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게 무슨 그림이었지?"
"그걸 까먹어요? 난 아직도 다 기억하는데."
-아, 안 간다고. 무슨 전시회가. 내가 가시나도 아이고.
-공짜로 보내준다 캐도 난리고, 퍼뜩 갔다 온나!
-안 간다 캤다.
-김태형이 니 자꾸 고집 피우제. 좋은 말로 할 때 갔다 온나.
그게 벌써 7년 전이죠? 그 때가 겨울이었으니까.. 제가 이제 막 스물한 살이 됐을 때. 어, 맞네. 7년 전. 우리 엄마가 전시회 티켓을 친구한테 하나 받아왔는데 그거를 나한테 주면서 그러는 거예요. 갔다 오라고. 내가 하도 망나니처럼 사니까 그랬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아, 형한테는 당연히 교양 있어 보이려고 그림 보러 다니는 게 취미라고 했죠. 꼬시려면 뭔 말을 못 해. 평생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들키네. 어쨌든. 형도 알죠? 내가 지금도 엄마 못 이겨 먹는 거. 그 때도 그랬어요. 결국엔 갔죠. 가서 그림 쭉 둘러보고 있는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냐면, 그 그림 앞에서 만났어요.
<햇빛 속의 포플러>. 나는 입구로 들어가고 형은 출구 쪽으로 들어왔었잖아요. 먹색 목도리 이렇게 두르고 야구잠바 주머니에 손 딱 꽂고 뚱하니 그림을 보고 있는 게 그냥 자꾸 시선이 갔는데… 형이 그림을 너무 빨리 보고 가는 거야. 그래서 그랬죠. 그림을 그렇게 빨리 보면 어떻게 하냐고. 파란 이파리가 있는 것도 보고 나무 크기 다 다른 것도 보라고…. 그 때는 그냥 붙잡아 놓아야 할 것 같아서 아무 말이나 했던 건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되게 웃기네요. 근데 형도 이상했던 거 알죠? 내가 그 때 말을 잘 했다고? 내가? 아, 어이없는 말을 잘 했다고. 근데 그림 설명은 꽤 괜찮지 않았어요? 아, 뻔뻔한 게 웃겨서 들어준 거라고. 맞아요, 그 때 제가 좀 뻔뻔하긴 했죠. 말도 안 되는 그림 설명 몇 마디 해준 게 다인데 엄청 멋있는 척 하면서.. 내가 형한테 웃는 게 예쁘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아, 안 했어요? 형 그 때 웃는 거 짱이었어요. 그 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컨셉을 잡았었나 봐요. 그래서 헤어질 때도 완전 남자답게 딱. 내가 일주일 후에 다시 여기로 올 테니까 보고 싶으면 오라고. 아, 멋지다. 근데 형은 모르죠? 나 일주일 후에 다시 미술관 가서 그 안에서, 그 그림 앞에서 2시부터 5시까지 기다렸어요. 5시가 폐관 시간이었는데. 근데 형이 끝까지 안 오는 거예요. 기분 어땠냐고요? 아, 당연히 완전 슬펐죠. 슬프단 말론 표현이 안 돼요. 너무 쓸쓸하고 진짜…. 아아, 그치. 이게 하이라이트지. 이제 말하려고 했어요. 하이라이트. 내가 진짜 너무 너무 슬픈 그 마음을 안고 미술관을 딱 나왔는데 형이 모과나무 밑에 서 있었잖아.
그 먹색 목도리, 야구잠바 그대로.
"근데 그 때 왜 안 들어왔던 거예요?"
"그냥. 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어."
"아, 이런. 내가 그 밀당에 낚였구나."
유홍준 교수의 실제 사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