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공기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 잿빛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밝게 보이겠냐만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쳐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는거다. 머릿속은 누군가가 잔뜩 헤집어 놓은 것처럼 두서 없이 뒤죽박죽 섞였고, 창 밖으로는 우울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으니 당장 우울증이 걸려버려도 아무렇지 않을것 같다. 창을 뚫고 넘어오는 바람이 시원했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따라 쳐지는 이 기분의 원인은 그 녀석에게 있는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머릿속이 다 그 녀석 생각으로 차있지 않을 수가 없다. 시험도 얼마 안남아서 빨리 공부해야 하는데 도무지 펜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원.
" 아아… 짜증나. 짜증나! "
그 녀석 얼굴을 볼때마다 자꾸만 뛰어대는 가슴과 오묘하게 기분 나쁜 그 감정의 이름을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열등감? 아니, 그건 분명 아닐거다. 내가 그 녀석보다 못할게 뭐고, 또 못날게 또 뭔가? 집안도 출중해, 성적도 나름 좋아, 운동도 잘해, 성격도… 이, 이건 패스. 아무튼 도저히 확답이 서지 않는다. 나는 지금 그 녀석을 확실하게 정의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보다 정확하고 확실한 무언가가.
![[아인/중기] SIMPLE LOVE _01 | 인스티즈](http://img26.imageshack.us/img26/7839/26e586db184c92dba521060.jpg)
" 운동장 세바퀴 뛴다, 실시! "
" 선생님 그건 너무 불합리하다고 생각 합… "
" 한바퀴 추가! "
한번 말대꾸한 댓가 답게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말대꾸한 장본인인 유천은 흠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저도 머쓱한지 헛둘헛둘 구령까지 붙여 제자리 뛰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한심+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유천에게 야유를 보내다가 "친구에게 야유 보내서 한바퀴 더 추가!" 라는 체육선생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총 합이 다섯바퀴였다. 봄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햇빛이 쨍쨍 내리쬐어 제법 초여름 티가 나는 이 날에 말이다. 유난히 넓은 이 운동장을 다섯바퀴 다 돌면 분명 탈수하거나 쓰러지고 말거라고, 중기는 생각했다. 치솟는 짜증에 중기는 날카롭게 유천을 노려보았다.
" 하여튼 입만 동동 떠가지고는. "
" 뭐, 뭐! 내가 뭐 잘못 말했냐? 이런 날씨에 다섯바퀴 돌면 다음시간에 완전 녹초 될것같아서 그랬지. "
" 녹초 뿐이야? 나는 쓰러지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다 이새끼야. "
" 허, 참. 사내가 그러면 쓰나? "
" 사내? 웃기고 앉았네. 3년동안 같이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하기는. "
운동장 뛴다, 실시! 빨리 안뛰나?
반 아이들이 단체로 우르르 몰려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중기는 인상을 잔뜩 쓰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흙먼지 나는 운동장 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리 학생이 체력이 있어야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중기는 체력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젬병이라 체육은 커녕 기본적인 운동도 피하기 일쑤였다. 대충 눈치 봐가면서 조금 뛰다가 중기는 아프다고 체육선생에게 말할 생각이다. 유난히 다른 남자애들보다 여리여리해서 그런 꾀병쯤은 의심받지 않고 간단히 넘어갈 수 있다는게 중기의 유일한 장점 아닌 장점.
