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열은 몇 일째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백현을 중환자실 유리를 통해 바라보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장담할 수가 없어서 일반 병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찬열은 정해진 면회 시간을 제외하고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도 없는 백현에 면회 시간만 기다려왔지만 막상 마주 보고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세자 전하, 면회 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찬열은 소독을 마치고 새하얀 방으로 들어 갔다. 큰 침대에 누운 백현은 참 안쓰러웠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지만 이제라도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지금은 축 쳐진 손가락을 어루만지는게 전부이지만 찬열은 어쩌면 이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백현이 의식을 차리고 자신과 마주본다면 그 두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죄인은 그랬다. 백현이 자신을 밀어내고 원망할까봐 두려웠다. 찬열은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내가 미워서 안 일어나는 거지. 얼른 일어나서 나한테 욕도 하고, 사과도 받아. 하고싶은 말이 많은데 나중에는 내가 용기가 없어서 못할까봐 무섭다. 나 그렇게 센척해도 엄청 겁쟁이거든... 너는 용기있게 우리 아이 키우려고 했는데 난 비겁하게 다 네 탓이나 하고 있었네. 우리 아기는 널 닮았으면 좋겠다. 널 닮으면 예쁘고 착할거야..." 찬열은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가다가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리 아기는 건강한 아들이래. 힘들었을텐데 너무 건강하게 잘 컷더라. 그래서 엄마를 힘들게 하는 건가봐... 한번도 초음파 사진 못봤지? 매주 검사하면서 너한테 보여주려고 초음파사진도 모아뒀어. 그리고 5개월이면 태동도 한다는데... 얼른 일어나서 태명도 짓고, 같이 동화도 읽자.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자. 백현아." 백현이 입원하는 동안 그동안 미뤄 둔 태아 검사를 마쳤다. 정상적인 임신이었다면 이미 마쳐야할 검사였지만 자신 때문에 백현은 그 흔한 초음파 사진 한 장 가지지 못했다. 이제라도 백현과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면회시간이 끝났다는 소리에 마지막까지 백현의 손을 만지다가 마지못해 중환자실을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던 김실장님이 할마마마가 찾아 오셨다고 전해왔다. 어마마마는 자주 찾아 오시지만 할마마마는 처음이였다. 왕실전용 입원실에 들어가자 근심 가득한 얼굴의 할마마마가 앉아 계셨다. 찬열은 뵐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래, 앉도록 해요. 세자빈은 상태가 많이 안좋은겁니까, 세자." "곧 기력을 찾을 겁니다..." "세자... 어찌 이리 미련합니까. 이 할미가 세자와 세자빈에게 있었던 일은 자세히 알지못하나, 세자께서 세자빈에게 대단히 잘못을 했어요.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으면... 회임한 사실을 숨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송구하옵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세자께서 입을 열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만, 힘든 세자빈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한 것은 세자는 지아비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것이에요." "...." "우리 세자가 이토록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니... 이 모두 세자를 제대로 훈육하지 못한 대비의 잘못입니다. 세자빈이 의식을 차리거든 이 할미가 꼭 사과를 해야겠어요. 세자또한 자존심 세우며 못난 짓이랑 하지 마세요. 이 왕실 모두가 세자빈에게 죄인이에요." 할마마마는 찬열에게 따끔한 충고와 질타를 보냈다. 찬열은 가슴 깊이 박혀오는 할마마마의 말씀에 또 한번 정신을 차렸다. 그 후, 할마마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세자빈 처소의 염상궁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숨을 헥헥거리며 전한 말은 백현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깜짝 놀란 찬열은 대비마마와 함께 중환자실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중환자실로 들어가자 눈을 뜨고 의원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고 있는 백현이 보였다. 백현이 할마마마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할마마마는 행동을 저지시키며 백현을 꼭 껴안았다. "세자빈... 고생 많았어요... 이 할미가 미안해요..." 백현은 스스로 손을 올려 호흡기를 떼어 내고, 영문을 모른체 그저 따뜻한 품에 안겨 있었다. 찬열은 차마 백현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서 아무도 모르게 중환자실을 나와버렸다. 병원 복도의자에 앉아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렇게 의식을 찾으면 사과를 하자고 다짐했는데도 백현이 자신을 밀어낼까봐 두려워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일반 병실로 옮긴다며 할마마마께서 이만 궁으로 돌아가보시겠다고 하셨고 찬열은 배웅을 하고 백현이 옮겼다는 병실로 돌아왔다. 