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은 여전히 높고 맑았다. 불그스름한 빛을 내며 서서히 타오르는 노을이, 저 높은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와 닮아서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사이사이로 역한 냄새가 풍겨져 오는 것만 빼면 아직까지는 살만하다고, 성규는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폭음은 여전히 진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적응을 못해 먹먹거리던 귀도, 쉴 새 없이 떨려오던 손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4일. 4일만이었다.
" 형. 배고파. " " 참아. 너만 배고픈 거 아니야. " " 건빵 하나만 더 주면 안돼? 형아. 응? " " 너 자꾸 철없는 소리 할래? " 성열이 황급히 성종의 입을 막았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삐쩍 골은 몸이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처음 이 곳에 오던 날에 받았던 미숫가루 세 봉지는 태풍을 만난 그 날, 모두 물에 떠밀려 내려가버렸다. 남은 건 건빵 한 봉지 뿐이었다.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고개를 숙인 성종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열이 자신의 주머니 속 건빵 봉지를 몰래 꺼내보았다. 하나, 두울, 셋. 딱 한 끼 양이었다. 내일 아침, 성종에게 주면 딱 끝날 양.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하나뿐인 동생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저멀리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규가 안주머니 깊숙히 박혀있던 아직 뜯지 않은 건빵 봉지를 꺼냈다. " 이성열. " " 어? " " 이거라도 가지고 가서 동생 먹여. 한참 먹을 때잖아. 이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차겠지만. " 얼떨떨해하던 성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고마워, 형! 서로 부둥켜안은 채 펄쩍펄쩍 뛰어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어느 새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워져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순찰대는 언제 오려나. 성규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작전명 174, 소년들의 태극기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음이 가득하던 장사리에도 조용한 침묵이 찾아왔다. 새벽의 조용한 장사리, 그 앞에 펄쳐진 드넓은 바다. 성규는 그 모습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 여기서 뭐해요? " 성규가 조심스레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우현아.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우현이 그를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침묵은 계속 되었다. 성규는 여전히 우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우현은 성규가 그랬던 것 처럼 바다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 바다가, 오늘따라 참 이쁘네요. " " ……. " " 이런 모습 보면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아요. " " ……. " " …해가 뜨면, 다시 지옥으로 변하겠죠. 이 곳도. " " 우현아. " " …순찰 잘 다녀왔어요. 다친 사람도 없고. 우리 왔으니까 형도 이제 좀 자요. 내일도 버티려면 자는게 좋아요. "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성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 자야지. …자야지. 허공에 대고 때늦은 대답을 내뱉어본다. 이미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된 무전기를 있는 힘껏 손에 꽉 쥐었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소름이 돋아오른 팔을 비비며 성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자자. 자고 나면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그는 소망했다. ∞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의 아침을 울리는 총성이 울려퍼졌다. 단잠에 빠져있던 이들이 허겁지겁 자신의 총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북한군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총을 고쳐잡았다. 성규는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으며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5일정도 있었다고 이제 모두들 전쟁터에 적응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남아있는 총탄을 살핀 우현이 성규의 옆으로 와서 신호를 보내왔다. " 오래 못 버텨요. 남은 수류탄도 하나 뿐이야. "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애초에 이 고지를 점령한다는 것 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점령할 수는 있었다. 다만 버티는게 문제였을 뿐이지. 성규가 허리를 숙인 채 남은 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여기까지 버틴 것도 잘했어. " ……. " " 조금만 버티자. " " 네! " " …죽지마, 다들. "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우현은 떨리는 성규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다시 한 번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 형, 조심해요. 형이 무너지면 안돼. 나즈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적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너도, 조심해. 우현이 베시시 웃어보였다. …니가 무너지면 내가 버티질 못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
