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짊을 논하지 말라.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라.
고되고 혹독한 길일 것이다.
그대, 꽃의 짊을 안타까워 말라.
꽃의 아름다움을 안타까워 말라.
그대는 그저 내년의 봄을 기다리라.
꽃의 핆을 기다리라.
꽃은, 그저 기다릴 뿐이니라.
[백현/경수] 화홍
w. 일기장
"세훈아, 밤바람이 생각보다 거세구나."
"추우십니까?"
"도포가 조금 얇구나. 다음 외출부터는 옷깃을 더 단단히 여매어야겠어."
"주의하겠습니다."
"녀석, 너를 책하려던 것이 아니다."
백현과 세훈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인경이 칠 시각이 가까웠다. 인경을 친 후에 길거리를 싸돌다간 오해를 받기 쉽상이었다. 달빛이 고운 날이었다. 세찬 바람에 백현이 떨었다. 세훈이 송구스러운 눈을 했다. 그것을 눈치챈 백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세훈의 어깨를 다독였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덩달아 세훈과 백현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정원군, 또 바깥을 다녀오십니까?"
단호한, 하지만 걱정이 잔뜩 베인 말이었다. 백현은 흠칫 놀래며 고개를 들었다. 백현의 어미인 권빈 김씨였다. 백현은 볼을 긁었다. 딱 걸린 것이었다. 얼마 전에 궐밖 출입은 삼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금새 약속을 어긴 것이다. 어머니는 단호한 눈을 하고 있었다. "늘, 세간의 시선을 주의하셔야만 합니다." 권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예, 어머니."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언제나 조심하셔야만 한다고."
"..."
"...밤이 늦었습니다. 피곤하실 터이니 들어가서 쉬세요."
"예, 어머니."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칭얼댈 수 없었다. 왕자에게 요구하는 궁궐의 법도는 백현에게는 고리타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어머니를 탓할 수는 없었다. 백현을 지극히 아끼고 늘 마음 졸이는 어미의 마음을 백현은 잘 알았다.
"참."
"..."
"세자빈의 간택 절차가 있을 것이랍니다. 이미 전국에 간택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렇습니까?"
"세자 저하의 배필이 정해지면 곧, 정원군도 그 수순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
"어미가 너무 붙잡아 두었군요, 밤바람이 찹니다. 들어가보세요."
"예, 어머니.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세훈아. 너도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밤바람에 몸이 많이 얼었을 터인데."
"아닙니다. 소인이 남아서.."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겠느냐? 녀석, 걱정말고 어서 들어가서 몸을 녹이거라."
"..."
"어서. 이건 명령이다, 녀석아."
백현이 사람 좋게 웃었다. 세훈은 백현답다, 고 생각했다. 백현은 자신의 사람을 아낄줄 아는 사람이었다. 뭇 궁궐 사람들과는 달랐다. 왕족이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오만했다. 백현은 그중에서 보석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왕족이라는 자리가 그에게 어울린다는 것은 아니였다. 그는 자유로운 새였다. 한쪽 발이 묶여 자꾸만 날려고 해도 제자리도 돌아오게 되는, 그런 새. 그런 백현이 세훈은 못내 안타까웠다. 하지만 세훈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백현을 위해 세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백현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 뿐이었다.
간택령이 내려졌다. 사대부가에서는 모두 처녀들의 사주가 적힌 사주단자를 올렸다. 그것은 경수의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수의 누이인 송화도 간택의 대상에 들었다. 경수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이의 이름이 적히는 사주단자를 보며 경수는 표정을 찌푸렸다. 송화는 그런 경수의 눈치를 살폈다. 티나지 않게 경수의 손을 다독였다. 경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지는 듯도 했다.
"간택이 무슨 의미인줄 알고 있느냐, 송화야?"
"..예, 아버지."
"고귀한 사람을 뽑는 자리이다. 세자빈의 자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줄은, 너도 알 것이야."
"..."
경수는 아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가문이 권세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송화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안다, 알겠다 대답만 할 뿐이었다. 경수는 그런 송화가 불만이었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경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송화가 간택에서 떨어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송화가 간택에서 떨어지는 것조차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였다. 경수의 집안은 왕비의 가문과 절친한 사이였고, 왕비는 한 가문이라도 더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세자빈의 자리는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차기 왕인 세자의 부인, 그러니까 차기 왕비의 재목. 세상을 호령하는 왕, 그리고 왕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자리, 왕비.
