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를 부탁해
04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아저씨와 함께하는 생활은 내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이나 빠르게 익숙해져 갔다. 그동안 아저씨와 내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다. 늘 똑같은 내 일상을 아저씨가 함께하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아저씨와의 생활 역시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렸고, 겨우 잠에 들면 다시 악몽 때문에 괴로워해야 했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아저씨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고,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아저씨를 따라 아침 운동을 나갔다. 밥을 먹을 때도 아저씨와 함께였고, 학교에 갈 때도, 집으로 돌아올 때도, 집에서도 잘 시간이 되어 각자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늘 내 곁에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러한 일상에서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그 작은 변화들이란 모두 나에게 생긴 것들이었다. 아저씨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혼자서 고군분투했다. 잔뜩 부푼 마음이 자꾸 붕붕 떠오르려는 것을 누르는 일은 생각보다는 견딜 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도 내 마음에는 바람이 불었다. 벌써 한껏 부풀어 있던 마음이 더 커져서 위로 오르는 것은 점점 겉잡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선 안에 서 있던 발마저 선을 넘고 싶어 달싹거렸다. 그런 마음도 모른 채 무턱대고 나를 설레게만 하는 아저씨가 미워질 정도였다. 부러 아저씨를 미워하려 애쓴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내 노력이야 항상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아저씨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걸핏하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나를 걱정하는 태도에서부터 가끔 마주하게 되는 단정한 웃음까지. 또 부쩍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하게 되는 날이면 더 그랬다. 어쩌면 이제 아저씨에게도 일상이 되었을 그 행동들은 번번이 나를 떨리게 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매번 당황했다. 그런 날에는 꼭 잠을 설치곤 했다. 그것이 내게 생긴 또 다른 변화였다. 잠들지 못한 채 밤새도록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는 이유에는 이제 그날의 기억보다 아저씨가 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밤새 아저씨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저씨의 목소리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아저씨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러니까 악몽을 꾸지 않는 동안에는 온통 아저씨 생각이었다. 깨어 있는 내 하루가, 온종일이 아저씨였다.
그 덕에 나는 눈 밑의 그늘과 함께 하품을 달고 다니게 되었다. 원래부터 잠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던 때에 잠을 설칠 이유가 하나 더해진 것은 대단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수면 부족은 금세 얼굴을 칙칙하게 만들었지만, 아저씨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잠이 부족하다거나 피곤한 것을 아저씨가 알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으니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아저씨의 모습을 보게 되니 왠지 모를 섭섭함이 밀려왔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또 하품을 했다. 과일을 고르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쇼핑 카트에 팔을 기대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먹을 것이 떨어져 가까운 마트에 장을 보러 나온 참이었다. 이왕 나오게 된 김에 저녁거리와 함께 과일도 좀 사갈 작정으로 입구와 가까운 과일 코너를 먼저 둘러보기로 한 것이었다. 원체 과일을 좋아하던 터라 많은 종류의 과일들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내가 과일 코너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안에 아저씨는 천천한 걸음으로 입구에서 쇼핑 카트를 끌고 왔다. 과일 구경에 정신이 팔린 내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니 아저씨도 쇼핑 카트와 함께 그대로 멈춰서 있던 것이었다.
"아저씨, 과일 뭐 살까요?"
"……"
"좋아하는 과일 있어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아저씨가 집어 올린 것은 제 앞에 있던 복숭아였다. 나는 한달음에 아저씨 쪽으로 달려가 복숭아를 하나 집어 들었다. 적당히 익은 복숭아의 분홍빛에서 벌써 달콤함이 느껴졌다. 아저씨 손의 복숭아와 내 손에 들린 복숭아를 번갈아 보며 고민하다가, 나는 내 손에 든 복숭아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아저씨가 들고 있던 복숭아를 잡아 카트에 내려놓았다. 그러는 동안 아저씨는 가만히 서서 내 손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벌써부터 복숭아의 맛을 상상하면서,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는 한 손으로 쇼핑 카트를 밀며 신나게 앞장서는 나를 따라 걸었다.
"아저씨도 복숭아 좋아하는구나."
"……"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며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아저씨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별 생각 없이 식품 코너를 찾으려 마트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저씨는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은 아끼는 편이었다.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말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일상적인 주제로는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가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내 말에 일일이 답하지 않는 모습도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었다.
"닮았습니다."
"……"
"아가씨랑."