손이 아파왔다. 총을 쥔 손이 자꾸만 떨려왔다. 널부러진 시체들 사이를 헤쳐나가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들 사이로 어렴풋이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언덕 뒤에 숨어 움직임을 살피던 성열이 두 눈을 껌뻑이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있는 힘껏 성규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성종은 급하게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성규형, 형! 몇시간동안 계속된 전투에 북한군의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성규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 형 ! " " 무슨 일이야. " " 뱃소리예요. " " 뭐? " " 뱃소리! 뱃소리를 들었어요. 성종이가 연락해보러 갔어요! " 분주하게 움직이던 걸음들이 멈추었다. 그게 사실이야?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곁으로 다가온 성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뒤요. 정확히 10분 뒤에 나오라고 했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10분 뒤면 적어도 5분은 여기서 더 버텨야 한다는 소리였다. 뒤를 돌았다. 제게 쏠리는 시선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성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지금 당장 이 곳으로 다들 모여. " " 형. " " 오 분. 오분만 버티다가 곧장 바다로 뛰어가는거야. 알았지, 다들? " 고개가 세차게 흔들렸다. 성규는 교모를 품에 꼭 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갈 수 있어요. 형. 우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천천히 울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환한 웃음을 지어보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멈추었던 총성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 형. " " …그래. " " 이제 정말 조금 남았어요. " " …그래. " " 죽지마요. " " ……. " " 무너지지 마요. 나도 그럴테니까. " " …그래. " 형,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배 안에서 잠깐만 나한테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요? 우현이 성규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성규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
오 분은 긴 시간이었다. 점점 육지와 가까워지는 전함을 발견한 모양인지 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 북한군 때문에 한 발자국을 떼기도 어려웠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주위를 살피던 성규가 마음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서히 올라가는 그의 손을 바라봤다. 가! 성규의 신호를 받자마자 모두가 모래사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성종일 먼저 보내고 후발대에 선 성열이 마지막으로 남은 수류탄의 핀을 뽑아냈다. 던지자마자 바로 달려, 알았어? 성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있는 힘껏 언덕 너머를 향해 수류탄을 내던졌다. " 뛰어! " 커다란 굉음이 울려퍼졌다. 이미 선발대는 모두 승선을 완료했다는 성종의 목소리가 무전기 저편으로 들려왔다. 미친듯이 뛰었다. 배와 연결된 줄을 타고 먼저 올라간 성열이 우현과 성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총알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와 나무판자에 박혀들었다. 성규가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 빨리…, 빨리 올라가! " " 형! " " 얼른 ! "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며 우현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자꾸만 손에 땀이 찼다. 눈을 질끈 감았다. 힘이 쫙 빠지는 것만 같았다. 미끄러져내리는 우현의 손을 꽉 잡은 성규가 이를 악 물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 정신차려. 이것만 올라가면 돼. " " …형. " " 약속했잖아. 죽지 말자고. " " ……. " " 얼른 올라가. 뒤에서 받쳐줄게. " 걱정하지 말고 가. 벌벌 떨리는 손을 꽉 잡았다. 성열이 우현을 조심스레 배 위로 끌어올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우현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성종의 부축을 받으며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겨우 일어선 우현이 아직까지 줄에 매달려 있는 성규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성규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폭발음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 성규형! " 째질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우현의 눈에 아슬하게 매달려있는 성규의 모습이 들어왔다. 쉴 틈 없이 총알이 날라왔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에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다리에 총알이 박혀 들어왔다. …성규형!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성규가 고개를 들어 우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형, 형.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또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연결되어 있던 줄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 형! 내 손 잡아, 얼른! " " … 성열아. " " …형, 제발. 성규형. " 우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성규가 교모를 벗어 배 위로 힘껏 던졌다. …꼭 살아. 살아서, 살아서…. 성규가 터져나오는 울음에 입을 꽉 다물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끊어졌다. 성규형! 악에 바친 성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우현이 떨어진 성규의 모자를 집어들며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 울지마.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까지 웃어보인 성규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까지 닿지 못한 마음이 그렇게 울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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