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콩조각
"아, 정말? 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싸가지였구나? 재수없어."
"하.. 하하.."
내가 여자애들이랑 잘 어울릴 수가 없는 이유가 이거다. 툭하면 까고, 놀린다. 게다가 나는 모르는 애인데도 이렇게 까대는 것을 보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애들한테도 이렇게 떠벌리고 다니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결국 내 귀가 못 버텨서 잠시만, 이러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역시 내 옆자리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는 정국이 있었다. 세상과 단절이라도 할 셈인지 이어폰을 끼고 공부에 집중하는 전정국을 건들일 수는 없어서 다른 반에 있는 친구 좀 만나러 갈까, 하고 자리에 일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정국이가 내 팔목을 잡고는 이어폰을 빼고 날 올려다보며 말한다.
"어디가?"
"어, 옆반에 좀.."
"왜 가는데?"
아니, 얘가 왜 그러는거지. 눈빛이 뭔가 무서워서 일단 답은 해야겠다 싶어 그냥 얼버무리기로 했다.
"심심하니까 놀러가러."
"뭐야. 그럼 나랑 놀면 되잖아."
"아니, 넌 아까까지 공부하고 있었으면서 그런 말이 잘도 나온다?"
"미안, 미안. 나랑 놀아줘. ##이름. 응? 나도 공부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고."
그 말에 하는 수 없이 다시 내 자리에 앉자 전정국이 흐뭇하게 웃으며 내 볼을 꼬집는다. 진짜 무슨 연인 다루듯이 만지길래 깜짝 놀라서 바로 손을 내쳤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난 순간 헉, 했다. 내가 지금 얘 손 친 거 맞지? 진심으로? 떨어져나간 자신의 손을 보며 멍하니 있는 정국이를 발견하고 서둘러 정국이의 손을 잡았다. 난 나 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정국아."
"...아니야. 괜찮아. 하아. 그것보다 놀랐잖아. 내가 너한테 뭐 나쁜 짓 한건가-."
"절대, 절대 아냐! 절대로!"
"푸흐흑. 알겠어. 알겠다고."
진심으로 웃는 정국이를 보고 한시름 놓았다. 내 하나 뿐인 절친을 이렇게 잃는가 싶어서 한 순간에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르겠다. 정국이 말고도 친구는 여럿 있지만 이 정도로 친한 친구는 없다. 특히 남자 중에서는. 이 학교 학생 중에 우리 엄마를 본 적이 있는 애는 전정국 뿐이니까 말 다했다. 귀엽게 웃는 정국을 보며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데 우리 자리 쪽으로 괴상한 휘파람 소리를 불면서 다가오는 남자 무리에 바로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뭐냐, 너네~ 사겨? 진짜?"
"오올~ 우리 반 모범생 전정국 아니야? 이번에도 전교 탑 노리냐? 여친도 이쁜 새끼가 공부도 잘하니. 이거야 원."
여친이라니. 지금 그거 나 말하는 거야?! 정확히 날 흘깃거리며 말했기 때문에 난 어이가 없어서 어버버거렸다. 저 자식, 이름이 윤태훈이었나. 내가 이 동네 이사 오고 나서 제일 처음 들은 이름이 김태훈이다. 최저라고. 여학생들을 몰캠했던 걸 들켜서 학폭위까지 열리고 경찰서까지 갈 뻔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쁜 새끼라니. 좀 마음에 드는데? 아니, 이게 아니고오!!
"야, 너네 뭐야? 우리 사귀는 거 아니거든?"
"헐. 아까 내가 본 건 헛것이었나? 아주 둘이 찰싹 달라붙어서 서로 걱정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라면서, 아주 대놓고 비웃는 김태훈 무리를 정말 얼척이 없단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조용한 전정국이 떠올라 옆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타오르는 눈동자에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가 왜 전정국한테 이런 느낌을 받는거지. 의문이 드는 동시에 말을 전혀 걸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아는 전정국이 맞는데 안경 너머의 눈빛은 내가 알던 눈빛이 아니다. 살의가 담긴 눈빛, 그건 분명 전정국의 눈빛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 정국이의 눈빛을 발견했는지 김태훈이 두꺼운 입을 찡그리며 가소롭다는 듯이 정국이를 내려다보았다.
"뭘 꼴아, 이 새끼가."
"그냥. 입술이 참 더럽게 두껍구나, 싶어서."
"...시발, 뭐?!"
저기, 정국아? 그렇게 상큼하게 웃으면서 말하면 나까지 무서워지잖아! 불안감에 벌벌 떨고 있는데 어느새 우리 주위로 애들이 모이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야, 쟤네 뭐야? 싸우는 거야?"
"저거 김태훈 아니야? 헐, 설마 전정국이랑? 미친 거 아니야?"
"백퍼 전정국이 지는 게임이네. 공부 잘하는 샌님이 싸움질을 어떻게 하겠냐? 그냥 내비 둬."
