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y, the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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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하게 변한 빛바랜 색의 달이 한줄기의 빛이 되어 세상을 밝힐때가 되서야 잠이 든 태민은 생생하게도 들리는 바람소리와 그것에 스쳐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눈을 감고있지만 시야 가득하게 남아 선명하게 춤을 추듯 떨어진다. 시원한 바람이 태민의 코끝을 간지럽혔고 곧 귓가에 어롱거린다. 「태민아. 이태민.」 분명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건만 듣는 순간 애잔할정도로 그리움이 감돌았다. 「누구세요?」 더이상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불안에 감정이 순식간에 온 몸을 휘감았다. 배가 사륵 사륵 아파온다. 한번 더 크게 소리쳤다. 「누구세요?」 어느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정말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지 알 수 없을만큼 멀리 서 있지만 선명하기 짝이없는 남자가 뒤를 돌았다. 그 순간 태민은 확신했다. 우린 분명 처음이 아니다. 그렇죠?
남자는 서글픈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태민이 아닌 어둠으로 가득한 길을 바라보았다. 그의 다부진 어깨가 굳어서 어색하다. 남자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태민은 움직일수조차 없었다. 「안되요. 가지마요!」 더 크게 악을 지르며 소리를 치지만 남자는 끝끝내 어둠 속 심연에 가득히 깊게 잠겨 늪으로 빠졌다. 「안되요! 안된다구요!」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강하게 요동치며 그를 향해 손을 뻗지만 어느새 태민의 주위는 환한 빛으로 물들어 간다. 하지만 그것은 빛의 어둠이었다. 태민, 그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빛이 더욱 강하게 죄어와 제대로 눈조차 뜰 수 없을때 현실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주위가 어둡기도 하지만 조금은 밝은 것이 새벽녘이었다. 턱끝까지 땀방울이 잔뜩 매달린것을 태민은 소매자락으로 닦아냈다. 눈을 뜨자 처음 보인 그것은 꿈속에서의 남자가 고통에 일그러져 죽어가던 표정이었다. 그 표정과 그의 달콤하고도 쓰라린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태민은 그것이 더욱 더 낙인처럼 온 몸을 파고들때마다 숨이 넘어갈 듯 몰아쉬었다.
“죽을 것 같아….”
최상의 악몽이었다.
*
“보고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태민님의 기운이 강해짐과 동시에 제이를 봉인하고 있는 주술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띄게 일그러진 표정의 민호가 검붉은 선혈로 가득하게 차오른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리 강하지 않는 타격에도 와인잔은 금이 가서 위태롭게 선혈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태민의 성인식이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 한 달. 한 달 남았습니다.”
와인잔이 깨지면서 선혈이 하얀 바닥에 여기 저기 볼품없이 튀겨버렸다. 민호의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던 찬열이 그것을 바라보더니 티나지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침착하던 그의 심정이 이렇게나 조급하고 불안하다는것을 알리고 있는 증거였다.
“모두에게 알려라 이태민을 데려온다.”
“예.”
검은 하늘을 오로지 비추고 있는 붉은 달은 민호를 잡아먹을 듯이 커다랗다. 민호는 그 달을 노려보듯 눈을 가늘게 떴다.
“김종인에게도 슬슬 명령을 내려, 친구놀이는 그만하라고.”
“…예, 그럼 이만.”
찬열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곤 방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민호의 기가 평소와는 달리 몇배는 강하게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기는 저택의 복도를 한참이고서야 걷자 서서히 멎어들어갔고, 찬열은 곧 바로 종인의 방으로 들어섰다. 노크도 없는 배려가 꽤나 기분이 상했는 듯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 상의를 탈의한 채 머리를 말리던 종인이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보스께서 명령하셨다.”
“….”
“친구놀이는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결국 이태민을 각성시킨다는건가.”
“제이가 봉인에서 풀려나는것을 감지하시고는 불안하신가 보더라고.”
냉장고을 열어 차갑게 얼린 알약을 꺼낸 종인이 제일 가까이 있는 글라스에 손을 뻗어 물을 따르곤 알약을 떨어트렸다. 물에 닿는 동시에 알약은 사라져버리고 붉은 피만 남았다.
“왜 하필 나인지 모르겠군.”
피를 마시며 찬열을 쏘아보는 표정에는 적대심이 가득했다. 둘이 같은 팀을 이룬지도 벌써 몇천년이 흘렀지만 여전한 그의 눈빛은 찬열을 자극했다. 재수없지 않을수가 없다.
“그야 그 싸구려 로맨스 드라마때문 아니던가?”
불쾌감을 어김없이 들어내며 조롱이 가득하게 웃어보이는 찬열의 눈동자가 붉은색을 띄며 빛이 났다.
| 하와 |
궁금한 점은 댓글로 쏴주시면 이해하기 쉽게 써드릴께요~ 근데 프롤로그라기에는 너무 긴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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