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19 (네 시선이 머무르는 곳)
아마 일찍 일어나게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일찍 일어나버릴 줄은 몰랐다. 사실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아 거의 반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 했지만, 지금 다시 잠을 청하려 해봤자 잠은 당연지사 오지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무료하게 누워 수능에 대한 긴장감으로 벌벌 떨고있을 바에야, 차라리 느긋하게 준비를 시작하며 '수능'이라는 걸 잠시라도 잊어버리는 편이 훨씬 나을 듯했다.
창문을 굳게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어내곤 바깥 날씨를 확인했다. 다행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보통, 날씨에 따라 그 날 하루의 기분이 좌우되곤 하는데, 만약 오늘같이 중요한 날 비라도 줄기차게 내린다면 난 아마 우중충한 기분으로 시험 문항을 풀어나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늘은 맑은 날.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
"○○이는 미역국… 안 먹지?"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미역국을 다시 데우던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어왔다. 중요한 시험을 보는 날 미역국을 먹는다는 건 사실 아직까지도 찝찝한 것이었다. 미역의 표면은 미끌미끌해. 그러므로 시험 날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질 수도 있겠네. 시험이 미끄러져? 시험을 미끄…. 사실 오래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속설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미역국을 먹는다 해서 시험을 못 보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속설이 존재하기에, 마음이 살짝 찝찝하고 꺼림칙하다는 것 뿐이었다.
"응, 난 된장국."
아침은 든든하고 평범하게 먹는 것이 가장 좋다. 최대한 부담이 덜 가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된장국과 계란말이 정도?
*
복장은 자유였다. 도대체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에 관해 어제 저녁부터 고민을 하긴 했지만, 녀석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 대략 30분이 남았을 무렵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답을 얻게 되었다. 지나치게 편안한 복장은 시험 볼 때 너무 늘어지려나. 그렇다 해서 불편하게 스키니진을 입고 갈 수도 없고. 교복은 더더욱 불편하고…. 오랜 시간 동안의 고민 끝에 결국 결정한 복장은, 편한 트레이닝 바지와 두꺼운 후드티였다. 다른 수험생들이 보기에 부담이 없을 법한 무난한 색상의 옷을 권장한다는, 많고 많은 수능 유의사항들 중 하나가 떠올라, 빨간색 후드티가 아닌 회색 후드티를 입어야 했다. 그 위엔 까만 패딩 조끼.
"다녀오겠습니다."
"응? 벌써 나가니?"
"응, 일찌감치 가있으려구요."
"아, 그래? 하긴 그게 낫긴 하겠다. 우리 딸, 그동안 공부 하느라 수고했고, 시험 잘 보고 와."
현관까지 나와 응원의 말을 전해주시는 부모님께 배싯 웃어보이곤 운동화를 신었다. 사실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떨리진 않았는데, 신발까지 신고 모든 준비를 마친 지금 이 순간은 너무나도 떨렸다. 휴대폰은 전원을 꺼둔 채 책상 한 구석에 고이 올려두었다. 혹시나 너무나도 긴장을 해 휴대폰을 제출하는 것도 까먹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
"아."
"어…, 안녕. 벌써 와있었어?"
"방금 도착했어."
녀석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진 대략 5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내 물음에, 방금 도착했다며 귀에 꽂고있던 이어폰을 뺀 김종인이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가자. 엄청 일찍 도착할 것 같긴 한데."
"… 너 눈에 졸림이 가득해."
"걱정 마. 집 가면 바로 잘 거니까."
"… 부럽다."
"… 아, 미안."
황급히 미안하다며 무미건조하게 사과를 해오는 녀석을 보며 작게 웃음을 짓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등굣길이었다. 그러나 매번 다니던 학교가 아닌 낯선 학교로 장소만 바꼈다는 것. 아,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다는 것. 이질적인 건 단지 그게 전부였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올해는 수능 한파가 몰려오지 않은 듯했다. 그리 많이 껴입은 건 아니었지만서도 대단한 추위가 느껴지진 않았으니 말이다.
"야."
"응?"
"모르는 건 3번, 헷갈리는 건 그 보기 중 가장 큰 번호다."
"… 이유는?"
"내가 지금껏 그래온 결과 50퍼센트는 성공했어."
"……."
"못 믿겠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든가."
