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를 부탁해
05
방 안은 조용했다. 이따금 창 밖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가 소음의 전부였다. 숨소리조차 신경쓰였을 만큼이나 그렇게 방 안이 잠잠했다. 그 침묵 속에서 가장 시끄러운 것이 내 심장의 박동이었다. 심장에서 시작해 온몸을 타고 쿵쿵 울려대는 그 박동은 아무리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아도 내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두운 방 안, 스탠드의 불빛에 의존한 시야에 아저씨가 담겼다. 아저씨는 내 침대 앞에 의자를 하나 끌어다 놓고 침대에 누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조용한 시선이 부끄러워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잠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아저씨는 그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나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나는 내 불면증의 원인에 대해 아저씨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렇다고 당장 사실대로 털어놓을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 후회도 결국 소용없는 것이었다. 스탠드의 은은한 불빛과 꼭 같은 색으로 보이는 아저씨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던 나는 혹시 아저씨가 눈치챌까 작게 한숨을 삼키고 눈을 감아 버렸다. 새삼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그 얼굴이 괜히 원망스러워졌다. 자주 나를 향하고 있는 차분한 색의 눈동자도, 선명하게 남자다운 선을 그리는 콧대도, 간간이 휘어 올라 부드러운 곡선을 만드는 입술도. 뜯어볼수록 더 정신 없이 뛰어대는 심장 소리가 금방이라도 아저씨의 귓가까지 닿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내게 향하는 아저씨의 시선 아래에서 나는 쉽게 뒤척이지도 못한 채 가만히 누워 눈만 감았다 떴다 했다. 아저씨와 함께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잠이란 잠은 다 달아나 버린 탓이었다. 애꿎은 이불만 괜스레 손에 꼭 쥔 채 나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밤에 천천히 숫자를 세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기대가 무색해질 만큼이나 내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수면제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금 당장 잠들 수만 있다면 다시 악몽이 찾아오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괜찮습니다."
"……"
"금방 잠 드실 겁니다."
그렇게나 복잡했던 머릿속에 던져진 아저씨의 목소리는 단번에 모든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 힘차게 팔랑거리던 생각들이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채 그저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자연스레 떠지려는 눈에 힘을 주어 꼭 감았다. 참지 못하고 뜬 눈에 다시 아저씨가 담긴다면 더 많은 생각들이 여지없이 머릿속을 날아오를 것이었다. 다행히 아직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 아저씨의 낮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차분함으로 천천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시끄럽게 느껴질 만큼이나 빠르게 뛰어대던 심장의 박동도 점차 제 속도를 찾아 가고 있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시야가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다. 감은 눈 밖으로 은은하게 느껴지던 스탠드의 불빛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제는 눈을 뜨더라도 아저씨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방 안에서 눈을 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둠과 함께 찾아온 기억은 그렇게나 단숨에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숨 막히는 어둠의 한가운데 떨어진 기분, 발버둥 쳐도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 그 지독한 기분은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꼭 지긋지긋한 악몽으로 끝이 나곤 했다. 이대로 잠이 든다면 다시 악몽 속을 헤매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가씨가 걱정하시는 나쁜 일,"
"……"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하겠습니다."
내 불안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담담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가 한없이 믿음직스러워 나는 괜히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간단히 나를 끌어올린 아저씨는 이내 손을 뻗어 이불 위로 내 손을 덮어 왔다.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편안한 감촉이 다른 날과 다르게 나를 안정시켰다. 조금이라도 아저씨와 몸이 닿을 때면 꼭 심장이 쿵쿵대고 얼굴에 열이 오르곤 했었는데, 이렇게나 차분해지는 마음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눈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음에도 눈꺼풀이 묵묵히 내려앉아 있었다. 힘껏 이불을 쥐고 있던 손에서도 조금씩 힘이 풀렸다.
"걱정 말고 편히 주무세요, 아가씨."
