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김태형] 네가 없는 시간. 02
농활은 시끌벅적하게 흘러갔다. 참가한 아이들 모두 도시아이들 이었기 때문에 처음해보는 농사일은 모든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태형이를 꼬셔보겠다며 아이라인에 섀도까지 칠했던 여자아이들은 일을 시작하자 마자 안타까운 한숨을 뱉었다. 여자 남자 나눠서 각자 다른일을 해야했던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논에서 피 뽑는 일을, 여자아이들은 포도밭으로 배정받았다. 내게는 오히려 여자아이들 끼리 뭉쳐있는 것이 훨씬 좋았다. 말수 적은 성격은 쉴새없이 재잘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해도 뜨기 전부터 준비해서 하루종일 여자아이들과 붙어 있다보면, 이미 지나간 소문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아침드라마 못지 않은 이야기들부터, 학과 선배들의 연애담까지.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는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앉아서 하자니 어깨가 아프고 서서하자니 허리가 아픈 포도밭일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끄럽고 즐겁게 하루하루 농활은 끝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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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9박 10일의 마지막 밤이었다. 매일같이 포도봉지를 씌우느라, 이제 종이 바스락 대는 소리만 들어도 팔이 자동으로 올라간다며 까르르 대는 여자아이들 틈으로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야 너네 안잘거면 평상에서 맥주 마실래?"
유리잔 한개를 흔들며, 빼꼼 열린 방문 틈으로 남준이의 얼굴이 보였다. 방안에서 짐을 챙기던 여자아이들은 한목소리로 오케이를 외쳤다. 남준이가 방문을 닫기가 무섭게 가방에 넣어 두었던 파우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파우치가 펼쳐지고 빠르게 변해가는 여자아이들의 얼굴을 보다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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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명이 넘는 아이들이 마셔대는 통에, 술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이장님 댁에서 얻어온 막걸리까지 바닥을 보였을 때까지 남아있는 아이들은 다섯정도였다. 술에 취해 맥주 한캔만 더 마시자며 난리하는 아이들을 보다가 내가 몸을 일으켰다. 재밌는 얘기에 맞춰 박수치고 웃다보니 술은 막상 많이 마시지도 못했고, 슈퍼까지는 왕복 삼십분이 넘게 걸리는데 취한 애들이 국도변을 걷다가는 사고나기 딱 좋을 것 같아서였다.
취기가 올라 발음이 살짝 꼬여버린 남준이에게 맥주사러 다녀올테니, 기다리라고 언질을 남겨놓고 지갑을 챙겨 걸음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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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한 숨을 내쉬며 쏟아지는 빗줄기와 내 옆에 놓은 봉지를 번갈아 보았다. 슈퍼에서 맥주를 살 때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흐려지더니 이내 장맛비같은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비는 거의 맞지 않을 수 있었지만, 언제 비가 그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맥주 미지근해 지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봉투 바깥에 빠르게 맺혀가는 물방을을 눅눅해진 가디건으로 닦아내고 하늘을 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도 별이 보였다.
"어- 안녕?"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오래된 버스정류장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틀어 목소리를 돌아보자 태형이가 서있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쉰 채로 내쉴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손으로 흔드는 그애의 손목이 보였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 애의 손을 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머리칼을 다 털었는지 태형이가 다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 진짜 많이 온다 그치?"
"으응-"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로 다시 태형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으응, 말꼬리를 늘이며 두글자를 뱉었다. 그리고 또 다시 빗소리가 버스정류장을 채웠다. 비가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 끄트머리에 앉은 태형이에게 내 심장소리가 들릴 까봐 걱정은 안해도 되니까. 꼭 그 때처럼, 농활을 시작하던 날 내 뒤에서 태형이가 걸어오던 그 열걸음의 거리를 걷던 때 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 보면 맨날 듣고만 있더니, 진짜 말 없구나."
"....그래?"
더 말하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봐 그냥 그래 하고 두글자만 말했다. 여전히 빗소리는 세차기만 하다. 소나기가 본래 이렇게 무섭게 내리는 지, 시골에는 살아본 적이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 옆에 태형이가 앉아있고, 사위는 어둡다. 어색한 이 침묵을 어떻게 좀 깨 봐야 할 것 같은데 생각나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
"...맥..맥주 마실래?"
나는 덜떨어진 애처럼 말을 더듬으며, 봉지 채 태형이에게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10캔이 넘는 맥주가 들어있었지만 무거운 줄도 모르고 그대로 들어 태형이에게 내밀었다.
"...이걸 다?"
태형이의 눈이 반달로 휘어지더니 나를 쳐다보고 묻는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봉투를 그대로 태형이에게 내밀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보. 황급히 봉투를 태형이와 나 사이에 놓고 열어서 안을 보여주었다. 모질이하는 말이 혀 끝까지 차올라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카스캔을 두개 골라든 태형이가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너 은근 허당이구나? 난 너 되게 야무진 줄 알았는데."