빈정 상하기라도 한듯 녀석이 투덜대며 말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워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낯선 길바닥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론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녀석의 발걸음이 내 발걸음에 맞춰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김종인의 검정색 컨버스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음의 속도를 살짝 늦춰서 걷기 시작하면 녀석의 걸음 또한 서서히 늦춰지기 시작했고, 다시 걸음를 빠르게 옮기기 시작하면 녀석의 걸음 또한 덩달아 빠르게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게 조금은 신기해 혼자 피식 웃어버리자,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왜 그러는 거냐며 녀석이 진지하게 물어온다.
"그냥. 웃겨서."
"뭐가."
"아, 있어 그런 게. 어? 너 운동화 끈 풀렸다."
"나? 어디…"
"오냐. 인사 잘~ 하네."
"……."
"……."
"너 시험 보는 날이니까 참는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입을 꾸욱 다문 채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도는 싸늘한 이 상황에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냥 어색히 웃음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시험 보는 날이니 참겠다는 녀석의 한 마디가 괜히 살벌하게 느껴져 등골이 오싹했지만, 평소 자주 던지는 장난스러운 농담이었겠거늘 생각하며 웃어 넘겼다.
*
"집에서 응원 하고 있을게."
"잘 거라며."
"자면서 응원 해야지."
"뭐?"
"난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놈이야."
나름 느긋하고 여유롭게 걸었다 생각했지만, 시험 장소까진 꽤나 빠른 시각에 도착을 했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수 이 곳까지 같이 걸음을 해준 녀석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드는 녀석에게 덩달아 손을 흔들어주곤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잘 보고 오라며 마지막까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이다. 걸음을 옮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면, 계속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건지 금세 김종인과 시선이 맞닿아버린다. 그렇게 시선이 맞닿을 때면 먼저 황급히 시선을 피해버리는 녀석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지만, 녀석의 그런 모습 마저도 좋았다.
수험표를 확인하며 교실을 찾았다. 내가 시험을 치르게 될 교실은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교실이었다. 굳게 닫혀있는 교실 문을 조심스레 열곤 살금살금 들어가 내 수험번호가 붙어있는 자리로 다가가 살포시 앉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교실 안엔 소수의 수험생들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혀버릴 듯한 적막감 탓에 움직임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살짝만 움직여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발생해 방해가 될 것도 같아 슬로우 모션으로 문제집을 꺼내야 했다. 이런 분위기는 정말이지 질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
1교시 국어영역을 치르고 나면 2교시 수학영역부터는 마치 모의고사를 푸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든다던 어느 누군가의 말이 사실인 것도 같았다. 사실 1교시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심장이 미친듯이 빠르게 뛰기 바빴다. 그러나, 100분이나 주어지는 2교시 수학시험이 시작되자, 도대체 언제 떨기라도 했었냐는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곤 했다.
1교시 국어시험은 그리 어렵지도, 그리 쉽지도 않은 난이도였다. 그러나 시간 배분을 잘못 하는 바람에 문학 작품 하나를 급하게 풀어야 했고, 답 마킹을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은 되도록이면 오래 잡아두고 있지 않아야 했다. 다음 시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1교시 내내 찬열쌤이 그동안의 과외수업 때 해주셨던 말들을 떠올리며 그리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어나갔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잘 봤다 자부를 할 수도 없고, 못 봤다 확신을 할 수도 없을 그런….
2교시는 정말이지 모의고사를 보는 것과도 같았다. 항상 수학시험을 마음 편하게 봐왔어서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 이게 수능시험인지, 기말고사 시험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물론, 문과생이라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한 부담감이 덜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시험을 볼 때 약간의 긴장감은 필수라 말하던 찬열쌤의 문자 메시지가 불현듯 떠올라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다.
1교시, 2교시 시험을 치르고 난 지금은 점심시간이었다. 그저 '시험'이라는 것에만 신경을 가했던 탓에 점심 밥을 누구와 먹을지에 관해선 단 하나도 정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어차피 혼자 먹는 학생들도 많으니 그냥 교실에 앉아 혼자 도시락을 먹을까, 생각하며 복도에 놓여있는 책가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렬로 나란히 놓여있는 책가방들 가운데 유난히 빨간 내 가방을 집어 지퍼를 열었다. 아침에 엄마가 싸준 도시락과 몇 개의 귤들을 보자 괜히 군침이 도는 것도 같았다.
"야."
"… 아, 깜짝아…."
"놀랐어? 미안."
