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은 위와 아래가 구분된다. 상과 하, 또는 승과 패. 그 감춰진 가면 속 불안의 눈동자는 부동의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부동의 자리도 지키지 못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게임은 명이 다하기까지엔 끝이 없고, 올라가야 하는 고지도 정상에 다다르면 끝이 없다. 정상을 승이라고, 고지라고 부르는 한 그 정상 속에서는 평생 머무를 수 없다. 올라간 길은 내려오는 법이다. 그곳에서 내려오기 두려운 자들에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속설을 던져본다. 정상에 발을 내디뎠다면 내려오거라, 싫다면 그곳에서 끝마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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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반성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아니, 반성의 시간으로 살겠습니다."
곧게 뻗은 눈앞의 탁자형 마이크처럼 나의 목과 상체, 길고 짙은 속눈썹마저도 뻣뻣이 굳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손가락 한 마디라도 까딱하거나 머리를 넘기는 행동을 보이면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까 봐? 그런 행실이었으면 딱딱하고 삐걱대는 의자에 앉는 일은 없었겠지. 어떻게 따지면 화려한 꽃의 얇디얇은 꽃잎과 같은 언론 위의 마지막 모습일 텐데 시들어 떨어져 버리기 전에 사진 한 장이라도 잘 받아볼까 생각 중이었다. 잘 익은 벼처럼 내려앉은 고개와 시선은 '뵐 면목이 없습니다.'라는 진부한 뜻으로 포장된 스포트라이트를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평소엔 턱선을 부각하고 웃어 보이려고 굳이 구도까지 찾아다녔던 플래시들이 지금은 날 꿰뚫어보는 포인트 같다. 말을 마치고 일 분 정도 지난 후에 고개를 들고, 친절히도 제일 먼저 기사를 내어 이미 내외 가게까지 차리셨다는 황 기자님의 카메라를 뚫어져라 보고 눈물을 모아 시선을 한 바퀴 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탁상 앞으로 나가 90도로 숙여 인사를 했다. 마치 혼쭐이 나 쫓겨난 어린아이처럼 발가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건 아니고, 아마 이 모습을 볼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차림새가 발가벗은 어린애가 아니라 차가운 마네킹이라면 어떨까? 시원섭섭한 인사까지 끝내고 등을 돌렸다.
기자회견의 문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할 동안 나와 매니저 형은 침묵의 시간만 지키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기자들을 지나 겨우 차에 도착했을 때 숨통이 트인 느낌이었다.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매니저 형은 어이없다는 듯의 작은 미소를 띠고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운전을 했다. 차량이 도착한 곳은 회사, 울림 엔터테인먼트. 그 앞의 인파도 해치우고 들어섰다. 사장실로 올라갈 동안 나와 매니저 형, 직원들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반겨주었다. 사장실에 도착한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조용히 사장실에 들어갔다. 여름인데도 열지 않은 창문 때문인지 텁텁한 공기가 나와 사장님, 우리 둘을 메우고 있었다.
"김명수. 이제 못 부를 이름이라 그런가 더 정겹네."
"진짜 안 보실 건가 봐요?"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장님의 말투는 사장님의 컴퓨터 옆에 있는 진한 커피의 휘핑크림 같았다. 부드럽고 감싸주는 듯 했지만 떠난 후 그가 남긴 본 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어려웠다. 약 5년이란 시간 동안 깊은 여정을 덮는다는 게 들이닥쳤다.
"이제 어떻게 지낼 건데?"
"모아둔 거 조금 팔고 집도 내놓고 그럼 좀 모이죠? 그걸 여기저기 합의금주고……."
"또, 또 뭐 할 건데. 합의금 나누면 남을 돈이 있느냐, 인마."
들이닥친 현실, 보이지 않는 막이 버티고 있는 내면. 그 둘이 섞이고 갈등을 빚는 듯했다.
"아. 저 사장님이 주신 용돈 조금 있네요. 기타 팔고 남은 돈도 조금 있고,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겠어요?"
"이 자식아, 그 돈이면 너 한 달도 못 버텨. 한 달? 그쯤은 가겠네. 하여튼……"
옅은 미소, 휘어진 눈매, 가라앉은 목소리가 부각되었다. 평소엔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꼈던 부목 같은 사장. 이제야 깨달았다.
"그럼 됐네요."
"뭐가 돼."
"한 달만 살다 가죠."
이 이야기는 한 달 동안의 나의 여정이다. 여정은 아니지, 도망도 아니고. 나의 애물단지 카메라와 약간의 자금, 그리고 그가 함께 써 내려가는 나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어떤 화려한 것이든지 찾아 번지르르하게 겉멋만 찾던 내가 한 겹 한 겹 멋을 잃어 알몸이 되어 마지막으로 세상 앞에 선, 그 끝자락을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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