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맥주
7층 휴게실이 이렇게까지 어색하고 숨 막혔던 적은 없었는데 단지 석진선배가 내 앞에 서있다는 자체가 날 힘들게 했다. 혹여나 누군가가 나랑 선배를 발견할 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만약에 피디님께 들키면 무슨 사이냐고 묻겠지. 분명 저번에 모른다고 했는데. 사실 물어본다 해도 그냥 대학 선후배 관계라고 말하면 되겠지만 자신이 없다.
담담하게 그저 선후배 사이였다고 말하는 게. 내 마음 다 숨기고 말하는 거 자신이 없다. 그래도 태형이랑은 부딪칠 일은 없겠네. 아직 1부 러닝타임이 20분은 넘게 남았으니까.
이것 참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선배는 잠깐 앉아서 얘기하자며 나를 휴게실 자판기 앞 의자에 앉혔다. 내 팅팅 부은 눈을 굳이 보겠다는 듯이 시선을 내 얼굴에서 떼질 않는다.
결국 그냥 고갤 들고 선배 얼굴을 쳐다보았다.
“탄소야 많이 힘들어?”
“...아뇨 괜찮아요”
한참 내 얼굴을 보다가 첫 마디를 꺼내는데 역시나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미안했다. 선배는 이유도 모른 채 나에게 애증을 태형이에겐 미움을 동시에 받고 있으니까.
아직도 모르겠지. 내가 선배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는 걸. 선배와 키스했던 그 룸메이트가 선배에게 말 했을 리가 없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선배를 그토록 좋아했던 거 알고 있었으면서.
정작 미움을 받아야 할 사람보단 지금 잘 살고 있고 다 잊었다고 맏었던 내 믿음을 왕창 깨트린 눈앞의 선배가 더 밉다. 왜 갑자기 나타난거냐구요.
그리고 다정하지나 말지. 내 걱정을 선배가 왜 해요.
“아까 태형씨랑 싸운거야?”
“아뇨”
“미안해 난감한 거 자꾸 물어서. 힘들어 보이길래 물어본 거야”
“아.. 괜찮아요.”
“잘 지냈어? 갑자기 연락도 잘 안됐었잖아”
“취업 준비 때문에 좀 바빴어요 죄송해요”
“아냐 그럴 수 있지 이해해”
뭘 이해해요 선배. 이렇게 쌀쌀맞은 내 대답에도 웃으며 대답해주는 선배가 얄미웠다. 날 놀리는 걸까. 차라리 그냥 무시해버리지. 나 따위 기억도 안난다는 듯이 지나쳐버리지.
왜 저런 모습마저도 날 울게 만드냐구요. 왜 저렇게 착한 걸까.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가는 선배의 모습에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젠 스튜디오로 돌아가야 한다.
선배랑 계속 있는 거 불편하고.. 힘드니까. 마시던 커피를 버리고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미안한데 지금 제가 방송중이라 돌아가야 해요”
“아 맞네. 미안 방송 잘 해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꾸벅 인사를 하곤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데 정국이와 마주쳤다. 다행히 선배와 같이 있던 날 보진 못한 것 같다. 안 오길래 날 찾으러 왔다며 어서 들어가자고 말했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스튜디오로 돌아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분 조금 넘게 자리를 비웠다. 내가 너무 미안해하자 정국이는 괜찮다며 피디님께는 비밀로 했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해줬다.
화장실에서 내 이름을 불렀는데 없는 것 같길래 걱정했다고 하는 정국이가 고마워서 방송 끝나고 커피라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튜디오로 시선을 돌리니 태형이는 환하게 웃으며 지민씨와 방송중이다. 사연들이 오늘도 재밌는 지 연신 미소를 짓고 있다.
그래 태형아 넌 웃는 게 제일 멋져. 지민씨도 환한 웃음을 짓는데 나도 같이 웃음이 났다. 이렇게라도 웃어야지. 방송할 땐 방송에 집중하자 김탄소
정신없이 지나간 방송이 무사히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데 태형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탄소야 오늘 나랑 한 잔 할래? 저번에 니가 술 사준다며”
태형이는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할 말이 많겠지? 왠지 혼날 거 같기도 하고
그래 오늘 태형이 나 때문에 고생 많았는데 당연히 사줘야지. 다행히 오늘따라 몸이 그다지 피곤하진 않았다. 좋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피디님이 불쑥 다가와 먼저 대답했다.
“어, 태형씨 우리 작가 오늘 나랑 퇴근하기로 했는데”
피디님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곤 빨리 나랑 같이 가자고 말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 언제 그런 약속을 했지? 기억이 안 나는데.. 사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피디님과 난 늘 같이 퇴근하긴 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아냐 안돼 오늘은 태형이랑 보내야해.
“피디님 오늘은 먼저 들어가세요. 저 태형이랑 얘기할게 있어서요”
“피디님 오늘은 양보해주세요”
태형이도 웃으며 피디님께 말했다. 은근슬쩍 내 어깰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피디님은 그런 우릴 보곤 섭섭하다는 듯 날 툭치며 알았다고 말했다.
그 대신 너무 늦게 들어가진 말라는 당부도 함께. 분명 잔소리인데도 듣기 좋다. 피디님이 다 날 걱정하는 거니까.
“태형씨 우리 작가 술 많이 먹이지 마요. 먹이면 내가 고생해”
우리 집 앞에 숙취음료를 두고 간 피디님이 기억나서 웃어버렸다. 감동이었는데 그 음료수.
