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이 저녁에 카톡으로 베라 기프티콘을 보낸거야.""그래서?""뭘 그래서야. 재결합했지." 내 말에 정수정은 어이가 없는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짚으며 한숨을 내뱉는다. 근데 뭘 어떡해? 이게 전분데. 나는 그저 최근 결별에 대해 낱낱이 고하라는 정수정의 협박에 정말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고했을 뿐이다. 마지막 결별의 이유는 영화를 보자며 약속을 잡아놓고 뻔뻔히 그 시간에 휴대폰을 꺼놓은 채로 롤을 하던 오세훈 때문이었고, 재결합의 이유는 오세훈이 내게 조공한 아이스크림 덕분이었다는 사건의 전말을. 이게 정말 끝이다. 끝. 아이스 초코를 빨대로 쪽쪽 빨며 음미하는 내게 다시 정수정이 말을 걸어온다."야. 나는 이건 아니라고 본다.""뭐가?""너희 연애한지 올해로 6년이지.""정수정 넌 가만보면 넌 우리 연애사에 징하게 관심이 많아.""오세훈 안질려? 걔는 너 안 질린대?""오세훈이 무슨 과자냐? 질리게?"오세훈은 물같은 놈이야 나한테. 말하는 내게 정수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는다."그럼 너 걔 보면 설레고 그래?""어?"섣불리 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던 정수정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미친년이지 이거. 非주류 로맨스공공복리동방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눈을 감고 기다란 쇼파에 널브러져 있는 오세훈이었다. 그 옆으로는 변백현과 김종대가 쇼파에 기댄 채로 게임기를 누르는데 정신이 없다. 노트북으로 맨날 한다는 짓이 게임 뿐이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킨 오세훈은 졸린 눈으로 나를 담더니 눈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연다."우리 겸이는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 오나.""정수정이랑 카페.""걔 만나지 말라니까.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들어.""수정이 걔도 너랑 언제 헤어질 거냐고 그러던데."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가방을 오세훈에게 던졌다. 알바를 관뒀더니 이번 달 생활비도 턱없이 부족해 택시는 꿈도 못꾸고 20분 거리를 꼬박 걸어왔다. 몸이 지글지글 익는 것만 같다. 망할 놈의 자본주의. 돈 없는 자는 바베큐가 되도 상관 없다는 건가. 다음 생엔 이은겸 말고 아랍 공주로 태어나야겠다. 내 중얼거림에 가방을 가볍게 받아든 오세훈은 충고한다."메르스 무섭다며. 그리고 아랍은 더울걸?""아! 맞다.""겸아, 이왕이면 영국 공주가 낫겠다."주된 일상 중에 하나인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게임이 끝났는지 김종대가 킬킬대며 이야기에 끼어든다."이은겸이. 이번 생에 선행을 많이 베풀어 봐. 윤회설이라고 아려나? 네가 윤회를 알아?"또 시작이다. 과방에서 노닥거리다 수강신청에 실패해 울며 겨자먹기로 교양과목으로 '종교에 대한 이해'를 듣게 된 김종대는 요새 불교에 미쳐있다. 마치 고등학생 시절 사탐 과목으로 생활과 윤리를 선택했던 친구들이 불교의 매력에 폭 빠졌던 것과 같은 맥락일까?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이 하나 있다면 단언컨대 불교는 수학 다음으로 아름다운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김종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막내 아들이라는 거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그거야 우리 엄마 친구 아들이 김종대거든. 하여튼 간에 열과 성을 다해 교리를 전파하던 김종대는 얼마 안되어 다시 게임이 시작됐는지 하던 말을 멈추고 게임기를 잡았다. 모순된 놈 같으니라고. 이게 바로 신컨! 이것이 신컨이지!하며 숨이 넘어가게 웃어대며 외치는 김종대를 가만 바라보던 나는 오세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덥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염병할 지구 온난화."세훈아 내일부터 머리 내리고 와.""왜. 언제는 내 이마가 잘생겼다면서.""네가 왁스를 쓰니까 지구가 열이 나.""지구가 나 좋아한대?""엉. 지구가 너한테 반했나봐. 질투 나니까 머리 내리고 와."알겠어 겸아. 어느새 가방 대신 제 옆에 앉은 나를 꼭 끌어 안고 답하는 오세훈이었다. 나는 그 품안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순간, 정수정의 물음이 머릿속에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오세훈을 보면 설레냐고 물었지."