한편 중기와 같은 반인 홍식은 체육부장으로서 반 아이들을 이끌고 제일 앞쪽에서 뛰었다. 뒤따라오는 느릿느릿한 아이들을 위해 속도를 적정하게 조절해가며 설렁설렁 달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저래뵈도 홍식은 초등학교때부터 중학교때까지 대회도 꽤나 나가던, 쑥쑥 자라나는 육상 새싹이었다. 지금은 육상에 흥미가 떨어져서 그만둔지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몸은 그 때의 팔팔한 몸과 똑같았다-틈틈히 운동을 하던 탓도 있겠지만-. 아무튼, 오늘 날씨도 선선하고 기분도 좋으니 축구하기에 정말 딱 좋은 날씨다. 다섯바퀴만 빨리 뛰면 축구 시켜주겠지? 지금 홍식의 머릿속에는 오직 축구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렇게 한 두어바퀴쯤을 돌았을까, 홍식은 뒤돌아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살피다가 게 중 하나가 쏘옥 무리 밖으로 튀어나가는걸 목격했다. 걷어올린 체육복 바지에, 하얗게 드러난 저 피부하며 여리여리한 저 몸은 분명… 중기다. 송중기. 녀석은 항상 체육시간을 저런 식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비록 같이 지낸지 아직 두어달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주시하고 있던 터라 녀석의 행동패턴은 이미 훤히 꿰뚫고 있었다.
" 또 빠지네. 하여튼. "
홍식은 곁눈질로 중기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열에 아홉은 체육수업에 빠지곤 했다. 의심 안하는 체육선생도 이상하지만, 능구렁이같이 정말 쓰러질 듯 연기를 잘 하는 중기도 홍식에게 신기하기는 마찬가지다. 또 시작되었다. 중기의 연기가.
" 선생니임… 머리 아파요. 배도 쪼오금 아프구요. 빈혈이 있어서… "
허구한날 몸이 약하다고 요리조리 빠지는 중기가 체육선생은 이번에도 역시 못마땅한지 고개를 절레절래 저었다. 그러자 중기는 머리를 잡고 한번 휘청-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홍식은 순간 움찔- 하며 운동장뛰기를 멈추고 급히 중기쪽으로 달려갔다. 덕분에 홍식 뒤로 뛰어가던 아이들은 잠시 당황하다가 달리는 속도를 점차 줄여갔다. 중기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평소에 중기는 몸이 약하기는 커녕 오히려 건강한 쪽에 속했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쓰이는건 어쩔 수 없는거다. 홍식은 머리칼을 잔뜩 헤집고는 다 알고있으면서도 체육선생에게 물었다.
" 무슨 일이에요? "
" 아니 글쎄, 중기가 아프다고 또 빠진다고 한다고 해서. 이게 한두번도 아니고. 어디 병 있는거 아니야? 사내새끼가 그렇게 약해빠져가지고 되겠어? "
" 선생님, 저 몸 약한거 알고 계시잖아요. 맨날 아픈거 알고 계셨으면서 모른 척 하시기는. "
금방 울 것같다가도 금새 부드럽게 상황을 주무르듯 넘어갔다. 송중기는 항상 그랬다. 체육선생은 중기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이번만큼은 쉽게 보내주지 않을것 같다.
" 아프면 아픈만큼 더 열심히 해야지. 가서 뛰어라. "
" 저 빈혈이… "
하얗게 질린 얼굴과 금방이라도 토해낼것 같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 까지. 체육선생은 정말 얘가 그렇게 아픈가? 생각 하며 점점 약해져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막 '그만 들어가서 쉬어' 라고 말하려던 차에 홍식은 중기를 도와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했지만, 어디까지나 중기를 도와주기 위해서.
" 쟤 진짜 아파요. 중학교때는 수술도 몇 번 했는데. "
무리수. 정말 완벽한 무리수 였다. 홍식은 도와주려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만 무리수를 던져버리고 말았다. 의도치 않게 입 밖으로 제 멋대로 공 튀기듯 튀어나간 말, 홍식도 자신이 무리수를 던졌다는 사실을 알긴 아는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체육선생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것들이 지금 선생을 우습게 보는건가?' 라는 생각에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다 된밥에 잿밥을 뿌리다니! 중기또한 미간을 찌푸리곤 홍식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지금 도와주는건지, 아님 엿먹이려는건지. 중기가 보기에 지금 홍식은 자신을 엿먹이려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고도의 작전술로 좆나 엿 먹이려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수는 없는 노릇이다.
