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경수가 일어났다. 곧이어 종인이 느릿느릿하게 책상 밖으로 빠져나왔다. 미.. 미안. 기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한 경수는 다시 몸을 숙여 부산스럽게 서류종이를 주워담았다. 탁탁탁, 종이를 한데 모아 담아 부장 선생의 책상위로 올려두고는 종인을 몰래 흘긋 보았다. 종인은 어느새 앞 자리에 앉아 빤히 경수를 계속 보고있었다. 경수는 손에 배인 땀을 교복바지에 슥 문지르며 시선을 피했다. 어..음. 잘 있어. 뒤돌아 문을 향하는 경수는 바보같이 행동한 자신을 꾸짖었다. 잘있어라니, 정말 바보같았다. 얼굴은 또 새빨개졌겠지? 화끈화끈한 볼가에 제 손을 갖다대었다.
'도경수.'
급작스럽게 내뱉은 말에 종인도 당황했고, 제 귀를 의심하며 경수도 당황했다. 경수는 찬찬히 뒤돌았다. 나..? 경수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종인은 저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경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텅 빈 반성문을 움켜쥐었다.
'어.. 나 이거, 좀. 도와주라.'
종인은 제 옆자리에 앉아 정갈하게 글을 쓰는 경수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가 반들반들하니 고왔다. 오뚝한 콧날 밑으로는 모양이 예쁜 입술이 오물조물, 글을 쓸 때마다 제가 쓰는 걸 자그맣게 따라 말하며 움직였다. 선풍기는 여전히 탈탈 잘만 돌아가는데 교실 안은 너무 더웠다. 경수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음.. 됐다. 대충 이렇게 쓰면 되지 않을까?'
경수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바라보았다. 중학교때 처럼 경수는 손에 쥔 연필을 도르르, 굴리고 있었다. 비어있던 종이는 경수를 닮은 반듯한 글씨로 꽉 차있었다.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종인은 입을 쩍 벌렸다. 아, 병신. 종인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턱대고 반성문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도와달라고 매달렸는데, 고운 옆얼굴을 감상하느라 제 반성문을 경수가 대신 다 써주는 내내 깨닫지 못했다. 날 뭐라고 생각할까. 몇년만에 처음 말을 걸어 반성문 쓰는걸 도와달라고 한 것도 모자라 다 경수가 쓰게 만들다니, 상병신이 따로없었다.
'아 미안하다. 정말. 내가 딴 생각 좀 하느라.. 니가 다 쓴줄도 모르고 있었어.'
입을 열고 말하는데 목소리마저 듣기 싫게 갈라져버렸다. 아.. 쪽팔려. 망했다. 종인은 자책하며 책상밑으로 제 허벅지를 몽당연필로 마구 찔러댔다. 경수는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어보였다. 괜찮아. 그 얼굴에 어린 시절 경수가 겹쳐보였다. 그리고 찾아온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적에 숨이 막혔다. 음.. 경수가 손장난하며 입을 뗐다.
'나 그럼.. 가봐도 돼?'
아, 안돼! 종인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소리쳤다. 으..응? 경수는 어색하게 웃음지어보였다. 경수는 종인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종인이 말을 먼저 걸어온 것 자체도 놀랄 노자였는데, 이제는 가지말라고 붙잡기까지 하다니. 이게 꿈인가, 싶었다. 어,음. 점심 먹었어? 종인은 이제 긴장해서 다리까지 달달 떨었다. 하나하나 저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주옥같아서 딱 죽어버리고 싶었고, 눈 앞의 경수를 보니 또 더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경수는 우물쭈물하며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백현이 깨작거리며 먹던 반찬거리들이 떠올랐다. 오늘 급식은 경수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아니.'
안 먹었어. 경수가 웃으며 답하자 종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먹으러 갈래? 아니다, 먹으러 가자. 경수는 종인에게 이끌려가는 제 손목을 보았다. 종인과 함께 먹는거라면. 맛있을 것 같기도 했다.