그렇기에 예고도 없이 툭 던져진 그 말에 내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 덜컥 멈춰 버린 나는 차마 아저씨 쪽을 돌아볼 용기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서서 아저씨의 말을 곱씹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저씨는 여전히 여유로운 걸음으로 카트를 밀어 나를 따라잡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내 마음은 전혀 여유롭지 못해서, 아저씨가 걷는 속도의 몇 곱절이나 되는 빠르기로 쿵쿵 뛰어대고 있었다. 마침내 아저씨가 내 옆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복숭아보다도 더 붉은 색으로 얼굴이 익어 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나 열이 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나는 다시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식품 코너로 향하는 내 발이 점점 빨라지는데도 아저씨의 걸음걸이는 내내 차분했다. 복숭아가 좋다는 거지, 내가 좋다는 얘기가 아니잖아. 내가 복숭아를 닮아서, 그래서 복숭아를 좋아한다는 게 아니잖아. 무슨 오해를 해도 이렇게 하냐 나는. 풍선처럼 바람이 잔뜩 들어가 또 눈치 없이 붕붕 위로 떠오르려는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식품 코너에 들어선 다음에야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제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아저씨 쪽은 돌아보지도 못한 채 나는 드디어 저녁거리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평소에는 본가의 아주머니가 만들어서 가져다 주시는 반찬이 넉넉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식사 준비라고는 밥을 안치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반찬이 일찍 떨어지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레토르트식품을 사다가 대충 끼니를 때우곤 했었다. 그러니 저녁거리에 대한 고민을 한다거나 그 때문에 마트에서 장을 보는 일은 새삼 어색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비 오던 날 얻어먹었던 볶음밥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들에 대해 떠올렸다. 그리고는 곧 그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음을 깨달았다.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라면이나 달걀 프라이 같은, 요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들 뿐이었다. 어린 시절 먹고 싶은 음식을 이야기하면 척척 만들어 주셨던 엄마와 다르게, 내 요리 실력은 형편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이어지는 것은 스스로도 변명처럼 느껴지는 합리화였다. 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를 해야겠어. 괜히 어려운 요리에 도전했다가 맛이 없으면 그게 더 미안한 거잖아. 그래, 요리는 정성이라고 하니까. 그런 타협과 함께 아저씨에게 대접하기로 한 요리는 맛있는 요리에서 쉬운 요리로 쉽게도 바뀌었다. 쉬운 요리도 맛만 있으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검색창에 '쉬운 요리', '만들기 쉬운 요리' 따위를 검색했다. 오이 물국수, 순두부덮밥, 토마토그라탱, 김치어묵국밥 등의 레시피가 차례로 추천되고 있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어딜 봐서 쉬운 요리야. 연관 검색어에 '초등학생이 만들기 쉬운 요리'라고 떠 있는 것에 괜히 자존심이 상한 나는 핸드폰의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몇 걸음 더 걷다 보니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스파게티 소스. 그 유리병이 그렇게나 반갑게 보였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단번에 저녁 메뉴를 결정했다.
절로 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제일 큰 병에 담긴 스파게티 소스를 두 손으로 꼭 잡아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저씨가 어느새 내 바로 뒤에 와 있었다. 그런 것에 놀랄 정신도 없이, 나는 카트 너머의 아저씨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저씨는 쇼핑 카트에 한 팔을 기댄 채 그저 조용히 나와 눈을 맞출 뿐이었다.
"아저씨, 스파게티 좋아해요?"
"……"
"좋아해야 되는데…"
아저씨에게서 금방 돌아오는 반응이 없으니 또 금세 소심해진 내 목소리만 작아져 갔다. 가슴께까지 높이 들었던 스파게티 소스가 점점 무겁게 느껴져 팔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피식, 싱겁게 웃은 아저씨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두 손에 꼭 들려 있던 스파게티 소스가 아저씨의 한 손으로 옮겨졌다. 아저씨는 말없이 스파게티 소스의 유리병을 잠깐 살펴보더니, 이내 그것을 쇼핑 카트 안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내 눈을 보며 하는 말은, 겨우 눌러놓았던 마음을 다시 들뜨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좋아합니다."
"……"
그 말의 목적어가 스파게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어쩐지 고백이라도 받은 듯 주책없이 떨려 오는 마음에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눈만 깜박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저씨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늘 이런 식이었다. 가볍게 웃는 아저씨의 얼굴은 또다시 내 마음에 바람을 불었다.
***
"어, 김여주!"