오늘은 뭐할까.""영화 보자.""영화 보고?""모두의 마블?""콜."굳이 설레야 돼? 이거면 됐지. 나는 탁자 위를 뒹구는 페트병을 잡아 물을 한모금 마셨다. 꿀꺽./새로운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내게 있어 과 단합은 언제나 귀찮고 쓸데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자, 인사들 해! 얘는 나랑 같은 학번인 이은겸이야. 다들 처음 보지? 강의실 맨 뒤에서 엎어져있다가 끝나면 맨날 과방으로 쪼르르 도망가서 못 봤을 거다. 그래."이럴 줄 알았으면 나는 차라리 경영대를 택했을 거다. 사람이 많아서 하나 쯤 빠져도 테가 안나는 그런."그리고 얘가 걔야. 경영대 오세훈 여자친구. 우리는 걍 쩌리지. 눈에 안 찰걸."문제는 하필이면 우리 학과생들이 어마어마한 인간미의 소유자들이라는데에 있다. 새학기가 시작 된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에 대해 배우는 학과생들은 뼛속부터 소통 지향적인 인간들인 건지 이 놈의 과 단합이 그칠 줄을 모른다. 웬만해서는 대충 핑계를 대고 빠져나오는 나였으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과대 남자애가 나를 질질 끌고 왔기 때문이다. 이름이 뭐였지. 김민수였나? 그것도 아니면 김민형? 아니지. 김민형은 내 첫사랑 이름이잖아. 나는 카톡창을 주욱 내렸다. 한번 팀플을 같이 했던 것 같은데. 맞다. 김민철이었지. 제 이름에 철이 들었다며 되도 않는 드립을 쳤던 것이 기억난다."우와 진짜요?"나 새내기에요, 하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뽀얀 여자애가 되묻자 김민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벌린다."어. 오세훈 여친이지 얘가."얘 나를 왜 이렇게 잘 알아. 불편하게. 누군가의 입에 내 사생활이 오른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왜 우리가 화두에 올라야 하지. 뽀얀 새내기는 나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오징어를 질겅댔다. 나는 졸린 눈으로 김민철이라는 이름이 올라와 있는 창을 꺼버리고 맨 위에 올라와 있는 카톡방을 꾹 눌렀다.[ 겸아 뭐해? ][ 더워서 이민갔나 왜 안보일까? ][ 나도 데려가지 이글루 지어줄 수 있는데 ][ 샌드위치 먹을래? ][ 사실 생각나서 벌써 샀어 ][ 과방에 놓으면 털리겠지? ]오징어 때문인지 입 안이 텁텁했다. 맥주를 홀짝인 나는 턱을 괴고 휴대폰 자판을 눌렀다.[ 훈아 샌드위치 맛있겠다 ][ 그건 그렇고 나 납치 당했어 ][ ? ]칼답에 썰리겠다. 오세훈은 휴대폰만 보고 사나? 대답을 요하는 녀석의 짤막한 메세지에 나는 손을 바삐 놀렸다.[ 끝나고 단합 끌려왔다 질질 ][ 아 ][ 놀랐네 ][ 과 단합은 대체 왜 하는 거래? ][ 야 술은 안돼 ][ 넌 맨날 술을 먹는게 아니라 술한테 먹히잖아 ][ 겸아 너는 다 사랑스러운데 음주는 자제했으면 좋겠어 ][ 이미 마셨으면? ][ 죽을래 ][ 누가 나 없는데서 술 마시래 ][ 네 진상짓은 나만 봐야 된다니까? ][ 읽고 있을 정신이 있지 지금 ][ 뭐하냐. 빨리 나가서 바람 안 쐬고 ]명답이시다. 오세훈 말이 진리요 법이지. 암, 그렇고 말고. 쏟아지는 잔소리에 휴대폰을 대충 클러치에 쑤셔 넣고 화장실에 간답시고 테이블을 슬그머니 빠져 나왔다. 나란 인간은 태생부터 음주가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술도 못마시고, 누군가와 잘 어울려 놀지도 못한다. 한 잔 좀 못 미치게 마셨는데도 살짝 정신이 알딸딸하다. 가게 앞 계단에 쪼그려 앉아 천천히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따갑다. 뭐야 왜 쳐다볼까. 나 거지 아닌데. 노숙자는 더더욱 아니고. 이거 봐. 지금 쓰고 있는 스냅백도 완전 비싼 건데, 오세훈이 한정판이라고 샀던 거.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구석진 곳이 어디 있을까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던 내 눈에 띈 것은 가게 옆에 위치한 으슥한 골목길이었다. 어둡고 구석지고, 남들의 시선을 피하는데에는 적격일 듯 했다. 저기가 좋겠다 싶은 마음에 몸을 일으켜 느릿 느릿하게 골목길로 향하는데, 몇 걸음 못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둔탁한 소리가 말이다. 간헐적인 헐떡임과 하모니를 이루는 익숙한 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이, 씨발, 새끼야.""진짜 좆 같은 새끼. 내가 우스워?"골목길의 회색 담에 몸을 밀착하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편한 차림의 남자 대 여섯 명이 한 사람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은 얼핏 보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도 안 될 정도로 망신창이였다. 