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출항 날짜가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 조금만 살살, 아파.”
내 손에는 동혁이의 머리카락 한 움큼이 쥐어져 있었고, 앞에 털퍼덕 주저앉은 동혁이는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징징거렸다.
“가만히 있어 봐! 머리 길어서 답답하다며, 내가 묶어준다니까?”
“이제 곧 비행기 타러 가야 하는데, 머리를 묶고 가라고?”
“뭐 어때? 누나가 이쁘게 사과머리로 묶어준다고!”
강압적으로 움직이는 내 손길에 동혁이는 포기한 듯, 이내 몸에 힘을 빼고 목을 축 늘어트렸다. 동혁이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거 동의의 표현으로 이해해도 무리 없겠지? 한결 쉬워진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하려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빼냈다. 얘는 무슨 남자애 머릿결이 이렇게 좋은지, 웬만한 샴푸 모델 머리채 쥐어뜯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다 묶고도 그 부드러움에 계속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다 된 거 아니야?”
“아, 으응. 다 됐어.”
“거울!”
징징거릴 때는 언제고, 거울을 찾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배시시 웃으며 옆에 두었던 손거울을 건넸다.
“괜찮아? 잘 어울리나?”
이마 한가운데에 뿅 솟아오른 머리카락 한 갈래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흔들 흔들렸다. 아, 역시 김동혁, 미친 듯이 잘 어울렸다. 웬만한 여자도 소화하기 힘든 사과머리를 그는 마치 그 머리를 하기 위해 태어난 듯 자연스레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야, 진짜 잘 어울려. 맨날 이러고 다녀라. 내가 묶어줄게.”
무작정 엄지를 세우며 그를 추어올렸더니 해사하게 웃는 동혁이었다.
“네가 묶어준 건데 잘 어울릴 수밖에 없지. 다 묶었으면 나가자, 형들 기다리겠다.”
타이타닉의 출항은 삼 일 후였다. 백 년 전의 타이타닉을 계승했다며 이와 완벽히 일치하는 영국 사우스햄프턴에서 출항하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뉴욕에 정박하는 코스로 짜여 있었다. 며칠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영국에서 여권 문제며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았기에 오늘 출국을 해야만 했다.
“빨리 나오라니까.”
나와 동혁이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엘리베이터 옆에 서 있던 한빈 오빠는 고개를 들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움찔하여 입이 굳는데, 동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얘가 머리 묶는다고 난리 쳐서, 기다려주느라고 그랬죠. 잘 어울려요?”
동혁이는 나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우리는 동시에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싫다고 하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잘 어울리냐며 묻는 것이 너무나 우스웠다. 진짜, 개귀엽다고! 우리가 박장대소를 하고 나서야 동혁이의 사과머리를 본 듯, 한빈 오빠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잘 어울리네, 무심히 한 마디를 뱉었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가자, 검은 세단 한 대가 오피스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는 눈부시게 좋았다. 이렇게 좋은 날 멤버들과 함께 한껏 바캉스를 즐기러 가는 거였으면 소원이 없겠건만, 국가에서 내려온 미션을 수행하러 가는 중에도 하늘은 미치게 청명했다.
“아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차에 오르는데, 지원 오빠의 목소리가 내 주의를 환기했다.
“표정 풀어. 지금 우리는 다 같이 놀러 가는 거야, 영국으로. 알았지?”
능청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오빠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 어찌 됐던 우리 다섯이 함께 비행기를 탄다는 게 대체 얼마 만인데. 미션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놀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그렇게 애써 위로하며 공항에 도착했다.
매일 밥 먹듯이 가는 장소가 공항인 만큼, 출국 수속은 손쉽게 끝났다. 전용기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미션을 수행하러 간다는 티를 내기 싫다는 구준회의 강력한 주장에 한빈 오빠가 일정을 조정하여 일반 항공사의 여객기 항공권을 예매했다. 다같이 하는 미션이라도 일은 일이었다. 정보요원으로서의 위험한 인생을 즐길 만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지원 오빠밖에 없었고, 그 외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이번 미션은 지원 오빠마저도 여행으로 포장하고 싶어 했다. 합동 미션인 것도 있었고, 어찌 됐던 호화 크루즈 탑승이라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게이트를 지나 탑승권을 내고 비행기에 발을 들였다. 앞서 들어가는 지원 오빠와 구준회가 보였다. 맞다, 창가 자리!
“나 창가 쪽!”
창가 쪽 자리를 뺏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지원 오빠와 구준회 틈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 먼저 안쪽 창가 좌석에 몸을 낑겨 넣는 것에 성공했다. 아싸, 그들을 보며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띠자 구준회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성격은 또 엄청나게 급해요, 누가 자리 뺏어간대?”
“너 성격이면 충분히 뺏어가고도 남겠다. 왜 또 시비야!”
“내가? 뺏어간다고? 어이없네.”
하, 하고 웃음을 내뱉던 구준회는 좌석 사이로 나를 따라 들어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따라오던 지원 오빠는 내 옆에 앉은 구준회를 보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야, 비켜, 내가 아가 옆에 앉을 거야.”
“아, 형, 제가 먼저 앉았잖아요.”
“형이 비키라면 잔말 말고 비켜. 내가 거기 앉겠다고.”
“싫어요. 다른 데 앉던가.”
