맴맴.
내 머릿속을, 귓가를, 눈앞을.
시끄럽게 울어대는 시계의 알람을 끄고 피곤한 몸을 일으켜 반쯤은 넋이 나간채로 이를 닦았다. 넥타이를 어디 뒀더라. 숙제가 뭐였지. 마음은 급한데 몸은 느릿느릿. 거울 속 왜소한 남자아이가 오늘따라 더욱 못나보인다. 한심한 눈빛을 쏘아주다 문득 떠오르는 구겨진 면상에 서둘러 입안을 헹군다. 신발을 신고, 한숨 한 번. 문 밖을 나서기 전, 한숨 두 번. 철컥- 하는 문소리와 동시에 보여지는 멀대같은 놈 하나에, 한숨 세 번. 저벅저벅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는 놈을 보자니 콧방귀가 절로 나온다. 아니, 그럴거면 기다리질 말던가. 반겨주는 이 없는 오른손을 내리고 삐죽 입을 내민다. 한 두번 겪는 일도 아닌데 매번 서운함을 느끼는 나도 참. 그래, 네 놈 뭐가 이쁘다고. 다시 인사해주나 봐라. 나도 팔 안 아프고 좋다, 이 놈아! 새삼스레 치밀어 오르는 분함으로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멈춘 상태였다. 다시 내딛는 걸음 앞에, 한참을 앞서 작아졌어야 할 등짝 하나가 아까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영감탱도 아니고 느려 터지긴. 짧은 다리를 열심히 벌려가며 속도를 높이니, 마침내 놈을 앞섰다. 네 놈도 내 뒤통수 한 번 실컷 보라지.
'.......?'
긴 다리로 휘적휘적 다시 앞서는 얄미운 뒷모습을 실컷 노려보다, 그래 뱁새는 뱁새일 뿐 황새 따라가지 말자. 미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애 같기는.
'야, 빡찬! 같이가!'
네가 이러니까, 미운 놈이 안 미운 짓을 하니까. 그래서 내가.
-
아침부터 왜 이리 소란스럽나 했더니, 역시 네 놈이 문제였다. 나 참 앞머리 내린게 뭐 대수라고 이 난리인건지. 조금 더 작아진 얼굴을 보겠다고 옹기종기 창가에 모여 수근대는 여학생들을 보자니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저기 숨어들면 네 얼굴 실컷 훔쳐다 볼 수 있을까. 하필 또 내 뒷자리일 건 뭐야, 서글프게. 사람은 왜 뒤통수에 눈이 안 달린거지, 중얼중얼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리고 있으면 왠 투박한 손 하나가 툭툭, 뒤에서 나를 친다. 어..?
'야, 똥백. 혼잣말도 자꾸하면 습관된다.'
아. 뭐야...김종인.
'뭐래...'
'뭐지, 이 실망한 얼굴은. 귀여운 여학생이라도 바란거야?'
'아 진짜, 이상한 말 할거면 네 반으로 가!'
'야, 박찬열 얘 좀 봐. 귀 빨개진거 보여?'
'아, 뭐! 그래서 뭐!!!!!'
'아이고, 귀청이야. 아침마다 소를 때려잡아 먹나...'
'아무것도 안 먹었거든?!'
드르륵-
'....?'
'....?'
미동도 없던 박찬열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 순식간이었다.
'쟤는 무슨 말도 없이..'
'하루 이틀이냐.'
톡 쏘아주고 반쯤 돌아가 있던 몸을 원위치 시켰다. 아침이 다 가도록 말 한 번 못 해보네. 매정한 놈. 나도 말 안 걸거다, 뭐. 아침 자습시간에 나눠준 학습지에 의미없는 글자들을 끄적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지만, 그 녀석이 나갔던 뒷문으로 온 감각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에이씨..공부하자, 공부! 정신을 차리고 들여다 본 학습지엔 익숙한 세 글자가 여기 저기 채워져 있었다. 히끅! 재빨리 종이를 잡아채 책상 속 서랍에 구겨 넣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튀어나온 딸꾹질을 가라앉힐 틈도 없었다. 으아- 정말 돌아버리겠네!
'어, 빵이다!'
'.....'
'와, 우유도 있어! 빡찬, 네가 다 사온거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솔솔 풍겨오는 빵냄새에 슬그머니 고개가 돌아가려는 걸, 주린 배를 부여 잡고 꿋꿋이 버틴다. 나 진짜 한다면 하는 놈이야. 뒤돌면 사람도 아니다, 개만도 못 한 의지야!
'같이, 먹던지.'
'그래, 똥백! 너 아침도 안 먹었다며?'
...그래, 힘이 있어야 적도 물리치는 법이지. 절대 내가 개만도 못 해서, 그런게 아니야. 그렇고 말고.
'어, 뭐야 초코빵!!!! 아까는 없었는데?! 내가 분명 다 뒤졌다고!'
'네 눈이 고자라서 그래. 아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코빵~'
'야, 이거 진짜 맛있는데 나랑 바꿔 먹을래?'
'......'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대꾸를 하지.'
미운 놈한테 떡 하나 더 준다더니. 이건 미운놈한테 떡 받은 격이다. 아니면, 내가 얘한테 미운놈인가?
'켁켁-'
'욕심 낼 때 알아봤다. 그러게 진작에 초코빵 좀 양보하지.'
'닥ㅊ...켁-'
쓰윽. 초코우유를 내민 큰 손의 주인을 확인할 새도 없이 얼른 빨대를 물고 쭉- 빨아들인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만족스런 표정으로 올려다 본 큰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뭐야, 손이 없어 발이 없어 '
'ㅁ...뭐라는 거야!!'
'이젠 얼굴이 다 빨개지네. 얘 이거 병 아니야? 야, 빡찬! 얼굴 터지면 네가 책임져ㄹ...'
'......'
'뭐야, 너는 또 왜 빨개져?!'
'교..교실이 좀 덥다. 그치, 찬열아?'
'...덥네.'
그 날의 교실은 너무도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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