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Leon) 2015 : The Professional
“남은 평생 편안히 잠들 수 없을 지도 몰라.”
“그런 건 두렵지 않아요.”
“사랑 아니면
죽음이에요.
그게 전부에요.”
02: 기묘한 동거의 시작
“책임져요”
그 말을 듣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과 달리 머릿속에선 적색경보가 정신없이 머리를 울렸다. 위험하다는 신호인 걸 잘 알지만 막상 이 아이를 밀어내지 못하고 자꾸 나답지 않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굳었던 몸으로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있던 탄소를 겨우 밀어내고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가려는데 다시 나를 부르는 탄소의 목소리에 그만 동작을 멈춰버렸다.
“제발요.. 아저씨 도와주세요”
“..미안”
왜 그랬을까. 탄소의 간곡한 말에도 무심하게 냉정하게 대답했어야 한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고 오늘 이 아이를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인생에서는 상상도 못할 놀랄 일인데 자꾸 일을 크게 벌여서는 안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해. 민윤기 정신차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눈을 보면 도저히 매몰차게 대답할 수 없었다. 탄소가 입고 있는 내 검은 옷이 묘하게 #탄소와 잘 어울려 보였고 누군가가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탄소에게 머물렀던 잠깐의 손길에 자꾸만 내 두 손을 간지러웠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씨발
“아저씨”
“......”
“내가 뭘 하면.. 뭘 어쩌면 될까요 제발요..”
“적어도 여기서 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떨리는 목소릴 감추고 겨우 대답을 뱉어낸 후 손잡이를 돌려 방 밖으로 나가니 금세 나를 뒤따라 나온 탄소가 내 앞을 가로 막고 서있었다. 탄소의 막무가내인 행동에 한숨이 나왔다. 보통 애가 아냐. 그저 얌전한, 평범한 여고생이 아니라고. 내 앞의 탄소를 지나쳐 거실 소파에 앉아 커튼을 내리고 괜히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니 쪼르르 쫓아와 내 옆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탄소를 보니 더 이상 내 일을 숨길 순 없었다. 내 대답에 겁먹어서 스스로 집을 나갈 거라는 나의 착각과는 전혀 다른 예상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켰지만.
“날 도와줬단건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그럼 왜 그냥 죽게 안 냅뒀냐구요”
“넌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는 아냐”
“...무슨 일 하시는 데요?”
“안 믿을껄”
피식 웃으며 말을 하는 비소를 띤 내 표정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탄소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날 향해 대답했다. 정말 진심이라는 듯.
“믿어요.”
단호하게 탄소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믿는다는 말. 김남준이 아닌 다른 사람에겐 한 평생 들어본 적도, 들어볼 일도 없었던 말. 자꾸만 묘하게 내 신경을 건드리는 탄소의 말에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나도 모르게 대답이 더 짧아졌다.
“킬러”
“....”
“살인 청부업자”
“...그래도 믿어요”
“믿지마”
진심이었다. 나 같은 새끼, 아무 죄책감 없이 손에 피 묻히고 돈 벌어 사는 너희 가족을 죽인 놈들과 같은 그런 놈을 니가 왜 믿냐. 믿지 말라는 내 대답에 내 맘이에요 라며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날 설득하는 바람에 결국 나도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졌다 졌어. 더 이상 이 아이를 밀어낼 여력도 그런 마음도 없었다. 그래, 분명히 탄소는 위험한 아이다. 하지만 날 믿는다는 말, 오히려 이젠 내가 그 애의 말을 믿고 싶어졌으니까. 이번 한 번만 믿자. 딱 한 번만. 그러니까 김남준 이제 내 머릿속에서 좀 꺼져줘.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어, 허락한 거죠? 맞죠?”
“...니 맘대로”
“정말요? 아저씨 진짜 감사합니다!”
“.....”
“근데 아저씨. 정말 나 왜 구해준 거에요?”
“그러고 싶어서”
“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가끔은 위험한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 김남준에겐 평생 비밀로 해야겠지만. 그 때, 지금보다도 더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머리를 덮쳐왔고 마침 내 앞 탄소의 한결 밝아진 눈을 보며 다 잊을 수 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닐 걸 알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의 탄소를 뒤로하고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저씨!”
“어”
“아저씨는 이름이 뭐에요?”
이름? 이름이야 많지. 늘 신분을 감춰야 했고 그에 맞게 주민등록증은 수십번을 바꿔가며 나중엔 진짜 내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수첩에 적어 놔야 할 정도로 나 자신까지도 철저히 속여왔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름을 알려줄게. 좀 유치하지만 정말 나랑 닮았다고 느꼈거든.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질감을 느낀 유일한 존재인 그 사람의 이름. 그냥 농담하듯 장난스럽게 얘기했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진실했다.