가방 속에서 도시락과 과일을 꺼내곤 교실로 향하고자 뒤를 돌았을 찰나, 바로 코앞에 위치한 오세훈의 얼굴과 동시에 들려오는 녀석의 낮은 목소리에 그만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 뒷걸음을 치는 내 모습에 도리어 더욱 놀란 듯한 녀석이 낮추고 있던 허리를 곧게 펴곤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나저나, 오세훈도 이 학교로 배정을 받았을 줄은 몰랐는데….
"너 교실 여기구나. 제일 끝이네. 어쩐지 안 보이더라. 오케이, 접수."
"……."
"이거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는데, 김종인이 너랑 밥 같이 먹으라고 했거든."
"김종인이?"
"뭐, 네가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부탁 받은 거라."
능청스레 얘기를 하곤 내 팔을 잡아 당기며 교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오세훈 탓에 정신이 멍해졌다. 여학생들밖에 없는 교실 안 광경에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들어선 뒤 자리로 안내를 하라며 나를 툭툭 쳐오는 녀석에, 하는 수 없이 내 자리로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 뭐야. 나 남잔데 여기 들어와도 되나?"
"이미 들어왔잖아."
괜히 목소리까지 작게 하며 소곤소곤 말을 꺼내는 녀석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도시락 뚜껑을 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곧이어 손에 달랑달랑 들려있던 제 도시락을 내 책상 위로 덩달아 올려놓은 오세훈이 젓가락을 들며 다시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야, 국어 어땠어? 아니, 난 진짜… 와… 1번부터 아주 그냥 멘붕이… 장난 아니었다니까."
"시간 모자랐어."
"시간만 모자라? 난 시간뿐만이 아니라 내 집중력, 체력, 온갖 에너지들이 다 모자랐어. 아니, 1교시부터 이래도 돼? 난 수능시험을 보면서 내 한계를 강제로 경험했다니까."
"……."
"1교시는 뭐 그럭저럭 넘어갔다 쳐. 2교시는 또 뭐야? 1교시 때 에너지를 너무 과하게 소비했던 탓인진 모르겠지만, 깜빡 졸았다니까 심지어."
"… 그래. 할 말이 아주 많았구나."
"이따 영어시험은 또 내가 어떻게 보게 될지 정말 궁금해. 분명 밥이 들어가 배가 부른 상태일 테니 노곤노곤 나른나른 하겠지?"
연설이라도 하듯 혼자 흥에 겨워 이런저런 말을을 길게 늘어놓는 오세훈 탓에 벙찐 채 꾸역꾸역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가며 열심히 불만들을 토로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배는 고픈 건지, 숟가락으로 밥을 크게 한 술 떠먹곤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이 돼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김종인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듯 보이는 녀석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보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저 작은 입에서 어찌 그리 많은 말들이 연속으로 다다다 나오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분명 인상은 차가운데 하는 행동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것도 벌써 몇 번째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오세훈은 제 생김새와 행동이 따로 노는 아이임이 분명했다.
"이쯤 되면 난 김종인이 정말 부러워. 지금쯤 PC방 달리고 있겠지?"
"… 아깐 나한테 잘 거라 했는데."
"… 올, 너희 아침에도 연락했냐?"
"어? 아니. 김종인이 오늘 학교 데려다 줬어."
"……."
"……."
"… 이 기분은."
"……."
"마치 체감온도가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여름날 좁디 좁은 봉고차에 여럿이 낑겨 타서 심각한 교통체증을 겪는 기분이랄까."
"… 뭐라고?"
"… 윽, 멀미…. 분명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왜이리 멀미가 나는 것 같지."
"……."
"역시 김종인이야. 항상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기 바쁜 오세훈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내 모습에 녀석이 작게 헛기침을 하곤 멋쩍게 웃어보이며 천천히 제 도시락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직 밥도 반 쯤이나 남아있는 듯했지만, 영어 듣기를 할 때 절대 졸지 않을 거라며 밥 먹기를 포기한 채 도시락 뚜껑을 닫는 녀석의 손에 귤 하나를 쥐여주었다. 그에 고맙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는 녀석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벌써부터 졸릴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큰일인데. 아…."
