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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났다. 수능, 뭐 대단한건 줄 알았는데 내게는 별거 아니였나 딱히 이렇다할 느낌이 없었다.
그냥 그동안 하고싶었던 보컬 공부나 해야지, 하는 생각만 들 뿐. 나를 늘 옥죄던 작은 족쇄에서 벗어난 기분 정도.
이것저것 따져 집근처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보컬학원이 끝나면 열시 정도 되는데 그 때 즈음에 문을 여는 가게가 없었다.
별수없이 24시간 운영하는 가게를 택해야 하는데 그런 곳이라면 롯데리아와 맥도날드 정도가 다였고, 아쉽게도 그것들은 집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그래서 어쩔수 없지만 페이가 생각보다 적은, 집과 가깝고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을 하게 된 것이다.
기분좋게 한 시작이 아니였던지라 별로 좋다는 느낌은 못 받았는데, 두달이 조금 넘어가는 지금 나는 이 알바에 나름 만족하고있다.
따뜻한 난로 옆에 놓고 자리에 앉아서 손님받고 돈계산만 제대로 하면 끝나기 때문이였다. 게다가 내 타임대는 손님도 별로 없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내 전타임 알바가 조끼를 벗어 건네고 잰걸음으로 편의점을 나섰다.
조끼에 팔을 끼우며 그녀가 편의점 유리문 밖에서 목도리를 고쳐매고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직 겨울이라 날이 어두워서 그런지 그녀는 무서운 듯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 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무서울만도 하겠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여느때처럼 가방속에서 갓 데워 온 베지밀을 꺼냈다.
10시에 학원이 끝나고 편의점에 올 때 집에 잠깐 들리는데, 언젠가부터 그 짬나는 시간에 베지밀을 데워오는 게 습관이 되었다.
아직 뜨끈뜨끈하게 김이 서리는 베지밀을 두 손으로 쥐었다.
따뜻해.
이걸 쥐고 눈을 감으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만큼.
손에 이리저리 굴리던 베지밀을 막 얼굴에 갖다대려는데 편의점 유리문 위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소리를 내었다.
나는 손님을 맞기 위해 베지밀을 카운터 구석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오세요."
![[기성용] 유리병 베지밀 (스토커주의)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d/8/2d81376ed0e5aaf7c359333d86a1a212.png)
훤칠한 키에 검은 겉옷을 걸치고, 호감이 가는 선한 얼굴을 한 남자손님이 들어왔다.
그는 내 인사에 몸을 살짝 숙인 상태에서 눈만 들어 나를 쳐다보더니 살짝, 고개를 꾸벅이곤 빠르게 음료수 코너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음료수라면 금방 고르겠지 싶어 인사할 때 일어난 자세 그대로 서있는데, 그는 내 예상외로 생각이 많았다.
찾는 게 없는건가.
아, 싫은데.
"저...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원체가 붙임성 없는 성격이라 이런 손님이 오면 곤란하다.
먼저 말을 걸어야 하니까... ... .
어쩔 수 없이 말을 걸었는데도 그의 시선은 고집스레 음료수 코너를 향해있었다.
...
... ... .
이 시점에서 내 쪽을 봐줄 법도 한데 그는 뻘쭘하게 말을 건 내가 무안함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 쯤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음료수 코너에 둔 시선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베지밀."
"네?"
"베지밀이 없어요."
"...베지밀이라면 손님 바로 앞에 있는데."
이 손님은 눈이 참 나쁜가보다. 베지밀은 딱 그의 눈높이에 한 줄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초록색의 사각형 팩 베지밀.
저 좀 봐주실래요. 가까스로 그의 시선을 내게로 향하게 한 후 카운터에서 최대한 몸을 빼내 베지밀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저거 말구요."
"네?"
"그 쪽이 매일 가져오는 유리병으로 된 베지밀이요."
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뭐지? 내가 매일 유리병 베지밀을 가져오는 것을 어떻게 알고있지?
당혹감과 왠지모를 두려움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그가 덧붙인 말이 바로잡아주었다.