겁 많은 아이를 달래듯 찬찬히 나를 안심시키는 그 조용한 음성과 함께, 나는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평소의 아침보다 창 밖이 훨씬 밝은 것이 어색해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시간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벌써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어쩐지 가뿐하게 눈이 떠진 것부터가 이상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던 아침 운동을 빼먹은 것은 물론이고 오후에 있는 전공 수업에도 지각할 위기였다. 매일 깨워 주던 아저씨의 목소리도 없이 절로 눈이 떠진 것을 보니 충분히 긴 시간을 잔 모양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던 덕에 악몽도 꾸지 않았고 몸도 가뿐했지만 그런 것에 기뻐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저씨는 왜 날 안 깨운 거지. 그런 의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나는 바쁘게 등교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다급하게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오는 동안에도,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내내 정신이 없었다. 점점 촉박해지는 시간에 결국 화장도 건너뛰고 대충 선크림과 틴트로 만족해야 했다. 얼추 준비를 마친 내가 가방까지 챙겨 들고 아저씨를 부르러 거실로 나갔을 때, 아저씨는 벌써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당연히 아저씨의 방으로 향하려던 나는 그 모습에 놀라 덜컥 멈춰서 버렸다.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하려던 말은 전부 잊어 버리고 심장만 바삐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잔잔했던 기억이 소란스럽게 쿵쿵대는 소리와 함께 새로 세팅되는 순간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네."
가벼운 미소와 함께 건네는 그 인사는 평소와 같았다. 다만 평소와 같지 못한 내 마음이 유난이었기에, 나는 얼마간 입술만 달싹거리다 겨우 한 글자뿐인 대답을 내놓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저씨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마음을 들킬까 염려하는 것은 나 혼자였다. 내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에 아저씨는 태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벌써 지각이 확실해진 시간임에도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에 궁금증이 일었다.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을 입 밖으로 꺼내놓을 정신도 없이, 여전히 멍한 상태였던 나는 걸음을 옮기는 아저씨를 따라 집을 나섰다.
대문을 지난 나는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그 자리에 멈칫 멈춰섰다.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처음 보는 승용차였다. 삐빅, 소리와 함께 승용차의 눈이 번쩍였다. 깔끔하고 매끄러운 승용차의 검은색이 어쩐지 아저씨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아저씨가 내 앞으로 와 조수석의 문을 열 때까지도,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 앞의 승용차와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타세요, 아가씨."
"네?"
"늦었습니다."
나를 쳐다보며 재촉하는 말에 그제야 나는 차에 올랐다. 내가 자리에 앉자 조수석의 문을 닫은 아저씨가 운전석으로 와 앉았다. 벌써 에어컨을 한 번 틀어 놓았었는지 볕이 잘 드는 자리였음에도 차 안이 시원했다. 내가 늦을까봐 일부러 차를 가져와 줬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차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이렇게 둘이서 차 안에 앉아 있는 것 또한 새로운 설렘이었다. 그렇게 설렘이 가득한 표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열심히 고개를 움직이며 차 안을 구경했다.
아저씨답게 깔끔한 내부였다. 승용차 특유의 답답한 냄새 대신 시원한 향이 느껴졌다. 과하지 않은 그 향 역시 아저씨에게서 나는 향과 비슷했다. 그 안에 앉아 있으니 왠지 아저씨와 가까워 진 듯해 공연히 마음이 설레었다. 잘 정리된 차 안에는 그 흔한 담배꽁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부러 청소를 했다는 느낌보다는 원래 차를 깨끗하게 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 자연스러운 깔끔함이었다. 내가 이리저리 차 안을 살펴보는 동안 아저씨는 별 다른 말 없이 차 키를 꽂아 넣고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이제 출발하려나, 생각하던 찰나에 마침 고개를 돌린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내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듯 했다. 나도 아저씨를 따라 뒤를 쳐다보려는데, 아저씨가 대뜸 상체를 내 쪽으로 숙여 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나는 얼결에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어쩐지 숨조차 참게 되는 상황이었다. 조심스레 뜬 눈 앞에는 아저씨의 가슴께가 보일 뿐이었다. 조용히 눈동자만 위로 올리자 아저씨가 내 뒤쪽으로 팔을 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다시 눈을 꼭 감았다. 이런 상황에 뜬금없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키스신을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감은 눈 너머로 아저씨가 제자리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지자 나도 천천히 눈을 떴다.
