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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김태형] 갈증 01-05 | 인스티즈









강한 빛일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우리는 이 법칙을 김석진이라는 인간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 지금 저 연단 위에서, 신입생 425명의 대표로 입학 선서를 읊고 있는 멀끔한 남학생 말이다. 먼지 한 올 없이 깔끔한 교복, 훤칠하게 뻗은 키와 당당한 눈빛, 흠결 없는 태도. 태생부터 결핍이라곤 한 점 없는 김석진의 삶은 저 모습으로 설명된다. 남산 아래 부촌에 자리 잡은 커다란 집. 3선 의원을 거쳐 장관직까지 승승장구, 야망의 화신 같은 아버지. 육군참모총장, 여당 대표까지 지낸 외할아버지 밑에서 공주님으로 살아온 어머니. 소위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석진에겐 부족할 것이 없었다. 말끔한 얼굴엔 늘 자신감이 묻어났고, 행동 하나하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티가 났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비롯된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석진은 어딜 가나 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머리가 자라 첨예한 판단력이 생기고부터, 석진은 이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깨달았다. 석진은 자신이 가진 패를 영리하게 활용하며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필요한 사람, 필요하지 않은 사람, 방해가 되는 사람. 석진은 마지막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굳이 누군가와 싸우지 않아도,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손에 들어오니까. 이렇듯 김석진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모두에게 사랑받을만한 진정 태양과도 같은 학창시절을 보냈다.








물론 태생부터 남다른 것은 기은효도 마찬가지였다. 깨끗하지만 초라해 보이는 교복, 낡은 운동화, 눈 밑에 드리운 걱정의 흔적들. 은효는 외로움과 편견이 만든 악마였다. 은효의 삶은 각박했다. 금수저는커녕 수저를 쥘 의지마저 박탈 당한 인생. 부모도 일가친척도 없었다. 불행하구나, 하고 스스로 실감할 즈음엔 이미 세상에 던져지고 난 뒤였다. 은효가 할 줄 아는 건, 열심히 하는 것 밖엔 없었다. 은효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과서에 머릴 처박고 그저 염불 외는 듯한 공부 밖엔 없었다. 이상적인 삶은 대학 졸업장을 따는 것부터 시작일 터였고, 당연히 대학에 갈 돈은 없다. 학기마다 주어지는 장학금과 지원금은 생계유지조차 힘든 수준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던 센터장의 말을 종교의 교리처럼 여겨왔다. 유일한 살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좌절되었을 때, 은효의 속에선 무언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내, 많이 힘드냐며 끈적한 손길로 허릴 쓰다듬는 선생을 통해 하나 깨달았다. 아직 하나 더 남았다는 것을. 껍데기였다. 사람을 홀려놓을 만큼 예쁜 얼굴.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모에게 단 하나 얻어낸 것이었다. 자각한 은효는 그것의 효용성을 계산했다. 절망과 혐오, 불안과 슬픔이 그 안에서 새카맣게 뒤섞였다. 그리고 은효는 오래지 않아 답을 내렸다. 은효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정말이지, 살고 싶었다.




운명은 언제나 기묘하다. 이 세상의 양 극에 두어야 할 김석진과 기은효를 한 점 위에 가져다 두었다. 운명은 이 변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더라도 그 처신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운명은 심지어 그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비극의 한 치 앞까지 예감하였더래도 방관할 뿐이다.



















입학 선서를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온 석진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한숨을 쉬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어김없이 대표의 자격은 석진의 손에 쥐어졌다. 이전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엔 한치의 의심도 없다.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교장의 연설은 길게 이어졌고, 석진은 고갤 숙여 하품을 감췄다. 지루한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석진이 가진 유일한 병증 같은 것이었다. 권태.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온 삶에 대한 권태. 석진은 건조한 눈빛으로 제 옆을 돌아보았다. 같은 학원을 다녔고 꽤나 석진과 친밀한 관계의 김남준. 그 옆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기어이 고등학교까지 붙어와버린 지긋지긋한 민윤기. 그리고 그 옆엔, 텅 비어있는 자리. 빼곡한 아이들 사이의 유일한 공백.




"야. 석진아, 교감이 너 째려본다."




정신 한 자락을 빼앗긴 듯 멍해진 석진의 어깨를 남준이 툭 건드린다. 삐딱하게 늘어져 있던 윤기도 석진을 보며 비죽 웃었다. 희멀건 민윤기의 얼굴 옆으로, 텅 빈 의자 하나가 석진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자신의 것도, 제 친구의 것도 아닌 빈자리 하나에 사연이라도 있는 듯 신경이 쓰였다. 멍하니 있는 석진에게 남준이 다시금 눈치를 줬다. 앞에 봐, 선생님들이 쳐다본다고. 그제야 마지못해 거두는 시선 끝에는, 석진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의문과 불길함이 진득했다. 입학식이 끝남과 동시에 요란하게 쏟아지는 박수와 의자 끄는 소음. 아이들을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 사이로 모든 게 혼미해졌다.





"우리 아들, 정말 장하다. 잘했어."
"바쁘실 텐데 뭐 하러 오셨어요."
"네가 대표라는데, 그럼."




하늘하늘한 스커트를 휘날리며 걸어온 석진의 어머니가, 더없이 고운 얼굴로 웃는다. 우아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그림처럼 안겨있는 해바라기가 한가득인 꽃다발. 건조한 표정으로 건네받는 석진의 옆으로 남준과 윤기가 나란히 섰다. 꾸벅 건네는 인사에 흔히 주고받는 ‘남준이는 키가 더 컸네’, ‘윤기는 더 어른스러워졌구나 ’ 따위의 말들이 오간다. 혈육인 본인보다도 더 화기애애한 그들을 두고, 석진은 두리번거리며 누군지도 모를 이를 찾는다. 눈이 피로할 정도의 인파 속에서 빈자리에 대한 의문은 더 커져갔다. 그것이 김석진의 인생 전반, 청춘의 가장 큰 부분을 뒤흔들어 놓을 것을 예감한 것 마냥.

















"교실이 왜 이렇게 어둡냐, 니들이 뱀파이어냐."



첫날부터 교사들 사이의 단골 대사를 읊는 담임이다. 그에 화답하듯 쏟아지는 햇빛에 아이들은 탄식하며 웅크린다. 햇빛과 함께 교실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반짝거린다. 석진은 무감한 눈으로 그저 삐딱하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교사로서의 경험치는 이미 지긋할 정도로 찼는지, 담임 역시 무덤덤한 눈으로 교실을 훑어보는 듯했다. 석진과 잠시 눈이 마주치고, 담임은 출석부를 한번 팔락이고 혼자 고갤 끄덕인다. 이미 대략적인 밑그림은 다 그려진 것처럼 말이다.





"소개는 뭐, 촌스럽고. 나중에들 하자? 그리고 자린 내일부턴 출석 순으로 앉아라."
"네."

"임시 반장은, 뭐냐, 그냥 출석부대로 김석진이, 니가 하는 걸로 하자. 불만들 없으면."





감춰지지 않는 억양이 묻어나는 말투로, 담임은 무심하게 툭 던져놓았다. 교실 안의 누구도 딱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예, 하고 낮게 깔리는 대답만 돌아왔다. 석진은 문득 옆 반으로 떨어진 김남준을 생각하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썩 달가운 역할은 아니다. 성가신 일. 다음 순서를 생각하는 듯 담임은 옆구리에 손을 짚고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뻔뻔히 비어있는 자리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린다. 거친 억양으로 저기 빈자리, 하고 운을 뗌과 동시에 교실 뒷문이 열린다.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뒤로 돌아간다. 김석진만 빼고. 정적 속에서 주저하는 발소리가 정말 작게 울렸다.







"기은효, 너는 첫날부터 늦나."






죄송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다. 어느 학급에나 흔히 있는 유형이겠지 하며 석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담임이 저 여학생의 이름을 당연하게 외운 이유도 궁금히 여기지 않았고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기은효가 있네. 근데 어차피 정한 거. 그럼 은효 니가 임시 부반장으로 하자. 석진은 기계적으로 고갤 끄덕였다. 뒤에서 들려온 의자 끄는 소리가 신경을 흩트려 놓았다. 그리고 석진이 너는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좀 와라. 담임은 이런저런 공지사항들을 남겨놓고 교실을 떠나갔다. 앞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풀썩 엎드리거나, 떠들어대기 시작하는 아이들 틈에서 석진은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소음 속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석진은 뒤늦게 고갤 돌려 지각생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책상에 무기력하게 엎드린 조그만 정수리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석진의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내가, 너를 부른 건 말이다. 그, 다름이 아니고."
"네."

"입학성적장학금 말이다, 원래대로면 너랑 은효가 둘이 똑같이 나눠야 하는데."
"......"
"그게 말이다..."





담임은 무척이나 말하기 어려운 듯, 잠시 뜸을 들였다. 석진도 그 사이 빠르게 머릴 굴렸다. 입학식 때 보았던 의문의 빈자리, 그리고 지각, 기어들어가던 목소리의 주인공. 그제야 좀 끼워맞춰지는 기분에 석진은 다시 네, 하고 담임을 재촉하듯 대답했다. 담임은 이마에 주름을 잔뜩 만든 채로 꽤 심각한 목소릴 내었다. 내가 너희 아버지 인품 훌륭하신 거 익히 알고 하는 얘기다. 사실 은효 걔가 부모님도 없이 혼자 산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다."




