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경수는 당당히 제 옆자리에 와서 선 전학생을 바라보았다. 손에 붙들린 교과서 자락이 팔락 팔락, 흔들렸다. 차분히 가라앉은 생머리 밑으로 하얀 이마가 설핏 보이고, 더 밑으로 동글동글한 두 눈동자와 마주친다. 더 밑으로 변백현. 새 것답게 윤이 나는 명찰이 전학생의 정체성을 일러주고 있었다. 경수는 당황스러운 마음도 잠시, 정답게 말을 계속 걸어오는 백현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곧은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왠지 싫지는 않았다.
친하게 지내자.
이름이, 도경수? 경수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싱긋 웃는다. 성이 되게 특이하네. 나도 성 특이해! 활짝 웃는데 눈꼬리가 축, 처졌다가 제 자리로 돌아간다. 백현은 후에도 한참을 경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얌전히 책가방을 내려놓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칠판을 바라본다. 그래. 경수도 고개를 돌려 전학생에게 대답했다. 친하게 지내자. 나지막한 경수의 목소리에 백현은 입꼬리만 살풋 올려 웃을 뿐,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경수도 샤프를 쥐어들고 서걱서걱, 필기를 시작했다. 창가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기분 좋은 날이었다.
친구
w. XTC
경수는 누가봐도 반짝반짝 빛이나던 아이였다. 유치원 때부터 앞치마를 두른 교사들은 경수 어머니를 붙잡곤 한참을 어머님, 아무래도 경수가요..로 시작해 어쩜 아이를 이렇게 바르게 키우셨어요 어머님. 하면서 또래답지 않은 영특함과 차분함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 근방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들 모두가 경수야 경수야, 하면서 아이의 주의를 끌고 싶어했고 그럴 때면 경수는 표정 한번 구기는 일 없이 응, 누구누구야. 하고 다정하게도 이름을 불러주며 대답하곤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했다. 공부도 착실히 잘 했고, 예의바르면서도 적당히 쾌활하고 밝은 아이는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타고난 분위기는 경수를 점점 지치게 했다.
이제 조용히 좀 살고 싶어요 어머니. 거실 쇼파에 앉아 한참을 경수에게 이번에는 전교 임원을 노려보면 어떻겠냐고 쾌활하게 얘기하던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물고 경수를 바라보았다. 잘 다려진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아들은 특유의 묘한 성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사과를 베어물던 경수는 어머니에게 웃어보였다. 요즘은 일학년때부터 수험생이래잖아요. 공부만 하고 조용히 지내려고요. 그 말을 끝으로 경수는 꾸벅 목례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경수의 어머니는 못내 서운했다. 집 밖에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조숙한 아들은 귀가해서는 제 방 안에서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했다. 그런 경수가 밖에 나가 뛰어놀고 운동하고, 가끔은 친구들과 심한 장난도 쳐보고 야단맞기도 하며 제 또래 아이들같이 사춘기를 겪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다. 그런 소리를 했다간 다들 복에 겨운 소리 말라며 시기어린 부러움을 표출했다. 너무 바른 아들도 힘들구나. 어머니는 과도를 내려놓고 경수와 꼭 닮은 고운 얼굴을 살풋 찌푸렸다.
경수는 집과 제일 거리가 가까운 남고에 입학했다. 시꺼먼 남학생들 무리 사이에서 경수의 하얗고 고운 얼굴은 단연 눈에 띄었지만 다짐했던 대로 경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먼저 다가가서 호감을 표시해도, 장난을 걸어도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만 대꾸했다. 몇 주가 지나고 곧 경수는 혼자가 되었다.
열여덟의 경수는 익숙히 교실 뒷 쪽 자리에 혼자 앉았다. 친하게 지내고 싶어 어슬렁 거리던 풋풋하던 입학 초의 남학생들은 경수를 점점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은 그 하얀 피부, 계집애의 것보다도 얇은 손목, 슬쩍 드러나는 목선 따위를 훑으며 탁해지곤 했다. 경수도 대충 알고는 있었으나 애써 제게 달라붙는 끈적함들을 무시하고 두터운 교과서를 꺼내 펼친다. 윤리와 사상. 어쩐지 웃음이 났다. 흘긋 시계를 올려다 보니 백현이 올 시간이었다. 제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슬그머니 치우기가 무섭게 교문이 드르륵 열렸다.
