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웨딩
파리, 사랑의 도시
입국 수속을 끝내고, 호텔까지 이동하고, 짐 정리를 하고,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이었다. 도착할 땐 해가 떠 있었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야경은 눈 부시게 아름다웠다. 내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호텔의 전면이 유리창이었다. 밝은 파리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멍하니 창 밖을 보았다. 여행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사랑의 도시, 파리. 그 곳에 지금 신혼 여행을 와 있다.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조금은 낯선 남자와 함께.
"식사부터 하면 안돼요?"
"그래. 내려갈까? 아래에 레스토랑 있는데."
"호텔 레스토랑 말고, 길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먹고 싶어요."
"좋아. 쌀쌀하니까 가디건 입고."
사계절이 있는 프랑스도 지금은 겨울이었지만, 한국보다는 조금 더 따뜻했다. 그 때문인지, 야외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동양인인 우리를 빤히 쳐다보지는 않았다. 여행의 도시니까. 사람이 별로 없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몰리면 시끄러우니까.
분위기 좋은 창가에는 외국인 커플 한 쌍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와 김종인씨는 그 옆 창가에 앉았다. 파리의 야경이 보이는 높은 레스토랑이었다. 바깥에서 식사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파리에 온 분위기를 제대로 내는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여러 가지 요리를 시켰다. 한 코스에 몇 십 만원이 넘어가는 수준이었지만 김종인씨는 그런 것에 별 연연하지 않았다. 대체 스물 일곱에 뭘 하면 돈을 이렇게 잘 버나...
"김종인씨."
"응."
"직업이 뭐에요?"
"그냥 회사원인데?"
"그냥 회사원이 이렇게 돈을 잘 벌어요? 우리 아빠도 그냥 회사원인데 돈 별로 못 버는데!"
김종인씨는 포크를 내려 놓았다. 30년 산 와인을 고급스럽게 마시는 모습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재벌 2세 같았다.
"음..."
"......"
"그 회사가 아버지 꺼라 그런가봐."
"네?"
"그냥 금수저 물고 태어난 거라고 생각해줘."
"회사가 어딘데요?"
"QH 그룹."
나는 먹던 빵을 더이상 씹을 수가 없었다. QH 그룹이면 거의 삼성, 현대 수준인데? 계열사도 많아서 수익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내가 지금 같이 밥 먹는 사람이 누군가 싶었다. 이거 생각보다 부담스럽잖아? 잘생긴 데다가 돈도 많다.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존나 많다.
"그게 다 내 껀 아니고."
"그래도 어마어마하잖아요. 이게 뭐람..."
"형이 전기, 금속, 중공업, 기계, 섬유 계열사를 가지고 있고 나는 금융이랑 화학. 아마 종대가 대학 졸업하면 섬유가 종대한테 넘어갈 거야."
"세상에... 미쳤나봐."
"왜?"
"제가 지금 누구랑 밥을 먹는 거에요? 워렌 버핏이랑 한 번 밥 먹으려면 22억을 내야 된다던데! 저도 돈 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누구랑 먹긴."
김종인씨가 와인잔을 들고 내게 건배를 하듯 잔을 올렸다. 나는 얼떨결에 잔을 들었다.
"니 신랑이지."
와인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맑았다. 창 밖의 파리의 야경도.
"피곤하지?"
밥을 먹고 호텔로 들어가자,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요."
"먼저 씻을래?"
그 말이 왜 그렇게 야하게 들리는지. 뒷머리를 헝클이며 침대에 풀썩 눕는 김종인씨를 애써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다. 분명 얼굴이 빨개졌을 거야. 나란 년... 음란한 년... '먼저 씻을래?' 가 메아리가 되어서 머리 곳곳을 돌아 다녔다. 호텔은 스위트 룸이었지만 침대는 하나다. 다행인 건, 침대가 넓다는 것 뿐. 킹 사이즈의 침대는 서너 명이 올라가서 大 자로 뻗어서 자도 남아날 것 같았다. 아마 저 끝과 끝에서 자면 괜찮겠지. 그래. 괜찮아. 난 괜찮다.
"나 먼저 씻어?"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종인씨가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제서야 소파에 앉았다.
"아, 전화해야지."
세훈이가 도착하면 꼭 전화해달라고 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자정이 되어서야. 지금 서울은 몇 시일까. 그래도 전화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화음이 꽤나 길게 울렸다. 졸음이 가득한 세훈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안심이 되었다.
- 도착했어?
"응. 저녁 먹고 들어왔어."
- 어디야?
"파리."
- 호강하네. 너 맨날 프랑스 가고 싶다고 그랬잖아.
"예뻐. 다 예쁘다, 여기는."
- 파리에서 뭐가 제일 예쁜 줄 알아?
"에펠탑?"
- 아니.
"......"
- 너.
"... 야, 오글거리게!"
웃음이 터졌다. 예쁘다는 칭찬을 자주 하지 않던 오세훈이 이런 말이라니. 나는 설렌다는 표현을 오글거린다는 말로 대체했다. 그리곤 오징어처럼 몸을 꼬면서 소파에서 뒹굴었다.
- 언제 와?
"다음 주. 개강 전 날에."
- 그 때까지 못 보겠네.
"......"
- 보고 싶어서 나 죽으면 어떡해.
"뭐래."
킬킬대는 웃음 소리가 달짝지근 했다.
- 나 죽기 전에 와야 돼. 알았지?
"응. 나도 보고 싶어."
- 같은 하늘 아래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하늘이야."
- ......
"멀어도, 같은 하늘이야."
오세훈이 울고 있으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눈물이 더 많은 놈인데. 나도 울 것 같은데 오세훈은 오죽 할까. 한참이나 말이 없던 오세훈이 입을 열었다.
