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
십년 된 선풍기는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털털털, 소리만 내며 후덥지근한 바람이 나온다. 한없이 덥기만 한 옥탑방은 사우나도 아닌 것이 숨 쉬기가 힘들 만큼 갑갑했다. 주인집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샀다고 했었나. 오래 됐네 확실히. 부채질이라도 할까 하였지만 움직이면 더 더워질 것 같아 그대로 누웠다. 샤워를 하고 또 해도 금세 땀으로 젖은 몸이 장판에 들러붙는다. 몇 개 나지 않은 창문을 모조리 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분명 이 시간이면 노을이 보여야 하는데. 북향인 탓에 해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보이지 않지만 전망 하나는 끝장이라 집을 옮기고 싶은 이유도 없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면 오밀조밀 모인 집들이 꼭 어린 아이가 장난감으로 만든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또, 이 집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씨이발, 내가 창문 열지 말랬죠.”
“넌 입이 뭐가 그리 험하냐.”
밖에서 안으로 참치캔이 던져져 왔다. 맞은 편 옥탑방에서 날아온게 분명하다. 몇 주 전 비어있던 앞 집에 이사를 온 녀석은 지독히도 까칠했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창문을 열면 그 쪽 집 내부가 바로 보이는 구조기에 창문을 열지 말라고 바락바락 악을 써댄다. 그럴 바엔 그냥 본인 쪽에서 창문을 닫는게 더 좋을텐데. 머리가 더럽게도 안 좋은지 그 단순한 생각도 하지 못 한다. 이름이 뭐였더라. 김, 김. 아, 알 게 뭐냐. 창문을 닫아버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염병, 무한도전 놓쳤네.
저 멀리 던져놓은 휴대폰을 가져왔다. 이제 쓸 이유도 없어 무용지물이 된 휴대폰이지만 성규는 버릇처럼 잠금을 풀었다. 액정 속 환히 웃는 그 아이의 모습이 눈에 가득 찬다. 아 정말 예뻐. 입술이 뒤틀렸다. 양 쪽 근육이 어떻게 된 듯, 기괴하게 뒤틀리고 올라갔다. 우리 우현이, 나 여기 두고. 어디를 갔나.
“보고 싶어.”
휴대폰을 꺼버렸다. 까맣게 지워져버린 우현의 얼굴 대신 액정엔 제 얼굴만 비춰졌다. 거울, 우리는 서로에게 거울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찢어질 듯 가난했던 그때가 떠올라 눈을 감았다. 위태롭기만 하던 삶은 우현으로써 서서히 그 중심을 잡아갔었다. 라면보다 밥을 더 좋아했던 그 아이를 배려하지 못하고, 정확히는 쌀 살 돈이 없어 늘 라면만 사 먹였던 나날이 뼈저리게 후회된다. 그 와중에도 너구리가 면발이 굵어 배가 더 부를 거라며 웃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거실 한 켠에 박힌 라면 박스에 눈길을 줬다. 너구리, 이제 많은데 왜 너는 없어 우현아. 라면 취향이라도 바뀐 건가. 이젠 쌀도 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일용직, 한마디로 성규가 노가다를 하며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저번 달에도 가까스로 냈던 월세가 또 밀렸다. 이번에 밀리면 정말 쫓겨날 텐데,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월세로 내버린다면 우현은 분명 굶을 것이다. 늘 괜찮아, 안 먹어도 돼, 참을 수 있어 같은 말들로 저희의 처지를 위로하며 웃는 아이라지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첫만남의 통통하던 볼살이 빠져버려 날카로워진 것도 안타깝지만 눈에 띄게 마른 허리가 더욱 저를 죄여왔다. 빌어먹을 성욕은 절제할 수도 없어 밤마다 맨 몸을 보니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걸 제 두 눈으로 확인까지 했으니. 혹시 우현이 이런 구질구질한 생활에 지쳐 저를 두고 떠나는 건 아닐까. 생각이 수많은 결말 중 하나에 닿자 조급해졌다.
“오빠, 성규 오빠!”
“어. 왜?”
“엄마가 밑으로 내려오래, 밥 먹게.”
문 밖으로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우현이도 목소리 예뻤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주인집 딸과 남우현은 참 많이 닮았었다. 자연스레 짓는 눈웃음도 그렇고 눈치가 빠른 것도 그렇고, 바닥에서 일어나자마자 휘청였다. 너무 누워있어서 어지럽다.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슬리퍼를 신었다. 오빠 빨리, 고기 탈 거 같음. 그러고보니 어디서 고기 냄새가 올라오는 거 같더만 주인집이었나. 문을 열자 선영이 웃어 보였다. 베시시 웃는 폼이 꼭 우현을 보는 거 같아 철렁였다.
“아 맞아.”
“응.”
“좀 전에 누가 찾아왔었는데. 오빠 있냐고.”
계단을 내려밟는 발이 순간 멈췄다. 갑자기 멈춘 성규를 돌아보던 선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얼른 내려와, 거기서 그러지 말고. 두걸음씩 뛰어 내려가는 선영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봤다. 그 누가, 누군데? 멍청하게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뒤늦게 계단을 내려가며 입술을 축였다. 바싹 말라가며 목소리가 안 나오는게, 여름이라 그런 거라 믿는다. 뒷목을 타고 땀줄기가 흘렀다. 이젠 노을이 보인다. 붉게 타오르며 서쪽으로 지는, 노을이 떠나간다. 선영의 원피스 끝자락이 펄럭인다. 하얀 허벅지와 검은 원피스가 대조되며 제 눈에도 온 세상이 흑과 백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노을이 검게 변했다. 하얀 하늘, 검은 해.
“누구겠어?”
“…….”
“남우현이지.”
순식간에 세상이 본연의 색을 찾았다. 보랏빛 하늘, 붉은 해, 그리고 파스텔톤의 기억 속 남우현까지. 정말 무언가에 얻어맞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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