" 둘다 지금 당장 농구코트로 달려가서 쓰레기 50개씩 주워와.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든? "
" 선생님 그게 아니라요오… "
" 이게 어디서 앙탈이야? 빨리 안가? "
" 아 진짜, 선생님! 저 아프다니까요! 막 빈혈이… "
" 추가로 운동장 세바퀴 더 뛰어라. 오십개씩 안주워오기만 해봐. 반성문 열장이다. "
마지막으로 중기는 기를 써봤지만 다 소용 없었다. 나왔던 눈물도 쏘옥 들어갔다. 체육선생은 손에 쥐고있던 쓰레기 봉투를 둘에게 휙 던져준 채 아이들과 함께 축구 골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씨, 다 망했다. 좆망했다. 두달동안 열심히 연기해서 쌓아온 자신의 여리여리한 이미지가 저 무식한 엄홍식 때문에 다 무너져버렸단 말이다. 이젠 체육시간에 꼼짝없이 수업받게 생겼네. 중기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홍식을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정도로 분이 안풀린다. 이 땡볕에 내가 쓰레기 주워야겠어? 아픈 내가? 물론 아픈건 다 개뻥 이었지만 그래도 쓰레기 만지는건 죽기보다 싫단 말이다. 씨이. 차라리 축구 하는게 낫지.
홍식은 당황했다. 그럴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상황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중기의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이 홍식을 향해있었다.
" 너때문에 다 망했잖아 엄홍식! "
" 그, 그러게 누가 뻥 치랬냐? "
" 니가 나한테 큰소리 칠 입장이냐? 너 일부러 그런거지? "
" 뭐? 아니야. 난 그냥… "
" 지랄하네. 너 나 엿먹이려고 그런거잖아. 내가 그렇게 싫었냐? 마주칠 일이 몇번 있다고. 좆나 짜증나. "
중기는 쓰레기봉투를 휙 낚아채서 농구코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홍식은 어버버- 당황하며 중기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빨리 와서 쓰레기 안주워?!"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재빨리 농구코트쪽으로 달려갔다. 이미지만 여리여리하지, 사실은 저렇게 괴팍하면서 여리는 무슨 여리. 여리가 다 죽었나? 홍식은 미안한 마음마저 증발하는것같은 느낌에 잠시 어이없어했다. 무, 물론 무리수를 던진 자신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중기를 도와주려 했다는 그 마음 자체 말이다. 지금 이렇게 중기에게 말해봤자 홍식은 질타만 받을게 뻔했지만 말이다.
홍식은 그냥 조용히 쓰레기나 빨리 줍고 확인검사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에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으니-중기에게 말 한마디라도 걸면 분명 그 입에서 욕이 한 바가지 쏟아져 나올테니, 굳이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게 홍식의 생각이었다. 이미 심기는 한번 건드리고 말았지만.- 없는 쓰레기라도 만들어서 봉투를 채워야했다. 홍식은 농구코트 구석으로 가서 쭈그려 앉았다. 그런다음 바닥에 처량하게 버려져있는 종이전단지를 길게 쭈욱 찢고, 한번 더 찢었다. 이렇게 하면 쓰레기 하나가 4개로 변하니까 말이다. 홍식은 머리를 잘 굴리는 자신이 내심 뿌듯한지 씨익 웃었다.
" 아 진짜 싫어. 쓰레기를 어떡게 손으로 만지라는거야? "
중기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쓰레기를 주으라고 시켰으면 청소용 집게 하나는 주던가, 아니면 목장갑이라도 주던가 해야되는거 아닌가? 어디서, 어떻게 굴러들어와 농구코트에서 서식하고 있는지도 모르는-세균이 득실득실한- 쓰레기를 이 손으로 만지라고? 중기는 상하는 자존심에 눈살을 찌푸리곤 주머니에서 휴대용 손소독제를 꺼냈다. 그런 다음 바닥에 떨어져있는 음료수캔에 손소독제를 쭈욱 짰다. 캔이 반짝거리는 햇빛 아래 미끌미끌한 손소독제로 번들거렸다.