'아.. 좀 떨어져봐'
'아, 변백현.. 너 어쩜 목소리도 예쁘냐?'
백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말만한 남학생 하나를 달고 들어왔다. 전학 온 후 계속 그 옆에 찰싹 붙어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되도않은 수작을 걸다 뺨을 맞은 박찬열이었다. 백현이 전학온지 벌써 한달이 다되어가는데 찬열은 뺨맞은 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반도 다른 백현을 졸졸 쫓아다녔다. 무시무시하게 큰 키와 반항적인 눈동자가 꽤 무서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생각했는데, 헤실헤실 하얀 치아를 드러내 웃으며 백현에게 어깨동무를 하는 찬열의 모습에 경수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쩌면 참 단순하고 정 많은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난 니가 존나게 존나게! 좋아.'
달라붙는 찬열을 떼어내는 백현의 미간이 속수무책으로 구겨졌다. 그 모습에도 귀여워 어쩔 줄 몰라 으아으윽, 하고 괴상한 신음을 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찬열이 무신경한 백현의 목부근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경수는 찬열이 꼭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난 초등학생 같다고 생각했다. 큼큼. 점심시간 때 다시 옴! 저를 무시하는 백현의 작은 어깨를 꼭 붙들고 속사포 랩하듯 쏟아낸다. 경수는 몰래 웃음을 삼켰다. 제 반으로 황급히 도망가는 찬열의 뒷 목이 붉었다. 백현은 그러건 말건 제게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경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그리고 각자의 할 일에 집중했다.
경수는 백현이 마음에 들었다. 지나치게 수다스럽지도, 과묵하지도 않은 백현은 약간 여성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경수와 잘 맞았다. 좋아하는 음식이라던가, 게임, 연예인같은 취향 면에서 잘 맞아서가 아니라 그저 단 둘이 있을때 오가는 말이 없어도 민망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점에서 백현은 경수에게 편한 아이였다. 찬열이나 다른 아이들에게는 쌀쌀맞고 고고하게 구는 백현도 경수에게만은 어쩐지 친근하게 대했다. 자연스레 둘은 함께 다녔고 그 모습은 퍽 잘 어울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사실은 두 남학생을 괴롭게 했다.
교실 문을 벌컥 열어 젖히는 소리가 종인의 귓등을 때렸다. 종인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씩씩거리는 콧김이 느껴졌다. 찬열임에 틀림없었다.
'아아아아아악!'
애꿎은 종인의 의자를 벅벅 발로 갈기던 찬열이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털썩 옆자리에 앉았다. 종인은 고개를 슬쩍 돌려 찬열을 흘겨보았다. 목부터 귀끝까지 새빨개진 찬열의 모습은 꼭 군밤 같았다. 안 물어봐도 도오경수 개애새끼! 하면서 욕지거리를 할 찬열을 알지만 습관적으로 종인이 물었다. 왜.
'도경수가 변백현 맨날 꼭 붙들고 있잖아! 존나 딱 우리 교실 입장할 때 맞춰서 변백현 자리 치워놓고 기다린다고. 아주 현모양처 우렁각시가 따로없음. 게다가 내가 변백현한테 점심시간 때 온다고 하니까 그 비웃는 표정이.. 어유 저 한심한 병슨새끼, 했다고. 으, 으 존나! 으!'
'본인이 좀 병신같다는 생각은 안해봤고?'
'이 쌔끼가?'
'박찬열 너 존나 한심하긴 해.'
'야!'
낮은 목소리로 꽥 소리를 지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종인은 배를 붙들고 웃어제꼈다.
'지도 존나 볼 것도 없는 도경수 빨면서 나댐. 진리는 백현여신이지, 암! 도경수 걘 애쌔끼가 글러먹었어.'
종인의 웃음이 뚝 끊기자 찬열은 궁시렁대며 가볍기 짝이없는 제 가방을 홱 건져 책상에 올려놓고 긴 팔을 휘저었다. 씨바, 무슨 시간이지? 야 나 교과서 없음. 좀 내놔봐. 옳지, 옳지.. 예쁘게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옆 자리 학생들에게 건들거리는 찬열의 저음이 멀어진다. 껄렁껄렁하기 짝이없는 찬열의 슬리퍼가 질질 끌리는 소리와 맛깔나는 욕설이 교실을 어지럽혔다. 종인은 한대 치고 싶은 그 뒤통수를 노려본다. 도경수, 도경수.. 힘 잔뜩 준 눈이 스르르 풀림을 느끼며 종인은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찬열의 비꼬는 말에 반박도 못하고 종인은 속으로 수긍했다. 그래. 이시대 진정한 속앓이 짝사랑 호구 병신은 나지. 이 구역의 짝사랑 병신은 나야. 하며.