그런데도 피디님은 그런 우리가 영 못 미더웠는지 결국 피디님은 태형이에게 날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런 피디님이 귀여워 술 마시러 같이 가자고 말할 뻔했지만 오늘은 그럴 분위기가 절대절대 아니기에 태형이와 난 먼저 방송국을 나왔다.
밤바람이 시원하고 거리는 한산했다. 상점들의 불빛만이 환하게 거릴 비추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태형이랑 이렇게 거의 하루종일 같이 있는 거 엄청 오랜만이다.
좋은 일만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태형아 미안해.
“탄소야”
“응?”
“오늘 미안해”
앞을 보고 걷던 태형이가 문득 나에게 사과했다. 대체 왜 니가 미안해해 태형아. 밤바람이 멈추고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만큼 답답했다.
한동안 이렇게 어색하게 지내야 하나 싶어 슬퍼졌다.
“태형아 니가 뭐가 미안해..”
“내가 화냈잖아 니가 제일 싫어하는 거 알면서.. 미안”
“괜찮아 뭐 어때 내가 너였어도 화냈을 거야!”
시무룩한 표정의 태형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확실히 프로인지라 방송할 땐 많이 웃더니 나랑 같이 있는 이 순간 미안한 표정을 짓는 태형이였다.
그런 태형이의 등을 장난스럽게 토닥이며 괜찮다고 연신 말했지만 별 반응이 없다. 태형아 나 진짜 괜찮은데.. 결국 토닥이던 팔을 내리고 태형이를 쳐다보는데 태형이가 새빨간 내 팔을 보고 말았다.
아까 오후에 태형이가 날 비상계단으로 끌고 가던 때 하도 세게 내 팔을 붙잡은 탓에 팔이 태형이의 손모양이 빨간 선처럼 붉게 부어있었다.
태형이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에이 김태형 어두운데 눈도 좋지. 뭐 이런 걸 보고 그러냐.
“이거... 아까 내가 그랬던 거야?”
“응? 아..아니! 그 뭐냐.. 내가 음료수 뽑다가 부딪쳤거든!”
“나 요즘 왜이러냐 자꾸..”
“이게 뭔 대수라고 근데 태형아 우리 어디가는 거야?”
황급히 말을 돌리는 날 보더니 요 앞 편의점으로 불쑥 들어가는 태형이었다. 나도 따라 들어가니 태형이는 캔맥주 두 개랑 안줏거리를 사 들고 겨우 웃어보였다.
그렇게 둘이서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역시 태형이는 기억하고 있네.
“이거 니가 좋아하는 맥주”
“기억하고 있었네? 고마워”
“안주는 내 맘대로 사왔어”
“다 괜찮아”
“맞아 너 먹보잖아”
“에이 솔직히 먹보는 아니다”
당연히 오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평소 태형이처럼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마음이 편해졌다. 솔직히 태형이랑 있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다라는 거 그 자체가 모순이긴 하지만. 태형이랑 있으면 정말 좋다. 내가 무슨 얘길 해도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태형이다. 나도 태형이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뭐든 다 얘기해도 되는 믿음직한 친구이고 싶다.
태형이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역시 연예인이라 그런지 뭘해도 참 잘생겼다. 내 친구인게 자랑스럽다.
“태형아”
“응?”
“난 니가 좋아 진심으로”
“너 취했지?”
“내가 아무리 술에 약해도 한 잔 갖곤 안 취하거든요”
“.......”
“있잖아 태형아 넌 나한테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야. 무슨 말을 해도 넌 항상 날 이해해주잖아. 나도 너한테 그런 친구이고 싶어”
“.....”
“대답 좀 해 괜히 부끄럽잖아”
“어? 어.. 그래”
“싱겁기는”
날 놀리는 건지 대답도 안하고 부끄럽게. 그렇게 별 특별한 이야기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태형이가 우리집에 오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아파트에 다다르자 태형이에게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태형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탄소야”
“응?”
“나랑 약속 하나 하자”
“뭔데?”
“앞으로 나한테 거짓말 하지 않기”
“알았어요 알았어”
태형이랑 약속도 하고 오늘 고마웠다며 태형이가 아파트를 빠져 나갈 때까지 태형이를 지켜보았다. 벌써 시간이 한 시가 넘었다. 빨리 씻고 자야지. 하루종일 팅팅 부은 눈으로 지내다보니 눈이 무겁다.
그렇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는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피디님이었다. 캔맥주랑 여러 안주거리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고갤 돌려 나랑 눈이 마주치자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네.. 피디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그냥 잠이 안 와서 이것저것 사오는 길
태형씨가 잘 데려다 줬어요?“
“네 덕분에”
“피곤하겠다 쉬어요
라고 말하고는 싶은데.. 나랑 같이 한 잔 더 할래요?“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든 캔맥주를 흔드는 모습에 괜히 설렜다. 바람은 시원하고 사방은 조용하고 그렇다고 너무 어두운 것도 아닌 그런 밤. 피디님과 단 둘이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편안했다.
에이 모르겠다. 내일 피곤해 죽어도 별 수 있나. 내 맘대로 할꺼야. 피디님께서 음료수 또 사주시겠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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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받습니다!빠진 분은 꼭 알려주기! 늘 감사합니다 댓글 잘 읽고 있어요!
암호닉 =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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