의원들이 백현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고 찬열은 멀찍이 서서 듣고만 있었다. "세자빈 마마,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그동안 태아 정밀검사는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어때..요?" 백현은 자신이 밥도 잘 먹지 못하고 검사도 받지 못해서 아이의 건강이 가장 걱정되었었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건강하다는 대답에 백현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원들이 쉬시라며 병실을 나가고 백현은 갑자기 앉아 있어서 그런지 허리가 아파와서 인상을 찡그렸다. 의식이 없는 약 2주 동안 더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표시인 것 같아서 사랑스러웠지만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있으니 또 다른 고통이었다. 백현은 다시 눕기 위해 조심히 몸을 젖혔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백현의 등을 받혀서 조심히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백현은 찬열의 갑작스런 친절이 의아했다. "...건강한.. 남자 아이라고 했어." "아.. 그래.. 왕실에서 좋아하겠다. 아들이 귀하잖아." "...쉬어.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찬열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백현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세자빈이 허리가 아픈 것 같습니다." "아... 아무래도 임신이 척추나 골반에 미치는 영향도 크고.. 그... 옆구리 타박상이 그러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시니 임신 기간이 길어지면 더 힘들게 될 것입니다. 홀로 다니시는 것은 피하시고 관리만 잘한다면 좀 괜찮을겁니다." 찬열은 백현이 앞으로 계속 아파야 한다는 사실에 자신의 마음이 더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퇴원은 언제쯤 가능한가요." "의식을 회복하셨으니 간단한 검사 후에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다행이군요..." 찬열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한다고 인사를 드리고 찬열은 백현의 병실로 향했다. 왕실 전용인 만큼 철통 보안이 되어있는 병실엔 왕실 호위실 직원들이 찬열을 발견하고 인사를 해왔다. 간단한 목례로 대답하고 병실 문을 열자,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찬열은 몇 일전, 백현의 친어머니에게 연락을 했었다. 세자빈의 입원사실을 왕실가족 외에는 알지 못해서인지, 그저 잘지내고 있겠거니하고 생각하셨나보다. 찬열은 지금 세자빈이 입원을 하고 있고 의식이 없다며 혹시나 세자빈이 정신을 차린다면 친어머니를 많이 보고 싶어 할거라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울음 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진 찬열은 다 제탓이라며 죄송하다 죄송하다 연신 말했다. 백현의 친어머니는 임신하고 있는데, 뭐 먹고 싶어하진 않았냐고 물으셨지만 찬열은 아는게 없어서 그저 사가에서 세자빈이 즐기던 음식이면 충분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찬열은 백현의 의식이 돌아오자 마자 백현의 사가에 호위차량을 보내서 친어머니를 모셔오게 했었다. "엄마... 흐으... 보고 싶었어요..." "울지마세요..마마..."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 하나없는 힘든 왕실 생활에 백현은 한번도 피워보지 않은 어리광을 피우며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어머니는 혼례 후 더 왜소해진 백현을 가슴에 품으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토닥였다. 찬열은 따뜻한 모습을 보여 둘만의 시간을 위해 상궁들과 나인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찬열 자신도 병실을 나왔다. 나가기 전 바라본 백현의 얼굴엔 한번도 보지 못한 웃음이 눈물에 젖어 흘렀지만 그 마저도 너무 예뻐 보였다. "밥은 드셨어요..?" "아직이요... 입덧이 심해서 죽만 먹었어요." "마마가 제 뱃속에 계실 적에도 그렇게 입덧이 심했는데..어떡해요.." "괜찮아요. 곧 괜찮아지겠죠. 엄마는 먹었어요?" "세자빈 마마랑 같이 먹을려고 집에서 좋아하시는 잡채랑 장조림 해왔는데, 지금은 무리니까 다음에 또 해드릴게요." "아니에요! 지금 먹고 싶으니까 같이 먹어요." 상궁을 불러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말하고 백현은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복 형이 유학을 가서 외국 아가씨를 데리고 와서 아버지가 크게 노하셨다는 말에 백현은 풉--하고 웃음이 나왔다. 매앨 저를 괴롭히던 이복 형의 소식마저도 반가웠다. 잠시후 염상궁이 잡채와 여러가지 반찬이 담긴 트레이 가져왔다. 익숙한 향기가 병실에 퍼지자 백현은 속이 안좋기는 커녕 군침이 돌았다. "저... 세자전하는 식사 하셨어요?" "네..? 아... 아마 저때문에 못먹었을거에요." "그럼 같이 드시러 오라고 하세요. 이렇게 세자빈 마마 만난 것도 세자 전하 덕분인데 인사는 해야죠." 백현은 염상궁을 불러 찬열을 모시고 오라고 부탁했다. 찬열은 중앙 라운지에 홀로 앉아서 병실 쪽을 처다보고 있었다. 병실에서 나온 염상궁이 자신에게 다가와 세자빈 마마께서 찾으신다고 알려왔다. 