입학성적장학금을 양보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계산했다. 그리고 그 얼빠진 지각생이 어떻게 자신과 같은 성적인지도 계산해보다가, 이내 귀찮아졌다. 약간의 의문이 남았지만 말이다. 석진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갤 끄덕이자, 담임은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너희 아버지 훌륭하신 분인 거 믿고. 석진이 네가 어디 가서 허튼 소리 안 할 것도 믿는다. 은효 옆에서 많이 도와주면 고맙겠다.






"알겠습니다."
"고맙다, 곧 종 치니까 어서 들어가 봐라."













어떤 앤지 얼굴이나 보자던, 어찌 보면 좀 못된 그 마음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눈앞의 뒷모습이 파들대고 있는 걸 보고 석진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교실 한구석, 책상 위에 엎드린 채로 그 애는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안쓰러울 만큼 마른 뒷모습에 대고 석진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가, 이내 도둑질 한 사람처럼 거두었다. 사람을 두고 할 말을 잃은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입학식 날, 저 애의 빈자리를 두고 그랬던 것 마냥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햇빛이 쏟아지는 교실 안에서, 아이들은 모두 웃고 떠드는데 그 애만이 외딴섬이었다. 하루 종일 저러고 있었겠지. 담임에게 들었던 기구한 사연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우두커니 선 석진의 뒤에서 목소리가 끼어든다. 야, 석진아. 뭐해. 빨리 나가자. 석진의 이름에 그 애의 마른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도 보았다. 석진은 고개를 가로젓고 서둘러 그 자릴 벗어났다. 농구공을 챙겨 지나며, 다시 한번 그 자릴 돌아보았을 때. 분명 그 애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햇빛 속에서 그 애는 분명 석진을 보고 있었다.






어떤 표정이었을까.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너무 눈부셔서 그랬나.


















"야, 김석진, 너 이번에도 1등이더라."
"석진아, 혹시 과외 소개해줄 수 있어?"
"석진아, 끝나고 뭐해?"





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석진은, 종종 자신이 다수인지 혼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피로와 불쾌에 빠지곤 했다. 완벽한 인생이 주는 권태, 그것은 석진에게 너무도 이른 나이에 찾아와버렸다. 대화가 오가고, 관심이 쏟아지고, 온갖 호의와 질투가 가볍게 날아들고, 시선이 머무는 하루 종일. 열일곱의 봄을 보내며 석진은 그러한 것들에 너무나도 질려버렸다. 관계는 습관적인 두통이 되어서 석진을 괴롭혔다.






다만 한 가지, 유일하게 김석진으로 하여금 끝없는 외로움을 실감케 하는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는 아주 외로웠다. 그 세계는 앞에 앉은 여학생의 새하얀 목덜미 위에, 그 아이가 자릴 오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향기에, 필기를 하느라 분주한 손가락 위에, 머릴 넘기려고 움직이는, 가느다란 팔목 위에 존재했다.




김석진의 열일곱, 따뜻한 봄날.

온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저기, 있잖아...”
"응, 말해.”
"아, 그러니까...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뭐가?"

"선생님한테 들었어. 장학금...네가 양보했다며."




잠시 머뭇거리던 그 애는, 이내 석진에게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애매한 거리감에 석진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커다란 눈에 석진의 얼굴이 한가득 담긴다. 애처로운 느낌. 명치께가 울렁거렸다. 석진은 무의식중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더 별다른 말도 나올 게 없는데, 명분 없이 좁혀진 거리감은 어색했고 고요했다. 석진은 남학생들의 눈빛이 뒤통수에 날아드는 걸 느끼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멀뚱히 그 애의 얼굴을 바라본다. 석진은 어떤 말 대신 그냥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고맙다고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
"아니야."

"너라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 고마워."





이번엔 어떤 표정인지, 확실히 보였다.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점의 흠결도 없는 인생이 주는 권태로움. 풍요에서 오는 피로감과 소란함. 기은효는 그것들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독립된 은하계 같았다. 그것은 처음엔 한 톨의 먼지처럼 석진의 명치께에 날아들었고, 매 순간 크기를 키워나갔다. 그 애가 떨어진 연필을 주우려고 허릴 숙일 때, 굴러가는 연필을 쫓아 고갤 돌렸을 때, 하얀 손가락 끝이 석진의 발치에 닿았을 때. 석진은 무언가 명치께에서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먼지는 어느새 손톱만 한 크기가 되고, 또 주먹만 한 크기가 되었지만 석진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자라나 하나의 마을이 되고, 나라만큼 커지고, 커다란 행성이 되어 공전할 때에도 석진은 몰랐다. 다만 두 눈으로 그 애의 손가락 끝을 쫓고, 쫓고, 또 쫓았을 뿐이다.



그리고, 유독 햇빛이 눈부셨던 어느 날.







갑자기 창문을 열어 들이친 바람에, 그 애가 들고 있던 종이들이 죄다 날아갔을 때. 나부끼는 종이들 사이로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세계는 한 번 더 크게 팽창했다. 석진은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서, 그저 종이를 주웠다. 어색하게 건네는 손에 그 애의 손끝이 스쳤을 때. 기어이 그 세계는 폭발해버렸고, 무한한 우주가 되어 김석진을 집어삼켰다.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 기은효가 만들어낸 세계, 기은효의 우주. 그것을 자각하고부터 석진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강박처럼 석진은 은효의 이름을 적어내려갔다. 석진은 기은효라는 이름을 적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절로 욕지기가 나올 때도 있었다. 석진은 이게 꼭 몸살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공책은, 은효가 그러했던 것처럼 석진에게서 점점 그 부피를 키워나갔다.






기은효는 예쁘다. 기은효는 같은 학교 사내놈들 사이에서 오가는 시답잖은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질리지도 않는지 매일 모여서 떠드는 게임 얘기, 축구 얘기, 여자 얘기. 그 당연한 수순의 종착지는 늘 기은효였다. 석진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다만 한 발짝 떨어져 방관했다. 귓전에 내려앉는 은효의 이름에 명치가 매번 따가웠지만, 석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석진은 제 앞에 있는 은효의 조그만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아마 십 분 째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은효의 목덜미에서 조각조각 부서졌다. 허기가 돌았다. 작은 뒤통수는 미동도 없이 앞만 보고 있다. 열심히 필기를 하는 손가락이 보인다. 간혹 뒤척거리는 팔꿈치는 말라서 뼈가 도드라진다. 건드려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석진은 그럴 수 없었다. 은효에게 손을 대는 순간, 온 우주가 비명을 질러대며 석진을 터뜨려버릴 것만 같았다. 석진은 책 위에 얼굴을 파묻는 것 말고는, 은효를 대할 방법은 아무것도 몰랐다. 첫사랑은 모든 게 의문이고 의심이었다. 석진은 매 순간순간 기은효의 존재를 의심했다.




어떻게 저렇게 웃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짓지.

어떻게 저렇게.













한 학기가 다 지나갈 시점에서, 석진은 은효에 대해 제법 많이 알게 되었다. 집중했을 때 입술을 깨무는 버릇, 연필을 잡기 전에 손목을 한 번 돌리는 것,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것, 하얀 강아지가 그려진 필통을 들고 다닌다는 것, 영어랑 세계사를 좋아한다는 것. 집중력이 떨어졌을 땐 교과서 한구석에 낙서를 한다는 것. 이런 시시콜콜한 것부터, 또.





웃을 때 휘어지는 눈, 입가를 가리는 버릇. 어쩌다 석진과 눈이 마주치면 머리카락을 향하는 손. 부드럽게 넘어가는 검은 머리카락. 늘 어깨에 걸리는 머리카락, 딱 한 줌 쥐어보고 싶은 그만큼. 인쇄물을 넘길 때 살짝 스치는 손가락. 그 온도. 매일 아침 7시 50분, 차분한 발소리. 새하얀 운동화. 하얀 가방. 딱 무릎을 덮는 치마. 가느다란 발목. 어김없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으로만 건네는 어색한 인사. 그리고.





"안녕, 석진아."





처음으로 그 입에서 나온, 이름.





주변 모든 것이 불꽃놀이처럼 폭발하고, 온 세상이 석진의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 기은효는 비로소 김석진의 심장을 앗아갔다. 그리고 석진은 생각했다. 기은효를, 갖고 싶다고. 그렇게 조금 뒤틀린 생각을 했다.





열일곱의 온 세계가 연호하던 그 말을.

그 순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견고하게 빚어진 김석진의 빛나는 세계. 그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다. 석진이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게 된 날, 평온하던 모든 일상이 혼란에 빠지고, 진실과 거짓이 모두 뒤집혔다. 수업은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모든 소리가 노랫말처럼 들려서 그랬나. 눈에 들어오는 건 앞에 앉은 저, 기은효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 기은효가 웃는 것. 기은효가 움직이는 것. 기은효, 은효, 전부 그 애였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루고야 마는 성미 덕에, 석진은 그리 오래지 않아 은효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한 학년이 끝나갈 즈음, 석진과 은효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 사이가 되었다. 은효는 궁금한 게 있을 땐 하나 둘, 석진에게 물어보기 시작했고 그건 이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사소한 일상의 공유. 은효는 작은 입으로 석진에게 참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자신이 읽었던 책이나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 은효에게 석진은 그저 늘 웃으며 은효가 원하는 대답들을 들려주었다. 매일, 아쉬울 만큼의 찰나. 그 찰나 속에서 석진은 온전히 은효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좋아하나봐."