교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조곤조곤. 오세훈이 나감과 동시에 교실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
점심을 하도 든든하게 먹어 영어시험을 볼 때 졸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정신은 멀쩡했다. 벌써부터 졸음이 몰려온다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던 오세훈은 과연 무사히 시험을 치렀을지 모르겠지만, 뒤이어 이어진 사회탐구시험도 나는 무난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막상 수능이 다가왔을 땐 긴장도 많이 했고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 조금은 허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허무한 감정보단 시원한 감정이 더욱 컸다. 한동안 지나친 스트레스와 부담을 주며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던 원인이 사라지게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공부했던 게 이번 시험으로 인해 끝을 보게 되었고, 이제 고등학교에서의 남은 일정이라곤 겨울방학과 졸업식. 그게 전부였다. 그건 뭔가… 조금 아쉬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이 아니라 많이. 많이 아쉬웠다.
시험이 끝나고 집에 같이 갈 수 있게 된다면 같이 가자 말하던 오세훈이었는데,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이럴 땐 휴대폰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휴대폰을 가지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감이 살짝 들었다. 5분을 두리번거려도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혼자 걸음을 옮겨야 했다. 오늘 처음 와봤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익숙해져버린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활짝 개방 되어있는 현관 쪽엔 많은 학생들이 몰려 북적북적했다. 몇몇은 부모님이 데리러 오신 학생들이었고, 일이 바빠 제 형제나 자매들이 데리러 온 학생들도 간간이 보였다. 물론 나도 부모님이 일 때문에 바빠 데리러 오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형제나 자매가 없는 나로서는…
"……."
사람들 사이 제법 널널한 틈을 찾아 헤매던 중, 저 멀리 익숙한 얼굴 하나가 시야에 박히듯 들어왔다.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제 손목시계만 슬쩍 확인하곤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모습을 보자마자 다시금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 괜히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도 같아 혀로 입술을 축이곤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곧이어, 하릴없이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휘파람을 불고 있던 김종인의 시선이 내게 꽂혀왔고, 그와 동시에 난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씨익 웃으며 이 쪽으로 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녀석의 걸음이 내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그와 비례하듯 점점 빠르게 콩닥콩닥, 세차게 뛰었다.
"수고했어."
어땠어? 잘 봤어? 쉬웠어? 이런 물음이 아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에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점철되어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
"피곤하냐."
"그닥 피곤하진 않아. 왜?"
"음."
"음?"
"나랑 하루종일 놀자, 그럼."
"… 하루종일? 너 오세훈이랑 PC방 안 가?"
"주말에 가기로 했어."
"… 아…."
"음, 너희 부모님 걱정하시려나."
작게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살짝 깨무는 녀석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김종인은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 부모님께선 아무리 밤이 깊어도 녀석과 함께 있는 거라면 안심을 하셨고, 늦게까지 연락이 되지 않다 녀석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되면 안심을 하셨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아니야. 내가 엄마한테 연락할게."
*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 데리러 와준 것이 고마워서라도 오늘 꼭 영화를 보여주려 했지만, 시간이 꽤나 늦어질 것만 같아 간단히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제 막 초겨울로 넘어갈 시기라 그런지, 시간이 살짝만 늦어져도 날은 어둑어둑했다.
"뭐 마실래? 오늘도 역시 핫초코?"
"넌 내가 맨날 핫초코만 마시는 줄 알아?"
"맞잖아."
"어."
금세 인정을 해보이는 녀석을 보며 푸스스 웃곤 주문을 마친 뒤 자리로 가 털썩 앉았다. 곧이어 맞은편 자리에 녀석이 앉았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휴대폰 꺼져있더라. 배터리 없어?"
"아, 집에 놓고 왔어."
"어쩐지."
"나 오늘 오세훈이랑 밥 같이 먹었어."
"그래? 피곤했겠네. 걔 말 진짜 많은데."
"네가 오세훈한테…"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걸로 봐선, 제가 오세훈에게 나와 같이 밥을 먹으라 했다는 사실을 내게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냥 말끝을 흐리며 황급히 말을 돌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응. 난 오늘 오세훈의 언변에 또 한 번 놀랐어."
"그냥 또라이야. 무시해."
"무시했어."
단호하게 말하는 내게 잘했다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는 녀석을 바라보며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이어, 주문나온 핫초코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시던 김종인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야."
"내 이름이 '야'야? 맨날 야,야."
"… 아."
"……."
"○○아."