유치하게 자리다툼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 나이만 처먹었지 애보다도 못한 것 같았다. 시발, 이것들은 왜 또 굳이 내 옆에 앉아 가겠다고 지랄일까. 끝까지 비키지 않는 구준회 덕에 지원 오빠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내 바로 뒷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몇 분 후, 비행기는 천천히 이륙했다. 붕 뜨는 느낌에 창문을 열고 밑을 보았다. 활주로와 공항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드는 덜컹거림은 이내 잦아들었고, 스튜어디스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기내식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트레이를 치워주는 스튜어디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시트를 뒤로 젖혔다. 여행을 간다는 설렘에 잠을 설쳤던 터라 피로감이 급하게 몰려왔다. 비행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어차피 한 번은 자야 도착을 할 터였다.
“구준회, 나 먼저 잘게. 대충 봐서 깨우든가, 알아서 해.”
“너 어제 또 떨린다고 잠 안 잤냐? 나중에 시차 적응 못 하면 어쩌려고.”
“어쩌라고. 어쨌든 잘 거야, 잘자.”
구준회가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 일부러 얼굴을 살짝 찡그린 채 창가 쪽으로 머리를 기울여 눈을 감았다. 조금 후, 옆에서는 스튜어디스가 왔다 갔다 하는 듯한 기척이 들리더니, 내 몸 위에 담요인듯한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눈을 움찔하자 구준회가 쉬, 말하며 눈가를 쓰다듬어 다시 내 눈을 감겼다.
“자, 어제 못 자서 피곤할 텐데.”
다시 눈을 꼬옥 감자 그래, 자, 하며 그는 내 볼을 어루만졌다. 위아래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추더니, 그는 담요를 턱밑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잘 자.”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잠이 들었다.
-
“……a warship.”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눈이 뜨였다. 완벽한 미국 동부의 악센트였다. Warship, 군함.
다들 잠을 자는 것을 배려한 것인지, 기내에 불은 거의 다 꺼져 어두웠다. 내가 조금 일찍 잠들긴 했구나, 하며 담요를 걷고 몸을 움직이려는데, 한빈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A stealth sub, to be more accurate.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텔스 잠수함이요)”
미친, 스텔스 잠수함이래. 한빈 오빠는 정보요원으로 일평생을 살아왔다. 심지어 일을 시작하기 전 유년 시절부터 오랜 훈련을 받았다. 그만하면 질릴 법도 한데, 오빠는 유별난 워커홀릭이었다. 평소에도 저런 군사 관련 대화를 꺼내는 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목까지 꼼꼼하게 덮인 담요를 들추고 고개를 돌려 보니 건너편 자리에 한빈 오빠와 한 멀끔한 외모의 서양 남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비행기에 오를 때 동혁이가 지원 오빠 옆자리에 앉는 바람에 한빈 오빠는 꼼짝없이 반대편 자리에, 모르는 사람과 함께 앉았었다. 직업병 어디 간다고, 비행기 안에서까지 모르는 사람과 군함이며 잠수함이며 온갖 군 관련 용어를 사용하다니, 그의 프로 의식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Well, Mr. Kim. You’ve got to be realistic. Consider the cost. (흠, 김한빈 씨.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비용을 고려해보세요.”
“In that sort of case, cost is just an irrelevance. The magnitude, it is going to be legendary. (그러한 경우에 비용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전설적인 규모가 될 텐데요)”
잠을 오래 잤는지, 목이 탔다. 호출 버튼을 누르자 스튜어디스가 나타나 무엇이 필요하냐 물었다. 물을 한 잔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 둘도 이제 자려고 마음먹었는지, 이야기 소리는 점차 작아졌고, 이내 멈췄다.
좌석마다 달린 스크린을 통해 보니 출발한 지 7시간이 지나 있었다. 남은 비행시간은 6시간 정도였다. 다시 자기도 애매한 시간대였다. 노트북을 꺼내 넣어온 영화를 보기로 했다. 테이블을 내리고,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타이타닉.
작전명에 어울리게, 타이타닉을 선택했다. 구준회가 보면 유치하다고 비웃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디카프리오! 이때가 리즈였지, 지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리즈 시절 디카프리오의 외모에 감탄하며 영화에 몰입했다.
미친, 디카프리오. 잭, 잭, 잭, 잭! 로즈가 갑판에서 팔을 내밀고, 잭이 뒤에서 잡아주는 장면은 언제 봐도 미친 장면이었다. 아, 나도 배에 타면 저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뒤를 돌아 남정네 넷을 바라보았다. 한빈 오빠, 그딴 사소한 부탁 하면 화를 낼 것 같고, 지원 오빠는 흔쾌히 승낙하겠지만 내가 조금 꺼려졌다. 시발, 아침에 깨우러 갔을 때도 입술부터 맞대는데, 그런 부탁을 할 배짱은 없었다. 구준회에게 부탁하면 미친년 소리 들을 것이 분명하고. 동혁이는…… 안돼, 쓰러질지도 몰라. 배에 괜찮은 남자 없으려나, 잭 같은 남자 하나 건져서……! 시발, 헛된 희망이겠지.
이내 영화는 끝이 났다.
침몰하는 장면에서 살짝 걱정되기는 했다. 애초에 이번 타이타닉의 침몰을 막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니까. 맥없이 침몰하는 배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그래도 지금껏 미션을 실패한 적은 없으니까, 이번에도 잘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잭과 로즈의 로맨스가 부러웠고, 호화로운 배에 심장이 뛰었다. 될 놈년들은 그냥 다 된다니까, 배에서도 연애질이나 하고……. 언론은 타이타닉을 재현한 배라며 무수히 홍보를 했고, 유명 인사도 셀 수 없이 탑승하는 배였다. 기대치는 더욱 높아졌다.
아, 배에서 잭 같은 남자나 만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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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바벨탑 / 신 / 주내 / 마그마 / 토마토 / 준회원 / 준회 / 카누 / 준회(오빠)
이제 시험기간이라서... 언제 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ㅠㅠㅠㅠㅠ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