명. 끊임없이 애정을 건네주는 줄리안을 알면서도 불안감은 그렇게 매일 양분을 흡수하며 이리 주체를 못할 만큼 성장해버렸다.



  " 줄리안도 버릴 거면, 지금 말해. "

  " ……. "

  " 사실 지겹지? 병수발만 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



 아냐, 사실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빙빙 돌려가며 타쿠야는 차례차례 더 깊게 제 독을 줄리안에게 집어넣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단어도 발음되지 못 했다. 어떤 표정일까. 화가 나 있는 얼굴은 아니더라도 무표정한 얼굴이지 않을까. 제 힐난에 베여 바닥을 흠뻑 적신 상처들은 참으로 진득했다. 자조적인 웃음을 푸흐흐, 터트린 타쿠야는 하얗게 질린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 줄리안, 나는…… "



 버림받고 싶지 않아. 억눌린 울음을 터트리며 타쿠야는 입술을 짓이겼다. 저와 동일하게, 아니, 오히려 더 힘이 드는 것은 줄리안일 텐데도 투정만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한심할까. 실상은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잡아 달라고 하고 싶었다. 부디 아직도 사랑해주기를, 그 사랑으로 제발 이 어두움을, 그 밝은 빛으로 변치 않는 따뜻함을 주기를……. 내 곁에 있어 줘. 타쿠야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지독한 이기심에 더욱 강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제 이기심에 이미 휘둘리고 있는 줄리안인데도 모자란 것인지, 파들거리는 입이 자꾸만 달싹거렸다.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욕심은 끝이 없는 듯했다. 간간이 작은 울음소리만을 새어내며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끊임없이 억누른 채, 가쁜 숨을 내쉬던 타쿠야는 제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이는 손길에 흠칫했다.



 " 날씨가 많이 춥더라. 쌓였던 눈이 얼어서 조심해서 걸어야 해. 하늘도 맑아서 햇빛이 밝은데, 구름이 솜사탕같이 생겨서 하얗더라. "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듯 찬찬히 말을 시작한 줄리안의 얘기에 타쿠야는 결국 쌓아두었던 둑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 가지 마, 줄리안. 제발 사라지지 마. "



 언제나 들려주는 줄리안이 보는 세계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시작하는 그 다정함이 두려웠다. 보지 못함에도 눈앞에서 그려지듯 세세한 설명으로 그림을 그려주는 그 온기는 잃어버릴까, 매일을 숨죽여야 했다. 지금도 저와 똑같이 타들어갔을 속을 보이지 않은 채, 저를 달래주는 손길과 그 따스한 이야기가 행복했다. 그 모순되는 감정은 저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들이었다. 불안한 행복을 온전한 행복으로 만들어 주는, 만들어 주려는 사람. 어쭙잖은 동정의 말이 아닌 위로는 어두움도 부드럽게 보듬어주고 있었다.



 " 딸기도 있더라. 그런데 색이 별로 안 예뻐서 안 사 왔어. 다음에 빨갛게 익은 걸로 사 올게. "



 여러 가지 색으로 곱게 덧칠해진 줄리안의 얘기가 끝날 때 즈음에야 타쿠야는 울음을 멈추어갔다. 한순간도 끊임없이 어깨를 토닥이던 손길도 그제서야 멈추며 타쿠야의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 목은 안 아파? "

 " ……괜찮아. "



 옅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 타쿠야의 답은 신빙성이 없었기에 줄리안은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컵에 따랐다. 몇 차례 짧은 기침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사라지며 타쿠야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새로이 병실을 채웠다.