맥주캔을 받아들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형이를 보았다.
"나 알아?"
"응, 너 과탑해서 전장 받았잖아. 너 모르는 애 없는데."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는구나. 기대도 한 적 없는데 괜히 실망이 든다.
"말도 별로 안하고 그래서 나는 너 엄청 야무지고 도도한 줄 알았어,"
태형이가 봉투를 뒤적이더니 봉투 옆으로 한칸 더 다가온다.
"근데 아니네. 와 진짜 센스없어. 맥주를 이렇게 사면서 안주를 하나도 안샀냐."
착실하게 맥주만 열캔 들어있는 봉투를 샅샅이 뒤지더니 태형이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맥주 사오라길래..."
"어? 뭐라고?"
괜히 주눅이 들어 중얼대듯 변명을 했다. 아이들이 맥주 사오라길래 맥주만 샀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태형이가 다시 묻는다.
"애들이 맥주 사오라-"
"크게 말해봐 안들려."
태형이가 내게로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다시 말해봐하고 말하며 코 끝에 다가온 그 애의 옆 얼굴에 덜컥 말문이 막혔다. 심장은 더 크게 쿵쿵쿵 뛰었다. 이렇게 가까우면, 심장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빗소리가 세차도 들릴거야. 어떡하지.
"..미안!!"
악을 쓰듯이 커진 목소리에 태형이가 으악, 하며 뒤로 물러난다. 심장소리가 분명 들렸을 거야. 소리를 크게 지르느라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으...흐핫."
뒤로 물러나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더니, 태형이는 웃었다. 흐허헛. 하는 소리를 내면서 웃다가 맥주를 다 쏟고, 쏟은 맥주에 놀라 내가 자리에서 일어 나자 겨우 그 애의 웃음이 멈췄다.
"은근 귀엽네."
"....어?"
바닥에 구르고 있는 맥주캔을 손으로 집어들어 구석으로 대충 치우다가, 태형이를 보았다.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하는 눈으로 그 애를 바라보자 태형이가 살짝 웃는다. 미소만 지어도 아래로 확 휘어지는 눈꼬리가 참 예뻤다. 심장이 또 쿵쿵쿵 세게 뛰었다.
"어- 비 그치려나보다."
태형이의 말에 뒤를 돌자 정말로 가늘어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맞고 가도 그리 심하게 젖지는 않을 만큼 가느다란 빗줄기였다.
"너 먼저 가. 내가 이거 정리하고 갈게."
맥주가 쏟아져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따지도 않은 내 몫의 캔맥주를 챙겨 봉투에 넣고 버스정류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가 퍼뜩, 제대로 듣지 못한 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버스정류장이 너무 멀리 보였다. 다시 돌아가서 그 말은 무엇이냐고 묻기에 나는 용기가 없었다. 비가 그친 농촌의 밤하늘은 맑고 밝았다. 쏟아질 듯이 많은 별을 잠깐 보며, 무슨 말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맥주사러 보냈더니 한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는다며 남준이가 걱정할 터였다.
-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디제이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병실을 울렸다. 에어컨의 온도를 조금 높이고 가습기의 방향을 네 쪽으로 조금 돌렸다. 그리고는 네 옆에 앉아 빗줄기가 세차가 쏟아지는 창 밖을 보았다. 푸르르게 피어오르던 나뭇잎들이 비바람에 휘청이고 있었다.
"태형아, 밖에 비가 내려."
기계음으로 가득차 있던 공간에, 내 목소리가 공기를 흔든다.
"옛날에, 스무살 때 농활 갔던거 기억 나?"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질문을 하는 것은 습관이 되었다. 계속해서 물으면 언젠가 네가 대답할거라고 믿으며 이야기를 건넨다.
"그 때, 나 너랑 처음 이야기 해봤잖아. 심장 터져서 죽을 뻔 했어. 그런 느낌 있잖아, 아이돌이랑 같이 있는 느낌. 너 그때 거의 아이돌이었잖아 학교에서."
대답하지 않아도 모두 듣고있다는 걸 알고있다.
"버스정류장에서 너랑 같이 비내리는 거 봤을 때, 꼭 그 때처럼 비가 내리고 있어 태형아."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태형이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으로 태형이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너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어? 나랑 같은 꿈을 꾸고 있으면 좋겠다. 스무살 때. 내가 너한테 반해버린 그 밤. 그 꿈을 꾸고 있지 태형아?"
우리는 함께 꿈을 꾸고 있다.
네가 내 곁에 있는 시간들을.
*
네가 없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약간씩 교차 될 거에요. 현재의 태형이는 혼수상태입니다.
스토리정리를 하느라 좀 오래 걸렸습니다. 풀어갈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스무살 짜리들이 이제 만났는데.. 언제 프로포즈 해서 같이 살지.... 허헛.
그래도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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