철컥, 소리와 함께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머리 뒤쪽부터 상반신의 아래까지 이어진 안전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행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것을 기대하기라도 한 것처럼 들떴던 마음이 내려앉자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덕분에 덥지도 않은 차 안의 공기를 탓하며 공연히 손부채질을 해야 했다. 아저씨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매고 차를 출발시켰다. 또다시 나에게만 설레는 시간이었다. 말없이 아저씨의 옆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는 그냥 한숨처럼 웃어 버렸다. 어색하기만 했던 짝사랑의 감정도 이제는 익숙해질 때가 된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창 밖을 쳐다보다가, 문득 조용한 차 안이 서먹하게 느껴졌다. 그 분위기가 싫어 늘 하던 것처럼 자연스레 아저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적을 깨기 위해서였다.
"아저씨. 왜 나 안 깨웠어요?"
"……"
"늦잠 자서 아침 운동도 못 가고… "
"너무 곤히 주무셔서, 못 깨웠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단조로웠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줄곧 궁금해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기에는 다소 허무할 만큼이나 평범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한 마디에도 나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을 떠올렸다. 잠든 나를 지켜보았을 아저씨의 모습이나, 내 침대 앞에서 나를 깨우지 못하고 망설였을 모습, 먼저 나갈 준비를 다 마쳤음에도 내가 깨어나지 않아 그저 거실에 앉아 묵묵히 나를 기다렸을 모습. 내가 지켜보지 못하는 아저씨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대화가 끊기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제는 조용함마저 설레는 시간이었다. 이대로 계속 차에 타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말없이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운전하는 아저씨는 또 처음이었다. 학교와 집을 오갈 때에는 항상 버스를 탔고, 어쩌다 좀 더 멀리 나가게 되는 날에는 지하철을 탔기 때문에 아저씨가 운전하는 차에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래 제가 쓰던 차였으니 운전에 익숙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아저씨가 능숙하게 운전을 하는 모습이 어쩐지 신기하게 보였다. 처음 보는 아저씨의 모습에 매번 가슴이 뛰어대는 것은 좀처럼 무뎌지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쪽저쪽 핸들을 움직이는 모습이나 사이드미러를 살피는 모습, 신호등의 불빛에 맞추어 브레이크를 밟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못나게 보이는 부분이 없었다. 적어도 내 눈에 아저씨는 무척이나 멋있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항상 그랬다. 함께하는 매일이, 설레지 않는 순간이 하나 없었다. 내게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에 와서 박혔다. 그 모든 것에 이어지는 의미 부여와 기대, 또 그것들을 따라오는 실망이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아저씨와 함께하는 시간은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누군가를 혼자서 이렇게나 좋아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한동안 아저씨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차는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춰서고, 아저씨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나는 아저씨를 따라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그저 아저씨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겼다. 차를 돌아 내가 앉아 있는 조수석 창문 앞까지 온 아저씨가 나 대신 문을 열었다. 그제야 나는 허둥지둥 안전벨트를 풀었다. 아저씨는 내가 편하게 내릴 수 있도록 문 앞에서 조금 물러났다. 나는 가방을 챙겨 들고 조심스레 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다음 순간에는 익숙한 목소리로 건네지는 인사가 있었다.
"아가씨."
"네?"
"잘 다녀오세요."
"…네!"
그 평범한 인사말이 또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가끔 마주하게 되는 단정한 웃음을 띤 얼굴에 어쩐지 아주 편안하고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다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힘차게 발을 옮겼다. 벌써 얼굴 가득 번진 웃음은 강의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내내 가실 줄을 몰랐다.
