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윤기, 연애 교과서 1 부제: 좋아합시다, 너를
W. 겨울잠
"탄손아 이번 달 월세 입금 안 됐던데?"
"아... 엄마께 부탁드렸는데 잊으셨나 봐요, 제가 금방 다시 입금할게요"
"그래, 늦었는데 공부는 적당히 하구 얼른 자렴. 아 맞다, 옆 방 윤기는 왜 안 오니? 원래두 늦게 왔지만 오늘은 더 늦네. 혹시 아는 거 없니?"
"아, 옆 방 오빠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주머니께서 나가시고 난 뒤 방문을 닫았다. 책상과 작은 침대, 노트북 한 대, 서랍 하나로 꽉 차는 3평짜리 하숙집. 열대야에 못 이겨 창문을 열자 서울 하숙이라는 현수막이 눈 앞에 펄럭이다가 금세 가라앉는다. 어느덧 밤 열두 시다.
옆 집 오빠 이름이 윤기였구나. 대학에서 의료학과를 전공한다는 사실 빼곤 아무것도, 그 오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저번 말일 쯤에 간만에 만난 친구와 한 잔 나눈 탓에 술에 잔뜩 취해 하숙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혼자 휘청대던 적이 있는데 감사히도 날 내 방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 인사를 꼭 전하고 싶었는데 낯가림이 워낙 심한 편이라 말을 걸기가 힘들다. 게다가 항상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주말이 아니면 마주칠 기회도 없다. 알고 싶은 게 많은 사람.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잡생각을 마치고 펜을 잡았다. 자격증 시험이 머지 않았다. 형광펜으로 중요한 부분 밑줄도 긋고 빨간 볼펜으로 별표도 쳤지만 머릿속에서 민윤기의 생각이 뜨질 않는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펜 뒤에 꽂은 뚜껑을 앞니로 질겅질겅 물었다. 구겨진 채 남은 자국이 꼭 내 맘 같아 속이 상했다.
결국 제대로 된 공부도 하지 못한 채로 잠을 청했다. 선풍기를 틀고 얇은 이불을 배에만 걸쳤다. 포근한 향이 코끝을 맴도는 게 잠이 잘 올 것 같았는데 평소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만 마음이 간지러웠다. 결국 이불을 걷어내고 선풍기 전원을 끈 채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안 자고 뭐 하냐?"
"아, 티비에서 영화 하길래"
아랫층에 사는 태형이다. 가수 연습생을 하겠다고 무작정 대구에서 올라온 친군데 무모할 정도로 긍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연습생 생활만 5년 동안 하고 있다는데 포기가 없는 걸 보면 여러 모로 대단한 애다.
하루종일 연습을 하고 왔을 텐데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며 말똥말똥한 눈으로 영화를 잘도 본다. 소파 옆에 앉자 분홍색 플라스틱 숟가락을 건네길래 사양 없이 받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반찬거리도 없고, 돈 들이기도, 재료 사기도 귀찮아서-
"태형아 넌 안 피곤해?"
"어? 완전 죽을 맛이야. 나름대로 참고 있어"
태형이 눈꼬리가 휠 정도로 접으며 웃었다. 그래, 안 피곤하고 안 힘든 청춘이 어디에 있을까. 고개를 끄덕이며 티비 내용에 집중했다. 비에 젖은 여주인공이 노크하자 남주인공이 문을 열고 입을 맞춘다. 당황스러워 태형을 쳐다보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화면에 집중한다. 괜히 머쓱해져 큼큼-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는데 내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어두운 그림자에 깜짝 놀라 엄마! 소리치며 놀랐다.
"이런 취향이야?"
"네...?"
"순진해 보이더니 남자랑 오밤 중에 무슨 이런 영화를 봐"
해맑게 웃고 있는 민윤기였다. 발소리도 없이, 도어락 여는 소리도 없이 언제 들어온 건진 몰라도 방금 들어온 듯 땀을 벌뻘 흘리며 날 보고 웃고 있었다. 태형도 깜짝 놀란 듯 해명하자 민윤기가 우리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다. 민망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태형을 바라보자 태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난 멀뚱멀뚱 화면을 보다 어느새 격하게 키스하는 모습에 놀라 애꿎은 손톱만 깨물었다. 새끼 손톱이 닳아 없어질 지경으로 잘근잘근 깨물자 민윤기가 인상을 찡그리며 내 새끼 손가락을 낚아채 앙- 깨물었다. 당황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오밀조밀한 외모와는 다른 큰 손으로 내 볼을 꼬집으며 한다는 말이-
"너, 여기 세균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데가 손톱 밑이야"
"아, 네... 안 깨물게요 이제"
"예쁘다"
"...네?"