계산대에서 막 나오던 길에 나를 불러 세운 것은 연갈색 머리를 한, 우리 오빠였다. 누가 보더라도 집에서 쉬다가 나온 것이 분명해 보일 만큼이나 후줄근한 차림이었음에도 벌써 주변에서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사실 옷을 어떻게 입어도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밝은 머리색이었다. 평일이라 마트 안이 붐비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빠가 얼굴 가득 반가운 웃음과 함께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입구 쪽에 서 있던 오빠는 반가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방방 뛰며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오빠의 머리색이 그나마 연갈색 정도인 것에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가끔 밝은 주황색이나 분홍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오빠가 학교 앞으로 마중을 나오곤 했었다. 그렇게나 시선을 끄는 머리색으로 교문 앞에서 막대 사탕을 물고 있는 오빠는 하교하는 모든 학생들의 눈길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나와 함께 걸어 나오던 친구들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오빠를 발견하면 아는 사람이냐며 한 마디씩 꼭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오빠에게 제발 그런 머리로 밖에서 아는 척 하지 말아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하곤 했었다. 그럼에도 오빠는 도무지 차분한 색으로는 염색할 마음이 없어 보였었다.
어느새 내 앞까지 온 오빠가 대뜸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았다. 울컥 짜증이 치미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나는 오빠와 함께 손을 들었다. 오빠가 내게 한 것처럼 똑같이 머리를 헝클어 놓으려는 생각이었다. 별 생각 없이 오빠의 머리로 손을 가져다 대려다가, 문득 아저씨가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속에서는 부글부글 화가 끓고 있었지만 이렇게 밖에서 오빠와 투닥거리는,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아저씨에게 보이게 되는 것은 더 싫었다. 그런 와중에도 표정 관리에는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뚱한 얼굴로 오빠를 흘겨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빠 만났는데 표정이 왜 그래. 반갑지도 않냐."
"응."
"에이 거짓말. 나 보고 싶었지?"
헤실헤실 웃으며 던지는 그 어이없는 질문에는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서,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서 돌아오는 답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오빠는 제 얘기만을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엄마가 또 공부하라고 난리다. 얼른 공부해서 대학가고 회사일도 배우란다. 또 선생님을 붙였다. 그런 하소연들을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언제 오빠의 말을 끊어야 할지 고민했다. 아저씨는 말없이 내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빠의 이야기가 끊을 틈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에, 나는 오빠와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제야 시선을 느낀 오빠가 내 쪽을 향해 고정되어 있던 고개를 돌려 아저씨를 한 번 쳐다보더니, 대뜸 내 손을 잡아끌어 제 쪽으로 오게 했다. 아저씨는 여전히 조용하게, 오빠가 그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빠가 아저씨와 괜한 신경전이라도 벌이는 듯이 짐짓 매서운 눈으로 아저씨를 쳐다봤다. 정작 아저씨는 오빠와 눈을 마주친 다음에도 무심한 표정이었다. 뭐라도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막 입을 떼려던 찰나에, 먼저 고개를 돌린 오빠가 나를 보며 물었다.
"누구야? 설마 그, 경호원?"
"…응."
뭐야 벌써 알고 있었구나. 아마 엄마에게서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이 경계하는 듯한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오빠지만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동안 나와 아저씨를 번갈아 보며 경계 태세를 취하던 오빠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다음 순간에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되는 양 소곤소곤 귓속말로 속삭이는 오빠의 말에 나는 허,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조심해. 남자는 오빠 빼고 다 늑대야."
"……"
90년대 철 지난 작업 멘트라 해도 믿을 만한 말을 덜컥 꺼내놓고서, 오빠는 괜히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러더니 꼭 아빠라도 된 것처럼 나를 단속하기 시작하는 것에 나는 고개를 내둘렀다. 항상 행동 조심하고, 일찍일찍 다니고, 집에서도 짧은 옷 입지 말고, 어디 앉을 때도 좀 얌전하게 앉고. 그런 식의 잔소리들을 나는 또 한 귀로 흘려보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잔소리를 어찌어찌 마친 오빠는 나를 보며 제법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잘 알겠냐고 묻는 것 같은 그 행동에 호응해 주기 위해 나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던 오빠가 또 대뜸 양손을 들어 내 얼굴을 잡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움직이며 이쪽저쪽 열심히 내 얼굴을 살피다가 이내 한 손으로 양볼을 잡아 주물럭댔다. 그러더니 조금은 웃음기가 가신 얼굴이 되어서는, 아까와는 다르게 사뭇 장난기가 빠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는 평소의 오빠와 어울리지 않는 그 소리가 어색하게 들렸다.
"요새 잘 못 자냐? 얼굴이 왜 그래."
"그냥, 뭐…"
"밥만 잘 먹고 다니지 말고 잠도 좀 잘 자고 다녀라."
"…그래 고맙다, 오빠."
