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다정함과 까칠함 사이)
-자냐.
...으응.
-얼씨구. 자면서 대답도 하네.
......
-전화 끊고 빨리 자. 내일 보자. 김탄소.
자는 탄소를 깨우기가 미안해 집 앞에 서서 불 꺼진 창문만 보다 집으로 돌아온 민윤기의 12번 째 밤.
1.
처음이라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그냥 제일 최근에 있었던 이야기?
미대가느라 수학 공부를 안 해서 수학 과외는 오바고 영어는 존못이라서 붓질이라도 할 줄 아니까 저번 달 부터 원장 선생님이랑 친하기도 하고 용돈도 부족해서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알바하는데 수업 있는 날에는 10시 30분 넘어서 끝난단 말이야. 학원 있는 곳이 번화가이기는 한데 밤에는 술 취한 사람들도 많고 이상한 사람도 많아서 집에 갈 때 매일 다른 언니들이랑 버스타고 같이 가는 데 그 날 따라 다들 약속 있다고 가버리고 나만 낙동강 오리알 처럼 혼자 남은거야.
너무 피곤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태평양 같은 어깨를 무기삼아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지하도에 들어가니까 자꾸 뒤에서 뭔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는거야. 처음에는 이어폰 소리 조금 줄이고 일부러 더 힘차게 걷고 있는데 내가 속도 줄이면 발자국 소리도 줄어들고 빨리 걸으면 같이 빨라지는 거. 너무 당황해서 셜록을 출까 장군처럼 걸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벨소리가 겁나 크게 울려서 핸드폰 떨어트리고 난리도 아니었음. 진짜 렉걸린 것 처럼 엄청 어색하게
"하하, 휴대폰이 떨어졌네."
하고 바닥에 있는 거 주워서 전화 받았는데 윤기더라고. 아까 전화하려다가 오늘 합숙이라 그래서 입 꾹 다물고 참았는데 기다렸던 전화 오니까 심장이 도쿠도쿠했음. 뒤에 누가 따라온다는 것도 까먹을 만큼 신나서 오늘 밥반찬이랑 간식 뭐 먹었는지 다 자랑하고 윤기는 어, 응, 그래, 맛있겠네. 이 딴 말 밖에 안 해줌. 10분 동안 통화하면서 제일 길게 한 말이 "집 가는 중이야?" 였음. 아무튼 나름 알콩달콩하게 전화 하면서 집에 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툭, 뭐 떨어트리고 허둥지둥 집는 소리가 나서 나도 모르게 확 뒤돌아봤는데 아무도 없는 거임.
"윤기야 체육관이지."
-어. 왜.
"아니야. 보고 싶다고. 체육관 우리 집이랑 되게 가까운데."
-어.
"지금 내가 오라고 하면."
-더우면 들어가서 씻고 자.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그것도 그렇고 그냥 괜히 말해서 훈련하는 애인 걱정시키기도 싫고 혼자 오해하는 것 같아서 다시 통화하면서 집으로 가는데 그 도서관이랑 연결된 길이 엄청나게 깜깜하고 풀도 많아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음. 윤기랑 통화 하면서도 진짜 엄청 빨리 걷느라 숨소리 헉헉거리고 땀 질질 나고 그러는데 갑자기 누가 어깨를 확 잡아끄는 거야. 진짜 진심 입이 콱 막히고 아무 말도 안 나와서 뿌리치고 전화도 끊고 그냥 핸드폰 꾹 쥐고 뛰는데 눈물도 안 나오고 대충 아무 곳이나 들어가려고 찾는데 공원에는 아무것도 없고 뛰다가 심장 터져 죽든지 저 남자한테 잡혀 죽든 지 할 것 같아서 공원 구석에 있는 벤치 뒤에 숨었는데 진짜 그제야 눈물 나오고 손 떨리고 무슨 소리만 내면 찾을 까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 막고 있었던 것 같아.
자꾸 주위에서 발자국소리만 나고 뭐 찾는 것처럼 뒤적거리니까 미칠 것 같아서 휴대폰 밝기도 제일 어둡게 하고 윤기한테 문자 보내려고 문자함 들어가는데 갑자기 전화 와서 무음모드라 소리도 안 나고 번쩍거리는 거 겨우 받았는데 진짜 윤기 목소리 듣자마자 미칠 것 같은 거야. 그런데 이런 일로 걱정시키기는 싫고.
"으응, 윤기야."
-전화 왜 끊어, 아. 어디야 지금.
"나, 집이지."
-거짓말 치지 말고 어디냐고, 씨발. 후, 어두워서 못 찾겠잖아.
"흐으, 나 공원, 공원인데. 자꾸, 끅. 자꾸."
얘는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일단 정신도 없고 물어보는 대로 대답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들리던 발자국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엄청 큰 발소리가 막 들리는 거야. 진짜 막 나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나가지는 못 하겠고 차라리 안 듣고 싶어서 귀 막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아침까지 있다가 가고 싶을 정도였어.
"김탄소."
"흐으, 누구, 윤기야... 나, 나."
진짜 극도로 긴장해서 다리 저린 것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민윤기 향수 냄새가 나는 거야. 그 비누 냄새 같은. 그래서 설마하고 고개 들었는데 앞에 윤기가 엄청 화난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어. 그 때는 표정이고 뭐고 보이지도 않고 얼굴 보자마자 막 눈물만 나서 울고 있는데 민윤기가 양 팔을 벌렸어.
"안아."
"으응, 안아."
이게 뭐냐면 나랑 민윤기 둘 다 스킨십을 별로 안 좋아해서 손도 잘 안 잡는데 종종 민윤기가 양팔 벌리면서 안아 하면 진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안고 있더라고. 아무튼 민윤기가 안으라니까 저린 다리 끌고 가서 안겨있었지. 더워 죽겠는데 한 20분 동안 안겨서 울고불고 그 사이에 변명도 좀 하고 나중에는 업혀서 집까지 왔는데 그제야 보이더라. 삼선 슬리퍼에 훈련복 차림으로 뛰어온 민윤기가.
"어떻게 알았어?"
"몰랐어."
"응?"
"자꾸 보고 싶다며."
"으응, 보고 싶었지. 계속."
"네가 체육관이냐고 물어 볼 때도 밖이었어. 잠깐 얼굴만 볼까 싶어서 집 앞에서 기다리는데 안 오잖아, 전화는 끊기고."
"......"
"어떻게 가만히 서있어. 미치겠는데."
"......"
"......"
"안아."
"싫어, 김탄소."
"윤기, 안아."
너무 기특해서 아까 민윤기처럼 양팔 벌리고 서있으니까 마지못해 안기는데 그냥 너무 고맙고 그래서 소파에서 둘이 안고 있다가 윤기는 자고 가고. 다음날 코치님한테 뒤지게 맞았지. 근데 맞은 것도 말 안 하고 있다가 나한테 들켜서 변명하는데 그것도 고맙고.
이렇게 쓰니까 너무 다정한 면만 부각된 것 같은데 다음에는 까칠(원래 이게 한 90%정도)한 모습을 써볼게. 다음에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