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툭 흘려놓은 한 마디. 눈앞에 있는 민윤기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특유의 경멸 섞인 표정으로 민윤기는 고갤 젓는다. 철없이 뛰어다니던 시절부터, 나름 머리가 커버린 지금까지. 민윤기는 한결같이 냉소적이고 객관적이다. 신기하네. 그렇게 윤기는 무성의에 가까운 대꾸를 했다. 석진은 스스로 뱉은 말을 다시 되새겨보고 머릴 쓸어넘긴다. 복잡한 얼굴이려나, 아니면 되려 심플하거나. 윤기는 가늘게 뜬 눈으로 석진을 쳐다본다. 한참동안. 뭘 그렇게 쳐다보냐고 석진이 묻자,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흘리며 고갤 꺾는다. 아니, 신기해서.





"나, 정말 은효 좋아해."
"그러시든지."
"무섭다."
"뭐?"


"무서워."












점심을 먹을 때, 하교 할 때, 혹은 쉬는 시간.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석진을 마주보는 은효의 커다란 눈동자. 천천히 휘어지는 눈꼬리와, 곡선을 그리는 입술. 그 순간순간마다, 그 작고 사소한 시간의 끄트머리마다 별이 태어났다. 그 별들이 버겁도록 석진의 주변을 가득 메웠을 때, 석진은 이 첫사랑이 지겹도록 오래 갈 것을 직감했다. 절대 쉽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석진아, 나 이 문제가 잘 안 풀려.
석진아, 끝나고 같이 갈래?


석진아,

석진아,

석진아.





정말 위험하다.














열일곱의 시간은 무엇보다 빨리 흘러갔고, 그렇게 석진과 은효는 열여덟이 되었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2월의 시작, 같은 반이 되었다고 좋아하는 은효의 얼굴. 새하얗게 웃고 있는 은효의 두 손이, 기어이 석진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때. 석진은 어찌해야 할 지 몰라 그냥 웃어버렸다. 하지 못한 말이, 할 수 없는 말이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겨우 삼켰다.






"김석진, 요새 부쩍 걔랑 붙어다니더라."
"잘 어울리지 않냐."
"난 기은효 걔 별로. 싸늘하다 해야하나, 예쁘면 얼마나 예뻐서."
"하긴, 얼굴보단 성격이지."
"친구 없이 다니고, 말도 잘 안하고. 쎄한 느낌이 있어."
"그래도 예쁘잖아."




겉보기엔 모든 것이 흥미로웠을 것이다. 잘생긴 부잣집 아들, 사연 있어보이는 예쁜 여학생. 한 구석에 자신을 대입하고, 보는 사람마다 저만의 망상을 써내려가는 그런 흔해빠진 드라마. 재밌는 얘깃거리임은 분명했다. 하얗고 예쁘게 생겼지만, 살가운 느낌은 아닌 은효는 딱 씹어대기 좋은 존재였을 것이다. 석진이 자릴 비우면, 혼자일 때면 늘 책상 위에 엎드리고마는 그 애는, 평범한 고등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애는 매일 정문 앞에 서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나면 물 밖으로 건져 올려진 사람처럼 가쁜 숨을 뱉고는 했다. 대단한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이란 것처럼.








석진과 은효는 절대 동등해질 수 없었다. 석진에게로 날아든 은효가 그의 세계가 되어버리고, 은효가 기어이 석진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을 때. 그 시작부터 둘은 동등하지 않았다. 석진은 은효의 목을 틀어쥔 가난과 불행에 대해선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은효의 가난은 게걸스러운 어둠이다. 악귀처럼 은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놓질 않았다. 사악하게 이죽거리며 은효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야간의 편의점, 새벽의 피씨방, 주말의 대형마트. 그러고도 가난은 성이 안 찼는지 기어이 은효를 집어 삼켜버렸다. 지겹도록 신고 다니던 운동화 뒷축이 닳아빠졌음을 알았을 때. 옷장에 겨울 외투가 한 벌도 없음을 알았을 때. 결국 휴대폰을 해지해야만 했을 때. 그런 비참함들이 쌓이고 쌓여서, 기은효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김석진이 알 리가 없었다.




"요새 왜 이렇게 졸아?"
"그냥, 좀 피곤하네..."
"다음 수학인데, 양호실 갔다고 말해줄까?"
"괜찮아."






그 다음 시험에서, 은효는 보기 좋게 네 문제를 틀려버렸다. 늘상 받던 성적 장학금은 은효가 아닌 다른 학생에게로 가버렸다. 석진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은효의 발 밑에 도사린 어둠이 석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석진은 교무실 한 구석, 복사기 앞에서 선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담임과 수학 선생의 입에서 기은효 이름 석 자가 여러번 오르내렸다. 부모도 친척도 없는 기은효는 늘 선생들의 걱정거리였고, 그나마 붙잡고 있던 동앗줄은 장학금과 지원금이었다. 석진은 못 들은 척, 복사기 옆에 쌓여 있던 백지들을 의미없이 챙겨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작아지지 않는 마음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어리석게 한다.

인정했다고 받아들이는 순간,



욕망은 이내 실수가 되어버리고 오만이 되어버린다.










바로 그 다음 주 금요일. 기은효 석 자 아래 근면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찍힌 오백만원. 그리고 그 후원자는 김씨 성을 가진 정치인. 어찌 보면 뻔한 일이었다. 석진으로썬 모른 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석진은 그렇게 그 돈으로 은효의 미래를 저당잡았다.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이 모든 걸 알게 된 은효가, 엉엉 울면서 바닥에 주저앉을 때도. 석진은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는 듯 굴었다. 은효가 기어이 석진의 어깨를 밀치며 욕을 하고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려도, 석진은 그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악의라곤 조금도 없는, 늘 한결 같은 석진의 눈동자엔 은효의 일그러진 얼굴이 가득했다.






"석진아, 너 내 친구잖아."
"......"
"김석진, 니가 진짜 내 친구라면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나 너랑 친구 아니야.
나 너랑 친구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석진은 그 말을 입밖으로 내지 못하고 삼켰다. 목구멍이 너무 쓰리고 답답한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싶어 입술만 깨물었다.






"왜 나를 동정해, 너까지 그러면......"


너마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석진아.




“사람들이 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돼.”





서러움에 온 몸을 파들파들 떨던 은효가, 눈물에 절여진 얼굴을 석진의 어깨에 푹 파묻었을 때. 떨리는 손 끝으로 석진의 팔을 부여잡고, 너는 그러면 안 돼. 그렇게 마지막 말처럼 울먹였을 때. 그 때에도 석진은, 어쩔 줄 몰라 그냥 웃어버렸다.




















은효는 점점 야위어갔다. 수업시간에 자기도 했다. 빚을 갚듯이 모자란 잠을 잤다. 교실 한 켠의 햇빛 아래서, 마치 꼭 총 맞은 초식동물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석진은 항상 그 옆에 있었다. 불안하게 들썩이는 등을 보면서 석진은 그저 지레짐작 할 뿐이다. 은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은효가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했는지. 그 모든 것을 한 발짝 멀리서 그저 관망하고 있다.






그래도 은효는 여전히 석진의 앞에선 잘 웃고,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변함없이 매 순간 석진의 눈앞에 별들을 흩뿌려놓았다. 석진은 이제 은효의 뒷모습이 아니라 옆모습을 보고 있다. 유일한 친구라는 명분으로 은효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친구라는 핑계로 은효의 머릴 쓰다듬기도 했다. 그럴수록 마음 한 켠에선 죄의식 같은 것이 자라났지만, 은효의 웃는 얼굴을 보면 그깟 것 하나야 싶었다. 석진은 그렇게 은효의 곁을 맴돌며 겨울과 봄을 보냈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가끔 욕심이 고갤 들 때면, 석진은 뻔한 말로 자신을 달랬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라고, 기은효가 널 떠나면 어떡할 거냐고 그렇게 자신에게 화를 냈다. 다만 은효의 곁에 있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할 뿐인데, 그동안 쌓아올려간 모든 감정들이 버거울 정도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혼란스러웠다.







석진이 공을 들여 쌓아올린 관계는, 주변의 작은 한 마디에도 금방 무너질 것처럼 불안했다. 간혹, 그 은효라는 애는 여자친구니. 그렇게 묻는 과외 선생의 말이라든가. 니 여자친구 어디 갔냐고 묻는 옆 반 친구의 말이라든가. 그때마다 석진은 웃으면서 고갤 저었다. 그냥 속이 쓰렸다. 불안이 석진의 등을 매섭게 두드리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하지만 석진은 은효의 커다란 눈을 마주할 때면 한없이 무력해졌다. 친구라는 명분으로 스치고 머무르는 은효의 손. 늘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름. 은효의 커다란 눈에 오로지 김석진 하나만 담겨있는 그 시간들.