 " 어디 아파? "

 " 아직 감기가 안 나아서 그래. 옮기면 안 되니까 오늘은 오래 못 있겠다. "



 타쿠야의 손에 물컵을 쥐여주며 줄리안이 장난스레 답했다. 더듬더듬, 헛손질을 하던 타쿠야는 물컵이 들려있지 않은 손에 잡힌 줄리안의 손목에 미간을 구겼다. 요 근래 추운 날씨는 지독한 감기도 선물로 준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제 병원비와 수술비를 감당하기 위해 일을 더 많이 하기 시작해 말라가는 줄리안의 몸을 더욱 가늘게 만들어버렸다. 일에 치여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는 몸이니 감기가 피해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밥 먹고 다니라고 했잖아요. "

 "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반말해도 돼. "



 이제는 서로 익숙하게 반말로 대화를 하지만 가끔 오늘처럼 타쿠야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존댓말로써 못다 한 미안함을 내비치는 타쿠야이기에 줄리안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타쿠야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제서야 타쿠야도 슬그머니 미소 지어 보였다.






 선물을 받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더불어 그 선물이 조금도 탐낼 수 없었던, 예상치 못한 선물일 경우에는 더더욱이. 자꾸만 기쁨에 달싹거리는 입술이 간지러워 잘근잘근 물며 타쿠야는 초조함에 손만 꼼지락거렸다. 빨리 이 소식을 전하고 같이 벅찬 기분을 나누고 싶어 타쿠야는 작게 들리는 소리 하나에도 민감하게 몸을 움직였다.



 " 타쿠야, 뭐 하고,"

 " 줄리안! "



 마침내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줄리안의 이름을 부르는 타쿠야의 외침에 줄리안은 몸을 흠칫하다 푸흐흐, 웃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확연히 행복을 머금고 있는 타쿠야의 얼굴은 줄리안에게도 기쁨이기에, 줄리안은 전하려던 이야기를 삼키고서 타쿠야에게로 다가갔다.



 " 무슨 좋은 일 있어? "

 " 나, 수술한대! 한 달 안에 할 수 있다고 오늘 얘기 들었어! "



 살짝 쿡, 찌르기가 무섭게 와르르, 정보를 쏟아내는 타쿠야의 두 뺨은 보기 좋은 다홍빛으로 곱게 물들여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저 또한 벅찰 정도로 느껴지는 기쁨에 줄리안은 그 모습을 찬찬히, 하나하나 눈과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잊을 수도 없고, 잊기도 싫은 고운 그림. 타쿠야의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줄리안은 오랜만에야 생기를 머금은 타쿠야의 뺨을 조심스레 제 손으로 덮었다.



 " 그런데 타쿠야, 내가 이번 달은 일이 바빠서……. 수술 날에 같이 못 있을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

 " 괜찮아. 나 때문에 못 오는 거잖아. 이제 수술 끝나면 줄리안은 당분간 푹 쉬어. 내가 줄리안 호강 시켜줄 거야. "



 벌써부터 희망에 부풀어, 미래의 계획을 말하는 타쿠야의 뺨과 머리를 번갈아 쓰다듬던 줄리안은 이내 굳은 다짐이 서려 있는 목소리로 타쿠야의 말을 막았다.



 " 호강시켜 주기 전에 나랑 약속할게 몇 가지 있어. "

 " 약속? "

 " 응, 약속. 수술하고 나서 다시 보게 된 게 기쁜 이유가 아니면 절대 울면 안 돼. 내 얼굴 보고 나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기. 고맙다는 말만 해야 해. "

 " 그게 다 뭐야… "



 신이 나 말을 잇던 타쿠야는 순식간에 하강된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항상 먼저 선수를 치는 줄리안은 지금껏 고생시킨 저의 입에 미안하다는 말, 한 번을 내보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볼 수는 없어도 분명 잔뜩 우울함을 머금고 있을 것이 분명할 얼굴에 타쿠야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안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을 망설일까. 그것은 타쿠야가 지금껏 저만을 위해 살아와 준 줄리안에게 당연시해야 할 일이었다.



