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은 지민을 곁에 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민은 다홍색 천 사이로 보이는 태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나라의 왕 답지 않게 생긴것이 훤찰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여러 여자를 홀릴만큼 잘생겼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창호지 사이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았다. 그 달빛은 왠지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비좁은 창호지 사이를 뚫고 들어와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오는 것 처럼 지민의 손을 비추었다. 지민은 자신의 손에 비추인 달빛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찌 달빛이 이리도 밝을까. 새벽에 홀로 있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빛을 비춰주는 제 몫을 하지않고 왜 자신에게 왔을까. 사실은 달 자신도 외로워서 자신의 곁으로 내려오지 않았나 생각했다.
끼이익 - …….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자신의 손에 비추인 빛을 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주색 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단아하게 땋아 묶은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조심 조심, 발을 한발 한발 내딛었다. 그리고 태형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저 눈물을 흘렸다. 다홍색 천 틈 사이로 보이는 여인의 얼굴을 지민은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이 매말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였고, 이와 다르게 눈은 또 초롱초롱 하였다. 허나 여인이 입고있는 옷은 누더기같이 지저분하였으며 손은 또 무슨 고생을 한 것인지 고운 손이 아닌 투박이 손이었다. 머리카락을 보아하니 물에 젖어 있는 것이 아마 배를 타고가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거나 빚을 지게 되어 스스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거나, 하여튼 어느 경우이던간에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이 틀림없었다. 여인은 지민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는지 그저 태형을 눈물 맺힌 눈으로 보며 이내 소리내어 통곡하였다. 지민은 여인의 통곡소리에 깜짝 놀라 태형을 쳐다보았다. 혹여나, 태형이 깨어난다면 곤란스럽기 때문이다. 지민은 치마를 양손으로 살포시 잡고 들어 여인의 곁으로 가까히 다가갔다.
"무슨 일이온데, 그리 슬피 우십니까?"
지민의 물음 소리에 깜짝놀라, 여인은 통곡하던 것을 멈추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지민을 쳐다보았다.
"제가 보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저는 죽은 자의 소리를 듣고,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긴 밤에 자꾸만 한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린다하여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어떤 여인이 무슨 한이 있길래 전하의 곁에서 통곡을 하는지 사연을 듣고자 이렇게 기다렸습니다."
여인은 지민의 말을 듣고 이내 다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 눈물은 원망의 눈물도 아니요, 슬픔의 눈물도 아닌 것이 마치 그리움의 눈물같아보였다. 지민은 그런 여인을 보며 여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 여인의 추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제게 털어놓아도 좋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울음을 멈추시고, 왜 한동안 전하의 곁에서 그리도 슬피 우셨는지 말씀해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여인은 지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입을 열었다.
"제겐 두 딸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오래 전 여의었고 두 딸과 저, 이렇게 셋이서 힘겹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먹을 것도 없어 배고픔에 찌들어 살았지만 보물과도 같은 두 딸이 절 항상 행복하게 해주어 가난함과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던 어느날,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죽기 전, 남편이 저와 제 딸들을 한번이라도 호화롭게 먹게하기 위해 어디선가 금전을 구해와 그 금전으로 바위만한 고기를 사와 배 터지게 먹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금전을 빌려준 사람이라 하더군요. 언제 갚을꺼냐고 화를 버럭 내기에, 석 달만 시간을 달라 빌었지요. 그리고 석 달째가 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에겐 모아 둔 금전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갚지 못한다면 집에서 쫓아나 노비 생활을 하겠지요. 하는 수 없이 저는 두 딸을 놓고 강망제(江望第 : 강의 신에게 범람하지도 말고 마르지도 말고 지금처럼 평온하게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지내는 제)의 제물이 되어, 강가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물로 쓰이는 대신 그 수 많은 금전은 저희 두 딸에게 돌아갔지요. 두 딸은 제가 죽은지 모를겁니다. 잠시 멀리 갔다온다는 말만 하고 나갔으니."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예. 두 딸이 보고싶어 집으로 가려 하였으나, 죄책스러운 마음에 차마 가지 못하고... 제 하소연이나마 들어 줄 사람을 찾으러 다니다가 결국 여기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제 울음소리를 들을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지민은 얕게 웃으면서 여인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고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두 딸을 보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매일 이 곳에 앉아 전하만을 바라보며 울 순 없지 않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여인은 그제서야 볼 위로 흐르던 눈물을 닦고 환하게 웃으며 지민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지민이 그리도 믿음직스러웠는지 여인은 지민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몇번이나 끄덕이며 고맙다고 수 없이 말했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여인은 스르륵 지민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지민은 여인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태형을 쳐다봤다. 다행이 태형은 깊게 자고 있는 듯 싶었다. 지민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아 태형을 쳐다보며 태형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아, 날밤을 샜더니 이리도 잠이 몰려오는 구나... 지민은 몰려오는 졸음을 애써 깨어가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허나, 무심하게도 잠은 계속해서 지민을 건들였다. 결국 지민은 졸던 끝에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감히 겁도 없이 내 옆에서 잘만 자는 구나."