김석진은 기은효 앞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석진이 너, 요즘 연애하니?"
"네?"



과외 선생이 기습적으로 던진 물음에, 석진은 발작처럼 기침했다. 한참 콜록거리는 석진을 뚫어져라 보던 그녀가 웃는다. 아니, 그냥 요즘 여러모로 감정기복이 있어 보여서. 석진은 빨개진 눈을 하고 쳐다봤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갤 숙인다. 또 괜히 볼펜을 만지작대다가, 결국. 그런거 아니에요, 하고 중얼거린다.





"고민 있으면, 선생님한테 말해도 돼."
"......"
"하고 싶은 얘기 있잖아."



벌써 삼 년 넘게 석진의 과외 선생을 한 사람이다. 머릿속에 다른 게 꽉 들어차서, 곧잘 하던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이 떠나 있는게 뻔히 보였다. 석진은 고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또 입술을 깨물다가, 한참 침묵하다가.




"말하더라도, 달라질 게 없어서요."


















석진아, 넌 나중에 뭐하고 싶어?
나, 그냥. 아무거나.
에이, 그게 뭐야.


그럼 넌 뭐하고 싶은데.



밤하늘 아래서 은효의 얼굴이 창백하다. 은효는 석진의 그림자 위로 발을 겹쳤다가, 뗐다가 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석진은 입술을 댓발 내밀고 은효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야, 너도 없으면서. 은효는 깔깔 웃으면서 석진의 입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리곤 이내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손가락이 닿았던 입술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워서, 석진은 입술을 앙 다물고 은효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밤공기를 타고 은효의 대답이 한참 늦게 날아왔다.





난 여행, 출장 많이 다니는 직업 갖고 싶어.
생각만해도 피곤하네.



그래도, 그렇게 계속 다니다 보면, 어딘가 내가 있을만한 곳을 찾지 않을까.





그냥, 지금은 어디 한 군데도 내가 발 붙일 곳이 없어서. 그래도 나중에 좀 어른이 되면, 그래서 돈도 벌고 여기저기 다니면. 여기다 싶은 데가 나타나지 않을까. 여기라면 내가 안심하고 살아도 되겠다 싶은 그런 곳. 가로등 아래서 은효의 얼굴이 빛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 쫌 그랬다. 그치. 은효는 민망했는지 일부러 더 밝게 웃는다. 빨리 가자.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는 은효의 팔을 석진이 붙들었다. 석진은 말없이 은효의 얼굴만 내려다봤다. 석진의 새카만 눈이 불빛을 받아서 반짝거렸다. 은효는 괜히 민망해서 가방끈만 만지작댔다.





갈 거야?
......응?


어디 가지 마.




여기 있으면 되잖아. 여기 있어도 돼. 석진은 버림 받은 어린 애 같은 얼굴을 하고는, 은효를 눈에 한가득 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렸다. 나 어디 안 가, 석진아. 은효가 달래듯 그렇게 말했지만 석진은 웃지 않았다. 이기적인 소리라는 것을 안다. 알고서도 하는 말이다. 은효는 그런데도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붙들린 팔을 통해 절망이 강하게 전해졌다.

















첫 사랑은 매 순간이 벅차고 설레지만, 그만큼 비참함을 동반하기도 했다. 그건 석진과 은효가 너무도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었을까. 은효의 머리채를 잡은 가난과 어둠은 석진에게도 이따금 손길을 뻗치려 했다.


석진은 난생 처음 어머니로부터 차가운 목소릴 들었다. 신뢰와 기대를 무너뜨린 것이 이유였다. 처음으로 일등 아닌 석차가 찍힌 성적표. 늘 인자하게 웃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 있었다. 고상함이 실망감으로뒤덮였다. 자신의 재정적 지원과 노력이 배반 당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어디에 빼놓고 다니냐고 묻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석진은 그저, 그런 거 아니라고, 더 잘하겠다고 죄송하단 말만 반복했다.






"아들, 내가 너 고작 성적 떨어졌다고 이러는 것 같아?"
"......아뇨."


"너. 그 은효라는 애, 걔 때문에 그래."




어머니는 코웃음을 치면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내가 실수했다. 네 아빠 이름으로 장학금, 뭐하는 짓인가 싶었는데. 석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꿎은 옷자락만 쥐었다. 반들하게 잘 관리 된 손이 석진의 앞으로 휴대폰을 슥 밀어놓는다. 휴대폰 속에 은효가 있었다. 은효가, 은효가.




"진짜 지독한 애다. 진짜 무서운 애야. 응?"
".......어머니, 이거."


"내가 나서야 하니?"




위원회에 이거 들고 나가서, 이 선생이랑 은효 걔, 전부 니 눈 앞에서 치워줬음 하니. 그래야 정신 차리겠어? 머리를 후려치고 지나가는 감정의 덩어리가, 버거울 정도로 무겁고 역겨웠다. 단순히 짐작하고 있던 것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석진은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되는 거니까.
당연한 것처럼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모든 게 그 애의 삶에 대한 모욕이 되어 돌아왔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석진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그래,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아니겠지 하며 고갤 돌리고 있었던 것 뿐이다. 뻔히 위험한 걸 알면서도, 바닷가에 지어진 기은효의 모래성에 발을 들인 것이다. 그렇게 좋다고 웃고 떠들고, 둘이서 마냥 행복했는데. 점점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고, 팔다리가 잠기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까 턱끝까지 물이 차올라서.





석진아.

사람들이 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돼.


너는 그러면 안 돼.






석진은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이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옷을 껴입었다. 그리고 곧장 집을 빠져나왔다.
















합정역에서 내린 석진은, 금요일 밤 취객들 사이로 계속 걸었다. 발길이 멈춘 곳은 은효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편의점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은효가 보였다. 손님이 없는지 은효는 책을 보고 있었다. 석진은 그 자리에서 은효를 한참 보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뛰쳐나온 은효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들었다.




"김석진!"




순간 왈칵, 눈 밑이 뜨거워졌다. 석진은 자리에 멈춰서 모자를 눌러썼다. 차마 뒤돌아볼 수가 없어서, 빨개진 코를 훌쩍대다가 입술을 꽉 물었다. 등 뒤에 다가온 은효가 꺄르르 웃으며 어깨를 붙들었다. 깜짝 놀랐잖아, 나 보러 온 거야? 여기까지? 신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은효, 석진의 등에 이마를 콩콩 부딪히면서 웃는 은효. 웃음소리는 밤 공기를 타고 날아와 가슴께에서 비눗방울처럼 터졌다. 석진이 대답도 없고 돌아보지도 않자 은효가 거듭 이름을 부른다. 석진은 고갤 푹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앞으로 온 은효가 석진의 손목을 붙들었다.



"석진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나 좀 봐, 응?"





석진아, 하고 은효가 조용히 속삭였다. 결국 석진은 견디지 못하고 어린 애처럼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말도 나오지 않아서 눈물을 계속 뚝뚝 흘렸다. 그 와중에 자존심인지 오른손으론 얼굴을 계속 감췄다. 그 앞에서 은효는 아무 말도 않고 서있었다. 무력하게 떨궈져있는 왼손을 은효가 꼭 붙들었다. 그리고 은효가 아무 말 없이 안아주었을 때, 눈물은 오열이 되어서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왔다. 석진은 꼭 다섯 살 짜리처럼 울었다.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는 은효의 손길이 느껴졌다. 석진은 은효를 꼭 껴안았다.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결국 자기도 따라서 훌쩍거리는 은효에게서 꽃향기가 났다. 꽃다발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울어, 석진아."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기은효, 너는 알고 있니.






"모르겠어, 은효야."















그 모든 비극들에도 불구하고 김석진의 모든 시간, 모든 계절이 기은효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작은 교실의 한 구석에서 석진은, 은효를 세상과 격리시키려는 것처럼 그렇게 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창문으로 넘어온 바람에, 엎드려 있는 은효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손가락 위를 덮은 책장도 팔락거렸다. 석진은 가만히 턱을 괴고 은효를 눈에 담았다. 숨을 쉴 때마다 들썩이는 마른 등이, 한 줌짜리 손목이, 눈 밑에 그늘을 만드는 속눈썹이. 벅찰 정도로 밀려들어 온 정신을 쓸어갔다.





"김석진."
"......"
"김석진!"
"네?"





화들짝 놀라는 석진을 아이들이 모두 돌아보며 한바탕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문학 선생은 검지로 칠판 한 구석을 툭툭 두드렸다. 진도 계속 나간다, 석진이 정신 차리고. 호석이가 읽어 봐. 프린트물 두 번째 페이지. 문하생의 서재, 서덕준.





너는 이 세상의 모든 문학을 훔친 것이 틀림 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름다울 수 없으니.







빨개진 귀가 가라앉기도 전에 종이 쳤다. 곧장 점심시간이라 아이들은 소란을 떨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은효가 얼굴을 찌푸렸다가, 멍한 눈을 깜빡이며 석진을 불렀다. 석진아. 응, 은효야.






"나 오늘은 점심 안 먹고 그냥 잘래."
"...그래. 더 자."


"응, 맛있게 먹고 와."




