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약사 맞아요? 06
그렇게 주말이 되었다. 아무것도 할 짓 없는 무더운 토요일이다. 김태형 집에 안 놀러간지 좀 되기도 한 것 같은데, 한 번 벨이나 눌러볼까? 비밀번호를 알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쳐들어가기도 좀 실례니까. 난 저번과 같은 참사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침대에서 뻐근한 몸을 일으켜 곧장 화장실로 향해 샤워를 하고 옷도 최소한으로 꾸며 입었다. 딱히 내가 그 약사를… 의식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나도 여자이니까, 진짜로 그냥 여자니까 사람한테서 민망하고 초췌한 꼴을 보이기 싫으니까 이렇게 귀찮음을 감수하며 가는 거다. 나는 문을 열어젖히고 703호라고 적힌 문을 응시했다. 조용하다. 김태형은 없을까? 평일 내내 계속 동기들이랑 쏘다녔으니 주말에는 쉴 거다. 근데 그 민윤기라는 사람은 정규직 약사로 근무하니깐 집에 없을 거다. 매일매일 출근하냐는 말에 자기는 성실한 약사라고 대답했으니까 그 말을 믿겠다. 나는 내 집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김태형 집 문에 대고 똑똑, 노크를 두어번 했다. 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건지 바로 나오진 않았다. 나는 가만히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서 김태형이 짠, 하고 나타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여주 씨 또 보네요? 아씨, 나 지금 너무 부스스한데. 일단 들어오세요."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냥 단지 왜 그 성실하다던 약사가 일 안 나가고 집에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는 나를 밖에다 그리 오래 세워두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늘 볼 때마다 느끼는 거고 늘 그랬듯이 이 사람은 여자 대하는 매너는 참 좋았다. 어디서 배워왔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들을 쏙쏙 골라서 행동했다. 아마도 연애를 많이 해 봤겠지. 그러나 내가 따로 놀랐던 건 민윤기의 청소 실력이다. 김태형의 집에 놀러가면 항상 청소하는 건 내 몫이었는데, 어느샌가 마구간이었던 집이 점점 사람 집으로 변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김태형이 청소해서 달라질 그런 변화가 아니었다. 필시 민윤기가 청소한 거다. 세상에, 청소를 무슨 나보다 잘 하는 것 같아. 부럽다. 내 집에도 와서 깔끔하게 싹 청소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응? 아, 이 말은 취소.
"성실한 약사시라면서요. 오늘도 일 안 나갔네요?"
"주말은 근무시간이 달라서요. 이따가 2시부터 나오라네요. 아, 김태형 얘는 좀 있으면 올 거라고 했고. 근데 왜 오셨어요? 혹시 저 보러?"
"아침부터 던지는 농담이 아주 김태형급이네요."
"재미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맞는 거죠? 다음에는 재밌게 칠게요. 아침은 드셨고?"
"아뇨, 그냥 김태형한테 아침 얻어먹으려구요."
"있어요 그럼. 얘 요리 못 하잖아요. 집에서도 맨날 제가 하는데."