 " 착하다. 상으로 타쿠야가 가고 싶어 하던 곳에 나도 빠짐없이 다 같이 갈게. 절대 귀찮아하지 않고 타쿠야가 보는 모든 것을 나도 같이 볼게. 평생을…, 함께 할게. 타쿠야가 보고 싶어 했던 하늘이랑 노란 달도 같이 보자. "

 " ……나는 줄리안 얼굴이 제일 보고 싶어. "



 목이 메이는지 잠시 말을 멈추던 줄리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이 마치 고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습기를 머금어 가득히 가라앉는 병실의 공기를 애써 깨뜨리려 타쿠야가 장난스레 답했다. 이제는 웃는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반드시 그렇게 만드리라, 다짐하며 말한 타쿠야의 말에 줄리안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타쿠야의 볼을 꼬집었다.



 " 나 엄청 못생겨져서 안 돼. 안 보여줄 거야. "

 " 그럼 제일 먼저 성형으로 호강시켜줘야겠네. "

 " 뭐? 차라리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

 " 아, 그건 싫어요. "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는 타쿠야의 말에 한껏 상처받았다는 목소리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흐느끼는 줄리안의 말에도 타쿠야의 답은 변함히 없었다. 수도 없이 겪어온 장난질인데 진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헌데도 참 이상하게 어딘가가 무거웠다. 눈을 뜨며 이 기시감이 사라질 수 있을까. 묘하게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타쿠야는 밝은 줄리안의 웃음소리에 집중했다. 빨리 보고 싶다.


테라다 타쿠야 X 블레어 윌리엄스

"아무도 없느냐"


한밤중, 문너머 방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데다가 잠도 못잔 상태에서 눈을 끔뻑거리며 대답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문 밖에 서있지 말고 들어와라."


들어오란 말에 할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화장실만한 침대에 그와 맞먹는 큰 책상.

그리고 그 뒤로 꽂혀진 수많은 책들.

들어올때마다 항상 놀라는 왕의 방이다.

거울앞에 어질러 놓여진 귀걸이 여러개를 보며 하나쯤은 없어져도 모르지않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접어두고 대답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실례는 무슨, 내가 필요한게 무엇인거 같으냐?"

"한방중인데도 아직 침소에 드시지 않으신설 보니 독서를 위한 책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라며 책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묻자 타쿠야가 웃으며 대답했다.


"책보다 더 재밋는건 없을까? 아, 물론 책처럼 볼때마다 새롭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것말이다."

"…그게 무엇인지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침대에 기대듯이 앉아있는 그가 이쪽으로 오라고 까닥까닥- 손짓을 한다.

다시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가니 그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뻔히 쳐다본다.


"왜 너는 내가 부르면 항상 한숨을 내쉬느냐?"

"‥예?"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하여 반문하고 말았다.


"내가 너를 부르는게 그렇게 싫으냐?"

"예? 아닙니다 제가 왜 전하를-"

"그렇다면 웃어보거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처럼 나에게도 웃어보란말이다."


내 입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그에게 근육을 움직이며 웃어보였다.


"그런 웃음 말고."

"‥아하하하"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데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나는 항상 너를 생각하고있는데 왜 내 맘을 몰라주는거야"



**



이른 아침부터 사신맞을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던 블레어를 스치듯이 본 후로 밤이 되도록 그를 보지 못하였다. 하루종일 깐깐한 사신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해져있지만 그럴수록 그가 보고싶었다.


"아무도 없느냐"


문밖에서 블레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들어와서 말하지, 얼굴을 보고싶은데말이야. 오늘은 두 번밖에 못봤는데. 다음부턴 사신을 오지 말라고 해야하는건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말도 안되는 상상이 들쯤에야 생각을 멈추었다.


"문 밖에 서있지 말고 들어와라."


그에게 들어오라 말하자 조심스레 들어와 거울앞에 어질러진 귀걸이를 빤히 쳐다본다. 귀걸이에 관심이 있었나? 하며 그의 얼굴을 살피니 귀에는 이미 여러개의 귀걸이가 꽂혀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대하는걸 알면서 항상 예의를 갖춘다.