은효는 졸음기 묻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다시금 눈을 감는다. 석진은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은효의 숨소리가 다시 일정해지고,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은효의 뺨 위에 내려앉았다. 석진은 가만히 은효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펼쳤다. 햇빛을 가렸다. 그렇게, 교실이 다시 소란스러워질 때까지. 구름이 햇빛을 삼킬 때까지, 석진은 계속 그렇게 있었다.



김석진은 그런 사랑을 하고 있었다.










은효야.



너를 떠올리면 온 우주가 빠르게 공전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네 이름만 부른다.

사막의 모래만큼 네 이름을 불러도, 입 안에 네 이름이 꽉 틀어박혀서.



나는 어떻게 해야해, 은효야.














[김석진/김태형] 갈증 01-05 | 인스티즈









뜨거운 햇볕이 모든 걸 녹여버릴 것 같은, 여름의 언저리.
석진과 은효의 세상에 이방인이 나타났다.





"김태형입니다."






그렇게 짤막한 한 마디로 자기소개를 일축해버리고, 김태형은 서늘한 눈으로 교실을 한 번 둘러본다. 그 시선은 아주 잠깐 석진에게 멈추었다. 8월의 뙤약볕 한가운데, 김태형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특유의 영민함 때문일까, 아니면 최초의 위기감이었을까. 석진은 어딘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첫 만남의 전부였다. 이후 석진에게 김태형에 대해 이야기해보라면, 딱히 무어라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태형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 점만은 석진과 비슷했다 할 수 있다. 천편일률의 사람들 사이에서, 두 소년만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김태형은 꼭 다른 별에서 온 인간 같았다. 신기할 만큼 커다란 눈, 선이 굵은 얼굴. 주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밝은 머리색. 겉모습은 화려했고, 뒤따라오는 소문은 더 화려했다.








김태형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보통의 인간들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잘생긴 전학생. 으레 쏟아지는 관심과 호의, 적의에 김태형은 무관심을 넘어 무념무상으로 일관했다. 김태형은 우주에 저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어딘지도 모를 곳에 시선을 두고 종일 멍한 얼굴이었다. 태형의 화려한 외양을 보고, 저들과 같은 부류라 착각한 모양인지. 질 나쁜 몇몇이 다가갔지만 태형은 그저 고갤 내젓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태형을 향한 아이들의 관심은 멈추질 않았다. 석진은 알고 싶지 않아도 태형에 대해 알 수밖엔 없었다. 번쩍거리는 얼굴과 다르게 경상도 시골 동네에서 살다 왔다는 것. 이제껏 학교에서 꺼낸 말이라곤 '김태형입니다', 그 한 마디 밖엔 없다는 것. 점심시간엔 어디론가 사라져서 종이 쳐야 겨우 돌아온다는 것.






그런 김태형의 등장으로부터 일주일까지. 김석진과 김태형은 태양과 달처럼, 서로 다른 온도를 지닌 채 각자의 삶을 살았다. 특징도 사건도 없는 수많은 행성들이 떠도는 또래의 우주. 그 안에서 둘은 영원히 마주할 일이 없을 것마냥 보였다. 만인에게 친절하고 평등한, 태양 같은 김석진. 누구에게든 너를 해하지 않거든, 친절을 베풀어라. 교육받은 바를 석진은 그저 행할 뿐이다. 석진은 태형을 평범한 급우 A,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급우 A로 대했다. '완벽한 김석진'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친절만 베풀었다. 프린트를 나눠주거나, 교칙에 대해 설명해주거나. 딱 그 정도. 그럼 태형은 늘 무표정으로 고갤 끄덕이거나, 가만히 석진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김태형이 처음으로 관심 비슷한 걸 내보인 건.








"......이거."




뜨겁게 달궈진 운동장 한구석, 나무 그늘 아래서. 김태형이 두 번째로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음. 그렇게 써져있는 얼굴로 태형은 카메라를 내밀었다. 조금 낡은 듯하지만 분명 꽤 좋아 보이는 카메라. 애지중지 다뤘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은효는 눈이 동그래진 채 태형의 카메라를 조심스레 건네받았다. 당황스럽게 치떠진 큰 눈과, 만만찮게 큰 또 다른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태형의 눈이, 은효의 뺨 언저리에 머물다가 카메라로 가 떨어졌다. 보라는 듯 턱 끝을 드는 것으로 다음 말을 대신한다.




"나 찍어준 거야?"




턱을 괴고 앉은 은효의 옆모습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조각난 햇빛들이 새하얗게 반짝거리면서, 은효의 머리 위에서 부서지는 순간. 그 순간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은효는 한참 사진을 본다. 딱히 웃지도, 불쾌해하지도 않는다. 애매한 얼굴. 태형은 운동화 끝으로 땅을 툭, 툭 때리면서 은효의 정수리를 보고 있다. 한참 뒤에야 은효가 고갤 든다. 태형을 올려다본다. 햇빛이 뜨겁다. 태형은 할 말을 고른다. 싫다면 지울게. 그 중얼거림에, 은효는.




"고마워."




하얀 얼굴 한가득 웃음이 번진다. 정말로 새하얗게 웃는다.






그게 꼭, 가득한 열기를 타고 번져온 것처럼. 태형의 얼굴에도 옅게 웃음기가 어렸다. 사진 찍는 거 좋아하나 봐. 다른 사진도 보여줄 수 있어? 은효의 물음에 태형은 느릿하게 고갤 끄덕거렸다. 은효는 몸을 옆으로 옮겨 자릴 만든다. 벤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면서 앉으라 말한다. 태형은 멀뚱히 머리를 한 번 긁적였다가, 은효의 뺨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발을 떼었다. 사진을 구경하는 은효의 눈이 반짝거린다. 이따금 태형에게 질문을 던진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태형은 느릿느릿 은효의 물음에 대답하다가, 이따금 희미하게 웃기도 했다.







"은효야."


여기서 뭐해.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은효가 퍼뜩 고갤 든다. 태형도 은효의 시선을 따라간다. 단정한 교복을 따라 올라가면 멀끔한 얼굴, 깊이를 알 수 없는 눈과 만난다. 김석진이었다. 김태형이 이름을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석진은 무언가 맘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둘을 내려다보고 있다. 뛰어온 건지 가쁜 숨을 뱉으면서 넥타이를 끌어내린다. 신경질적인 손짓이다. 한참 찾았어. 그렇게 말하는 석진의 눈은 태형을 향하고, 은효를 향하고, 은효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옮겨간다. 늘 단정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만큼은 한없이 쌀쌀맞아 보인다. 태형은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석진을 쳐다볼 뿐이다. 은효는 카메라를 태형에게로 돌려주면서 말한다.



"태형이가 찍은 사진 구경하고 있었어."



석진의 미간이 한층 더 일그러진다. 태형은 카메라를 만지작대며 석진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말도 안 하고 없어져, 왜."
"...미안해, 너 남준이랑 얘기하고 있길래 잠깐 나왔어."





친구 사이에 오가기엔 어딘가 간질거리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김석진은 어딘지 집요해 보였고, 은효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태형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딱히 의미는 없다. 삐졌어? 은효의 목소리 끝이 장난스럽게 올라간다. 배시시 웃으면서 석진의 팔목을 붙잡는다. 좀 전에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속성의 웃음 같았다. 무언가 하나 더 들어간 느낌. 입이 댓 발 나와있던 석진은 사르르 누그러져서, 평소의 유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보일 듯 말 듯 웃는다. 그 광경들이 흑백영화처럼 태형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카메라를 쥔 태형의 손가락에 미묘하게 힘이 들어간다.





"태형아, 나 먼저 갈게."
"......응."


"사진 찍어줘서 고마워."





그럼 이따가 봐, 태형아. 은효는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어째야 할까, 태형이 느려터진 움직임으로 손을 들기도 전에 석진이 은효의 손목을 낚아챈다. 석진의 손에 이끌려 은효가 매가리 없이 따라간다. 태형은 멀어지는 은효와 석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태형아, 태형아. 겨우 몇 마디 나눈 여자애의 입에서. 꼭 노래처럼 흘러나오던 제 이름이 다른 단어처럼 낯설었다.









"태형이가 사진을 진짜 잘 찍더라구."
"......"

"나 되게 예쁘게 찍어줬다, 태형이가."



나중에 너도 태형이한테 보여달라 해. 그렇게 말하는 은효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들떠있다. 석진은 대답 없이 그냥 걸었다. 태형이 생각보다 되게 착하더라구. 오늘 좀 친해진 것 같아. 은효는 계속 재잘거리며 석진을 따라 걷는다. 이유 모를 짜증이 솟구치는 게, 더위 때문이려니 했지만. 석진은 참고 싶지 않았다. 석진은 한숨을 쉬면서 멈추었다. 따라 멈추는 은효를 돌아보는 표정이 서늘하다. 석진은 은효의 손목을 붙들었다. 다분히 짜증스러운 손짓이었다. 뭔가를 지워내려는 것처럼 석진은 은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다. 걸음과 태도와, 손짓과 눈빛이. 표정과 공기가 모두 이질적이다. 은효야, 하고 퍽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손목을 잡아 끈다. 힘없이 딸려가는 몸에 이유 모를 망설임이 느껴진다. 석진은 별들이 주변을 빠르게 맴돌며,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날이 진짜 덥다."
"......"