안그래도 평소에 약간의 결벽증이 있어 남이 만지던 것에는 민감했는데 이런 쓰레기를 주으라니! 분명 이건 자신이 결벽증이 있는걸 알지도 모르는 체육선생의 횡포였다. 혹은 저 엄홍식의 완벽한 작전일수도. 이유야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자신을 싫어하는건 분명했다. 물론 정당치 않은 방법으로 체육수업에 빠지긴 했다만, 그게 저 체육부장에게도 그렇게 거슬리는 일이었다는건 몰랐다. 하긴, 저 녀석은 체육시간을 금으로 아는 녀석이니 그럴수도 있었겠다. 항상 중기가 빠져 팀 인원이 홀수라 게임 진행에 방해되기는 했을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 치사한 방법 아닌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만 치솟는 느낌에 중기는 제 앞에 있는 깡통을 발로 세게 찼다. 신경질적인 발길질에 날아간 음료수캔은 '깡-' 소리와 함께 공중을 붕 뜨더니 저 멀리 쭈그려앉아 쓰레기를 줍고있는 홍식 쪽으로 날아갔다. 중기의 눈이 커지고, 이윽고 음료수캔과 홍식의 머리 사이에서 경쾌한 소리가 나고 말았다. 중기는 놀란 눈으로 그만 쥐고있던 손소독제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아 진짜 오늘 일진 왜 이러냐.
-
음료수 캔에 음료수가 남아있던 탓인지 그만 음료수 캔 안에 남아있던 잔여물들이 홍식의 체육복과 얼굴을 적셨다. 덕분에 홍식은 치솟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그 자리에서 "송중기!!"하고 소리지르며 중기의 뒷덜미를 잡고 수돗가로 질질 끌고갔다. 아무리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해도 음료수 캔을 던지는건 너무 하지 않느냐고 따질 시간같은건 없었다. 겁에 질린 중기얼굴과 분노에 휩싸인 홍식의 얼굴이 맞대면 했을때 비로소 중기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엄홍식은 중학교때 '좀' 날렸던 애가 아니라 싸움으로 '많이' 날렸던 애라는걸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씨발…. 중기는 작게 중얼거렸다.
홍식은 그런 중기를 한번 노려보고 체육복 상의를 벗어던져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리고 손에 한가득 받은 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그 손놀림이 너무 거칠어서 중기는 안타깝다는 듯 "그러면 피부 다 상하는데…."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홍식이 하던 세수를 멈추고 중기를 노려보았다.
" 그럼 니가 씻겨라도 줄거냐? "
" 응? 아니… 근데 클렌징 하는 방법쯤은 알려줄 수도 있고… "
" 넌 너무 말이 많아. "
홍식은 다시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에 얼굴을 박았다. 거칠게 씻은 탓인지 물방울이 여기저기 사방에 튀었다. 중기는 멍하니 홍식이 씻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홍식이 윗옷을 벗고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구릿빛, 홍식의 피부는 구릿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위에 사르르 흘러내리는 물방울하며 열여덟살 남자 치고는 꽤 단단한 잔근육까지 가지고 있었다. 중기는 입고있던 체육복을 살짝 들어올려 마른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잔근육은 커녕 피부가 보드랍기까지 하다. 왠만한 여자 뺨치게 부드럽고 하얀 피부에다가 선천적으로 운동엔 젬병인 저질체력.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럽다. 누가? 엄홍식이 말이다!
홍식은 다 씻었는지 물기 묻은 머리를 털고 거칠게 숨을 내쉬며 중기에게 한 손을 턱하니 내밀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서 중기는 자신의 한 손을 그 손 위에 얹었다. 그러자 홍식은 기겁하며 중기의 손을 내쳤다. 아니 뭐, 내 손이 그렇게 더럽기라도 한가? 하지만 한번 더 실수하면 정말 맞을것 같아서 중기는 조금 더러워지려는 기분을 억누르고 억지로 웃으며 홍식에게 물었다.