***
"오늘 제가 세미나가 있어서, 수업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짧은 설명으로 양해를 구한 교수님이 책을 덮었다. 강의실을 나서는 교수님의 걸음을 눈으로 쫓다가 나도 얼른 책을 덮고 가방을 들었다.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여가 시간이 주어졌을 때의 행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수님이 미리 안내하지 않았던 덕에 강의실 안의 분위기는 한껏 들썩이고 있었다. 그 흥겨운 풍경을 잠깐 지켜보다가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수업도 일찍 끝났는데 이제부터 뭘 하지. 잔뜩 들뜨는 마음에 말릴 새도 없이 다시 아저씨 생각이 끼어들었다. 이제부터 뭘 하지, 라는 고민은 아저씨랑 뭘 할까, 하는 기대로 쉽게도 탈바꿈했다.
두 시간이나 일찍 끝난 수업이었다. 예정된 수업의 반도 채우지 못한 시간이었다. 아저씨의 차까지 타고 와서 지각할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고 들은 수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짜증이 날 법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짜증은 커녕 머릿속에는 벌써 기대와 행복감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두 시간의 여유라면 아저씨가 차를 가져온 것을 핑계로 제법 먼 곳까지의 드라이브를 제안하거나, 가까운 백화점으로 쇼핑을 간다거나, 아니면 집으로 곧장 돌아가 어제처럼 영화를 한 편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한 상상은 꼭 아저씨와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 벌써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여주야!"
"응?"
강의실 앞문 쪽으로 향하던 혜선이가 덥석 내 팔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건물 밖까지 함께 나가기 위해 옆자리의 민주가 가방을 챙기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꽤나 다급해 보이는 혜선이의 표정에 나는 절로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혜선이가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주 너, 이제 길훈 선배랑 안 만나는 거지?"
"…아니, 그 선배랑은 원래 만난 적도 없다니까!"
"그래? 아무튼 고마워!"
기분 좋게 아저씨와의 데이트를 상상하고 있던 때에 또 한 번 갑작스럽게 꺼내어진 선배의 이름이 달가울 리 만무했다. 느닷없는 질문에 잠깐 멍해졌던 나는 이번에도 열심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해야 했다. 갑자기 또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아저씨를 남자친구라 소개했던 그날 이후에 선배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러 선배와 마주쳤던 시간을 피해 다녔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뒤로는 정말 마주치게 되는 일이 적었다. 가끔 먼저 선배를 발견하게 되는 날이면 선배가 나를 보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해 버리곤 했다. 그렇기에 내게는 혜선이의 질문이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내 얼떨떨한 기분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혜선이는 밝아진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선배와 만나지 않는다는 대답이 고마워해야 할 일인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멍하니 앞문을 쳐다보며 서 있는 동안에 민주가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민주는 벌써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내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민주는 먼저 입을 떼며 걸음을 옮겼다.
"혜선이, 오늘 고백한대."
"누구한테? 갑자기 무슨 고백?"
"누구긴, 길훈 선배한테!"
"뭐?"
민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내게는 정말 뜻밖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더 캐묻지 않아도 민주에게서 시시콜콜한 설명이 이어졌다. 신입생 때부터 좋아했다더라. 벌써 혜선이랑 친한 동기들은 다 알고 있다더라. 저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는데, 알고 나니까 나와 선배를 몰아가려고 놀렸던 게 괜히 미안해지더라.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 민주는 내게 그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내게는 자꾸 피하게 되는 불편한 선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짝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내가 아저씨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선배에게 느끼고 있는 사람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나 역시 혜선이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혜선이가 부럽기도 했다. 고백. 생각으로는 참 간단한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 놓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럴 용기가 없어 그저 좋아하는 마음을 누르고만 있는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내게는 혜선이가 부럽기도, 또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1층까지 다다라 민주가 이야기를 대강 마무리 지을 때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줄곧 고백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언젠가 나도 아저씨에게 고백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런 장면을 상상하자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던 혜선이의 들뜬 표정이 내게로 옮아오는 것 같았다.
일단은 지금 당장의 데이트를 상상하면서,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민주를 배웅했다. 건물을 나서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주차되어 있는 아저씨의 차가 보였다. 나는 얼른 발을 옮겼다. 그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것이 무색하게, 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근처를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마침내 건물과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을 때에는,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큰 소리로 아저씨를 부르려다가 멈칫, 조용히 손을 내렸다. 아저씨 옆에 앉은 처음 보는 남자 때문이었다.