걱정스러운 말투에 감동한 것도 잠깐이었다. 금세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온 오빠는 다시 손을 들어 내 머리를 꾹꾹 눌렀다. 점점 안 좋아지는 내 표정을 지켜보며 가볍게 웃던 오빠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쇼핑 카트가 일렬로 세워져 있는 마트의 입구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 간다?"
"어 잘가. 우리도 가요, 아저씨."
"네, 아가씨."
나와 아저씨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고 나서 짧은 인사를 마친 오빠는 다시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 빠른 걸음이 꼭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도 찾은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든 것보다 훨씬 무거운 봉투를 들고 있었을 아저씨에게 미안했다. 고개를 들어 아저씨를 올려다보자 아저씨도 대번에 나와 눈을 맞추었다. 꼭 내가 올려다보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저씨가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에 다시 마음이 울렁였다. 벌써 미안해하는 마음을 눈치채고 괜찮다며 나를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웃음에 마주 웃지도 못하고 얼른 눈을 피해 버렸다. 그 눈을 더 바라보고 있다가는 마음을 전부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갑작스레 만난 오빠가 소란스럽게 휘몰아치고 난 다음의 마트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아저씨에게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해 겨우 들게 된 가벼운 봉투가 걸음에 따라 바스락 소리를 내는 것이 기분 좋았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한 발 한 발 기분 좋은 설렘이 피어날 것이었다.
***
잘 준비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창 밖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나는 불도 켜지 않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누르면서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침대에서 밤새 뜬 눈으로 밤을 지샐 바에야 차라리 조용하게 영화나 몇 편 보자는 생각이었다. 리모컨 버튼을 이리저리 누르며 인기 있는 영화나 프로그램들의 다시 보기 목록을 넘겼다. 보려고 생각했던 로맨스나 판타지 영화 대신 요리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밤중에 혼자 앉아서 요리 프로그램을 보는 건 좀 이상하려나. 하지만 그렇게라도 요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몇 시간 전 아저씨에게 저녁으로 대접했던 스파게티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의 저녁 식사란 내가 대접했다 하기도 민망한 것이었다. 그저 면을 익히고, 제품으로 판매되는 스파게티 소스를 올린 것이 전부인, 아무리 요리가 정성이라 하더라도 요리 축에도 끼워 주지 않을 것 같은 그 스파게티가 오늘의 저녁이었다. 달랑 면과 소스로만 만들기가 민망해 소스에 채소를 좀 썰어 넣기야 했지만 그마저도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내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아저씨가 부엌에 서 있는 내 앞으로 나선 일이 그렇게나 잦았다.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칼로 채소를 손질하는 일도, 뜨거운 물에 면을 넣거나 다시 건져내는 일도, 뜨거운 소스를 접시에 담아내는 일도 전부 아저씨의 몫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러니까 위험하지 않은 일이란 스파게티와 함께 낼 스프를 국자로 젓는 것 뿐이었다. 부엌의 상황이 그렇게 되자 나를 걱정하는 아저씨에게 고마운 마음 대신 불만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칼을 쓰는 것도, 불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게나 위험한 일이라면 나는 대체 무슨 요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찌어찌 완성된 스파게티는 아저씨 덕분인지 맛이 괜찮았다. 그럼에도 나는 저녁을 먹는 내내 불퉁한 표정일 수 밖에 없었다. 접시에 담긴 스파게티가 줄어들수록 제대로 된 요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커져 갔다. 아저씨가 걱정도 할 수 없을 만큼 능숙하게 요리를 해서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한 손으로는 계속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요리 프로그램의 다시 보기를 열심히 살폈다. 밤새도록 돌려 보며 레시피라도 마스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열의로 프로그램을 고르고 있던 때에, 아저씨가 방에서 나왔다. 아저씨도 잘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자려고 했는데 텔레비전 소리가 시끄러워서 일어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소심하게 텔레비전의 음량을 낮추었다.
"아가씨, 안 주무십니까."
"아 그게, 잠이 안 와서…"
"……"
"영화나 좀 보려고…"
요리 프로그램의 다시 보기를 찾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또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원래의 계획대로 영화를 보려 했다는 말로 둘러댔다. 시끄러우니까 소리 좀 줄이라고 하려나. 늦었는데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하려나. 그런 걱정을 하며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말없이 소파로 다가온 아저씨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안 자요?"
"아가씨가 주무시면 저도 자겠습니다."
아저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 때문에 못 자는 건가. 그럼 그냥 들어가서 자야 되나. 또 밤새 침대에서 뒤척이기는 싫은데. 내가 아저씨를 쳐다보며 갖은 생각을 하는 동안 아저씨는 조용히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도 오늘은, 잠이 안 와서요."