" 뭐 달라는건데? 스킨 줘? 내 사물함에 있긴 한데… "
" 그거 말고. "
" 그럼 뭐, 퍼스트세럼? 수분크림? 나 그거 오늘 학교에 안갖고 왔단말… "
" 수건! 수건 달라고. 닦을게 있어야 할것 아니야. 다 젖은거 안보여? 안그래도 이 땡볕에 땀나서 죽겠는데. "
" 아, 수건? 없는… 빠, 빨리 찾아올게. 기다려. "
수건이 없다고 하자 절로 찌푸려지는 홍식의 인상에 중기는 재빨리 교실쪽으로 발을 돌렸다. 아무래도 물이 마르기 전에 수건을 가져다줘야겠지? 아니, 그러면 애초에 수건은 필요 없는거 아니야? 아니, 나 뭐래는거니?
중기는 교실쪽을 향해 뛰다가 갑자기 제 어깨를 부여잡는 누군가의 손의 악력에 못이겨 뒤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손의 주인은 홍식이었다. 홍식은 한쪽 어깨에 체육복을 걸치고는 구겨진 얼굴로 중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중기에게는 마치 '상황은 역전됬다'라고 말해주고 있는것만 같아 조금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조금 속이 시원한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속 시원하다는 말 하면 한대 맞을것 같기도 하고….
" 같이 가. 어차피 이왕 이렇게 된거 나도 쓰레기 줍기 짜증나니까. "
" 응? 뭐 그러던가. "
나중에 체육선생한테는 어떻게 깨질지 모르겠지만.
홍식은 분명 이 말을 뒤에 생략했다. 뭐 어떻게든 되기야 하겠지. 홍식은 심드렁하게 중기와 나란히 걸으며 학교 건물로 들어왔다. 아직 수업시간이라 그런지 다행히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중기는 상의탈의를 한 홍식이 조금 민망해서 자꾸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아무리 남고라지만 웃통을 까고 학교를 돌아다닌다니. 2학년 첫날에 남녀공학에서 남자들만 드글거리는 남고로 전학온 탓에 아직까지 남고가 조금은 어색하다. 그런데 그런 남고에서 상의탈의를 하고 돌아다니는 학생은 더더욱 어색했다.
" 그… 옷좀 입으면 안되나? "
" 왜? 시원한데. "
" 니가 시원한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빨리 옷좀 입어. "
" 넌 써니텐으로 젖어서 포도향나고, 찝찝하고, 축축한 체육복 입고싶냐? 누구때문에 이렇게 됬는데. "
흠흠, 중기는 머쓱한지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 홍식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갔다. 홍식은 피식 웃고 중기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중기를 앞질러 걸어갔다. 어라? 중기는 인상을 찌푸리고 홍식을 바라보다 홍식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거의 뛰다시피) 홍식을 또다시 앞질러갔다.
" 그럼 난 누구때문에 이렇게 됬는데? 너때문에 이제 체육시간에도 못빠지잖아. 니가 먼저 시작한거다. "
" 내가 일부러 그랬냐? "
" 응. 너 사실 나 싫어하지? 나 엿먹이려고 그런거지? "
" 참나, 어이없어서. 너야말로 맨날 체육수업에 빠지고. 니가 여자애냐? 하긴, 너 맨날 하는짓 보면 여자애 같기도 하다. 화장품도 그렇고. "
" 장난해? 누가 여자애 라는거야?! "
중기는 빠른 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홍식의 앞에 섰다. 중기의 날카로운 시선과 홍식의 차가운 시선이 공중에서 맞닿았다.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둘 사이에서 크게 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기는 자신이 화장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도 않고, 숨길 이유는 더더욱 없었으며 당당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피부미용은 자신이 갖고있는 여러 취미들 중 한가지일 뿐인데, 그것때문에 놀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화나는 이유는 다름아닌 자존심에 있었다. 자고로 남자에게 여자같다고 놀리는 것은 자존심을 북북 파는말과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은 종종 들어오긴 했으나, 질 나쁜 놈들에게서 듣는것과 달리 홍식에게서 듣는 말은 유독 기분이 더 나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눈빛, 표정하며 행동들이 자신을 얕보는것 같기 때문에? 어쩌면 홍식이 더 질 나쁜 놈일수도 있기 때문에? 아니, 모른다. 모른다!
