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종인은 벌떡 일어섰다. 쓰려오는 뒤통수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담임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한심한 눈빛을 띈 선생 너머로 찬열이 주먹을 입에 문 이상한 모양새를 하고 종인을 비웃는 소리를 참아내고 있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된 종인은 담임의 여전한 손맛에 새삼 놀라워하며 흘긋 담임을 쳐다보았다.
'박찬열로도 모자라 김종인 너까지 정신 빼놓고 다니지?'
담임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는게 애처로웠다. 안그래도 찬열 탓에 온갖 고생을 하는 담임에게 왠지 모를 동정심이 일어 종인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짐짓 진지해지는 담임 뒤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그 새를 못참고 의자를 한껏 젖힌 찬열이 얄궂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종인은 벙긋거리며 혼신의 무성 연기를 펼치는 찬열의 입모양에 집중했다. 학주도 모자라 담임 너까지 정신 빼놓고 다니지? 담임 병신! 김종인 병신! 눈 앞에 선 선생과 뒤의 열연중인 제 친구를 번갈아 본 종인은 결국 실소했다. 이 새끼가 웃어? 담임은 기가 차 종인의 머리를 한 대 더 갈기고는 교탁으로 향했다. 김종인 정신차리고 수업 들어라. 이 빌어먹을 교육청은 왜 체벌을 못시키게 해. 저런 새끼들은 처맞으면서 커야되는데 말이야. 담임의 푸념소리가 멀어지자 찬열은 소리죽여 낄낄댔다.
'어휴 김종인 쌔끼 너 아주 넋이 나갔드만? 맞기전에 표정 존나 병신.'
종인은 끊임없이 떠드는 찬열의 입에 제 주먹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쑤셔넣었다. 퍽, 하는 소리가 한번 더 제 뒤통수를 울렸다.
친구
w. XTC
종인의 머리 속이 눈 앞의 A4용지마냥 하얘져갔다. 찬열과 종인때문에 편두통을 앓고 있다는 담임은 종인의 주먹을 입에 물고 토악질 시늉을 내던 찬열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가벼운 협박 선에서 끝을 내던 선생은 두 소년을 교무실에 친히 동반했다. 그리곤 하얀 종이 뭉치를 안겨주고 급식실로 사라졌다. 찬열이야 늘상 해왔던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연필을 놀리더니 빡빡한 종잇자락을 종인에게 자랑하고 변백현을 찾아 나섰다. 반면 종인은 찬열의 말썽에 의도치 않게 말려들거나 단순히 찬열과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선생들의 눈총을 받아왔을 뿐 반성문 따위를 써 본 적이 없어 난감할 뿐이었다. 30분째 담임이 던져 주고 간 몽땅연필 끝을 뜯으며 손장난을 치는 종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실로 잘못한 일이 없기도 했다.
지도 존나 볼 것도 없는 도경수 빨면서 나댐. 진리는 백현여신이지, 암! 도경수 걘 애쌔끼가 글러먹었어.
그저 찬열이 아침에 비아냥거리던 소리에 경수가 떠올랐고, 옛날 생각까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렇게 회상하다가 이 사단이 난 것이었다. 경수를 생각할 때면 정말이지 헤어나올 수가 없으니 잘못은 차라리 저를 휘두르는 경수에게 있었다. 대충 거짓말로 채워넣으면 될 종이를 붙잡은 종인의 마음이 어지러웠다.
'허이고, 김종인 이거 아직도 이러고있네. 설마해서 와봤더니.'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손에 쥔 몽땅연필을 떨어트렸다. 탈탈 돌아가는 구식 선풍기 뒤로 찬열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쭉쭉 빼물며 휘적휘적 다가오는 찬열이 종인의 눈에는 구세주와도 같아보였다. 그 방문이 없었더라면 남은 시간 내내 또 빈 백지 위로 글 대신 경수의 말간 얼굴을 그리고 있었을 제 자신을 알기 때문이었다. 너 대체 이 병신같은 종이 쪼가리 한 장 못채우고 여태껏 뭐했냐. 이거 그냥 개구라로 채우면 됨! 아님 고해성사 본다치고 여태껏 한 짓거리 다 끄적이던가. 어차피 이거 제대로 안쓴다고 안 죽어 병신아. 하여간 거짓말을 못하냐 존나 모태 사기꾼 페이스 주제에. 형 없다고 울지 말고 열심히쓰고 들어와. 난 먼저감. 빠이! 찬열의 쩌렁쩌렁한 저음이 한바탕 빠르게 휩쓸고 지나간 교무실이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또 다시 혼자 남은 종인은 찬열 때문에 굴러떨어진 연필을 찾고있었다. 아, 왜 없는거야. 도움도 안 되는게 와서 떠들고 가고. 종인은 속으로 불평하며 찬열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무실의 높은 창 위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있는 눈동자는 분명 경수의 것이었다.