그럴수록 그냥 군신관계가 되는듯한 느낌을 받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몇시간만에 보는 그였기에 참고 넘어갔다.


"실례는 무슨, 내가 필요한게 무엇인거같으냐?"

"한밤중인데도 아직 침소에 드시지 않으신걸 보니 독서를 위한 책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책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순진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그의 모습에 괜히 귀여워 웃음이 났다.


"책보다 더 재밌는건 없을까? 아, 물론 책처럼 볼때마다 새롭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것말이다."

"…그게 무엇인지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옆으로 드러난 하얗고 얇은 목선. 그리고 그에 대조되는 대답하며 오물거리는 빨간입술. 아, 씨.발. 욕은 안하려했는데 너무 섹시하다. 정녕 나를 시험하려는건가. 솔직히 이정도면 많이 참은거야. 아니 참은 내가 부처지. 야설스런 생각을 하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가락으로 까닥까닥- 손짓하니 그가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다가왔다.


"왜 너는 내가 부르면 항상 한숨을 내쉬느냐?"

"‥예?"


생각지도 못했는지 당황한 역색이다.


"내가 너를 부르는게 그렇게 싫으냐?"

"예? 아닙니다 제가 왜 전하를-"

"그렇다는 웃어보거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처럼 나에게도 웃어보란말이다."


다가가려하면 항상 한숨부터 쉬는 그에게 심술이 났다. 나한테도 웃어줬으면 좋겠다며 그의 입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그가 근육을 움직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웃는게 아니잖아-


"그런 웃음 말고."

"‥아하하하"


멋쩍은 웃음을 짓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나는 항상 너를 생각하고 있는데 왜 내 맘을 몰라주는거야."



**



"아직도 모르겠느냐. 나는 항상 너를 생각하고있는데 왜 내 맘을 몰라주는거야."


큰, 아니 크다못해 거대한 방 안에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자신의 목덜미가 점점 축축해지는게 느껴진 남자는 당황하여 말도 제대로 못하며 반항도 하지 못했다. 그걸 느낀 다른 남자는 일부러 외설스러운 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빨다가 당황한 남자의 귀에 자신의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나도 많이 참은거야, 너도 알았잖아 내가 어렸을때부터 널 좋아했던걸. 오늘 밤은 기니까 말인데 뜨겁게 보내야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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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런ㅇ마ㅣ럼ㄴ이럼니러ㅣㄴㅁㄴㄹ어니망ㄹ닝 내 글 읽지 마세여 핵노잼ㅠㅠㅠ 그래도 주최정 수고했어ㅠㅠㅠㅠㅠ
그리고 다음부턴 다들 합작 신청할 때 책임감 갖고 했으면 좋겠다ㅠㅠㅠ