- 응.
"......"
- 같은 하늘이다.
"금방 갈게."
- 날아 와.
"응. 날아 갈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 주는 달콤한 말들. 연인 사이에나 할 말들을, 구남친이랑 하는 나는. 오늘도 여전히 나쁜 년이다.
"씻어."
"아, 씨... 옷 좀 입죠?"
"지금 욕 하려고 했지? 와, 나 상처 받았어."
속으론 백 번도 더 외쳤어, 이 남자야. 나는 아래에 수건만 걸치고 나온 김종인씨 때문에 쌍욕을 남발할 뻔 했다. 마음 속의 음란마귀 새끼는 저 수건을 잡아 당기라며 말도 안되는 지랄을 하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꺼져... 나는 김종인씨의 맨 몸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높이 두며 욕실로 향했다. 지금 두근거리는 건, 남자의 맨 몸을 봐서 그런 거다. 낯설지만 잘생긴 남자의 나체 때문이다.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기를 바라면서 욕실 문을 열었다. 뜨거운 기운이 얼굴로 다가왔다.
"파리."
거울에는 김종인씨가 손가락으로 뽀득뽀득 써 놓은 'paris' 가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작은 하트도. 나는 샤워기를 틀어 거울로 뿌렸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거울에 김이 서렸다. 손가락에 잔뜩 거품이 묻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거울로 손끝을 갖다 대었다.
"파리."
paris. 사랑의 도시에서 나는, 사랑을 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벌써 작은 하트 하나에 설렐 만큼.
"자자."
킹사이즈 침대의 한 가운데에 누워 있는 김종인씨. 대체 어디에 누워야 할까... 어딜 누워도 결국 김종인씨 옆이다. 나는 고민 끝에 소파로 향했다.
"어디 가?"
"여기서 잘래요."
"왜?"
"불편하잖아요."
"뭐가?"
"음란한 김종인씨 옆에서 자는 게."
"너무해."
김종인씨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 얼굴이 또 열일곱의 소년 같았다. 김종인씨는 손가락을 들었다. 새끼 손가락을 쫑긋 세우고는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안 건들게. 약속!"
"어떻게 믿어요. 저번에도 안 건든다더니."
"내가 손끝 하나라도 대면."
"대면?"
"니 동생할게."
"별로 땡기는 제안은 아닌데요?"
"왜~ 막 대할 수 있잖아! 재벌 2세를!"
스스로 재벌 2세라고 하는 거 보니깐, 재벌에 놀라는 내 반응이 상당히 흥미로운가 보다. 나는 고민했다. 재벌 2세가 내 동생? 막 대할 수 있어? 그럼 능글 맞은 김종인씨한테 반말도 쓸 수 있고, 여차하면 등짝도 한 대 때릴 수 있고. 나쁘지 않은 제안인데...?
"좋아요. 대신 진짜 손 끝 하나라도 대면!"
"니 동생 한다니까?"
"콜."
나는 꾸물꾸물 김종인씨 옆에 누웠다. 김종인씨는 정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아쉽지는 않았다. 절대로.
나를 확 끌어 아는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어...? 손..."
"......"
"김종인씨 지금 나한테 손 댔어요."
"응."
김종인씨는 키들키들 웃으며 내 머리통을 폭 끌어 안았다.
"누나."
"......"
"이제 누나네."
이 말에 안 설렐 수 있는 여자 나와 봐. 그럼 기꺼이 나는 썅년이 되리. '누나', 한 마디에 정말로, 심장이 녹아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의 김종인씨는 정말로 소년 같아서, 나는 봄 같은 마음이 들어 버렸다.
"나는 누나가 좋은데."
"......"
"누나는 내가 싫은가."
"... 내가 언제 싫댔나."
"그럼 왜 자꾸 딱딱하게 굴어요."
"......"
나는 김종인씨에게 끌어 안겨 있다. 빠져 나가려고 몸을 뒤틀지도 않았다. 그냥 김종인씨가 안은 대로, 그대로 안겨 있다.
"김종인씨, 나는..."
"반말해도 되는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반말해줘."
"그런데 자꾸..."
"......"
"네가 이렇게 다가 오면."
"설레?"
"......"
"내가 좋아져?"
"... 응."
김종인은 나를 꽉 안았다. 숨이 막혔는데, 그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제 그 사람 말고 나랑 연애하자."
"......"
"파리잖아."
"......"
"사랑의 도시."
그 목소리가 꿈 같았다. 파리의 야경을 다 담은 것 같은 눈동자에 나는 넋을 잃었다. 매력이 넘치다 못해 흐르는 남자네. 김종인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풀고, 내 이마에 뽀뽀를 했다. 간지러워.
"파리에는 나랑 너랑 둘 밖에 없어."
같은 하늘이라고 했던 내 말이 무색해지게도, 나는 오세훈을 잊어 버릴 것 같았다.
"오늘은 개선문에 가자. 밤에는 에펠탑에 가고."
"좋아요."
"내가?"
"웃기고 있네."
"어, 반말했다."
"아니거든요."
"말 놓으면 안돼?"
"싫어요."
"그럼 나 계속 누나라고 부른다."
"그것도 싫어요."
"둘 중에 뭐가 더 싫어?"
스물 일곱이 나한테 누나라고 하는 거. 그건 진짜 별로다. 자꾸 설레는 건 둘째 치고, 나는 스무살 이니까. 누가 보면 내가 서른 쯤 되는 줄 알 거 아냐.
"말 놓을게요. 대신 누나라고 하지 마요."
"응. 대신 너 존댓말 할 때 마다 누나라고 할 거야."
"... 응."
"자, 가자!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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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정 이때 ㄹㅈㄷ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