남자는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벤치에 등을 기대기도, 몸을 숙여 팔꿈치를 다리에 대기도 하면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줄곧 남자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와 대화를 할 때에도 아저씨는 항상 그랬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것은 아마 아저씨의 습관인 것 같았다. 언제나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그 올곧은 시선이 단순히 아저씨의 습관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아저씨의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아저씨가 그렇게나 밝게 웃고 있는 것에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말을 마쳤는지 아저씨가 짧게 대답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문득 이쪽을 쳐다본 아저씨와 눈이 마주친 것은 한순간이었다. 꼭 아저씨를 훔쳐보고 있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 당황한 나는 아저씨의 눈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저씨가 대뜸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걸어왔다. 같이 있던 남자에게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자가 얼굴 가득 물음표를 달고 아저씨를 따라 몇 걸음 걸어오고 있었다. 아저씨를 부르며 따라오는 남자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남자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나와 아저씨의 거리는 꽤 가까워져 있었다.
"잘 가, 형!"
"어, 들어가라."
남자는 아저씨를 형이라 부르며 인사했다. 나를 보며 걸어오고 있던 아저씨는 잠깐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인사했다. 그 다음 순간에 아저씨의 시선은 곧바로 내게 돌아왔다. 내 앞에 선 아저씨가 조금은 평소와 다르게 보이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벌써 나오셨습니까, 아가씨."
"…네. 수업이 좀 일찍 끝나서요."
"그럼,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아저씨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을 만큼이나, 아저씨는 편안하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 적 없던 표정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니 마음이 더 복잡했다. 나와 같이 있던 평소와는 달리 긴장이 풀어진 듯한 편한 얼굴의 아저씨가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지금 아저씨의 표정은 아마 그 남자가 아저씨의 긴장을 풀어 놓았기 때문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괜스레 속이 상했다. 꼭 그 남자에게 질투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얼마나 더 지나야 아저씨와 그만큼 친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아저씨가 내게도 말을 놓고, 또 얼마의 시간이 더 흘러야 그렇게 편한 얼굴로 웃어줄까.
아저씨와의 데이트를 떠올리며 잔뜩 부풀었던 마음에 금세 바람이 빠져나갔다. 이대로라면 데이트는 고사하고 영영 친해지기도 힘들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나한테도 이제 말 놓으면 안 돼요? 나랑은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나한테도, 그렇게 웃어 주면 안 돼요? 선을 넘지 않기로 다짐했던 마음이 또 그렇게 쉽게도 흔들렸다. 그래도 아직은 선 안에 서 있는 것이라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조금 더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데, 그 정도도 힘든 걸까.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냐는 아저씨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머뭇머뭇 망설이며 서 있었다. 내게는 마음을 고백하는 일 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대답 없는 나를 기다리던 아저씨가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아가씨."
"아저씨, 나한테도 말 놓으면 안 돼요?"
"네?"
"아까 그, 그 분이랑은 웃으면서 얘기도 하고…"
그 다정한 목소리에 생각만 하던 이야기가 기어코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내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아저씨는 내가 던진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한 번 되물었다가, 내 설명이 장황하게 길어지자 그저 웃으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막상 말을 한 번 꺼내놓자 민망함에 이야기가 횡설수설 자꾸 길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더 부끄러워졌다. 그 사람도 동생이고, 나도 따지고 보면 한참 동생인데. 내가 놓으라고 부탁해도 나한테는 꼭 존대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말까지 미처 꺼내놓기도 전에, 얼굴에 오르는 열이 느껴져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다시 말을 정리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니까, 나랑도 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거예요?"
"……"
한참을 언저리에서 맴돌던 이야기가 드디어 본론에 당도했다. 아저씨는 답이 없었다. 그 표정이 전과 같이 다소 딱딱하게 돌아와 있었다. 오늘의 풀어진 얼굴을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이나 익숙한 표정이었다. 아저씨는 말없이 차 문을 열었다. 대답 대신 그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꽤 오랜 시간을 마주해 왔던 그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오늘따라 서럽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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