찬열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병실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백현의 어머니가 같이 식사를 하자며 끌어 당기기에 찬열은 반강제로 백현의 옆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백현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를 하는데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찬열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세자전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아, 아닙니다. 가끔 이렇게 만나서 세자빈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제 번호로 따로 연락을 주시면 언제든지 만날 수있게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백현은 찬열이 직접 연락을 한것도 놀라운데 이어저 들려오는 소리에 당황해서 찬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학교에서의 사건 이후로 저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현은 자신이 아프고 찬열의 아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책임감 때문에 그런것이겠거니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서 이만 들어가 보아야 한다는 어머니를 몸이 불편한 백현 대신 직접 배웅까지하고 병실로 돌아온 찬열은 백현과 둘만 있는 상황이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먼저 말을 걸어서 속은 어떻냐, 어디 아픈 곳은 없냐,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 고마워..." 백현도 이 어색한 상황을 참지 못한 것인지 용기를 내어서 먼저 찬열에게 고맙다 인사를 건냈다. 찬열은 먼저 말을 걸어오는 백현에 용기를 얻어서 말문을 떼었다. "뭐... 어머니를 보는건 당연한 거니까..." "그래도... 우리 친엄마잖아. 나 임신하고 우리 엄마.. 보고싶었거든.." "...속은 괜찮냐. 갑자기 먹으면, 너 소화하기 힘들잖아." "괜찮아, 조금 밖에 안먹었어. 이제 우리 아기도 엄마 고생 안시킬려나봐." 찬열은 차마 백현을 바라보고 말할 수가 없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 아기라며 배를 소중하게 쓰다듬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어느 순간 백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백현은 다음 주면 6개월인 것이 티가 나게 튀어나온 배가 신기하면서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 한번도 우리 아기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오늘이나 내일, 초음파같은 거 할 수있어?" "주치의원께 말씀 드려놓을게. 이거... 사진인데 너 쓰러진 동안 찍은 거야. 보던지..." 찬열은 지갑을 열어서 초음파 사진 여러장을 꺼내서 백현에게 건냈다. 아직 고등학생인 백현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초음파 사진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뭉클해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 백현이 일어나면 설명해 주려고 열심히 공부한 찬열은 이게 얼굴이고, 이게 다리라며 백현에게 말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는 백현이 의아해서 고개를 들어 백현을 쳐다 보았다. 백현은 입체 초음파로 선명하게 찍힌 아이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진 위로 떨어지는 눈물에 사진이 보물이 된 듯 닦아내며 어깨를 들썩이는 백현의 모습에 찬열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작은 몸을 안아버렸다. 백현은 찬열에게 기대어 더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미안... 힘들게 해서 미안해... 아무 잘못 없는 네가 철없이 미워 보였나봐. 나는 어릴 때부터 왕실에서 혼자 커서, 이기적인 나쁜 놈으로 잘못자라서 너같이 착하고 여린 사람한테 상처준 걸 잘몰랐어. 어떤 말로도 용서가 안되는거 알아. 평생 너한테 속죄하면서 살아갈게. 나 쉽게 용서되지 않는다는거 알아. 네가 죽을 때 까지 기다릴거야." "...흐으.." "울지마... 그리고 우리아기 끝까지 지켜내줘서 고마워... 아기랑 너한테 좋은 아빠랑 남편이 될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 백현은 귓가에 들리는 찬열의 말을 들으며 응어리진 것이 하나하나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앞으로 찬열이 다시 변할수도 있지만 지금 너무 힘들어서 들려오는 말이 너무 달콤했다. 아이와 자신, 둘만 홀로 황무지에 떨어진 것 같았는데 찬열이라는 버팀목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아기 태명은 뭘로 지을까..? 너가 정해줘. 엄마가 정해줘야 아이도 좋아하지. 미래에 국왕이 될거니까 좋은 태명으로 지어 주자. 나는 할마마마께서 오래 살으라고 요상한 이름을 지어주시는 바람에 널마나 스트레스 였는지 몰라." 백현은 풋-하고 웃으며 찬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웃을 수 있을것 같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미안함, 안도감, 사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엔 제자리를 찾아온 것에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긴 여정이 힘들지 않았냐며 도닥여 주는 듯 했다. 아직 갈 곳이 멀었지만 둘이 함께여서 힘을 모을 수 있었다. 다음주에 오겠쯤!
눈류낭랴에 대한 필명 검색 결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