민윤기는 그 말을 끝으로 내가 있던 거실에서 조그마한 부엌 한 켠으로 몸을 숨겼다. 아니, 방 구조가 다소 협소한 탓에 다른 공간으로 가도 몸이 다 보여서 숨긴다는 표현도 웃기긴 하지만 아무튼 민윤기는 나에게 있어보라며 가 버렸다. 나한테 계속 등만 보여주고 부스럭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뭔가를 만들어주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나저나 김태형 이 새끼는 언제 오는거야? 아. 어색함은 전보다 덜 했지만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성인 남녀가 한 집에 있으면 누구나 뻘쭘하기 마련이다. 민윤기는 내게 티비라도 보고 있으라 했다. 아직 11시라서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안 하는데 뭘 보라는 건지. 나는 리모콘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2인용 소파의 한 구석에 앉아 핸드폰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이제서야 드는 생각인데, 이번엔 저번처럼 거지꼴은 보여주지 않아서 다행이다. 핸드폰만 계속 만지작대다 보니 조금 지루해졌다. 이미 페이스북에서도 볼 거 다 봤고, 인터넷 서핑도 다 했고, 카카오톡 친구목록에서 사람들 프로필 사진 옆에 뜨는 빨간 점을 다 없애보기도 했다. 정말 나는 할 짓이 없구나. 아! 아직 인스타그램을 들어가보지 못 했다. 나는 내 바지주머니에 자리잡은 민트색 이어폰을 꺼내 내 핸드폰에다 연결을 시키고 노래를 들으며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그간 올라왔던 게시물을 살펴봤다. 남자친구랑 잘 사귀고 있는 대학 동기의 럽스타그램, 연락은 하지 않고 그냥 인스타상 맞팔하고 있는 과대 오빠의 먹스타그램, 때로는 선배들의 여행 사진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부럽다. 나는 대학도 휴학했고, 알바도 잘렸고, 여기서 처량하게 그냥 민윤기가 해주는 무언가만을 얻어먹으려 기다리고 있다. 나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살고있는 주위 사람들이 약간은 부럽게 느껴졌다. 마침 흘러나오는 노래도 딱히 즐겁지만은 않은 노래였다.
"나랑 이어폰 똑같네요."
내 귀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노랫소리 대신 민윤기의 목소리가 한 쪽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멍을 너무 심하게 때렸나, 내 옆에 누가 왔는지도 몰랐다. 이어폰이 같다는 말에 나는 갑자기 옆에 앉은 민윤기에 대한 놀람을 최대한 감추려 대답을 얼른 공감하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나는 다시 시선을 핸드폰에 꽂고 머쓱함에 하염없이 스크롤질만 해댔다.
"친구들이에요?"
"아뇨, 과선배 언니들이에요. 놀러갔나보네요 어디로."
"부러워서 그렇게 축 처져있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좀 부럽죠. 전 사정 때문에 대학도 휴학하고 알바도 잘려서 이렇게 앉아있는데, 반면에 주위 사람들은 재밌게 재밌게 잘 사니까... 뭐 그래요."
"나중에 우리 셋이 가면 되는데 뭘 그래요. 인스타그램 아이디나 알려줘봐요, 팔로우 하게. 저도 인스타 하니까."
나는 얼떨떨함을 느낌과 동시에 내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민윤기에게 알려주었다. 겉으론 아마 아무렇지 않아보였을 테지만, 여행가면 된다는 말에 엄청 놀랐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여행을 원체 잘 가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는 맞벌이로 바쁘셨고 또 두 분이 출장도 자주 가셔서 시간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족 관련해서 추억이 별로 없다. 이따금씩, 부모님들이랑 함께 여행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었다. 어린 마음에는 부모님이 미워서 여행을 자주 가고 추억거리도 많이 만드는 부모님의 자식이 되고 싶기도 했다. 그렇기에 민윤기가 건넨 말이 나에게는 놀람, 감동 그 자체였다. 난 일단 그런 쓰잘데기없는 회상은 밀어내버리고 민윤기와 거의 마주보면서 인스타그램에 관련된 얘기를 나누었다. 민윤기가 나를 좀 전에 팔로우했다는 알람이 뜨자 나도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민윤기의 인스타그램은 의외로 평범했다. 게시물을 보다보면 여행을 자주 갔던 흔적이 잘 묻어나있었다. 바다 사진도 있었고, 산 사진도 있었고, 중간중간에 가운을 입고 셀카를 찍은 사진도 있었다. 셀카도 셀칸데 역시 실물만 못 한 듯 했다. 나는 좋아요를 몇 개 누르고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누군가와 이런 연결고리가 생긴다는 건 좋은 예감의 시작이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가보면 참 형식적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나름 즐거웠던 대화를 몇 번 주고받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나! 누나 왜 여깄어?!"