송화는 반듯하게 행동했다. 양반집 규수의, 도씨 가문의 체면을 보여주었다. 쉬운 것이었다. 평소대로만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송화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절대, 가문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였다. 가문에, 누가 돼서는, 안 된다.
당연한 수순처럼 송화는 재간택에 오르고, 세자빈의 자리에 내정되었다. 재간택 후에 대개 세자빈에 자리에 오를 사람이 정해진다. 대비가 삼간택에 오를 규수 셋을 고르고 그 중 왕비가 세자빈이 될 영애를 선택한다. 삼간택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했다. 당연한 것처럼 왕비는 말했다. "이조판서 도영석의 영애, 도씨 처녀." 그리고 당연하게 송화가 세자빈의 자리에 내정되었다. 그리고 송화는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경수는 허무했다.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경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여인. 하지만 가장 외로울 여인. 송화는 그런 여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왁!"
"아구, 놀래라."
준면이 기분 좋게 웃었다. 경수는 그런 백현을 보고 피식 웃었다. 백현이 "네 이 놈!" 하면서 경수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그러자 경수가 대꾸했다. "..또 어찌 그러십니까?"
"괘씸한 놈. 장원 급제를 하더니만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더냐? 얼굴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그것이, 그것이 아니오라."
"하하, 농을 한 것이다. 빈궁의 처소로 가는 길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저하."
"그렇구나. 세자빈이 외로울테지. 종종 들려 말벗이 되어드리도록 해라."
"예, 저하."
준면은 별말없이 경수를 뚫어져라 보았다. 감히 경수가 쳐다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경수의 고개는 바닥을 향했다. 준면은 금새 시선을 거두고 갈길을 가라 명했다. 경수는 예를 갖춰 인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경수의 뒷모습을 준면이 빤히 쳐다보았다. 경수는 나라의 인재였다. 그렇기에 아버지도 경수를 아꼈고, 저도 아끼는 것이었다. 빈궁의 아우 동생. 그 자리가 주는 힘은 컸다. 그리고 경수 스스로가 가진 힘 또한 컸다. 크게 될 사람이다,고 준면은 생각했다.
"마노하." * 마노하 : 궁궐에서 지체 높은 여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 주로 빈(嬪)에게 사용되었다.
"어서오거라.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느냐?"
"아닙니다. 얼마나 걸린다고요."
얼마 전에 경수는 급제했다. 그것도 장원으로. 송화는 기뻤다. 오랜 시간 공들인 경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했다. 괜한 걱정이나 경수가 오만할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송화는 경수가 얼마나 노력했고 집안의 질타 속에서 내적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이리도 기쁜 것이었다. 오랫만에 보는 얼굴이였다. 아버지는 경수와 송화가 만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세간의 눈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리도 애틋한 남매가 남짓 5년이나 되는 시간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 오죽했을까. 둘은 손을 맞잡았다. 송화는 벌써 커서 남자의 손이 된 경수의 손을 쥐었다.
"그래, 어디에 배정되었다더냐?"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홍문관이나 사헌부일줄 압니다."
"..그렇겠지. 힘든 것은 없고?"
"힘들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마노하께선 무탈하십니까?"
"그럼. 안 좋을 것이 있겠니?"
무탈할 리가 없었다. 중전 김씨는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다. 세자 내외에게 얼마나 모질게 대하는지 그 소문이 파다했다. 친아들인 준면에게도 그 모양인데 송화에게는 오죽했을까. 경수는 안타까운 눈을 하고 송화를 보았다. 송화는 그러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 걱정하지 말아라. 송화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동생 경수에게 걱정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고.
"..."
경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얼음을 걷고 있는 누이. 궐 생활이 얼마나 혹독한 줄은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말 한 마디도 편하게, 행동 하나도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곳. 시선에 쫓기고 궁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줄도. 그래서 경수는 송화가 측은했다. 그런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누이가 대견하기도 했고. 경수는 빈궁전의 뜰에서 송화의 처소를 돌아보았다. 송화의 처소는 주인을 닮아 소박하지만 위엄이 있었다. 그리고 외로워보였다. 경수의 기분 탓이었을까.