상황이 심각했다. 어떡하지. 어떡해. 어쩔줄 모르고 벽 뒤에 숨어 눈만 굴리고 있는데, 순간 눈이 마주쳤다. 바닥에 엎어져 고통에 찬 숨을 내뱉는 남자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등을 돌려 벽에 기대고 덜덜 떨리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온몸이 난폭한 울렁임으로 가득 찼다."야 이 새끼 좀 봐라. 이래도 죄송하다는 말 한번 안해."아, 난 몰라. 나는 안돼. 계속 들려오는 욕짓거리들에 나는 온몸을 달달 떨며 가게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테이블로 걸어가 자리에 앉자, 흥에 젖은 김민철이 나를 반긴다. 술게임이 한창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아까 앉았던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렇게 멍하니 창 밖만 쳐다보고 있는데, 클러치에서 진동이 짧게 울린다.[ 겸아 샌드위치 너희 집 냉장고에 놨어 먹어 ][ 내가 해장국은 못끓여서 숙취해소 그건 사다 놨거든 ][ 그것도 꼭 먹어 ]오세훈이었다.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급히 가방을 챙겨 나왔다. 가게를 빠져나온 나는 조심 조심 골목길을 향해 전진했다. 그리고 골목길 앞에서 눈을 꾹 감고 가방을 던졌다. 그게 지금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것은,"억."아까 그 고통에 찬 신음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골목길에는 아스팔트에 몸을 뉘인 남자가 유일했다. 그 등에는 내 가방이 안착해 있었고. 나는 울상을 짓고 골목길로 들어가 남자를 살폈다. 아까 그 남자들한테 맞은 걸로도 모자라, 내 가방까지 맞은 남자는 숨만 간신히 내뱉고 있다. 하필이면 가방도 오세훈이 치한 만나면 휘두르라고 사줬던 거다. 뾰족한 찡이 박혀 있는.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기, 괜찮아요? 미안해요. 진짜 고의가 아니었거든요. 정말. 근데 진짜 괜찮으세요? 계속되는 물음에, 남자는 입을 열어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다."...아. 죄송한데. 좀, 일으켜, 줄래요?"아스팔트에 까진 것은 단순히 겉만이 아니었나 보다. 까슬까슬하게 끊어지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급히 남자를 부축했다. 까만 점퍼에 밟힌 자국이 선명하다. 거기에 내 찡 자국은 덤이다. 미안. 내가 미안합니다./"뭐 먹으러 갈까?""학식.""우리 겸이는 왜 맨날 학식만 먹고 살아? 안쓰럽게.""몰라서 물어봐? 네가 알바 관두라며. 네가.""그랬나?" 우리 학교 학식 존나 맛없는데. 난 아직도 후회를 해. 내가 왜 이 대학교를 지원했나. 뻔뻔한 얼굴로 말하던 오세훈은 돌연 자리에 멈춰 서더니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말한다. 아니지. 우리 겸이랑 씨씨하려고 지원했지 그래. 김종대가 입에 닳도록 말하는 석가모니스러운 얼굴이 이런 걸까. 드디어 열반의 경지에 다다랐구나 내 남자친구가. 가만히 녀석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 보고 있노라면, 오세훈은 이어 말한다."우리 다음 목표는 사내 커플이야.""웬?""남남 커플 말고 회사 내 커플.""전공이 완전 다른데?""복수 전공을 할까 내가?"진지하게 물어오는 오세훈의 이마를 검지 손가락으로 꾸욱 밀었다. 철 좀 들어. 우리 세훈이는 이름에 철이 안들어서 철이 없나? 개명을 시켜야 하나. 아니. 오세철은 좀 이상한데. 그냥 오세훈이 낫겠다. 철 없으면 뭐 어때, 빈혈은 없는데."아, 덥다." "그냥 김밥이랑 라면 사서 과방 갈까?" "그럴까?""어. 좋다. 과방에서 라면 먹고 가자.""겸아 좀 위험한데 그 발언은." 더위 먹었어 훈아? 주먹으로 녀석의 팔을 퍽퍽 치자 오세훈은 내 주먹을 잡아채 제 커다란 손으로 움켜 쥐어 버린다."가자 빨리."오세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길라 치면, 저 멀리 체대생들이 뛰어 다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땡볕에서 또 지옥 훈련이고만. 체대생들이 그렇게 훈훈하다던데, 애인 감으로는 낙제다. 쟤네는 군기가 바짝 잡혀서 애인보단 선배가 중요할 걸? 뛰어다니는 체대생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세훈이 내 눈을 가려온다. 야, 눈 돌아간다. 겸아. 하며. 지구 온난화 때문에 머리 내린 세훈이 8ㅅ8 공공복리 l 작가의 전체글 신작 알림 설정알림 관리 후원하기 모든 시리즈아직 시리즈가 없어요최신 글현재글 최신글 [EXO] 비주류 로맨스 1 210년 전위/아래글현재글 [EXO] 비주류 로맨스 1 210년 전공지사항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