9년 전
독자2
내가 합작 꼼꼼히 읽어봤는데 다들 금손정들이었는걸! 너정도 수고했어(어깨 주물주물)
9년 전
독자3
심장 멎을뻔 해써ㅠ
9년 전
독자6
응응 미안미안T.T 나도 삭제됐다는거 보고 깜짝놀랬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임시저장된게 있어서 다행이지 어휴.. ㅇ<-<
9년 전
독자62
다 읽었다ㅠㅠㅠㅠ 고생했어!!! 자주 읽으러 오게 될 거 같아
9년 전
독자4
순간 놀랬어ㅠㅠ 총대정도 수고했고 합작 열어줘서 고마워! 마지막까지 고생이 많아ㅠㅠㅠ 금손정들의 글을 볼 수 있어서 좋다!
9년 전
독자8
놀랐다니 미안해ㅠㅠㅠ 아냐 참여정들이 수고했지!! 나두 금손정들 글 볼수있어서 좋아ㅋㅋㅋㅋㅋㅋㅋ 헤헤
9년 전
독자5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수고했어 너정도!!
9년 전
독자10
고마워 아벨라정♡♡
9년 전
독자7
옴마.. 지금 내글 다시보는데 왜이렇게 곰손이죠...(눈물) 아무튼 수고많았쪙 ㅠㅠㅠ
9년 전
독자12
잉 아냐아냐 내가 하나하나 읽어봤는데 다들 금손정들이었는걸!! 너정도 수고했어(어깨 주물주물)
9년 전
독자9
주최정도 수고했어!! ㅠㅠㅠㅠㅠㅠㅠ 와 진짜 이제 하나하나 읽어봐야지 금손들 파티!!! 물론 나를 제외하고....(울컥)
9년 전
독자14
고마워!! 너정도 금손정이야^~^♡♡ 수고했어!!
9년 전
독자11
슼슼해놓고 나중에 봐야겠다ㅠㅠ 금글들을 비몽사몰한 상태로 볼수 없어.. 총대정 작가정 정말정말 수고 많았고 고마워 ♥
9년 전
독자1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응응!! 다들 글 그림 퀄리티 다 높으니까 천천히 열어봐 두근두근한 맛이 있어:D
9년 전
독자13
내 글... 하... 보내지 않을 수 없어 보냈지만...
신청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16
아냐아냐!! 너정이 무슨 글인진 모르지만 다 금글이었는걸^.T!! 수고했어~~(어깨주물주물)
9년 전
독자19
아! 바보같이 이 말을 빼먹었구나. 주최정 정말 수고 많았어 ㅠㅠ
9년 전
독자20
고마워 너정도 수고했어!!
9년 전
독자17
내 글은 여전히 금글들 사이에 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스크랩 해놓고 씻고와서 읽어야지. 주최정이 제일 수고 많았어♡ 이런 금글들 한 번에 모아서 볼 수 있게 합작 주최해줘서 고마워! 사랑해!
9년 전
독자18
아냐아냐 너정도 금글^~^♡ 내가 하나하나 읽어봤는걸! 너정두 수고했고 나도 고마워! 사랑해!!
9년 전
독자21
슼슼해놓고 내일 일어나서 봐야겠다ㅠㅠㅠㅠ 고마워 쓰니야ㅠㅠㅠ 그리고 금손정들도 고맙당ㅠㅠㅠㅠㅠㅠㅠ 다들 내 하트 머겅♡♥
9년 전
독자23
응응 천천히 읽어봐:D 하나하나 개성넘쳐서 열어볼때마다 두근두근할거야!!
9년 전
독자22
무슨 문제있어서 글 내린 줄 알고 걱정했잖오ㅠㅠㅠㅠㅠㅠ 주체정 정말 고생했어! 이런 좋은 결과물 줘서 감사해욥 아벨라정~!!!!!
9년 전
독자24
아냐아냐 그냥 내가... 마지막까지 허당짓해서그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까지 모지란짓해서 미안해T.T!! 고마워~~!! 너정도 아벨라!
9년 전
독자25
와마이너ㅠㅠㅠㅠㅠㅠㅠ일단선스크랩후감상ㅠㅠㅠㅠㅠ다읽ㅇㅓ버ㅏ야지ㅠㅠㅠㅠㅠㅠㅠㅠ후ㅠㅠㅠㅠㅠㅠㅠㅠㅠ쓰니도고생많이했어!!!!
9년 전
독자26
참여정들이 다들 개성넘쳐서 하나하나 열어보는 재미가 있어:D 천천히 읽어봐! 고마워~~
9년 전
독자27
세상에 엄청 대박이다 신청 안 하길 잘했엌ㅋㅋㅋㅋㅋㅋ 다 금글이라 내 글은...☆ 후 작가분들 수고 하셨고 주최정도 수고했어!ㅠㅠㅠㅠㅠ 힘들었지 너무 좋은 글 잘 보고 가. 앞으로도 건필해!
9년 전
독자28
너정도 참여했으면 좋았을텐데!! 분명 금손정이었을거야=D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9년 전
독자29
와아ㅠ 글이 다 좋당ㅠㅠ 작가정들 진짜 쓴다고 고생많았어. 막 갈아엎고 그랬을 꺼 아니야. 못 쓰기는 무슨, 잘 쓰는 구만!!
주최정도 힘들었지! 그래도 이런 좋은 글들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버~
다음에도 또 이런 합작 열어줘야돼~!