"얼른 가자."



석진은 참으로 예쁘게, 다정하게 웃는다. 좀 전의 찰나는 헛것이었던 것처럼. 다시 걷기 시작하는 석진을 따라, 비틀거리면서 따라가는 은효. 밟히고 또 밟히는 그림자 위엔 불안이 길게 꼬릴 내리고 있다. 삐걱거리는 소릴 내면서 불안은 둘을 따라 걷는다. 그 어떤 말로도 달래질 수 없는, 미세한 균열. 다만 석진은 그것을 감춰보고자 은효의 손을 더 세게 붙잡았다.















"언제 고백할 건데."
"...무슨 소리야."

"뻔히 보이는데 언제까지, 어, 속 터지게!"




무표정한 김석진과 반대로, 호석은 아주 엉망으로 얼굴을 구긴다. 옆에 놓인 쿠션을 끌어다 안으면서 석진에게로 발길질을 한다. 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몸을 틀어 피하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헛소리 말고 공부나 해. 문제집을 팔락거리는 석진의 얼굴은 덤덤을 넘어서 뻔뻔하다. 호석은 그런 석진을 흘겨보면서 다시금 들었던 발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티 나게 붙어 다니는데, 민윤기도 안다! 민윤기도!"

"어, 안 그래도 걔 헛소리하더라."





참으로 개 같은 타이밍이네. 허여멀건 얼굴에 조소를 띄우고 민윤기는 그리 말했었다. 뭐. 민윤기는 뭐라 했는데, 호석의 물음에 석진은 그냥 고갤 저었다. 호석은 답답한지 쿠션을 퍽퍽 때리면서 다시금 목소릴 높인다. 너 그러고 있다가 뺏긴다. 안 그래도 은효 예쁘단 놈들 한 둘도 아닌데. 김석진. 너 얼굴 믿고 그러면 안 된다. 호석은 제 연애사도 아닌데, 부처처럼 있는 석진이 답답한지 장황한 잔소릴 해댄다. 확신을 줘야지. 확신을. 안그래도 김남준도 맨날 기은효 예쁘다고, 뭐 자긴 그런 거 아니라 그냥 예쁘단 소리라고 하는데. 야, 막말로 김남준이 들이대면 은효 걔도 신경 쓰이지 않겠냐. 키 크고, 몸도 막 이렇고, 어? 여자애들이 겁나게 좋아한다고. 그리고 그 뭐냐. 옆 반에 걔랑, 걔랑. 또.




"은효는, 그런데 관심 없어."

"하이고."



"정말이야."



석진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하고, 그럼에도 어딘지 서늘했고, 끝은 제법 단호했다.



















기은효를 향한 소망, 갈망은 그저 새까만 종이 위에 낙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원하고 원해도, 그냥 갇힌 마음 안에 덧그리기만 할 뿐이다.




"석진아."
"......."


"저번에 말한 사진, 태형이가 인화해줬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은효의 뺨이 분홍색이다. 석진은 가만히 은효의 입술을 쳐다본다. 심기가 불편하다. 은효의 입에서 점점 김태형의 이름이 늘어가는 게. 석진은 딱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이도 저도 아닌 불안이 목을 조여왔다. 숨이 막히는 걸 느낀다. 은효가 대답을 재촉하듯 석진의 손목을 붙잡는다. 봐, 진짜 잘 찍었지.





"응, 예쁘네."





은효는 소중한 것처럼 사진을 본다. 사진을 석진의 책상 끄트머리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웃는다. 외줄타기를 하듯 불안한 정적 속에서, 은효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웃는다. 석진은 줄 끝에서 대답을 고르고 표정을 고른다. 신중해야만 하니까. 그리고 불행일까, 다행일까. 정적이 타인에 의해 부서진다. 저만치서 남준이 은효를 불렀다. 은효야, 저번 주에 교재 신청한 거 왔어. 은효는 아, 의미 없는 소릴 내고 석진의 옆을 스쳐간다. 석진은 은효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남준과 무어라 얘길 나누고 있다. 열심히 무언갈 떠들고 있는 남준의 눈에 분명한 빛이 들었다. 석진은 턱을 괸다. 말아 쥔 주먹으로 입모양을 감춘다.






참으로 개 같은 타이밍이네.




민윤기가 했던 말을 되뇌어본다. 책상 끄트머리에 불안하게 놓인 사진. 석진은 그걸 가만히 쳐다본다. 일 초, 일 분. 조금씩 확실해진다.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게, 백 퍼센트 김석진의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라는 점. 은효를 향한 모든 소망은 그저 석진의 머리를 스쳐가는 '욕심', '갈망'일뿐이고. 어떤 순간, 어떤 부분. 석진은 그저 그걸 남의 것인 양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점.






석진은 손가락 끝으로 사진을 밀어낸다.


무력한 종잇조각은 책상 밑으로 추락했다.


















석진의 부모님은 대학에서 만났다. 예술대 최고의 여학생과, 인문대 최고의 남학생이라는 적절한 서사로. 딱히 낭만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은 이야기다. 그저 적절한 타이밍과 적절한 배경이었을 뿐이라고. 석진은 그렇게 평가했다. 공주님처럼 나고 자란 여자와, 야망으로 똘똘 뭉친 남자가 만났을 때. 그 서사는 뻔하지 않은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축복받고. 석진은 그 언젠가 아버지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왜 어머니와 결혼했느냐고. 아들들이 으레 할 법한 그런 질문 말이다. 아버지는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완벽했기 때문에.
둘을 둘러싼 환경도, 타이밍도, 결론도.


그냥 모든 게 완벽했으니까.






동화 같지도, 드라마 같지도 않은 그 말에. 석진은 조금 우스운 기분마저 들었더랬다.







별생각을 다 한다. 석진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생각들을 덮어버렸다. 닫히는 대문을 등지고 언덕길을 내려왔다. 두껍고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집들을 지나서, 대로변이 나올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의 소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석진은 정류장 벤치에 앉아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서 만지작대다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은효가 얼마 전 침울한 얼굴로 했던 말이 기억났기 때문에. 석진아. 미안, 나 휴대폰 그냥 해지했어. 멀거니 서있는 석진을 두고, 은효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변명처럼 뒤에 말들을 이어붙였다. 공부에 방해되기도 하고, 그냥. 없어도 지낼 만하더라고. 그리 말하고 조금 달아오른 얼굴 앞에서 석진은, 그놈의 타이밍, 그놈의 환경에 대해 생각했었다.





"보고 싶은데."





은효에게 손을 뻗어도, 은효는 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은효는 모든 걸 방관하듯 가만히,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조심스레 은효를 안아보기도 했다. 친구라는 명목으로, 넘을 듯 말 듯 한 그 선을 앞에 두고. 은효의 온몸을 뒤덮은 불행의 향기가 느껴졌다. 은효는 석진이 한참 머릴 쓰다듬고, 이유 모를 한숨을 쉬고, 은효의 눈을 마주했다가 또 피할 때까지도. 은효는 거기에 있었다.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모든 걸 다 했다는 것처럼. 지친 것처럼.





가만히 있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슬퍼서.

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은효야, 아까 김태형이 너 찾던데?"
"응?"

"어, 저기 왔다."





남준이 툭 던지는 말에 은효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교실 한구석을 쳐다본 은효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 옆에서 석진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하드커버 책 너머로 싸늘하게 식은 눈이 드러난다. 한순간에 달라지는 공기. 남준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갤 갸웃댈 따름이다. 은효가 어쩔 줄 모르는 게 너무도 잘 보인다. 기은효는 정말이지, 투명하고, 투명해서. 잔인할 정도로.





"야, 은효랑 쟤랑 친했어?"
"...누구."


"김태형. 아까 오자마자 은효 찾더라고?"






석진의 시선이 교실 앞쪽을 향한다. 책상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김태형과, 그 앞에서 무어라 어버버대고 있는 기은효가 보인다. 은효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기분이 좋거나 당황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김석진이 모를 리가 있나. 김태형은 그런 은효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바람 빠지는 것처럼 픽 웃는다. 그와 동시에 석진의 안에서도 무언가 쿵 내려앉았다. 은효는 한참 동안 그렇게 김태형과 무언갈 얘기하다가 돌아왔다.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는 말이다.



석진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석진을 잠 못 들게 하는 생각이 늘었다.

그것은 김석진의 우주, 기은효에게 별개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였다. 순간 달라지는 것들이. 석진이 몇 개의 계절을 보내며 필사적으로 감추고 묻어두었던 것. 어쩌면 오만. 외부를 향한 은효의 관심. 타인을 향한 호의. 이제 은효는 종종 멍하니 어딘가를 본다. 그 어딘가, 그 종착지를 석진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석진의 온 신경, 온 시선 끝에 늘 은효가 있는 것처럼. 이제 은효의 시선 끝에도 늘 누군가가 자리한다. 그건, 석진이 아니었다.




김태형이었다.








찬란한 여름날, 기은효의 앞에 불쑥 나타난 존재. 김석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 이방인. 김태형과 마주칠 때마다 은효의 눈이 요동치는 것이 석진에겐 너무도 잘 보였다. 그래, 은효의 관심은 온통 김태형에게 쏠려 있었다. 은효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자라나고 있었다. 지난봄. 석진에게로 날아들었고, 결국엔 전부가 되어버린 그것처럼. 그래, 알고 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자신도 똑같이 경험했는데.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기은효 하나만 보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겠는가.




