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이 끝나가고 날이 갈수록 나는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하고싶은 건 무엇일까,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0년 후 나는 선생님처럼 번듯한 '직업'이란 걸 가지고 있을까? 하는 고민들은 종국에 나는 왜 꿈이 없을까, 하는 좌절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무작정 선생님이 좋아서 공부를 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 이미 1학년 성적은 말아먹은 상태에서 내가 죽어라 공부를 한다고 해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꿈이 없었기에 목표가 없었고 목표가 없었기에 지치지않고 달리기엔 무리였다. 모두 그만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 공부도, 머리 아픈 고민도, 지긋지긋한 짝사랑도 모두. 내가 아무리 문제집에 파묻혀 살아봤자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데.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저녁을 먹고 차학연은 댄스학원으로 떠났고 나는 버릇처럼 학교에 남아 야자를 하고있었다. 때려치고 싶다면서도 놓지못하고 있는 문제집을 들여다보다 문득 춤추는 게 힘들어 차라리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고싶다며 징징대며 교실을 나서던 차학연의 축 쳐진 어깨가 떠올랐다. 요즘 들어 연습이 빡세졌다며 유난히 힘들어하던 차학연이 안쓰러웠지만 이내 그래도 꿈을 위해 노력하는 녀석이 나는 부러웠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꿈이 없다는 게 이렇게나 힘이 빠지는 일일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틈에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흘렀고 교실에 남아 야자를 하던 아이들도 하나 둘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갔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교실엔 나 혼자 남아있었다. 아직 야자 시간은 남아있었고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도, 문제를 붙잡고 풀고싶지도 않았지만 어느샌가부터 문제를 하나도 풀지않고 집으로 돌아가기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만 느껴져서 애써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한 글자라도 더 읽어보려 애를 썼다.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아 문제집 끄트머리엔 의미없는 낙서들만 늘어가고 머리를 퍽퍽 때려가며 집나간 정신줄을 잡으려 기를 쓰던 그 때, 조심스레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니 조금 열려진 문 틈 사이로 선생님이 빼꼼 고개를 내미셨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있는 내게 입모양으로 '안녕'하고 인사를 한 선생님은 교실을 둘러보더니 이내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교실에 불켜져있길래 어떤 예쁜 놈들이 이 시간까지 공부하고 있나 와봤더니 역시 우리 예쁜 택운이밖에 없네. 공부안하고 다 어디로 간거야, 이놈들은." 투털거리시던 선생님은 곧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우리 택운이 공부잘하고 있나볼까?"하고 문제집 쪽으로 고개를 숙이시기에 슬쩍 두 손으로 문제집 끄트머리에 해놓은 낙서를 가리니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너도 공부가 잘 안됐구나?"하고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여트리셨다. "왜? 집중이 잘 안돼?" "아.... 그냥 뭐...." "집중이 잘 안되는가 보네. 음, 고민이 있는건가?" 왠지 모르게 간파당한 기분에 샤프를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회피하자 선생님은 무슨 고민이길래 그러냐며 나를 계속해서 추궁했다. "그냥... 앞으로 제가 뭘 해야될 지 모르겠어서요... 하고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고..." "응, 그랬구나. 그래서 머리가 복잡해?" "음.... 네. 확실한 목표가 없으니까 공부가 하기싫어지고 솔직히 2학년 1학기까지 성적이 별로였는데 이제와서 한다고 달라질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래. 이 시기, 아니 고등학생때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을때야. 선생님도 딱 너 나이때에는 꿈이 없었어. 원래는 가수가 하고싶었는데 아버지 반대가 너무 심해서 강제로 포기한 상태였거든." 선생님은 턱을 괴고 10년 전의 자신을 떠올리듯 허공을 바라보고 계셨다. "우리 집이 아버지는 학원을 하시고 어머니랑 할아버지는 선생님이셨거든. 교육자 집안이여서 가수는 딴따라라고 칭하며 반대가 심하셨고 어릴때부터 할아버지가 내 직업을 잠정적으로 교사로 정해놓으셔서 그게 너무 싫었어. 난 가수가 되고싶은데 교사를 하라니깐. 밴드부 활동도 아버지가 너무 완강하게 못하게 하니까 갈수록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거부감은 커져버려서 매일이 반항의 연속이였어. 그 때 내가 생각했을 때 최고의 반항은 공부를 안하는 거 였기때문에 야자째고 학원 땡땡이치고 처음으로 시험보면서 답을 한 번호로 찍어보고. 내 인생 통틀어서 절정의 반항기였지." "...근데 어떻게 선생님이 되신 거예요?" 내 물음에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본 채 웃으시며, "그 때, 선생님을 좋아했었거든." 라고 대답하셨다. 선생님은 그 당시에 부모님에 대한 반항을 온몸으로 표출하던 자신을 붙잡아주려 담임 선생님이 매일같이 자습시간에 자신과 상담을 많이 해주셨는데 선생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공감해주시고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주신 게 위로가 되면서 점점 선생님을 짝사랑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무의미했던 반항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가수가 아닌 그렇게 하기싫어했던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같은 과목의 선생이 되고싶었지만 담임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셨고 자신은 이과였기 때문에 국어보단 더 잘하고 좋아하는 수학 선생님이 된거라고 하셨다. 다른 아이들은 모를 10년 전 내 나이의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니 선생님과 나 사이가 조금 더 특별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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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만이야! 늦어서 미안ㅠㅠ 풋사랑을 일찍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학기가 시작되니 여유가 없었고 방학이 되니 또 이전에 써놓았던 것들이 전부 날아가서 이제서야 왔어. 많이 늦어서 미안하고 최대한 빨리 다음 편 써올게! 혹여나 기다리고 있었다면 많이 미안해...8ㅅ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