"……"
또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툭 꺼내놓는 그 말에 나는 금세 안심했다. 여전히 텔레비전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의 옆모습을 쳐다보다가 왠지 웃음이 나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리모컨 버튼을 열심히 눌러 로맨스 영화를 찾았다. 어쩐지 꼭 로맨스 영화를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화가 재생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마음이 또 쿵쿵거렸다. 잔잔한 음악이 배경에 깔리는 것과 함께 느껴지는 두근거림이 기분 좋았다. 나는 소파에 놓여 있던 쿠션을 집어 꼭 끌어안았다. 가끔 예능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중계를 함께 보기는 했어도 이렇게 불까지 꺼 놓은 어두운 거실에 둘이 앉아 영화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라는 것은 나를 더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꼭 영화관 데이트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영화의 내용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에도 나는 한동안 그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영화의 내용보다는 옆에 앉아 있는 아저씨에게 자꾸 신경이 쓰여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는 아저씨와 함께 버스에 탔던 어떤 날이, 처음으로 손을 잡는 장면에서는 아저씨와 손을 잡고 걸었던 학교에서 버스정류장까지의 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가씨."
"네?"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깨워서, 잠이 부족하신 겁니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던져진 아저씨의 질문은 다소 뜬금없었다. 아저씨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보는 거지. 그 질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오늘 오후 마트에서 오빠와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잠을 잘 못 자냐고 물었던 오빠의 이야기가 신경 쓰여서인지, 아니면 아저씨가 보기에도 요새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갑자기 꺼내놓은 그 질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확실히 잠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저씨가 일찍 깨우는 탓은 아니었다. 굳이 아저씨 탓을 하자면 아저씨 생각 때문에 점점 잠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아저씨가 아침에 깨워 주는 것을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저씨와 함께 살게 되기 전에는 잠드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모두 제멋대로였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잠드는 날이면 다음 날에는 꼭 늦잠을 잤고, 수업이 없는 날에는 오후까지 꿈속을 헤매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떤 주말에는 괜히 일찍 눈이 떠지기도 하는 것이 그야말로 들쭉날쭉이었다. 그런 생활 습관이 아저씨 덕에 고쳐지고 있었으니 일어나는 시간이라도 지금처럼 규칙적으로 변한 것에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요. 일찍 일어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럼,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십니까."
"…네."
정곡을 찌르는 듯한 질문에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뒤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아저씨가 더 자세히 묻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잠을 설치는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다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하거니와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어찌 되었든 영화의 스토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가 절정으로 달려감에 따라 주인공들의 사랑도 무르익는 듯 했다. 영화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잔잔했던 덕분에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려던 참이었다. 내가 천천히 눈을 끔벅거리고 있던 때에 절정으로 치달은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입맞춤을 나누기 시작했다.
보기에 민망할 만큼 격렬한 키스신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화면을 더 쳐다보고 있기가 힘들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괜히 부끄러워지는 마음에 안고 있던 쿠션을 좀 더 세게 끌어안으며 아저씨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한결같은 자세로 그저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영화 속 주인공들의 감정선은 최고조에 달했다. 마침내 그들이 서로에게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내게 드디어 아저씨의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저, 이제 자러 갈게요."
"네, 아가씨."
이런 상태로 침대에 눕는다고 해도 잠이 올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변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아저씨는 별다른 말 없이 대답해 주었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도 이제 들어가서 자려는 모양이었다. 곧 텔레비전이 꺼졌다. 텔레비전의 빛이 사라지자 거실이 어둠에 휩싸였다. 문득 떠오르는 악몽에 나는 몸을 떨었다. 눈앞이 어둑했지만 익숙한 공간이기에 내 방을 찾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 안에 들어선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쪽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들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악몽에 두려워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 혼자서 이렇게나 설레는 것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어렴풋이 방 안의 침대가 보였다. 밤새 뒤척일 생각을 하니 푹신한 이불도 불편하게만 보였다.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방문을 닫기 위해 뒤로 돌아 손을 뻗었다. 문고리 대신 손에 닿은 것은 아저씨의 옷자락이었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아저씨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 닿는 그 감촉의 어색함을 인지했을 때, 나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는 어둠이 눈에 익어 아저씨의 얼굴이 제법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왜요, 아저씨?"
"곁에 있겠습니다."
"……"
"잠드실 때까지."
그 조용한 목소리에 도리어 시끄럽게 바빠진 심장박동과 함께, 나는 아마 오늘도 밤새 잠들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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