친구
w. XTC
'근데.. 반성문은 왜 쓴거야?'
'아. 수업시간에 멍때려서.'
'왜?'
'..그게.'
평소답지않게 재차 말을 걸고 또 물어오는 경수에 종인이 당황하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왜냐고? 너 생각하느라. 하고 말하기에는 종인과 경수는 아직 많이 어색한 사이였다. 종인과 경수의 어머니끼리 친하다지만, 두 분은 아들들이 점점 크면서 딱히 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곤 그저 내버려두셨다. 그냥 둬도 친해지게 되어 있다며 깔깔깔 웃으시던 두분의 대화를 들었던 열여섯의 종인은 경수에게 품은 제 마음을 알고서도 두 분이 친구로 남으실 수 있을까, 궁금했었다. 종인은 뜸을 들였다.
별 것도 아닌 종인의 사소한 말과 행동을 경수는 하나하나 놓치기 싫어 의자를 잡아 당겼다. 정자세로 열심히 귀기울이는 경수가 귀여워 종인이 슬쩍 웃었다. 너 생각하느라. 종인이의 작은 혼잣말이 여기저기 긁히는 식판소리와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섞여들어갔다. 경수는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인지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제 행동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사람 마음을 헤집어 놓는지는 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했다.
종인은 입을 달싹였다. 미운 일곱살때처럼 유치한 짓으로 경수의 주의를 끌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던 열여섯의 자신을 생각했다. 하지만 뒤에서 멍청하게 경수를 바라보고만 있던 여태까지의 제 행동은 일곱살 때 만큼이나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순진하게 눈을 굴리는 경수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게이야. 네 엄마 친구 아들이 게이야. 그것도 너를 좋아하는. 너를 좋아하고 있어. 너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정말, 많이 좋아해. 속으로 꾹꾹 하고싶은 말들을 눌러담았다. 깨끗한 경수의 두 눈동자기 저를 그저 그런, 남자 한번 따먹어보겠다고 뻗대는 다른 남학생들과 동일시할까 두려웠다.
'별거 아니야.'
'으응..'
조금 실망한 듯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곧 다시 경수는 종인이 묵묵히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님은, 잘 지내셔?
'아,응. 너희 어머니도?'
'으응.. 근데 되게 이상하다.'
경수는 목소리가 파르르, 자그맣게 떨렸다. 종인은 어느 새 식판을 말끔히 비우곤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꿈지럭거리며 경수는 저답지않게 긴장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다.
'뭐가?'
'음, 우리 엄마들은 되게 친하시잖아. 너희 어머니 어제 우리집에 놀러오셨어.'
'아,알아.'
'근데.. 우린 이제야 처음, 제대로 대화 같은거 해본 것 같아.'
경수가 조근조근 말하곤 시선을 내렸다. 종인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참 힘들었다. 발을 꿈지럭대며 어색해하는 경수는 제 행동이 백현이 찬열을 기다리며 애태워하던 것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종인은 말없이 그런 경수를 보고있었다. 경수의 내리깐 속눈썹이 길었다. 우리도. 친해져볼래? 종인의 들릴듯 말듯한 말에 경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종인 앞에서 말을 너무 많이했다, 싶어 이제 조용히해야지. 하던 참이었다. 진심일까? 경수가 본 종인의 표정은 묘했다. 경수는 종인이 어울려다니는 친구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고있었다. 살갑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태도의 나른한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못하고 그저 바라보자 종인은 눈을 접어 웃었다. 싫어? 소음으로 어지러운 급식실 안에서 마주앉아, 경수와 종인은 같은 생각을 했다.
여전히, 설렌다.