석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은효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석진은 고개를 끄덕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꿈보다도 더 일그러진 세계.




















그런 일도 있다. 우연이 아닌 필연.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엔 없는 일.



잔인하더라도, 결국 그럴 수밖엔 없는 그런 일.








여름밤은 짙은 남색이다. 꼭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것 마냥. 하늘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태형은 가만히 셔터를 눌렀다. 홍대 거리의 정신없는 네온사인,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의 뒷모습. 버스킹을 하고 있는 청년들. 새파란 밤의 파편들. 온 거리에 위액처럼 쓰린 청춘이 얼룩덜룩하고,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겨우 마음에 차는 사진 몇 장을 건지고 나면, 태형은 사진 속 사람들에게 다가가 묻곤 했다. 사진 속에 담긴 모습이 괜찮은지, 태형이 이 사진을 가지고 있어도 되는지. 그러면 그들은 대개 괜찮다고 말하거나, 태형의 얼굴을 신기한 것처럼 쳐다보곤 했다. 태형은 어딜 가든, 누구와 말하든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나쁘진 않았다. 썩 유쾌하지도 않지만. 태형은 에어팟을 귀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완벽한 이방인의 태도겠거니 하며 말이다.






저 사람 봐, 엄청 잘생겼다.
저렇게 생긴 애랑 한번 만나보면 소원이 없겠다.

얼굴값 하게 생겼어.



쟤가 그 김태형인가 걔야?


전학 왔다는데, 뭐 사고 쳐서 전학 온 거 아니야?
얼굴 봐라. 답 나온다.





태형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는 것에 가까웠다. 태형은 그들의 눈빛으로부터 수족관 속 돌고래가 된 기분을 느끼곤 했다. 타인이라는 존재들은 늘 유리 벽 너머에서 태형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조롱하는 동시에 욕심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어쩜 이렇게 생겼냐며 인형처럼 만지작댔고, 키가 불쑥 커지고 뼈가 굵어지고서는 관심에 욕망이 섞여들었다. 어린 태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면서 인형놀일 하던 동네 여자애들. 그들의 눈은 장난감을 탐내던 눈에서 곧 남자를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여자애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태형을, 배척하거나 괴롭히던 남자애들. 그들의 눈은 적대감에서 동경,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향한 경외로 바뀌었다.





태형은 느릿한 말투, 무관심한 태도와 다르게 눈치가 제법 빨랐다. 아니, 어쩌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모두 태형 앞에서 노골적이고 투명했으니까. 새로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자애들은 모두 태형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 게 뻔히 보였고, 남자애들은 같은 급으로 묶여보려는 부류, 적대감을 드러내는 부류 둘로 나뉘었다. 다만 딱 두 사람.





김석진과 기은효.





김석진이 어떤 인간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조금 다른 차원에 있는 인간임이 분명했다. 재야의 선비 같은 선하고 곱상한 얼굴을 한 주제에,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눈을 갖고 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두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 성격 좋은 모범생의 웃음을 띤 채, 태형에게 이것저것 친절을 베풀지만 눈빛은 싸늘하다. 너는 여기까지, 라고 선을 그어놓고 있는 것만 같다. 태형은 그 경고를 분명 알아챘지만, 다른 이들은 과연. 태형은 늘상 김석진을 입에 올리며, 경배에 가까운 호감을 표하는 급우들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기은효는, 조금 신기하다. 어쩌면 여태껏 태형을 수족관 생물 마냥 구경하던 이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새하얗고 삐쩍 마른 주제에, 어딘지 처절하고 독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다가 무슨 일 나겠네' 싶을 정도였다.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가벼운 관심과 저급한 욕망들을, 분명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얼굴은 예쁘장하고 고생 하나 모를 것처럼 생겼으면서, 감출 수 없는 곤궁함, 빈곤함이 분명 그 애에게 들러붙어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비극적인 예술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생겼다. 그게 태형이 내린 평가다. 뜨거운 햇빛 아래서 그 가녀린 여자애는, 자신이 녹아서 사라지길 바라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분명 오전까지만 해도 김석진 옆에서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그 애는 모든 햇빛을 다 받아내며. 약간의 미동조차 없이. 존재했다. 그래서 셔터를 눌렀던 거다.






고마워, 태형아.





그리고 이내, 좀 전의 표정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얗게 웃는 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었다.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성가실 만큼 스쳐가는 인파를 피해, 닫힌 은행 문 앞에 기대어 섰다. 사진들을 확인하는 태형의 입술이 뚜렷한 곡선을 그렸다. 같은 반 아이들이 보면 기겁할 만큼 선명한 미소였다. 태형은 문득 피로감과 갈증을 느꼈고, 카페라도 가볼까 했지만 바글대는 인파를 보고 이내 단념했다. 홍대 거리를 벗어나 그나마 한산한 합정역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태형은 느릿한 걸음으로 걷고, 또 걷다가. 한적해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곧장 냉장고 쪽으로 직행해 음료부터 꺼냈다. 차가운 이온음료 한 병을 계산대 위에 올려두고 주머니를 뒤졌다. 끼고 있던 에어팟 하나를 빼서 주머니에 떨군다. 담아드릴까요, 묻는 목소리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




낯익은 얼굴을 본다. 기은효다. 하얀 얼굴엔 감출 수 없는 피로가 내려앉아 있다. 계산기를 보던 은효는 제 얼굴에 내려 박히는 시선을 알았는지, 그제야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한다. 새카만 눈동자에 태형의 얼굴이 한가득 차오른다. 태형임을 확인하자마자 두 눈이 놀라울 정도로 커졌다. 은효가 너무 놀라는 탓에 태형마저 당황해버렸다. 둘은 그렇게 커다란 눈만 데구륵 굴리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나마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은효였다. 안녕, 하고 뒤늦은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너도 이 근처 살아?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한 쪽 에어팟도 뺐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 끝에 묻는다.




"몇 시에 끝나?"









은효는 정확히 열한 시 십 분에 일을 마쳤다. 태형은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만지작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은효가 나온 것을 보고 고개를 가볍게 까딱인다. 앉으라는 듯 맞은편 의자에 눈길을 둔다. 은효는 피로가 묻은 눈가를 한 번 문지르고, 태형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태형은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은효를 빤히 쳐다본다. 이전에도 느낀 거지만, 김태형은 사람을 뚫어버릴 것 마냥.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쳐다본다. 호랑이나 사자, 혹은 늑대. 맹수 같다고 생각했다. 제 뺨 위에, 눈가에, 미간에. 집요하게 박혀드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 은효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맥주 네 캔과 과자 한 봉지를 꺼내놓는다.




"술도 마시나 보네."
"어쩌다 가끔."
"......."



"왜, 싫어?"





은효는 그제야 태형의 눈을 쳐다보면서 생긋 웃는다. 시선에 당황하는 건, 이번엔 태형의 차례인 것 같다. 태형은 그 눈을 마주하자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목이 타는 듯해 조금 급한 손짓으로 맥주를 따서 들이켰다. 과자 봉지를 뜯는 은효의 얼굴을 관찰한다. 밤에 보니까 더 하얗고, 눈이 크고, 입술은 좀 텄고. 무표정으로 있으면 차가워 보이는 게, 태형과 비슷한 점인 것 같다. 그리고. 뭔가 비밀을 갖고 있는 얼굴이다. 태형은 한 모금 더 마셨다. 갈증이 정말 심하다고 생각하면서.





"근처 산다고?"
"어..."
"사진 찍으러 나왔던 거야?"
"응."





어색한 대화가 뚝, 뚝 끊어진다. 낡은 비디오처럼 말이다. 침묵과, 그 틈에 오류처럼 섞여드는 자동차 소리. 취객들의 고함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태형은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대고 은효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다. 은효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어색한 움직임으로 태형의 시선을 피한다. 계속해서 역전되는 시선들 간의 관계, 그 안에서 기이한 기분이 피어난다. 괜히 맥주캔 위를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문질러본다. 태형은 그런 은효를 묘한 얼굴로 쳐다본다. 기은효. 볼이 빨갛다. 술 때문인가. 태형은 피식, 하고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그냥."

"...잘 안 웃을 것 같았는데."

"...아아. 그치."




그런 말 자주 들었어. 태형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또 땄다. 난 엄청 잘 웃어. 웃음이 좀 많아. 그렇게 말하고 은효는,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웃어버린다. 태형은 아주 희미하게 입 꼬릴 올리며 받아쳤다. 그러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태형은 은효 앞에 놓인 맥주캔을 따서 건네준다. 은효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또 생글거린다. 태형은 의자를 앞으로 당겨, 조금 가까워진다.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더, 더 가까워진다. 턱을 괸 채로 은효를 뚫어버릴 듯 쳐다본다.




"진짜 잘 웃네."
"...응, 좀 고쳐야 되는데."


"좋은데, 왜."





그리고 또 침묵.






