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좋다."
"뭐가?"
"그냥"
언뜻보자면, 나는 멍청하고 답답하다. 원래 그런건지, 아니면 특정 대상에게만 작용하는 그 무엇이 있는건지 알 수 는 없지만 나는 그런 나에 대해 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 김성규는 이런 내 모습을 어지간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성규가 좋아하고 선호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의향이 있으며 그것을 티 안나게, 원래 나 역시 그런 성격임을 어필할 자신도 있다. 김성규에게 달라붙는 저 좆같은 것들을 순하고 밝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쫒아내는 스킬도 있고, 김성규가 힘들땐 언제나 내가 있어 줄 수 도 있고, 콩 한쪽이라도 김성규와 나눠 먹을 자신이 있다. 아,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약 7년간의 짝사랑을 통해 터득한 그 모든 것이다.
언제였더라... 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김성규를 만난 그 날을 말해보아라 하면 나는 바로 '7년전 4월 15일, 벚꽃의 꽃몽오리가 곱게 자리잡은 나무위에서 장난스럽게 기특대며 나를 내려다 보던 하얗고, 말랑해보이던 얼굴이 아직도 눈 앞에 선명해.' 하고 말할 수 있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학교 뒤 소각장에 갔던 그 날, 소각장과 안 어울리게 고운 벚꽃나무가 줄서있던 소각장 앞에서. 그 당시 열다섯살이 무슨 사랑을 알겠냐만은 나는 분명 그때 사랑에 빠진 것 이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귀가 화끈거리며 눈이 커지는 그 무엇인가는 없었지만 나는 분명 그때 사랑에 빠졌다. 멍하게 홀린듯이 장난스러운 얼굴을 올려다 보던 나를 내려다보며 김성규는 키득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병신. 뭘봐"
아, 존나 매력있다.
첫만남부터 화끈하게 한마디 날려준 김성규는 그때 내 마음 속에 단단히 자리잡았고, 10분뒤 알게 된 사실은 김성규는 전학왔으며, 학교를 빠르게 들어온 터라 사실 우리보다 나이는 한살 어렸고, 죽여주게 공부를 잘한다는 점 이었다. 깔끔하게 다려진 순수해보이는 교복 끝을 연신 만지며 귀를 붉히고 민망하지 않은 척 큰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은 내눈에는 퍽이나 귀여웠다. 어떤 계집아이들보다도 훨씬 더. 하도 매만져 구깃해진 교복 끝에 매달린 분홍빛 손가락 역시도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얌전하게 교복이 걸쳐져 있는 어깨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꽃잎이 아까 봤던 것이 내가 만들어낸 환상도 아닌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진짜 눈 시리게 예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난 김성규의 짝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안타깝게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김성규는 1분단 창가자리 맨끝인 내 시야에 아주 잘보이는 대각선 앞이었다. 동글동글한 갈색 뒷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느라 수업에 집중하지도 못했고, 김성규가 턱을 괴고 수업에 집중하며 필기하는 모습을 열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가끔씩 조느라 꾸벅거리는 뒷모습을 혼자 키득거리며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했다.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운 그 무언가가 과연 김성규 외에 존재할까? 만지고 싶고, 다가가고 싶고, 그 마음속에 자리잡고 싶고, 나와 같음을 절실히 느끼고 싶은 그 무언가가 과연 존재할까? 그런면에서 김성규는 내게
유일함이다.
신이 나를 꽤나 아끼는 모양인지 우리는 나름 운명적으로 친해졌다. 김성규가 나와 같은 학원에 들어오게 된 것 이었다. 수학을 좋아하는 내가 처음으로 부모님께 말씀드려 다니게된 수학학원은 김성규와 내가 친해질 수 있게 만든 매개체였다. 그 뒤로 나는 수학을 더 좋아하게 됬다. 우리가 친해지게 된 때가 아마, 1학기 중반 쯤 이었을 거다. 물론 그 전에도 말을 섞긴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친해질 계기가 생긴게 너무 떨려서 내 뒤에 앉은 김성규를 의식하느라 잔뜩 긴장한 등근육을 풀어주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던 밤이었다. 내 등을 콕 찌르며 "샤프심있어?" 하고 물어오던 그 목소리도 귓가에 맴돌고, 샤프심을 건낼때 떨리던 내 손에 스친 그 손가락 감촉도 계속 맴돌고.
여러모로 행복했던 밤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서로의 모든 것 -내가 품고있는 마음을 제외한- 을 알고 지내며 흔들림 없는 우정과 흔들림 없는 내 짝사랑을 등에 업고 걸어왔다. 이렇게 구구절절 김성규와 나의 별 재미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곧 약 20개월동안 보지 못하게 될 김성규의 얼굴을 애도하는 차원에서 되새겨봄과 동시에 20개월동안 절대 너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첫 설레임을 다시 각인시키는 일종의 의식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나 군대 갔다오니까,
제대하면 고백할거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지,
조금만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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