백현은 쉴새없이 책상 아래로 발을 꼼지락댔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침 끝이 정확히 12를 가르키자마자 남학생들은 경주하듯 서로를 밀쳐내며 복도로 뛰었다. 그런 소동에도 백현은 계속 불안한 듯 발을 작게 굴렸고 경수는 차분히 제 책상을 정리했다.
'안 가?'
어느 새 경수가 얌전히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경수에 흠칫, 하고 백현은 다시 시계를 훔쳐보았다. 12시 10분. 찬열이 오지 않았다.
'가야지. 가자.'
경수가 뒤돌더니 앞서 교실을 나섰다. 백현은 차마 발길이 떼어지지 않았다. 시침은 째깍째깍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왜 그래? 등 뒤로 경수의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 으응, 아냐. 가자. 백현의 하얀 운동화가 교실을 떠났다.
백현은 급식실에 내려가서도 실내화 안의 자그만 발을 꼼지락거리며 초조해했다. 경수는 쉼 없이 반찬거리를 뒤적거릴 뿐 입에는 대지도 않고 계속 문 쪽을 바라보는 백현을 의식하고 있었다. 백현이 가끔 그럴 때면 십중팔구 찬열과 연관된 일임을 알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백현과 찬열의 모습은 일방적인 관계같아 보이지만, 예리하고 꼼꼼한 성격의 경수 눈에는 달리 비쳤다. 찬열은 애초에 전학을 온 백현을 보자마자 푹 빠졌고 백현은 도도하게 굴면서도 내심 찬열의 눈길을 끌려는 은근한 행동을 감행했다. 백현은 감정기복이 알게 모르게 심했는데, 이 또한 워낙 제멋대로에 오락가락하는 찬열 탓이기도 했다. 물론 경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백현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하지만 남의 연애사에는 끼어들지 않는게 배려있는 행동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또 백현의 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기도 했다.
분명 서로를 좋아하는 두 남학생의 감정은 일반적인게 아니었지만 경수는 찬열과 백현이 부러웠다. 스스럼없이 남고라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제 감정을 표현하는 찬열과 그 귀염성있는 백현. 언제쯤 나는 저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긴 할까. 잠시 든 생각에 경수는 후,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부러워하고 한탄해봤자 제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알고있었다. 백현은 경수가 일어난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문 쪽을 훔쳐보았다. 눈꼬리가 축 처진 백현의 표정은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경수는 이내 학년부장 선생이 제게 시킨 심부름을 떠올렸다.
'백현아, 나 교무실 좀 갔다올게.'
'응?'
'교무실, 교무실. 부장 심부름 때문에.'
'아.. 으응.. 갔다와.'
'먼저 교실 갈거지?'
'응.'
백현은 경수의 말에 전혀 집중을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경수는 푸스스 웃곤 교무실로 향했다.
어디갔지? 종인은 금새 사라진 동그란 두 눈동자를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아쉬워 입맛만 다셨다. 찬열 때문에 백현과는 자주 마주치지만 경수와는 중학교 때를 제외하곤 단 둘이 마주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제가 찬열처럼 오도방정을 떨며 애정표현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 마주치지마자 인사나 할 걸 그랬나. 무뚝뚝한 제 성격을 탓하며 종인은 책상 밑으로 손을 뻗었다.
'아, 어디있는거야.'
짜리몽땅한 연필은 그래뵈도 수년간 반성문 전용 연필로 담임이 구비해 놓은 것이라, 잃어버렸다간 제 뒤통수가 위험했다. 보이지 않는 작은 틈에 손을 끼워 넣으니 죽을 맛이었다. 어, 뭐 있다. 붙잡혀 오는 작은 무언가에 종인이 쾌재하며 주욱 잡아당겼다. 아! 무언가 작은 신음소리가 들리자 종인은 놀라 일어서려다 책상 밑으로 머리를 찧었다. 끊임없이 어디엔가 맞게 되는 제 머리를 종인은 작은 책상 틈으로 갖다 대었다. 뭐지? 가느다란 실처럼 보이는 틈으로 제가 잡은 것을 바라보았다.
하얀 그것은 사람 손이었다. 믿기 어렵게도, 경수의 작은 손이었다. 뒤이어 나타난 경수의 얼굴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복숭아처럼.
경수의 상황은 대충 이러했다.