9년 전
독자3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음에도 합작 열 기회가 있음 좋겠다!! 재밌게 읽어주면 좋겠어=D
9년 전
독자30
으아아아아앙 드뎌 공개구나ㅠㅠ주최해준 너정 진짜 아벨라~ㅠㅠ 재미있는 경험이었엉 보내는 게 좀 많이 늦었는뎈ㅋㅋㅋㅋ 총대정이 수고 정말 많이했어욥!!! 나도 일단 스크랩해놓고 천천히 읽어봐야게따 금손정들 작품 볼 생각에 벌써부터 신난다^ㅂ^! 고마워 정아ㅜㅜ 좋은 밤 보내!!ㅇ.<
9년 전
독자31
아냐아냐 보내준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T.T!! 너정도 수고했어!! 하나하나 열어보는 재미가 있을거야ㅋㅋㅋㅋㅋㅋㅋ 너정도 쫀밤되길!
9년 전
독자33
와 금글 정모가 열렸단 소식을 듣고 왔는데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퓨ㅠㅠㅠㅠㅠ너무좋다 정말 나중에 또 정독하러 올거야..☆★
9년 전
독자35
ㅁㅈㅁㅈ 다들 금글!! 그림도 금손정들만 모였어T.T 언제든 정독하러와 ㅇ_<!!
9년 전
독자34
어디에 숨고싶다 ㅠㅠ 이런 금손정들... 내가 이 커플링을 망칠줄이야ㅠㅠㅠㅠ Hㅏ...ㅠㅠㅠ
9년 전
독자36
숨긴 어디에 숨어(끌어내기) 너정도 금손정인걸^~^♡ 수고했어 정아!!
9년 전
독자37
쓰니도 수고했어. 좋은 기회 줘서 고마워!
9년 전
독자41
응 나두 참여해줘서 고마워~~~
9년 전
독자38
우와아아아 진짜 다 금손들ㅠㅜㅜㅠ참여한 금손 정들 주최해준 너정 모두 다 고생 많았겠다ㅠㅜㅠ다 정말 너무 고마워^ㅇ^이런 합작 앞으로도 자주 열어주면 좋겠당ㅎㅎ 슼슼해놓고 두고두고 볼께♥
9년 전
독자40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나두 이런 합작이 자주 있음 좋겠어!! 천천히 읽어봐~
9년 전
독자39
퓨ㅠㅠㅠㅠㅠ 이제와서 내 글 읽어보니까 존댓말 수정 안 했..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으으 몰라아 ㅠㅜㅠㅠ 금소니들 왜 이렇게 많은거야 엉엉 ㅠㅜㅜㅜㅜㅜㅜㅜ 으읅 총대야 정말 수고 많았어 ㅠㅜ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43
아 그래? 어떤 글인데? 말해주거나 메일로 수정할부분 보내주면 최대한 수정해볼게T.T 그래도 너정 짱 짱 수고했어! 아벨라정♡ 고마워~
9년 전
독자49
알로 두번 째 그을인데 에잏! 몰라 그냥 두지 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고쳐보니 다 어색하네잉 으으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수고 많았어욥 아벨라♥️무사히 끝내서 다행이다♥️♥️
9년 전
독자50
잉 그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정도 수고했어욥!! ♡♡
9년 전
독자42
저기... 쓰니야 지금 있니?
9년 전
독자44
아하.. 앞에 미.친.놈 그 표현은 수정했던거같은데 내가 놓쳤나보다T.T!! 지금 수정해줄게!!
9년 전
독자45
정말 고마워!! 사랑해 쓰니!
9년 전
독자47
지금 수정했어^~^♡
9년 전
독자46
나...나만 만...만화다... 으어.... 대니로빈 영업당해주세요... 헤헤.... 영업당해주세요.... 영업...(먼지가 되어 사라짐
9년 전
독자48
너정 만화 나까지 설레면서 봤어!! 영업당하는 정들 분명 있을거같아 사라지지 말구T.T!! 아벨라정 수고했어!!
9년 전
독자52
고마워 ㅠㅠㅠㅠㅠ 늦게 보냈는데도 올려줘서 정말 고맙고 ㅠㅠㅠ 에효 ㅠㅠㅠㅠ 나정을 혼내줘 ㅠㅠㅠ