미운 일곱살 때로 기억한다.
'인사해, 종인아. 어휴, 자꾸 뒤에 기어들어가지 말구!'
유치원 같은 반 남자애의 어머니는 종인의 어머니의 동창이었다. 찐하고 눈물겨운 우정을 나눈 중고등학교 동창. 학예회에서 우연찮게 만난 두 분은 반갑다며 소리를 지르고 얼싸안으시더니, 그 이후로 매일같이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제 아들들을 소개시키고 귀엽다며 또 다시 서로를 얼싸안고를 반복했다. 하지만 종인은 그 남자애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저보다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야무져서. 친구도 많고... 부러웠던건지도 모르겠다.
종인 하나 쯤 없어도 아이는 친구가 많았다. 누군가 경수야!! 하고 불러제끼면 어디선가 으응.. 하고 귀엽게 미소지으며 작은 손을 마주잡을 때면 종인은 묘한 질투심이 일었다. 경수를 향한건지, 경수를 부른 누군가를 향한 질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단순한 종인은 그러한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끔 경수의 뒷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아이들과 뛰어노는 경수에게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하는 제 나이에 딱 맞는 미운 짓으로 분을 풀어보려 했지만, 경수는 금방이라도 투두둑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도 탁탁 털고 일어나 웃어보였다. 말갛게 웃으며 난 괜찮아! 하고 제 친구들과 사라지는 경수를 보며 어린 종인은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동그라니 귀여운 뒤통수를 노려보며 종인은 간질간질한 제 가슴께를 벅벅 긁으며 비져나오려는 울음을 참곤 했다. 그러면서도 경수를 몰래 괴롭히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기.'
항상 종인을 부를 때는 저기, 하는데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떳떳한 이름 석자-그것도 이미 일곱살 때 통성명을 해서 경수가 모를 리가 없는-가 있는데 왜 항상 저기, 하면서 쭈뼛거리는지. 어렸을 때 괴롭힘 당한 기억이 남아있는 걸까? 안본지 너무 오래되서? 종인은 초조했다. 그런 종인에게 경수가 처음 먼저 말을 건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얌전한 생머리를 긁적이면서, 전교 부회장이랍시고 그 예쁜 손으로 종인의 교복을 지적하면서였다.
'넥타이가 없어서.'
처음에 쭈뼛거리던 태도와는 사뭇 다르게 꽤 센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음, 바지 통도 너무 좁은데.. 단추도 하나 없고.'
하고는 작고 하얀 손에 쥐어진 연필을 도로록 돌리더니 노트에 이름을 적었다. 복장 불량. 김종인. 그 작고 꼬물거리는 손으로.
'나 명찰도 없는데. 내 이름 알면서 왜 안 부르냐?'
경수의 동그란 머리꼭지를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느긋하면서도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경수가 흠칫하곤 올려다봤다. 연필을 잡은 손에 땀이 배였다. 눈이 마주친 찰나, 두 사람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놀라서 더 동그래진 눈과, 살짝 올라간 짙은 눈썹 끝. 그리고 앙증맞게 벌어진 입에 유치원 때 훔쳐보던 경수의 보송보송하니 앳된 얼굴이 겹쳐보이면서도 왠지 달라보여 종인은 웃음이 났다. 이젠 나보다 한참 작네 도경수. 종인은 붉어진 경수의 귀끝을 툭툭 건드리곤 씩 웃었다.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때부터인가, 종인은 경수가 밉지 않았다. 외려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종인은 더 이상 좋아하는 마음에 짝사랑 상대를 괴롭히는 미운 일곱 살이 아니었다.
**
가입해서 처음 쓰는 글이 팬픽이라니..^^ 엑소게이들 사랑하자!
그냥 갑자기 경수 교복보고 학원물이 쓰고싶어져서 대책없이 써봤어요. 부끄러워라. 즐감!
+)
대책없이 글 싸질렀는데도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싸랑합니다
암호닉 받을게요 !!
+)
초록글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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