지민은 눈을 스르륵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자신의 시야를 가득 매운 태형의 얼굴. 태형의 얼굴에 깜짝 놀라 지민은 벌떡 일어났다. 언제 내가 잠을……. 태형은 앉아서 다홍색 천 안으로 얼굴을 매만지는 지민을 빤히 쳐다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화무, 네 덕분에 간 밤에 한번도 깨지 않고 지금까지 편하게 쭉 잘 수 있었으니 내 옆에서 잔 건 용서하겠다. 신기하게도 그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더구나. 그 여인과 만나기라도 한 것이냐? 그 여인이 뭐라하더냐? 내게 원망이 있다고 하던? 지민은 갑작스레 물어오는 태형의 물음에 당황하여 그저 벙찐 눈으로 태형을 쳐다보았다. 아, 말을 하지 못한다 하였지. 깜빡 잊었구나. 태형은 지민을 보고 웃으면서,
"이제 그만 나가보거라. 수고했다."
지민은 이내 일어나 태형에게 꾸벅 인사하고 뒤돌아 나갔다. 지민은 생각보다 태형이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였다. 밖에서 들리는 소문에는 태형이 폭군이라고 하여 자신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린다면 칼을 꺼내들어 목을 베어버린다고 하기에, 겁이 나있었던 지민이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궐을 나가던 중에 누군가가 제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지민의 앞에 우뚝 선건 다름아닌 윤기였다. 지민은 윤기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윤기를 지나쳐 나가려 하니, 윤기가 지민의 팔을 덥썩 잡아왔다.
"전하께서 그 여인이 또 찾아올지 모르니 당분간은 이 곳에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화무, 그대가 머물 곳에 데려다줄테니 따라오십쇼."
지민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전하의 명이라는 말에 윤기 모르게 한숨을 한번 더 내쉬고 말 없이 윤기를 따라갔다. 윤기를 따라간 곳에는 꽤나 큰 각이 하나 있었다. 윤기는 지민을 보며 말했다. 전하께선 달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이 곳의 이름이 달 월(月)자에, 좋을 호(好)자를 써서 월호각입니다. 이 월호각은 전하께서 사랑하는 여인이 나타나면 그 여인에게 주고싶다 하셨습니다. 지금은 남은 각 중에 전하와 가장 가까운 각이 이 곳이니 어쩔 수 없이 내어주는 것이지만요. 지민은 윤기의 말을 듣고 끄덕이며 이제 들어가봐도 되냐는 고갯짓을 하였다. 윤기는 알아듣고 지민에게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어도 좋다고 하였다. 그렇게 지민이 훽 돌아서서 들어가려하자 윤기가 지민의 손목을 붙잡고 확 잡아당겨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화무."
"……."
"어찌 숨기는 것입니까."
"……."
"왜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지민은 윤기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윤기는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월호각 안으로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지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민은 그저 가만히 서서 윤기를 바라보았다. 10년동안 들킨 적이 한번도 없던 내가 겨우 딱 한번 본 이 자에게 들키다니. 지민은 덜컥 겁이났다. 윤기, 이 자는 태형의 호위무사이기 때문에 태형의 귀에 들어가는건 순식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 윤기는 지민의 앞으로 뚜벅 뚜벅 걸어갔다. 덩달아서 지민은 뒷걸음질을 쳤다. 윤기는 지민의 팔을 잡고 지민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다홍색 천을 확 잡아당겼다.
"아!..."
"사내였군요."
지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완전히 죽은 목숨이겠구나 체념하기 직전이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의 턱을 붙잡고 들어올려 얼굴을 가까히 마주하여 보았다.
"비밀로 해드릴테니, 제게만 말씀해보십쇼. 왜, 여인의 행세를 하고다닌 것입니까?"
"...그것이, 사내가 죽은 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하면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인의 행세를 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 천은 사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쓴 것이지요."
윤기는 지민의 말을 듣고 손을 스르륵 내렸다. 지민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턱을 매만지며 윤기를 쳐다보았다. 정말 비밀로 해주실겁니까? 윤기는 자신에게 물어보는 지민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옆춤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 지민의 목에 갖다댔다. 그렇지 않다하면 어찌 하실겁니까? 저를 속인 것도 모자라 전하까지 속이다니, 무례합니다. 전하께서 아신다면 화무, 그대는 부관참시(剖棺斬屍 : 사후에도 큰 죄를 물어 무덤을 파헤쳐 주검에게 행하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 그러하다면, 제게 삼일의 시간만 주십쇼. 삼일이 지난 후에는 제 목숨을 앗아가셔도 좋습니다."
윤기는 칼을 내리고 지민을 쳐다보았다.
"전하의 곁에서 매일 밤 통곡을 하던 여인과 약속하였습니다. 두 딸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그 약속을 지키고 난 후에는 제 몸을 찢어도, 불에 지져도 상관 없습니다. 대신,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윤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민의 도움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우와, 드디어 2번째 편을 쓰네요! 많이 기다리셨죠? 8ㅅ8
엄청 길게! 정말 오랫동안! 연재할 목적으로 자세하게 쓰는 것이니!... 지루하시다면 어쩔 수 없...(눈물을 흘린다)
글을 쓸 때마다 매번 고민합니다. 어떤 BGM을 넣어야 몰입이 잘될까 하고 말이죠..
아! 현지님 감사드립니다! ^0^/

인스티즈앱
국가정보원 신입 공채 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