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에 따갑게 내려앉는 비에 다시금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재수가 없었다. 별다른 방법도 없었다. 무작정 빗속을 걸어나갔다.
비와 복숭아
w. 열대야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몸에 비까지 내려앉으니 물에 젖은 솜 마냥 축축 처지는 정국의 몸과 기분이었다. 어두컴컴한 저녁에 맞는 비는 생각보다 더 기분나빴다.
뒤에서 들려오는 자박자박 물 밟는 소리는 정국의 짜증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톡톡, 정국의 젖은 어깨를 두드렸다.
놀라 돌아보자 투명한 우산을 든, 같은학교 교복의 한 소녀가 서있었다. 뭐냐는 듯한 눈빛으로 소녀를 보자 우산을 조금 올렸다 내리며,
"같이 쓸래?"
하는 소녀였다. 이미 다 젖은 마당에 우산 하나 쓴다고 달라질게 없었지만, 정국은 말 없이 우산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키 차이 때문에 우산을 들기 버거워하는 소녀의 손에서 하얀 손잡이를 가져갔다.
소녀의 시선이 정국의 얼굴에 머무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저 정면만 보았다. 소녀에게선 은은한 복숭아 향이 났다.
향에 이끌려 무심코 소녀를 바라보았을 때 정국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씩 젖어가는 소녀의 왼쪽 어깨였다.
아차, 싶었던 정국은 슬쩍 우산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그런 정국의 움직임을 느꼈는지 소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정국은 괜히 빨개진 귀를 만지작 거렸다.
***
정국과 집 방향과 같은지 정국이 아무생각없이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도 -정국은 이런 면에서 좀 둔한 편이었다.- 소녀는 별말없이 자박자박 따라 걸었다.
그러다 어느 하얀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녀는 정국의 팔을 잡곤 말했다.
" 여기 우리집이야. "
정국은 물끄러미 소녀를 내려다보다, 소녀의 손을 잡아올려 우산 손잡이를 쥐어주려 했다.
하지만 소녀는 손을 빼내며 " 아냐, 바로 앞이니까 뛰어 들어가면 돼. 너 쓰고가. 안 돌려줘도 돼." 하고 말했다.
" 그래, 고마웠다. 조심히 들어가."
정국의 말이 끝나자 소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엘리베이터까지 탄 소녀를 보고 나서야 정국은 발걸음을 뗐다.
아직 복숭아 향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
소녀를 다시 본 곳은 학교였다.
옆에서 실없는 소리를 하는 박지민에 대꾸를 해주며 복도를 걷는데, 반에서 친구와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정국을 보지 못한 듯 했다.
아는 척을 할까, 싶었지만 그러기에 둘의 관계는 너무 멀었다. 소녀가 돌려주지 말라 말한 탓에 우산도 집에 고이 모셔둔 상태였다. 말을 걸만한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옆에서 왜 갑자기 멈추냐고 칭얼거리는 박지민의 목소리는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그 날 소녀와 헤어지고 나서 정국의 눈 앞에는 이름도 모르는 소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소녀가 미소 짓는 모습이 생각나자 이불을 확 덮어쓰는 정국의 귀는 터질듯이 빨개진 상태였다.
그날 밤을 회상하던 정국의 눈에 소녀의 명찰이 들어왔다.
'김탄소'
명찰에 박힌 세 글자를 보며 정국은 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나 왔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