![[기성용] 유리병 베지밀 (스토커주의)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f/a/8/fa839663e45dc2d4e983bee61cb45b0e.jpg)
"그거 맛있더라구요."
진심으로 즐거운 듯 그의 눈이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선했던 그의 인상이 완전히 웃는 얼굴이 되자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뭐, 단골손님 쯤 되는건가? 그러겠지? 뭔가 괜한 오해를 한 듯 싶어 약간 민망해졌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그 제품이 완전히 떨어져서요."
"...아."
실망한 듯 그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그의 쳐진 눈꼬리를 보는 내 머릿속은 더더욱 복잡해졌다.
아 이건 또 어떡해야하지?
손님이 원하는 물건이 내게 있다. 그런데 그 손님은 내가 그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떡하지. 어떡할까.
...에라, 모르겠다.
"저기요!"
입술을 살짝 내밀고 아쉬운 듯 음료수 코너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가 내 부름에 천천히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완전히 카운터 앞에 선 그가 날 내려다보며 '네?' 하고 물어온다.
"이거라도 드세요."
아까 카운터 구석에 놓아두었던 내 베지밀을 두 손으로 집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하루쯤 안 먹는다고 죽는거 아니니까.
그는 내가 내민 베지밀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픽, 김빠진 웃음을 웃고는 베지밀을 꾹 누르듯 내 가슴쪽으로 밀었다.
"전 괜찮아요."
"아, 저...그래도... ... ."
"다음에 다시오죠, 뭐."
정말 괜찮다는 듯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색하게 아, 저...만 반복하는 나를 앞에 두고 나가려는 듯 옷 매무새를 다듬던 그가 빙글 뒤를 돌았다.
그리곤 아무말 없이 터벅 터벅.
아무도 없는 편의점이 금새 그의 발자국 소리만으로 가득 퍼졌고, 나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 어떡해야하지.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베지밀을 건넬까.
...아닌가 너무 오바하는건가.
이것저것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데 그가 천천히 편의점 유리문 손잡이를 반 쯤 미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인사.
아, 인사. 인사를 해야하는데.
편의점을 나서는 그에게 뒤늦게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하기 위해 막 입을 벙긋 하려던 그 때였다.
그가 반 쯤 밀었던 손잡이를 확 끌어당기더니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함께 찬 겨울바람이 들어와 살짝 내 코끝에 닿았다.
"아, 나 이 말 하려고 왔지."
그가 내게 등을 보인 상태에서 얼굴만 뒤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살짝 가려진 부분 때문에 뭔가 어두워보이는 그의 얼굴이 묘하게 웃고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 표정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내게 하려는 말이 뭘까.
아까의 상황에서 그가 나에게 더 할 말이 남아있는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지만, '딱히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만 들 뿐이였다.
알쏭달쏭해진 내 표정을 살피던 그가 눈을 휘어 아까처럼 선한 웃음을 짓더니, 불만을 말하듯 뾰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베지밀, 다 먹고 빈 병 집에 가져가지말고 옛날처럼 그냥 가로등 밑 쓰레기봉투 옆에다 버려요."
...이건 무슨 소리지...?
뭔가 이상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선해보이기만했던 그의 웃음에, 점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걸로 매일매일 버티는데 그 정도 봉사는 해줘야죠. 아 참, 이거."
그가 그의 두꺼운 겉옷 주머니 깊숙히 넣어두었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빈 베지밀 유리병... ... .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갖 사고회로가 정지한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되서 당신 느낌 안나."
탕! 탁, 탁... ... .
그의 손에서 추락한 베지밀 병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편의점 바닥을 나뒹굴었다.
데굴거리는 빈 병이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웃는 눈으로 열심히 쫓던 그가 경악에 물든 날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성용] 유리병 베지밀 (스토커주의)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b/b/4/bb46c0933877da76b5be280bc2930a79.png)
"지금 나 엄청 무섭죠."
"... ... ."
"더 무서워지기전에 내 말 들어요."
"... ... ."
"좋아하니까 그래요, 내가 그 쪽 좋아해서."
그는 날 좋아한다고 말했고, 여전히 날 보며 웃고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보며 웃어 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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