백현은 앓는 소리를 냈다. 종학은 참으로 지루했다. 일단 대부분이 백현이 아는 것들이었다. 사실 종학 자체가 왕자에게 어떤 학식을 주기 위한 곳이 아니였던 것도 그랬다. 왕족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왕자라면 더더욱. 왕자에게는 일절의 의무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였다. 그렇기에 백현은 시간이 남는대로 서책을 읽었다. 닥치는 데로 읽었다. 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세상은 똑똑한 왕자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목을 조르고 위협할 뿐이었다. 백현은 그것을 잘 알았다. 걸음을 뗴고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권빈 김씨가 백현에게 말해온 것들이었다. 조심할 것, 나서지 말 것, 섣불리 행동하지 말 것. 백현은 세상을 알기 시작할 즈음부터 그것을 깨달았다. 이 궁궐에서 자신이 가지는 위상과 존재를. 백현은 세자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은 서열 2위의 왕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윗분들에겐 눈엣가시일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어머니가 그렇게도 고군분투하는 것이라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맞추었다. 본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썼다. 철저하게 가면 안으로 자신을 숨기고 대외적으로 보여주어도 되는 것들만 했다. 그것이 백현의 생존방식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백현은 스승에게 예를 갖추었다. 백현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끝나고 무엇을 할지 고민이었다. 그다지 왕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백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백현은 늘 상상했다. 자신이 그저 평범한 사내아이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차라리 바깥세상에서 서자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복에 겨운 소리라고 투덜댈지 몰라도 백현은 그랬다. 자유가 없다. 궁궐에는, 숨쉴 틈이 없다. 그것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백현은 자유로운 새였다. 언제나 훨훨 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훈아. 바람이 좋구나. 어엿 봄기운이 도는 모양이다. 작년 겨울이 참으로 혹독했거늘 백성들에겐 다행인 소식이로구나.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대감."
백현은 바깥이 좋았다. 궐밖으로 나온 이후로는 더욱 외출이 잦아졌다. 궐밖에서 싸돌아다니는 것은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궁궐의 위엄이며 법도며 들먹였지만 백현의 사람들은 백현의 안전 때문이었고 백현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백현이 무슨 꿍꿍이인줄 간파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백현은 냉소했다. 모두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왕의 차남. 그까짓 자리가, 무엇이라고. 백현에겐 부질 없는 것이었다. 왕좌 따위에는 정말로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백현은 여러모로 준면을 존경하고 측은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왕세자의 호화로움에 감탄하고 동경할지도 모르겠지만 백현은 아니었다. 준면의 자리는 백현의 자리보다 더 불쌍한 자리였다. 어릴 때부터 백현은 준면을 지켜봤다. 준면은 뭇사람들과 달랐다. 준면의 어미인 중전 김씨 일가는 백현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만 준면은 아니였다. 중전 김씨와 권빈 김씨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중전 김씨의 모진 성정 탓이 컸다. 백현의 어미인 권빈 김씨는 명문가 출신은 아니였다. 오히려 평민 출신으로 권빈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었다. 권빈은 궁녀 출신이었다. 승은을 받고, 더 높은 품계를 받아온 것이었다. 중전 김씨는 그 피해의식이 컸다. 남편의 마음을 가져간 여인.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녀는 권빈 모자에게 혹독했다. 백현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지만 준면은 아니였다. 준면은 백현에게 따뜻했고 권빈에게도 깍듯했다. 백현은 알았다.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권빈은 늘 백현에게 말했다. 거리를 두셔야한다고. 백현은 어머니를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준면에게는 계속해서 마음이 갔다. 준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서 둘은 좋은 형제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백현이 바깥을 좋아하는 것은 자유의 냄새, 그것 때문일 것이었다. 백현은 거리의 시전을 좋아했다. 쓰개치마를 덮은 여인네들의 소곤대는 소리. 기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하나라도 더 파려 애쓰는 상인들, 거리를 뛰노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 그것들 모두가 백현에겐 자유의 목소리로 느껴졌다. 백현은 기분 좋게 웃었다.
"도련님. 지점에 가실 것입니까요?" * 지점 : 종이를 파는 상점.
"그래. 나올 때에 벌써 말하지 않았어."
"하핫, 요새 제가 깜박깜박합니다요."
"농은. 네 나이가 몇이라고 그런 소리를 해?"
경수는 사람 좋게 웃었다. 글을 쓰려는데 종이가 다 떨어진 것이었다. 해서 이렇게 바깥외출을 했다. 경수는 갓을 메만졌다. 홍식은 경수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경수가 고맙다며 웃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봄이 오는 모양이다. 바람이 많이 누그러들었다. 작년 겨울이 몹시 추워 동사자가 많다 들었는데 다행이라고 경수는 생각했다.