아이스크림을 쪽쪽 빠는 백현의 볼이 홀쭉해졌다 볼록해졌다를 반복했다. 찬열은 그 모습이 귀여워 입꼬리를 쓱 올리기도 잠시, 발간 백현의 눈두덩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텅텅 빈 교실 안, 경수의 책상을 차지하고 쭉 뻗은 찬열은 슬쩍 눈가를 만졌다. 야. 너 눈병났냐?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더 빨개보여. 백현은 그런 찬열을 내버려두었다. 계속 찬열이 쥐어준 설레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찬열이 손을 델때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쳐내던 백현의 변화에 신이나서 그 가지런히 내려앉은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동글동글한 머리가 더 예뻐보였다.
'너. 나 좋아해?'
백현이 정적을 깨고 당돌하게 물어오자 찬열은 손길을 뚝 멈췄다.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금? 찬열이 이내 푸하하 웃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왜 좋아해? ..너 게이야? 백현은 찬열의 거침없는 시선을 피하더니 쏘아붙였다. 차가운 말투와는 다르게 백현의 눈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반면 찬열은 백현이 말을 계속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항상 좋다고 붙어와도 께림칙한 표정으로 저를 쳐내던 백현이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않거나 쌀쌀맞게, 혹은 시큰둥하게 대충 대답하더니 지금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장족의 발전에 찬열은 기쁜 내색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너 좋아하는 건 맞는데 게이인건 모르겠는데?'
찬열은 구김살없이 웃으며 다시 백현의 앞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 남자잖아. 남자 좋아하면 게이잖아.'
백현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박해왔다. 너 왜그러냐 갑자기? 찬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내가 부담스러운건가. 남자가 좋다고 따라붙으니 싫은건가. 항상 단순하게 생각해왔던 찬열의 머릿속에 별의 별 의문이 다 떠올랐다. 찬열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백현은 다 먹어가는 아이스크림을 내려놓고 눈을 마주쳐왔다.
'너, 나랑 스킨쉽하는거 상상해봤어?'
곧이어 들려오는 백현의 목소리가 건조했다. 저를 바라보는 처진 눈이 왠지 슬퍼보여 찬열은 쉽사리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는 영 제 체질이 아니었다. 찬열은 다시 웃음기를 띄고 백현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자자~ 됐지? 스킨쉽. 이거 하고싶었구나? 손이 닿기도 전에 백현이 날카롭게 내쳤다.
'그런거 말고.섹스. 키스. 상상해봤어?'
갈 곳을 잃은 손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왜? 해봤잖아. 안해봤어? 역겹니? 딱딱하게 굳은 찬열을 바라보던 백현이 빨간 눈가에 두 손을 얹었다. 내내 들고있던 아이스크림 탓인지 손끝도 빨갰다. 눈이 차갑게 식어갔다. 자꾸 저를 설레게 만드는 찬열이 미웠다. 진지하지 못하고 방방 떠서 웃기나 하고, 백현에게는 이것저것 챙겨주고 잘해주는 행동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매일 장난스럽게 니가 존나게 좋아. 하는 찬열의 낮고 달콤한 목소리도 이제는 못견딜 것 같았다. 자신의 질문에 굳어버린 찬열을 바라보며 무너져내리는 제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오는 대로 말을 쏟아냈다.
'그럼 너, 게이아니야. 게이아니면, 나랑 못자. 그러니까 뻘짓 안해도 돼. 정 하고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백현은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전학을 오고, 그냥 조용히 잠자코 살고싶었다. 한달 내내 찬열에게 시달리며, 전학오고서의 첫 다짐과는 다르게 은근히 찬열에게 사랑받고 싶고, 더 많은걸 기대하는 제 자신이 두려웠다. 찬열의 눈에도 백현은 쓰러질 것만 같아보였다. 변백현, 왜이래 자꾸? 한차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일어나려는 백현을 붙잡았다.
'뭐하냐. 누가 너랑 자고싶대? 넌 대체 내가 뭐로 보이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던 백현이 고개를 돌렸다.
'너 게이야? 너 게이면. 나도 게이할게. 근데 너랑은 안잘거야.'