김태형이 두 손에 장바구니 같은 걸 잔뜩 들고 온 채 민윤기와 나란히 앉아있는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목소리엔 놀람과 신기함이 가득 차 있는 목소리 같았다. 민윤기는 뭘 이렇게 많이 사 오냐, 여주 씨 닮아서 그러냐? 친남매도 아닌데 닮았어 그런 게, 하고 김태형을 보고 큭큭 웃으며 말했다. 김태형도 마찬가지로 웃음으로 화답하고 식탁에 장 봐온 것들을 쭉 꺼내놓고 막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리하는 건 또 어디서 배웠대? 아, 내 옆에 있는 사람한테 배웠겠지 뭐. 김태형은 정리를 다 마치고 식탁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이 새끼는 뭐가 그렇게 의심스러운지 나와 민윤기를 번갈아보았다. 그것도 한참이나.
"윤기형한테 누나 말 듣긴 했는데. 내 모르는 새에 둘이 사귀나~?"
"지랄 할래?"
습관적으로 김태형한테 쓰는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어제 기사님에 이어서 얜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너무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런 거친 말이 튀어나와버렸는데 민윤기를 쳐다보니 또 이 인간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너무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데…?
"야, 나 여주 씨랑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다. 부럽지?"
"무시각이네. 형, 근데 저 누나 성격 드러워. 4년 동안 봤는데 그닥. 물론 형도 드럽지만."
"왜? 여주 씨 성격 괜찮던데. 니 말대로 우리 연애해도 잘 맞을 거 같지 않냐?"
"쌍으로 지랄 참 잘 할 듯. 나한테만은 하지 마."
민윤기는 한 팔을 내 어깨에 어깨동무하듯 걸치고 내 어깨를 감싸더니 그대로 나를 자신에게 당겼다. 나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3초 동안은 가만히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이 양반이 농담이 진짜 김태형급이다. 아까는 장난으로 한 말이지만 이번엔 진짜다. 무슨 농담을 저렇게 해? 솔직히, 정말 가감없이 말 하면 솔직히 약간은 설렜다. 몸이 굳은 것도 그 때문일 거다. 내 성격이 괜찮다는 말에 한 번, 연애해도 잘 맞지 않겠냐는 말에 두 번. 확실히 여자 많이 사귀어본 티가 확 난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민윤기의 몸에서 떨어졌다. 민윤기는 날 한 번 보고 쓱 웃어줬다. 그러고선 김태형이랑 아무렇지않게 수다란 수다는 다 떨었다. 그 수다 중에서도 내 귀를 은근하게 사로잡았던 대목이 터져나왔다.
"야, 너 내일 뭐 없냐?"
"없다 왜."
"내일 여주 씨 데리고 여행이나 가자. 여행 가고 싶대."
"와, 존나 콜! 누나 갈거지?"
"…아니 잠깐만, 차 있어?"
"윤기 형 차 있어. 차가 문젤 거 같으면 말 꺼내지도 않았을 걸? 가자!"
"저기요, 민윤기 씨. 이거 너무 충동적인 거 아니에요? 당장 내일이라뇨."
"그런 게 재밌는 거에요. 즉흥적인 거라고 말해주면 예쁠 텐데, 참. 아무튼 갈거죠? 가요."
"어… 네, 가요 가."
…근데, 저 약사는 그럼 내일 근무 또 빠져? 세상 참 편하게 산다. 나는 민윤기가 아까 요리해 온 베이컨과 에그 스크램블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아직 그렇게 식진 않았네, 맛있다.
그리고…
다시, 봄.
암호닉 ♡ 똘똘이 론 말랑카우 민구 민군주 민설탕약사 민윤기 보솜이 뿝뿌 슈가슈가 융기융기 준회 짱구 춘심이 Gellemdal 0324 1600 ♡
안녕하세요 화빈입니다 학원 가기 전에 이렇게 얼릉 올려놓구 가요 ♡ㅅ♡ 여주한테도 다시 봄이 온 건 가봐요 여름이 다 끝나면 가을 ㄴㄴ 봄 ?!
아무튼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리구 수요일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