이왕 나온 김에 경수는 시전의 상판을 구경했다. 물건을 주워들고 기웃거리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건 하나하나에 시선을 두고 구경했다. 경수 또한 이런 외출을 즐겨했다. 당연히 지루한 공부보다는 이런 외출 쪽에 더 마음이 갔다. 물론 외출을 하는 날이면 부모님의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지만, 경수는 이제 성인이였다. 이제는 그런 시선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있었다.
"홍식이 너는 무엇 필요한 것이 없느냐? 이왕 나온 김에 말하면 내 사주마."
"예? 아닙니다요, 아닙니다. 소인이 필요한 것이 무엇 있겠으며 있다해도 어찌 말을 하겠습니까요."
"뭐가 그리 빡빡해? 집밖이니 편하게 대해도 상관 없다 하지 않았어. 말해보아라. 내 사준데두."
"아닙니다, 아니어요. 소인은 정말로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녀석은. 그럼 생각이 나거든 말하거라. 알았지?"
"예, 예."
경수는 늘 이 신분이라는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귀천이 정해지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부모의 존귀함이 자식의 존귀함을 결정한다. 경수는 그것을 늘 비웃었다.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었다. 하지만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누가 알기라도 한다면 세상을 뒤흔들 것이라며 손가락질 할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속 한편으로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신분의 귀천이 없어지는 세상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홍식과 경수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다면 같이 자란 사이였다. 홍식의 어미인 행랑어멈은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일해온 여인이었고 그 자식인 홍식 또한 자라나면서 점점 집안의 일원이 되었고 경수와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경수를 모시게 되었다. 경수는 홍식을 편하게 대했다. 경수는 어릴 때부터 친구가 없었다. 서당을 다니지 않고 집안으로 스승을 모셨기 때문이었다. 다른 집안의 아이들과도 쉬이 친해지질 않았다. 해서 어릴 때부터 경수 주변의 또래라곤 홍식 뿐이었다. 경수는 스스럼없이 홍식을 편하게 대했다. 홍식 또한 그랬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분의 벽이 쉽사리 무너지는 것은 아니였다. 이렇게 물건 하나 사줄 때도 그것을 의식해야만 한다니. 경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 어. 비켜요, 비켜!"
급하게 뛰어가는 사내에 경수는 떠밀렸다. 순간 발에 힘이 풀린 경수의 몸이 공중으로 작게 떠올랐다. 넘어지겠다. 경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철푸덕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피부가 긁히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경수는 작게 눈을 떴다. 경수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경수는 식겁하는 소리를 내며 사람의 품을 빠져나왔다. 모퉁이를 돌던 사람이 경수를 붙잡은 모양이었다. 경수는 얼굴이 빨개졌다. 도움을 받았으니 인사를 해야만 했는데도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겼다고 하니 쑥쓰러운 것이었다. 경수는 뒷목을 긁으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인사했다.
"감, 감사하오."
"아니요. 다친 곳은 없소?"
"예, 잘 붙잡아준 덕에.."
경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잡아준 상대는 미남이었다. 경수보다 조금 키가 컸다. 해서 조금 고개를 올려보아야 했다. 헌데 왠지 익숙한 얼굴이였다.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경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정확하게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슷한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겠거니 했다.
백현은 모퉁이를 막 돌던 참이었다. 근데 갑자기 사람이 튕겨져 나오는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백현은 사람을 붙잡아 끌어안았다. 사내였는데 얼굴도 반반하고 사람 좋게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사내를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은 실례이니 백현은 금방 경수를 놓아주었다. 상대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보며 백현은 웃었다. 순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얼굴을 그리 붉히시오?"
"제가 언제 얼굴을 붉혔다고..!"
"지금 그렇지 않소?"
"장,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경수는 분명 자신의 행동이 조금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것을 따질 여유가 없이 상황 자체가 민망했다. 예법을 따질 경황 따위는 없었다. 경수는 홍식의 걸음을 재촉했다. 홍식은 주인의 귀여움에 웃었다. 경수는 웃지 말라고 투덜거렸다. 백현은 그런 경수와 홍식을 뒤돌아보았다. 귀여운 사내라고 생각했다. 경수의 뒷통수를 백현이 한참 쳐다만 보고있자 세훈이 헛기침을 했다. 백현은 얼뜨기 소리를 냈다. 사람을 훔쳐본 것이 부끄럽기라도 한듯이. 백현이 큼큼대며 다시 걸었다. 세훈이 백현의 뒤를 따랐다. 백현과 경수는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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