찬열이 백현을 자리에 도로 앉혔다. 찬열의 표정은 백현이 여태껏 봐왔던 것중에 제일 진지했다. 백현은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또 말하는 찬열의 속내를 알 수 없어서, 그의 말에 주책없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마음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너랑 안자 병신아. 날 뭘로보고.'
'...'
'야 근데 너.. 진짜 게이야?'
'..응.'
'...'
'...'
'그럼 사귀자.'
'..뭐?'
'사귀자고.'
'미쳤어?'
백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이지 찬열은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도 너무 좋은게 문제였다. 찬열이 허허 웃으며 백현의 벌어진 입에 설레임을 다시 물려주었다.
'나 솔직히 남자 좋아해본 적 없다. 자본 적도 없어. 근데 진짜 안 잘거야. 그런 상상 해본 적도 없어. 왜냐고 물어봐 빨리, 쪽팔리지만 대답해줌.'
찬열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어보인다. 뾰족한 귀 끝이 붉었다. 왜에.. 백현이 조그맣게 소리냈다. 백현은 내심 기대하며 설레임을 만지작거렸다. 찬열을 확 내치면서 울컥했던 마음이 어느새 잔잔해져있었다. 찬열의 진지한 표정에 백현은 얼굴을 붉혔다. 아, 너무나도 오랜만에 찾아온 저릿한 감정이었다. 박찬열도 나와 같을까. 지금 하는 말이 다 진심일까. 계속 이렇게.. 좋아해도 될까.
'넌 백현이잖아. 존나 아껴줄거. 원래 좋아할수록 아껴뒀다 혼자 먹는 법.'
진지하게 나지막히 말하더니 그새 또 으 존나오글! 하면서 찬열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띄었다. 찬열이 헛기침하며 다리를 떨었다. 백현은 말없이 다 녹아 물기가 송글송글 맺힌 아이스크림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교실 안으로 미지근한 오후 햇살이 녹아들어 두 사람을 감쌌다. 존나 아껴줄거. 하는 말이 백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찬열은 자세를 고쳐앉고 계속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근데 대답 안해줘? 사귀자니까. 설마 나 싫냐? 진심?'
백현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을 찬열의 품에 쑤셔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야! 나 진심인데? 안그래보여도 나 존나 성 정체성 혼란와서 힘들었음! 나 싫어하면 안되거든? 변백현! 찬열이 쫓아오는 소리에 백현은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몸을 숨겼다. 난생 처음 몰려오는 큰 감정에 몸이 후들후들 흔들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세웠다. 얼굴을 무릎에 푹 묻어버렸다. 어깨가 달달 떨리는게, 자꾸만 울음이 나왔다. 찬열을 이렇게나 좋아했던가. 이렇게나 사랑받고 싶었나. 너무 솔직하고 당당한 찬열의 고백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온전히 변백현이라는 그 존재를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울음이 났다. 찬열이 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귓가를 맴돌았다.
종인은 백현과 손을 꼭 붙잡은 찬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하냐? 찬열은 호탕하게 웃으며 종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면서도 백현의 손을 놓지않았다. 뭐긴. 놀러간다고 했잖아. 방과후면 뻔질나게 제 집 드나들듯 종인의 집에 놀러오곤 했던 찬열이었다. 야 오늘 놀러가도 되지? 하는 유난히 흥분한 찬열의 목소리에 별 생각없이 오지말라해도 올거잖아. 하곤 통화를 끊었더니 뜬금없이 백현을 달고왔다. 미안하다는 백현의 표정은 불편하면서도 어딘가 전보다 부드러웠다. 경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잔뜩 날을 세우고 있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음을 알아차린 종인은 찬열에게 눈짓했다. 빨리 이 상황을 설명하라는 눈빛이었다. 찬열은 흔쾌히 입을 열려다 백현을 돌아보았다. 어휴, 입모양 다 보이는데 병신.. 벙긋거리는 찬열의 입은 말해도 되지? 하고 있었다. 제 일 빼고는 눈치가 빠른 편인 종인은 단숨에 알아차렸다. 아, 연애하는구나.