“레옹”
**
그렇게 나는 아저씨와 같이 살게 되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사이즈가 큰 아저씨의 검은 후드집업의 소매에 코를 대보니 의외로 소매에선 아저씨의 차가운 분위기와는 다른 따뜻한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부엌으로 들어간 아저씨는 자신의 이름을 레옹이라고 했다. 레옹이 뭔진 잘 모르지만 이름을 얘기하는 아저씨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정작 표정은 묘했다. 그래서 난 그냥 믿었다. 아저씨가 킬러인 것도, 이름이 레옹인 것도 다 그냥 믿었다. 아저씨, 그냥 날 구해준 그 한 사람만이 내겐 중요했으므로. 며칠 전 날 향해 들어가라고 말했던 날 그저 스쳐지나갔던 그 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여느 날처럼 그녀석에게 맞고 있는데 이상하게 몸보다 가슴이 더 저릿했다. 아저씨 웃기죠. 분명히 아저씨를 만나기 전까진 죽지 못해 살아갔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날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
“응”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아저씨의 시선을 피하며 나이를 물었다. 사실 궁금했다. 내 앞에 서있는 아저씨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은수가 아닌 그냥 생판 남인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 나이기에 아저씨에게 자꾸만 말을 걸면서 묘한 낯설음을 느꼈다. 근데 아저씨는 내가 말은 아저씨라 부르지만 사실 꽤 젊어보였다. 이십대 중반정도?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어깨와 손은 넓고 컸다. 목소리도 멋있었다. 약간 귀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목소리는 낮고 말을 거의 안 하는 탓인지 약간 잠겨있었다.
“31살”
“정말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더 많이 봤어?”
“당연히 아니죠. 이십대 중반 정도로 봤는데..”
“그렇군”
“아저씨는 내 나이 안 궁금해요?”
“고등학생이잖아. 맨날 교복만 입고 다니면서”
순간 아저씨는 교복을 얘기하면서 내 옷을 힐끗 쳐다보았다. 힘들었던 과거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있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이곳저곳 묻어있고 이리저리 찢겨있는 낡은 교복이 부끄러워 후드의 지퍼를 올렸다. 내가 부끄러워 한다는 걸 안건지 아저씨는 내 옷에서 금세 물컵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무뚝뚝하긴 해도 나름 자상한 거 맞네.
다시 대화가 사라진 식탁에서 내가 먼저 아저씨를 불렀다. 사실 오늘 일은 마음 속 깊이 예상은 했던 일이다. 가족이 죽는 거,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죽을 거고 그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란 걸. 또는 내가 죽는 거. 우리 가족은 확실히 다른 가족들과는 시작부터 달랐으니까.
“사람 죽이면 얼마나 벌어요?”
“의뢰에 따라 달라. 표적에 값을 정하는 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니깐”
“....저”
“쉿, 이제 그만. 영업 기밀이라서”
내게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비밀이라고 말하곤 물컵을 치우는 아저씨의 모습에 하고 싶었던 말을 꾹 눌러 담았다. 나중에 물어보자. 그래 김탄소, 지금은 너도 좀 쉬어 아무 걱정 말고 해방된 날이잖아. 근데 정말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저씨는 배고프지 않냐며 나에게 저녁을 사주겠다 말했다. 그렇게 저녁식사는 간단하게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에 돼지처럼 꾸역꾸역 씹어 먹다가도 문득 내 앞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 아저씨를 생각해보면 아저씨의 모습은 뭔가 의외인 점이 많았다. 짜장면이 도착하자 후다닥 달려가 현관문을 열어주는 아저씨의 뒷모습, 짜장면 비닐을 뜯는 모습, 나무젓가락이 잘못 잘렸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까지 내가 상상했던 차갑고 잔인한 킬러와는 달랐다. 우습게도 청부살인업자인 아저씨가 가족이었던 그녀석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으로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깔끔하게 음식을 해치웠다. 짜장면을 싹싹 긁어 먹던 돼지같은 내 모습이 살짝 부끄러워지는 순간 아저씨가 피식 웃으며 내게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잘 먹네”
아직 덜 먹은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젓던 그 모습마저도 왜 멋진 걸까.
“아저씨”
“왜, 더 먹을래?”
“그게 아니라..”
“...”
“내일은 뭘 먹을까요?”
“...돼지”
“네?”
“아냐 아무것도”
돼지?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근데 아저씨 그거 남길 거면 나줘요. 아직 배가 좀 고파서.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늘도 읽어줘서 고마워요 암호닉은 제가 받을 수 있을만큼 계속 받을께요!
댓글, 추천, 신알신은 사랑입니다. 감사해요.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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