제게 기분 나쁜 추파를 던지곤 하는 윤리선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미리 교무실 안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끈적한 시선대신 저를 사로잡은 건 까만 소년의 눈동자였다. 여유롭던 종인의 눈과 마주치자 경수는 바로 머리를 숙여버렸다. 손에 붙든 서류종이를 가슴에 꼭 붙이자 쿵덕거리는 심장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 어떡해.. 경수는 그 길로 냅다 빈 옆 교실로 들어갔다. 주체할 수 없는 고동소리를 종인이 들을까 무서워 눈을 꾹 감고 진정했다. 살금살금 다시 교무실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종인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헛것까지 보나. 경수는 은근히 그와 다시 마주치기를 바라던 저를 타박하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삭,하고 손에 들린 서류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책상 밑으로 숨어버렸다. 끙, 경수는 작게 몸을 웅크려 그 틈으로 손을 뻗었다. 책상 밑의 꼬리한 냄새에 차마 얼굴은 대고 있을 수 없었다. 여기 저기 팔을 쭉 뻗어 더듬으며 틈 사이를 훑는데 반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뜨뜻한 무언가에 잡혀버렸다. 그 감촉에 놀란 경수는 재빨리 고개를 집어넣었다. 주욱 저를 잡아당기는 그것에 흐악! 아! 아픈 소리를 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콩콩 다시 달음박질을 한다. 작은 그 틈으로, 다시 한 번 까맣고 축축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백현은 심통이 났다. 손도 안댄 식판을 소리나게 정리대에 쑤셔넣고는 훌훌 털고 일어섰다. 박찬열은 순 거짓말쟁이였다. 점심시간에 온다더니. 혹시나 하던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말로만 청산유수였던 제 전 애인들이 찬열의 웃는 얼굴에 오버랩되었다. 백현아, 형은 네가 제일 좋다. 하면서 끊임없이 몸을 지분대며 입맞춰 오던 더운 숨결들이 떠올랐다. 찬열은 그렇지 않기를, 저를 외롭게 하지 않기를 내심 바랬다. 한 달밖에 안본 애 때문에 이게 무슨 삽질인가. 헛웃음을 지으며 타박타박 혼자 계단을 오르는게 힘에 부쳤다. 경수라도 있었으면 매점이라도 가는건데. 백현을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려 손을 뻗었다.
'백현아!'
멈칫, 듣고싶던 저음이 크게 복도를 울렸다. 새꺄, 조용히 안해? 지나가던 선생들의 타박마저 듣기 좋았다. 백현은 얼른 몸을 돌렸다. 언제 왔는지 입에는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물고 한 손에는 까만 봉지를 든 찬열이 숨을 헥헥 내쉬고 있었다. 치아가 드러나게 활짝 웃으며 찬열은 백현의 가는 손목을 붙잡았다. 씨바, 달려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덥지? 도경수는? 혼자야?
말을 걸어오는 찬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현은 왠지 눈이 따가워짐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는 찬열의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져있었고 벌어진 어깨를 감싼 교복도 온통 땀에 젖어있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눈가에 몰려오는 뜨거운 느낌에 얼른 천장을 바라보곤 눈에 슬쩍 차오르는 물기를 몰래 닦아내었다. 아, 나 왜이래. 야, 왜그래? 더워서 그래? 더위먹었냐? 아파? 괜찮아? 너 눈 시뻘개. 이거 먹어. 숨을 고른 찬열이 입술을 꾹 깨무는 백현의 손에 봉지를 쥐어줬다.
'야, 이거 먹으면 다 나을 걸? 만병통치약이야.'
'뭔데..'
백현은 투정섞인 목소리를 하곤 봉지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손에 시린 감촉이 느껴졌다. 찬열은 쑥쓰러운 듯 뒷목을 매만지더니 이내 계단 손잡이를 잡고 백현의 귓가에 입을 갖다대었다. 다정한 저음이 백현에게 속삭였다.
설레임.
너처럼 하얀거.
찬열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옛날에 써놓고 묵혀놨던 글을 올려도 되나.. 하다가 대책없이 싸질렀는데 좋아해주시는 독자분들 감사해요! 반응이 의외로 좋아 저도 기분이 좋네요 ㅋㅋㅋ그리고 여기 여러모로 부족했던 1편 보고 암호닉 남겨주신 독자님들!
아델님
통조림님
우왕님
메이링님
도비님
뀨뀨님
어펙션님
공룡님
스폰지밥님
망고님
팡팡님
콕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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됴순님
됴덕후님
베지밀님
빛나리님
+
몽실이님
외에도 글잡 첫글 호평해주신 독자님들 사..사..!! ♥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편은 내용이 별거 없는 것 같아서 끙.. 기대하시던 분들 죄성함니다
다음 편에는 분량 많이 뽑아 올게요 내용 알차게 ㅜㅜ
아 그리고.. 제가 좀 바보같아서 그러는데 스크롤 너무 길어 불편하신 분들 있을까봐 이런 작가말 숨기기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누가 좀 알려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쳐지나가시는 분들도 읽어주시는 분들도 손팅해주시는 분들도 모두 사랑해요. 호평이든 악평이든 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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