" 내가 틀린 말 했냐? "
" 응. 틀린말 했어. 그리고 요즘은 너같은 남자보다 나같이 여자마음을 잘 헤아려줄 수 있는 남자가 대세란거 모르냐? 너 말고, 나같은 남자 말이야! "
" 누가 너 남자라는거 몰라서 하는 소리냐? 봐, 상식적으로 너무 얇지 않냐? "
홍식은 중기의 팔목을 손으로 단단히 휘어잡아 들어올렸다. 홍식의 손에 쏘옥 들어가는 얇은 팔목에 홍식도 놀라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중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더 저하된 중기는 홍식의 손에 잡힌 제 손목을 빼내려고 힘껏 힘을 줘봤지만 역시나 역부족 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발버둥치다가 홍식은 아무 말 없이 중기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중기의 왼쪽 손목이 발갛게 자국이 남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손목 여기저기를 살피던 중기는 순간 갑자기 서러워졌다. 아무런 표정도 담고있지 않은 저 얼굴을 한대 쳐주고 싶었고, 자존심에 스크레치낸 저 얼굴에 되려 스크레치 내주고 싶었다. 도데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서로 친하기는 커녕 말도 한마디 하지 않던 사이인데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다니. 아무리 자신이 마음에 안들어도 그렇지, 쓸데없이 시비 걸 아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유없이 그냥 자신이 싫은 것일수도 있다. 하는 행동이 얄밉고 못미더워서, 그래서 그런걸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는것 같았다.
한편 홍식은 제 손에 잡혔던 손목의 감촉을 가만히 떠올리다 주먹을 꽉 쥐었다. 육상하면서 마른 남자아이들은 수도없이 봤고, 지금만해도 학교에 중기처럼 마른 아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중기만 유독 튀어보였던건 피부도 하얗고, 오목조목 선하게 생긴 얼굴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달랐다. 오묘하게 톱니바퀴가 엇물린 것처럼, 중기의 손목을 만졌을 때의 느낌이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그것이 도데체 무슨 느낌인지 홍식은 알지 못했다. 홍식은 제 앞에서 금방이라도 울 듯 눈 아프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중기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한건지, 후회가 물밀듯 몰려왔다.
" 넌 진짜 개새끼야. "
중기는 그렇게 말하고 홍식에게 등을 돌려 걸어왓던 방향 반대쪽으로 뛰어나갔다. 홍식은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이나 서있었다. 몇 분정도 더 지나고, 머리에 묻은 축축한 물기가 차갑게 얼굴로 방울져 떨어져내리고 나서야 홍식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 이유없이 시비걸고, 마지막에는 상처까지 안겨줬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 그 쪽에게는 얼마나 상처가 될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내뱉은 말 부터가 문제였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장 사과해야겠다는 의무적인 생각, 하지만 사과한들 일정한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을것 같다는 당연한 생각. 그 뿐이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반성도 필요했다.
" 진짜 엄홍식 개새끼… "
그래, 개새끼.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왜 그랬냐.
★★★★★★★★★★★★★★★★★★★★★★★★★★★
걸림팬픽...봐주는 익인들 있을ㄸ까...???ㅠㅠㅠㅠ부디 봐줬으면 돌던지지 말아줬음해 여기 처음쓰는거라....긴장되.
일화부터 쓸데없이 ㅈ나 길지? 흑흑ㅠㅠ사실 이게 한 20kb되려나... 암튼ㅋㅋㅋㅋ
난 봄봄봄이야 익이니들 기억해둬!! 기억해줘!!!
아왠지 애정갖고 써서 두근두근하다. 텍파로 만들지 말아주고 여기서만 봐줭ㅠㅠ♡ 아....암튼 봐줘서 고마워♡
사실 저 로고도 내가 쓸라고 몇개월 전부터 만들어논거임ㅋㅋㅋㅋㅋㅋㅋ잌ㅋㅋㅋㅋㅋ봄작가라고 불러주고 난 유수 걸림 탑뇽 지지자얔ㅋㅋㅋㅋㅋ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