이런 부름을 기대했던 건 아닌데, 김종인은 아무렇지 않게 성을 뺀 채 내 이름을 불러왔다. 녀석은 지금껏 내 이름을 성 빼고 제대로 불러줬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있어봤자 변성기도 오지 않았을 시절인 아주 어렸을 때가 전부였을 것이다. 근데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훅 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을까. … ○○아, 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설레고 두근거릴 줄을 누가 알았을까.
"… 어, 어, 왜?"
"겨울방학 때 놀러 가자. 1박 2일로."
"1박 2일?"
"응. 졸업하기 전에."
"… 아."
수능이 지나가니 이제 졸업이라는 것이 다가오는구나. 졸업… 하기 싫다. 아니, 졸업은 해도 김종인이랑은 헤어지기 싫다. 매일같이 보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싫었다. 그 당사자가 김종인이라서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싫었다.
"그래, 가자. 어디로?"
"그건 아직 안 알아봤어."
"… 둘이…?"
"……."
"……."
"… 이상한 생각 하지마."
"… 뭐, 뭐래…. 나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괜히 자기가 찔리니까…!"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며 피식 웃어버리는 녀석의 모습에, 안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결백했지만, 조심스레 묻는 내 목소리와 말투가 녀석에겐 그런식으로 들렸나 보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못 말리겠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리던 녀석이 살짝 식어버린 핫초코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점점 어두워지네. 곧 겨울이 오려나 보다."
마음이 넓은 건지, 배려가 깊은 건지, 아님 둘 다 해당이 되는 건지 녀석은 더이상 나를 놀리려 들지 않고 자연스레 넘어가 주었다. 티는 안 냈지만, 솔직히 그건 좀 고마웠다.
*
카페 안에 가만히 앉아 의미 있는 대화 반, 의미 없는 대화 반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밖은 깜깜해져 있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후드티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 썼다. 그리고 곧이어, 그런 나를 흘끗 보던 김종인이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내 어깨에 제 팔을 걸쳐오기 시작했다. 항상 하던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왠지 더욱 떨리는 것만 같았다. 방금 전 카페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은근히 풍겨오는 산뜻하고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에도 기분이 묘했고 마음이 설렜다.
"… 야, 무거워."
"무거우라고 이러는 거야."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낮은 웃음소리에도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이젠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심장이 주체를 못하는 것만 같았다.
"어? 뭐야? 방금 폭죽 터진 거 맞지?"
"그러냐. 난 잘 모르겠어."
"아, 여긴 잘 안 보이는데…. 가 보자!"
어디서 축제라도 하는듯, 순간 폭죽이라도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원체 폭죽 이벤트와 같은 걸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던지라,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며 제 뒷목을 어루만지는 김종인을 거의 끌다시피해 근처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법 넓으면서 예쁘게 꾸며진 공원이었다. 아마 이 장소에서 폭죽 이벤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 여기 뭐야? 이거 보고 싶어?"
"응, 보고 싶어. 나 이런 거 구경해보고 싶었어. 우리집에선 이런 거 하나도 안 보이거든."
배싯 웃으며 말하는 내게 김종인의 시선이 꽂혀왔다. 그리곤 얼마 있지 않아 녀석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했고, 곧이어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큰 소리가 나며 폭죽 하나가 터지기 시작했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커 주변의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리는 큰데 폭죽은 그만큼 예쁘고 아름다웠다.
"… 아, 깜짝 놀랐어. 예고라도 좀 해주고… 아씨, 귀 아파."
"뭐라고?!"
옆에서 김종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도 같았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신기하다며 자기도 해보고 싶다는 말이었겠지. 나도 그 마음 다 알지.
"야, 또 터뜨린다!"
곧이어 크나큰 폭죽이 큰 소리를 내며 하나둘 연속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까만 도화지와도 같은 하늘에 형형색색의 폭죽들이 물감처럼 번지듯 퍼져나갔다.
"와…, 진짜 예쁘다! 그치?"
"뭐라고?"
"진짜 예뻐!"
"……."
"예쁘다…."
"너도."
"종이야! 저것도 좀 봐봐! 장난 아니야!"
"……."
"으으…, 멋있다 진짜."
"좋아해."
수능날 밤은 그렇게 서서히,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폭죽이 터지는 것에만 관심이 쏠려 주변에서 무슨 말이 들려오는지는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녀석의 시선이 밤하늘이 아닌 내게만 자꾸 닿아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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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수요일 밤에 올 줄은 몰랐죠? 흐흐.. 어제가 쉬는 날이었어서 그런지 시간이 좀 많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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