백현은 망설였다. 학교 안에서는 티내지 말자고 신신당부를 해서 근 일주일을 겨우 버텼다. 그런데 제 절친인 종인한테 자랑을 하고싶다고 조르고 조르고 조르는 찬열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왜 굳이 말을 해야되는데? 하고 묻자 끙끙거리며 물론 변백현 너는 내가 주머니에 숨겨놓고 다니고 싶긴 한데, 김종인은 약올리고 싶단 말이야. 이렇게 예쁜 변백현이 드디어 내 애인이다! 하고싶음.. 하는 것이었다. 굳이 이렇게 커밍아웃을 해야하나 싶기도 했는데, 종인은 설상가상으로 이미 찬열이 백현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안다고 했다. 백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찬열은 엄청난 비밀을 말하듯 과장된 손짓으로 종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야 사실.. 존나 비밀인데..나 얘랑 사귐.'
표정없이 종인은 짐작했다는 듯 그래? 하곤 잘됐네. 축하해. 하고 백현을 돌아보았다. 백현은 아무렇지 않은 종인의 태도에 반은 놀라고 반은 호기심이 났다. 거부감이 전혀 없나봐? 하고 묻자 종인은 어, 하곤 그저 고개를 까딱할 뿐이었다. 별 반응이 없는 종인에 시무룩해진 찬열이 오도방정을 떨었다. 사실, 얘도 남자 좋아해. 종인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아웃팅하는 찬열을 밉지않게 노려보았다.
백현은 이내 수긍했다. 어쩐지 백현은 딱 제 나이 또래 남학생같은 찬열에게선 느끼지 못했지만 종인에게서는 막연히 저와 같은 성향의 사람일거라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었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놀랍지가 않았다. 경수도 같은 경우였다. 비단 외모 뿐 아니라 사람 자체에게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딱히 직접적으로 게이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잘 맞을 것 같아 함께 다녔다. 그리고 예상대로 경수는 꽤 괜찮은 친구였다. 백현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눈치 빠르게 저와 같은 사람들을 캐치하곤 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대개 맞아떨어졌다. 종인의 경우만 봐도 그러했다.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구나, 하고 백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경수도, 어쩌면..
'뭐야.. 왜 다들 안놀램? 존나 스펙타클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찬열이 궁시렁대며 백현을 잡아끌었다. 손님왔는데 마실 것도 안내주냐! 존나치사. 백현아, 뭐 마실래? 주스? 우유? 물? 거실로 향하는 둘의 맞잡은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종인은 책을 가만히 덮고 두 사람의 손을 눈으로 좇았다.
경수와는 잘 지내고 있었다. 그저 경수 앞에서면 떨리는 가슴 탓에 제대로 된 언어구사를 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라는게 흠이었다. 사실 잘 지낸다기 보다는 아주 더디게, 조금 더 친해진게 다였다. 아침에는 교실 창 밖으로 백현 옆에서 경수가 잔잔히 웃으며 올라오는 풍경을 보고, 쉬는 시간에는 경수의 반으로 찾아가 앞자리에 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에는 백현과 밥먹는 경수를 멀찍이서 보다가 마주치면 인사하는 것, 하교할 때 몰래 시간을 끌다 경수와 나란히 걸어 집에 가는 것 따위가 소소하게 종인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작은 변화였지만 종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종인은 거실로 나섰다. 백현의 귀에 찬열이 무어라 속삭이자 백현이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간지러.. 하며 찬열에게서 몸을 빼면서도 손은 붙든 모습이 참 좋아보였다. 행복해보였다. 백현이 전학 온 첫날 대뜸 가서 까불다 뺨을 얻어맞고 왔던 찬열이 처음 백현이 좋아졌다고 제게 말했을 적에는 그저 그런 호기심이려니, 했었다. 경수만큼이나 백현은 남학생들 입에 자주 오르락거렸기 때문이었다. 생각외로 찬열의 관심은 꽤 오래갔다. 며칠 전 종인의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너도 도경수보면 이러냐? 하며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했던 찬열의 마음이 결국은 통한 모양이었다. 나 처음에 니가 남자 좋다고 그랬을땐 존나 이해 못했는데. 그땐 미안했다. 제게 감정을 털어놓던 찬열은 솔직했고, 저보다 성숙해보이기까지 했다.