동물원 속의 동물들을 구경하는 것 같은 애들의 말투에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남자였다면, 힘이 세고 키가 큰 남자였다면 이런 자식들 바로 해치웠을텐데. 정국이한테 뭘 바라는 건 아니다. 오래 지내왔던 만큼 전정국에게는 힘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더 험악해져서 김태훈이 비아냥 대며 이번에는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야, ##성이름. 넌 얼굴은 이쁘장하게 생긴 게 왜 이런 애랑 놀고 있냐? 친구 없어?"
"내가 누구랑 다니든 그건 내 마음이고. 괜히 시비 털지 말고 꺼져. 애들이 보는 거 안 보여?"
"허허. 내가 왜 애들 눈치를 봐야하는 건데?"
"너 이번에도 걸리면 강전은 기본인 거.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닐텐데."
"...야, 전정국.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아, 전정국 넌 제발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김태훈이 여자는 괴롭혀도 안 때린다는 걸 이미 소식들어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이 망할 전정국 새끼가 일을 더 벌릴려고 하고 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난 몰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걸로 벌청소 확정이다. 당당한 녀석의 태도로 봐서는 내 뒤에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런 식인 것 같다.
"야, 정국아. 너 의외로 깡은 쎄다. 어? 내가 몇 명 학교 못 나오게 한 거 모르지는 않잖아?"
"모르지는 않지. 하지만 내가 그 중 한 명이 될 일은 일단 없어."
"허? 그건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
"야, 전정구우욱!!!! 시발, 너 진짜! 야, 비켜. 김태훈!"
우리반 문을 벌컥 열고 김태훈의 말을 끊고 심지어 김태훈을 밀쳐버린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 것인가. 명찰을 보니 3학년인 것 같은데 전정국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멘붕에 빠져간다. 정국이가 친한 사람들 중에 선배가 있던가? 같은 스터디라면 몰라도 이런 썡날라리 같이 생긴 선배는 모른다. 여자애들이 비명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난리법석을 떠는 것 보니 뭔가 인기는 많은 것 같은데, 누구지? 왜 전정국이랑 아는 사이인데?! 그런데 난 엎어져서 당황한 김태훈이 벌떡 일어나서 외치는 소리에 아예 의자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야, 이 싸이코 새끼야! 동생을 이렇게 밀치냐!?"
"동새애애애앵?!?!?!?!"
이건 나만의 외침이 아니었다. 전정국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의 외침이었다. 딱봐도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한 성깔하게 생긴 김태훈에 비해서는 이 쪽, 김태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신 분은 좋은 쪽으로 한 성깔하게 생겼달까. 베이스로 귀엽고 옵션으로 사납게 생겼다. 여자들이 많이 좋아할만한 얼굴인데 이건, 전혀 이 김태훈이랑 형 동생 하는 사이인 줄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아니다. 잠시만. 설마 친동생?!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김태훈을 가르키며 김태형이란 선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치, 친동생?"
"어. 그런데 넌 누구야?"
흐에에엑,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내 베프야. 태형이 형."
"아, 그래?"
"야, 전정국! 넌 왜 네 마음대로 얘기를 진행시키고 있어?! 선배는 누구세요? 정국이랑 아는 사이에요?"
"...호오, 정국이? 음, 그렇네. 아는 사이인데. 왜, 불만?"
"아니, 불만이라기 보다... 이 새끼.. 김태훈이랑 형제라고 해서.."
"어. 그건 맞는데 나 얘랑 따로 살아. 가족 아니야. 이딴 쓰레기 새끼."
쓰레기 새끼라니. 뭔가 김태훈 상처 받은 것 같은데.. 김태형 선배의 차가운 말에 반 전체도 술렁이고 내 마음도 같이 술렁거렸다. 그 자신감이 넘치던 김태훈은 어디갔는지 인상만 팍 찌푸리고 애들을 데리고 반을 나갔다. 상황 정리 해준 건 정말 감사한데 뭔가 더 심한 폭풍이 찾아 온 기분이다. 김태형 선배가 무서운 표정을 거두고 돌변해서 전정국에게 달려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 새끼야! 왜 말 안 했어? 우리 학교 왔다고! 1년 동안이나 몰랐다는 게 말이 돼? 완전 섭섭한 거 알아?"
"하는 수 없잖아. 나도 형이 여기 다니는 줄 몰랐으니까.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건데?"
"2학년 복도 지나가는 길에 너네 싸우는 중이라고 듣고 튀어왔다. 어디서 익숙한 이름이 두 개가 들리더니만 그 하나가 너더라고? 싸울거면 이 형을 부르지 그랬어. 초스피드로 달려갔을텐데."
"자기 동생인데도 참 말이.. 그것보다 나가서 얘기하자. 애들 눈이 너무 많아."
"그래,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우리 싸랑스러운 쩡국이랑 단둘이 있고~ 얼마나 좋아, 엉?"
"아, ##이름. 나 잠시만 갔다올게."
"어? 어, 어..."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잘생긴 선배가 와서는 정국이를 김태훈이랑 떨어트리고 심지어 아는 사이라고 그러고 지금은 '싸랑스러운 쩡국이' 라고 부르며 내 쪽을 주시한 채 과시하고 있다. 게다가 정국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반을 나가면서 슬쩍 내 쪽을 쳐다보고 오만하게 내 승리다, 라고 말하는 듯 한 미소는 날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