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학교는 잘 다니고 있니?"
"네. 다 회장님 덕분이에요."
"은하 저번에 상도 탔어요. 진짜 천재라니까 얘?"
백현의 허풍에 단란히 모여 앉은 일가의 눈길이 저들이 거둔 소녀를 향해 쏟아졌다. 내 앞에 놓인 반찬만 깨작거리던 나는 그들의 관심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입에서는 따뜻한 쌀알이 퍽퍽히 굴러다녔다. 이것도 집에 가면 다 게워낼 터이니 어찌 보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끈질긴 시선에 속이 뒤틀린 듯 메스꺼워졌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변백현은 생글 거리기에 바빴다. 그 태도는 마치 새로 산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와도 흡사했다.
"뭐 필요한 건 없구?"
"저는 종이랑 펜만 있으면 되는걸요."
"그래?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렴."
"아뇨. 지금도 충분히 감사해요."
내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사모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희들이 고아 소녀의 재능을 피워냈다는 뿌듯함이 그 연유일 것이다. 회장님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7년 전에 은하 너를 데려왔던 일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지. 의미 없는 찬사에 나는 다시 기계적인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 말은 내가 아무 재능도, 쓸모도 없는 존재였더라면 나를 후원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울적한 기분에 빈 웃음만을 내보이자 백현은 실실대며 제 아버지에게 간언을 올리기에 이른다.
"아빠, 은하 오피스텔에 키보드 하나 놔주면 안 돼요?"
"......"
"은하 작업실도 너무 좁고... 응?"
회장님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행해 온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제야 결실을 맺고 있는데 그깟 키보드 하나 마련하는 게 어려울까? 하지만 아마 이해관계에 밝은 회장님의 사업가 기질은 둘째였을 것이다. 그것이 변백현의 부탁이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겠지. 제가 끔찍이 사랑하는 막내아들의 말인데 무얼 못 들어줄까. 회장은 그 대상이 변백현이라면 세상이라도 내어 줄 사람이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병을 달고 살았던, 죽음에까지 이를 뻔했던 가여운 아이. 회장 부부에게 있어 백현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존재, 하늘이 내린 선물과도 같았다. 변백현을 흘끗거리던 나는 맞은편에 앉은 이현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던 그 얼굴은 시선이 맞물림과 동시에 다시 말간 웃음을 짓는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울렁임을 느꼈다. 가식 가득한 모습에 속에서는 구토감이 잔뜩 일었다.
호흡
作 이플라
키보드까지 두들겨가며 작업을 할 정도로 음악에 열정이,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거듭해서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님은 끝내 내 작은 보금자리에 신형 키보드를 들여놓으셨다. 물건을 경비실에 맡겨뒀다는 택배 기사의 문자를 받고 다시 포장해 돌려보낼 생각을 했건만, 레슨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포장은 이미 다 뜯어진 후였다. 변백현이 희고 매끈한 키보드 건반을 꾹꾹 내리누르고 있었다. 내 등장에 녀석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방싯댄다. 웃는 꼴이 꼭 개새끼 같다. 말 잘 듣는 개새끼. 변백현은 웃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건네온다.
"비밀번호 바꿨어?"
개새끼는 아니구나. 세상 어느 개새끼가 무단 침입을 하겠어. 변백현의 확인 사살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 키가 제게 있는데도 변백현은 굳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오는 편을 선호했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기분이 좋다고 했던가. 그리고 나는 변백현이 좋다면야 언제고 비밀번호를 바꿀 의향이 있다. 변백현이 선물한 가방을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자 변백현은 샐샐 웃으며 묻는다.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아니."
"물론 안된다고 해도 자고 갈 거야. 알지?"
그럼 그러던가. 나는 픽 웃으며 눈을 감았다. 한산히 침묵이 내리 깔린 집 안에는 피아노 소리가 요동쳤다. 귓가를 자극하는 선율에 나는 끌어안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저주받은 재능은 타인에게는 기쁨을 가져다 주나, 정작 그 자신에게는 기쁨을 주지 못한다. 이 세상에는 재능을 갈망하는 사람이 넘치고 넘쳤는데, 하필이면 신은 왜 부족함 없는 너에게 재능을 주셨을까 백현아.
"내 곡은 잘 쓰고 있는 거지?"
"......"
"기대할게. 은하야."
나는 침묵했다. 변백현에게 있어 피아노는 그저 장난과도 같았다.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의 취미 생활 정도나 될까. ...어쩌면 변백현에게 있어 피아노는,
"네가 내 곡 작업하는 생각만 해도 미치겠어."
그저 나와 접할 수 있는 매개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변백현은 잘게 웃으며 선율을 이어나갔다. 쇼팽의 겨울바람이었다. 나는 점차 거세지는 선율에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런 감흥 없이 손을 놀리는 변백현의 옆모습이 시선 가득 차올랐다. 네 재능은 신의 축복이 아닌 신의 저주다. 곡을 연주하던 백현은 악보의 중간 부분을 무자비하게 끊어내 버리고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쇼팽이고 베토벤이고 진짜 재미없다. 네가 만들어 준 곡이면 하루 종일 칠 텐데. 말하며 비실대던 변백현은 내 옆에 앉아 물어온다.
"은하야, 고등학교 졸업하면 뭘 할 거야?"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백현에게 나는 소리 없이 외쳤다. 백현아 나는 한국을 떠날 거야. 네가 모르는 곳으로 갈 거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내게 변백현은 찬찬히 제 사상을 각인시킨다.
"나는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갈 거야."
"......"
"너랑 같이."
나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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