종인의 인기척을 느끼자 찬열이 개구지게 웃었다. 백현이 종인의 눈치를 보며 슬쩍 찬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염장질러서 쏘리. 야 근데 먹을게 너무 없는 거 아니야? 김종인표 라면 끓여줘.'
'손님 주제에 달라는 것도 많다.'
종인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을 뒤적였다. 정말 먹을게 없었다. 이것저것 만들어 먹기를 귀찮아하기도 하고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탓에 항상 인스턴트 식품을 산처럼 쌓아놓고 살던 종인이었다. 야 너네 부모님 오늘 안 들어오시지? 오늘 불금인데 놀래? 거실에서 찬열이 당연하다는 듯 묻는 걸 무시하고 종인은 의자에 걸쳐진 져지를 건져 입었다. 라면 사올테니까 놀고있던지.
테이블 여기저기 놓인 종인의 가족사진을 구경하던 백현과 찬열이 돌아보았다.
'오올, 너 그러니까 손님주제에 좀 미안한 마음이 쥐꼬리만큼 생기려고 그르네.'
'그러게. 난 불청객이잖아, 따지고보면.'
백현도 거들며 현관문을 열어젖힌 종인의 등에 대고 덧붙였다. 다시 손에 들린 액자를 보니 설핏 웃음이 났다. 작은 직사각형의 프레임 속 어린 시절 부루퉁한 종인이 노려보고 있는 소년이 눈에 익는다 했다. 백현은 남몰래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노란 원복을 입은 짙은 눈썹의 하얀 소년은 분명 누가봐도 도경수였다. 별 기대없던 방문이었는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경수 요리잘하는데. 경수도 초대하면.. 실례려나?'
백현이 중얼거리는 척 종인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나 종인이 멈춰섰다. 백현은 액자를 소리없이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안되겠지? 현관문에 달린 종소리도 멈춘지 오래였다. 도경수 요리잘해? 찬열이 신기하네, 하며 되묻자 백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아냐 됐어. 현관쪽 복도로 서서히 걸어나가자 문가에 선 종인의 눈에띄게 굳은 모습이 꽉 들어찼다. 설마, 백현은 거짓말처럼 딱 맞아떨지는 제 감에 스스로 놀라워했다. 종인은 고개를 돌려 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오호라, 찬열도 씩, 웃었다. 백현아. 도경수 전화번호 있지? 찬열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백현의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뭐해애? 안가아? 찬열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지는게 불길했다. 종인은 열어놓은 현관문을 끝내 닫고 운동화를 벗었다.
'설마 지금 사람 더 부르겠다 이거야?'
'안돼? 그럼 너 라면사러 굳이 안나가도 되잖아. 존나 윈윈. 싫어?'
종인은 차마 말을하지 못하고 끙, 하고 소파에 앉아버렸다. 싫지는 않았다. 다만 박찬열이 지나치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묘한 인상의 백현도. 저를 꿰뚫는 듯한 시선에 몸 껍질이 하나 하나 다 벗겨져 속내가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소리없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그 눈은, 언젠가 찬열이 '존나 사연있어 보여. 존나 사람 답답하고 궁금하게 만들어,' 라고 했던 말을 실감나게 해주고 있었다.
'싫다는 소리는 안하네?'