"말 되게 잘 듣네"
내 머릴 헝클이듯 쓰다듬고는 민윤기가 욕실에 들어섰다. 우릴 바라보던 태형이 '오 뭐야 김탄손, 그린 라이트?' 하며 놀란 표정으로 장난을 걸었지만 정작 놀란 건 나였다. 하숙에서 반 년 동안 살며 민윤기와 나눈 두 번째 대화였으니. 내게 예쁘다고 했다. 예쁘다고. 귀게 붉어지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손부채질을 했다. 에어컨을 작동시키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지만 이미 실내 최저 온도에 맞춰진 에어컨을 보고 맘을 접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북극에 가도 더울 것만 같다.
중학교 때, 전교회장 오빠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2년 동안 맹렬히 짝사랑을 겪은 후 용기내어 고백했다가 대차게 까인 후 그 오빠에겐 누가 봐도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친구가 생겼다. 난 그 사실을 듣고 두 번 다시 바보처럼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내 자신과 맹세했다. 중학교 2학년 때니까 6년 전이다. 겨우 6년 만에 바보 같은 짝사랑을 또 시작하게 될 것만 같은 이 우울하면서도 설레이는 기분은 뭐지.
아이스크림을 먹은 탓에 다시 양치를 하려고 욕실에 들어서자 누구 건지 모르는 면도기가 눈에 띄었다. 치약을 짠 칫솔을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태형이에게 물었지만 제 물건이 아니라고 했다. 호석이는 광주에 부모님 뵈러 1주일 동안 여행을 간다고 했고, 남준 오빠는 엠티 갔으니 남은 남자 하숙생은 민윤기 뿐이다. 입을 헹구고 면도기를 든 채 조심스레 옆 방문을 노크했다. 두 번 정도 두드리자 '네' 하는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요- 하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침대에 반쯤 누워 독서하는 민윤기가 눈에 가득찼다. 열린 창문 사이로 별빛이 사무치게 쏟아져 내렸다. 민윤기를 위한 스탠드 같았다.
"저기, 욕실에 면도기 두고 가신 것 같은데..."
"아, 내 거 맞아"
"여기 두고 갈게요. 책 읽는 거 방해해서 죄송해요"
"별게 다 미안하다. 아 이리 와 봐"
이리 와 보라는 민윤기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민윤기 근처로 다가갔다. 로션 냄새인지 뭔지, 민윤기 특유의 향이 코를 찔렀다. 분명 아까 땀을 뻘뻘 흘렸을 때도 느꼈던 향인 걸로 보아 체취인 것 같다. 맡기 좋은 것이었다.
침대 근처에서 멀뚱히 서 있자 민윤기가 웃으며 서랍을 열어 초콜릿을 꺼내 주었다. 두 손으로 받고 고개를 꿈뻑 숙여 고맙습니다- 하니 유치원생 같다며 또 머리를 잔뜩 헝클였다. 자꾸 머리 쓰다듬는 거, 버릇인가? 버릇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무의식적 행동이 아닌 나에게만 주는 특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이거 왜 주신 거예요?"
"착하잖아, 물건 주인도 찾아주고"
"아..."
초콜릿을 손에 쥐고 터벅터벅 걸어 방문을 열었다. 이제 막 나가려는데 민윤기가 다시 한 번 나를 불러 세운다.
"몇 살이야? 이름 뭐야?"
"스물한 살 김탄손이요"
"너 향수 같은 거 써? 되게 좋은 향기 난다"
"네?"
"아니야, 늦었는데 가서 자"
나에게 좋은 향기가 난다고 했다. 우린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사실만으로 벅차올랐다. 금세 좋아하게 된 사람은 처음이다. 그만큼 지금껏 좋아했던 그 누구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말 없이 좋아한다는 마음을 보냈다. 오늘은 정말 쉽게 잠에 들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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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불친절한 글로 처음 독자분들을 뵙게 된 겨울잠이라고 합니다! 달달한 윤기 연애물을 쓰고 싶은 맘에 글잡을 찾았지만 금손 분들이 많아서 제 글은 재미가 없을 수도 ㅜ^ㅜ
포인트 기부하고 읽어 주신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싸랑해요♡ 댓글 달아 주시고 제게 주신 포인트 다시 가져 가세요 다음 편에서 뵐 수 있으면 뵈어요 ㅎㅔ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