9년 전
독자54
아냐아냐 보내줘서 고마워..T.T... 요건 진심.... 진짜진짜 수고했어(어깨주물주물)
9년 전
독자51
헐 금소니 대박 ㅠㅠㅠㅠㅠㅠㅠ 나 영업 당함 ㅠㅜㅜㅜㅜ 핡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살려줘어 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53
ㅠㅠㅠㅠㅠ 영업당했다니!! 넘 기뻐 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57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괜찮아 나도 그림이야! 너정 만화 읽으면서 정말 내 페이지는 펴지 말자고 파이팅넘치게 다짐했어... 고맙습니다 금손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58
아냐아냐 너정이 금손이지 ㅠㅠㅠㅠㅠㅠㅠ 너정 그림 봤는데 진짜 짱이야 ㅠㅠ 둘다 닯았고 그림체도 좋고 ㅠㅠ 금손정 감사합니다 ㅠㅠ
9년 전
독자5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 나 왜 여기있지...?(동공지진) 나는... 나는 해로운... 폐기물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나하나 다 보고 다 읽어봤는데 진짜 여긴 성지다 성지 잇츠 리얼 핫플레이스 나 매일 한번 성지순례 올 기세야 지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주최정 진짜 정말 정말 고마워!!!!! 편집하고 모집하고 공지하느라 고생 많았을텐데 이제 한시름 놨네 수고했어8ㅁ8 펑크때문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을텐데... 주최정 뿐만이 아니라 정말 모든 참여정들 그리고 읽어주는 모오든 그취정들에게... 치어스...☆
9년 전
독자56
폐기물이라니 그럴리가 없어T.T 그치 다들 금손정들이라!! 나도 업로드하면서 신났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맙다니 헤헿 쑥스럽다!! 나두 고마워^~^♡♡
9년 전
독자59
타...타쿠안이 없..없네...ㅠㅜ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60
마이너합작이라 메이저는 신청을 아예 안 받았어~
9년 전
독자61
아아 마이너였구나
9년 전
독자63
흙 닥치고 슼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6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스크랩하구 천천히 봐! 다들 금손정들이라 보는재미가 있따=D
9년 전
독자65
아아아...내 글....보잘 것 없어보인ㄷㅏ...★다들 금손이다ㅜㅜㅜㅜㅜㅜㅜㅜ주최정 수고했어어!!!
9년 전
독자66
너정도 금손인걸!! 너정도 수고했어^~^♡♡
9년 전
독자67
으아아아 나 무슨 자신감으로 저걸 보냈짘ㅋㅋㅋㅋ 고생했어 정아!!! 이렇게 일일이 숨김글 하는 것도 일이었겠다 ㅠㅠㅠ 고마워요!!
9년 전
독자68
아니야 너정도 수고했어^~^♡♡♡!!
9년 전
삭제한 댓글
(본인이 직접 삭제한 댓글입니다)
1년 전
독자70
너정 좋은 글 내줘서 고맙고 수고했어^~^♡♡♡♡♡
9년 전
독자71
대박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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