백현이 슬쩍 종인과 마주보고 앉았다. 앞머리를 정리하며 백현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찬열은 이미 부엌 쪽으로 걸어가며 백현의 휴대폰에 빠져있었다. 경수의 전화번호를 찾는 모양이었다. 잔뜩 집중해서 큰 손에 작은 휴대폰을 쥔 꼴이 우스웠다. 경수랑 옛날부터 많이 친한가봐. 탁자의 액자를 매만지더니 슥 돌려 보여주는데 유치원 시절의 저와 경수였다. 몰랐네. 조용조용 말을 걸어오는 저의가 무엇인지, 종인은 짐작이 갔다. 근 3년 여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 찬열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는데. 철저하게 몰래 좋아하려고 했는데.
'좋아하지?'
소파에 편하게 기대 이미 다 안다는 듯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어. 도경수냐? 누구긴 누구야 이 쌔끼가. 변백현 폰 맞거든? 엉. 박찬열인데 나 백현이랑 김종인 집인데 좀 와라.'
찬열의 쩌렁쩌렁한 저음이 뒤로 울렸다.
'딱히 답을 바라는건 아냐. 아는 척해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
백현은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섰다. 어떻게 알았어. 붙잡는 조용한 목소리에 백현은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원래 우리끼린 대충 알아보잖아. 안그러니? 소파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종인은 액자를 만지고 있었다. 까만 손끝은 경수를 향했다. 3년이야. 뭐? 짝사랑. 3년, 아니. 더 되었을 수도 있고. 종인도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하는 제 자신이 이상했다. 그냥 백현에게는, 찬열에게 그랬듯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백현의 눈에도 지금의 종인은 평소 찬열의 옆에서 보던 그 덤덤한 태도와는 퍽 달라보였다. 그렇게 모노톤으로 고백해오는 종인의 서투른 모습에 백현은 속으로 수긍했다. 그래, 3년. 3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은 것이었다. 백현을 올려다 본 종인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찬열은 아직 통화중이었다. 잘될거야. 백현은 그 말을 끝으로 찬열에게 향했다.
'아무튼 너 안오면 죽는 줄 알아라. 김종인이 너 안오면 투신자살할지도 모른다고! 참고로 여기는 17층이니까 알아서 판단해! 끊어. 아 끊자니까. 잔말말고 와라. 백현이 통화비 존내 나오겠네. 빠이!'
아니 그게..! 하는 경수의 작은 목소리는 띠리링, 하는 전자음과 함께 잦아졌다. 야 김종인, 도경수 온대는데? 근데 백현아, 너 어디 통화왔던데. 함 봐봐. 도경수 협박하는데 존나 자꾸 뚜뚜거려서 죽는줄. 찬열은 궁시렁대더니 종인의 소파로 몸을 던졌다. 겜할래? 하고 종인에게 깐죽대는 찬열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백현은 부드럽게 휴대폰 스크린 락을 해제했다.
부재중 전화 1건. 86으로 시작되는 어지러운 숫자들은 중국에서 온 국제전화였다.
+) 작가말!
1편도 2편도 초록글이라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2편에 암호닉 남겨주신 사랑하는 독자님들!
도비님
통조림님
설레임님
공룡님
메이링님
얌냠냠님
민트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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뀨뀨님
외에도 비회원이신데 댓글잘 안다는데 너무 좋은 글이라 남기신다고 하셨던 독자 45님 ㅠㅠ 사랑해요.. 정말 기분 너무 좋았어요!
복습하시는데도 재미있다고 해주시는 분들도, 브금도 글도 너무 좋다고 칭찬해주신 독자분들도 다 사..사.. 사.. 사리곰탕 드실래요?♥
이번에는 브금 매치되는 걸 찾기가 힘들어서 영 기분이 찝찝하네요 흑흑. 분량을 많이 뽑으려다보니 글 분위기도 들쑥날쑥인것 같고.
근데 사실 분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게 함정. 부끄러우니 빨리 던져놓고 자야겠습니당
마지막으로~ 스쳐지나가시는 분들도 읽어주시는 분들도 손팅해주시는 분들도 모두 사랑해요. 호평이든 악평이든 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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