태형은 고갤 가로저었다. 다시금 갈증이 찾아온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걸 인지한 건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저 애의 샴푸 냄새가 코끝에 존재감을 남겼을 때.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쟤랑. 무언가 이상하다고, 이건 정말 이상하다고 깨달은 건. 맥주를 다 마셔버리고. 저 애의 달아오른 볼을 보자니 갑자기 무언가 궁금해졌을 때였다.






남자친구 있어?
김석진, 걘 무슨 사인데.





이렇게 물어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졌다.
이건, 정말. 이상하다.

















세상만사 관심 없는 김태형의 눈에도 기은효는 예뻤나 보다. 교실 오른쪽 맨 앞자리. 거기 앉은 김태형이 뒤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지고, 정말 뭔가 한참 잘못됐음을 깨달았을 때. 딱 그쯤. 햇빛에서 묘하게 달큼한 향기가 나는 것 같던 아침. 복도에서 마주친 은효의 입가에 꽃이 피었다. 태형은 입 꼬릴 비틀어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 하고 지나쳐가는 꽃향기가 슬로모션처럼 눈에 보일 듯했다. 그리고, 그런데.





"은효야, 빨리 와."
"...응, 갈게!"




김석진.





김석진이다. 반듯한 얼굴에 살얼음을 띄우고 태형을 노려보고 있다. 그 살벌한 적의 속에서도 또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기은효를 부른다. 은효는 가볍게 팔랑거리는 것처럼 김석진에게로 간다. 김석진의 손이 당연한 것처럼 기은효의 뒤통수를 감싼다. 가볍게 머릴 쓰다듬고, 다시금 태형을 쳐다보는 김석진의 얼굴은 싸늘하다. 너무도 노골적인 적대감이라 태형은 화조차 나질 않았다. 그저 실소할 따름이다.








이후 태형은 매일, 싫어도 마주하게 되는 석진과 은효를 관찰했다. 은효는 늘 태형과 눈이 마주치면 잠시 정지 상태가 된다. 그러다가 이내 녹는 것처럼 활짝 웃는다. 무언가 얘기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엔 늘 안녕. 그렇게 짧게 말하고 지나쳐간다. 그 뒤로 곧장 김석진의 시선이 따라온다. 어김없이 그 눈빛은 경멸에 가깝다. 저와 극단을 달리는 김태형을 향한 경멸과 경계. 눈빛만 보면 당장이라도 욕이나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데. 김석진은 항상 말없이 태형을 지나쳐갈 뿐이다. 그리곤 꼭 앞에 가는 은효의 손목을 붙잡거나,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어 만지곤 한다. 태형은 확실히 알았다.





김석진은 김태형을 싫어한다.
김석진은 기은효를 좋아한다.


그럼, 기은효는?












"기은효."





처음. 입 밖으로 낸 그 이름은 생각보다 더 달았다. 돌아보는 은효의 얼굴, 그 주변의 공기가 사르륵 녹는 게 눈에 보일 듯하다. 응, 태형아. 돌아오는 자신의 이름에 태형은 일순 머릿속이 흔들렸다. 갑자기 하려던 말이 생각나질 않아서, 입을 꾹 다문 채로 카메라만 흔들어 보였다. 은효는 그런 태형의 얼굴을 한 번, 카메라를 한 번 보고. 다시금 태형아, 하고 불렀다. 태형은 커다란 눈을 꿈뻑거리다가 아, 하고 탄식했다.



"나한테 할 말 있는 거야?"
"...부탁이 좀 있어서."


"응, 뭔데?"




태형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고, 한 번 재차 훑어본 다음에 은효에게 내밀었다. 이거. 은효는 의아한 얼굴이다. 그래서 태형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시청에서 하는 사진전인데, 거기에 출품하고 싶어서. 은효는 이해 못 했는지 고갤 갸웃거리다가, 조금 느리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응."
"그, 저번에 찍은 사진?"
"응."





은효는 이내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지는 듯했다. 고운 미간이 한껏 찌그러진다. 태형은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고 해서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은효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계속 무언갈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입을 앙 다물었다. 거절인가 싶어서, 태형의 커다란 눈동자에 미약하게 일렁임이 생긴다.




"좋아."
"......"

"네가 예쁘게 찍어준 거잖아."






대신 일등 해야 돼. 그리고 맛있는 거 사줘. 은효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응, 고기 사줄게. 태형은 정말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말에 은효는 또 웃음을 터뜨렸고, 태형은 명치께가 간질간질함을 느낀다. 이것도, 진짜 이상했다. 정말 이상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정말 너무 좋았다. 태형은 이 생소하고 신기한 감각이 무엇일지 며칠 고민했고, 오래지 않아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태형아.
사진 찍어줘서 고마워.
좋아.
네가 예쁘게 찍어준 거잖아.



좋아, 태형아.





무언가 버거운 기분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어서.
태형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일단 확실하게 해둬야 할 사실이 있었다. 기은효가 심각할 만큼 예뻐 보이고, 일상에 지장이 올 만큼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단 점. 그리고 기은효가 김석진과 있을 때마다, 명치 언저리가 시큰거리면서 속이 쓰리다는 점. 태형은 이러한 사실들을 명료히 받아들이고, 제 나름대로 취해야 할 행동들을 했다. 아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을 지도.





"기은효."
"어? 아, 태형아..."



"물어볼 거 있어서."





너 공부 잘한다며. 그리 말한 태형은 옆구리에 낀 가방을 뒤적거린다. 형광펜 자국이 빼곡한 은효의 교과서 위에, 얄팍하고 깨끗한 문제집 하나가 툭 떨궈진다. 은효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다. 볼이 빨갛다. 고갤 들어 태형을 올려다본다. 기묘하다 싶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얽힌다. 태형은 손가락 끝으로 문제 하나를 가리킨다. 사실 별 관심도 없다만, 가장 길고 난해해 보이는 문제를 고른다. 은효의 시선이 다시 문제집 위로 떨궈진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모아 한쪽으로 넘긴다. 버릇인가. 태형은 혀로 입술을 훑는다. 고갤 숙여 드러나는 목덜미가 하얗다. 태형의 눈이 가늘어진다. 태형은 은효의 책상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멋대로 은효의 필통을 열어 볼펜을 손에 쥐여준다. 닿는 손에 은효는 파드득 놀란 듯 들썩인다. 빨리 설명해줘. 그리 말하고.




옆자리의 김석진을 본다.




역시나.



잘생긴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는 게 재밌다.







"수학은 나보다 석진이가 잘하는데..."
"니가 알려줘."
"......"




"너한테 물어보려고 온 거야."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고. 무해한 어린아이처럼 웃으면, 은효는 귀까지 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 한다. 더듬더듬, 은효는 태형의 문제집 위로 열심히 숫자를 적어 내려간다. 나른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다. 태형은 알아듣는 척 고갤 끄덕인다. 웃으면서 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사실 하나도 안 궁금해. 이건 그냥 핑계일 뿐이야. 왜 그걸 모르는 걸까.





봐, 김석진 쟤도 아는데.













기은효는 그냥 예쁘고 착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청순한 얼굴을 해가지곤 꽤 못된 구석도 있었다. 험한 말도 제법 할 줄 알고.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감출 줄도 몰랐다. 변덕도 꽤 심했다. 뭔가 맘에 안 들면 입을 꾹 다무는데, 순식간에 냉랭한 인상이 되어서 눈치를 보게 만들 때도 있었다. 사람을 갖고 노는 기질이 있었다. 태형은 그런 점이 맘에 들었다. 태형에게서 멀어지는가 하면, 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또, 그래놓고도 끝까지 마음 한구석은 내주지 않는 게 느껴졌다. 아마 김석진 때문이겠지.




기은효? 김석진? 걔네 사귀는 거 아니었어?
아니라던데?
야, 그게 어딜 봐서 친구냐.
그런 거, 한 쪽이 사심 있는 거 아니면 그렇게 못 지내.




뻔히 눈에 보였다. 그렇게 친구랍시고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속내가.



물론 인정하는 부분도 있다. 기은효에게 제일 가까운 사람, 가장 많이 의지하는 사람. 그건 김석진. 사실이다.






근데, 사실이란 단지 부분일 뿐이라고.
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들 궁금하지 않고, 누군들 상상하지 않았을까. 금수저에 얼굴까지 잘난 전교 일 등과, 홀릴 것처럼 예쁘지만 가난한 천애 고아의 청춘 학원물. 누구나 궁금하고,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에 있는 건. 김석진이 기은효에게로 향하는 모든 관심과 관계를 차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형과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김석진의 서늘한 눈빛만 없었더라도. 태형은 단순히 김석진이 그냥, 기은효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친구의 탈을 썼음에도 감춰지지 않는 집착이. 태형의 눈엔 분명히 보였다.





"석진아, 제발, 응?"
"...싫다고 했잖아."
"석진아아아..."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

"...언제는 귀엽다고 했으면서."





안 들리는 척, 관심 없는 척. 태형은 벽에 머릴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소음 속에서, 은효와 석진의 목소리는 어째 평소보다 선명히 들려왔다. 김석진의 목소리는 어딘가 곤란한 듯했고, 기은효는 꽤 여우 같은 구석이 있어서 김석진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어쩐 일로 조금 투닥거리는가 싶더니, 기은효가 김석진의 이름을 재차 길게 늘여 부르는 것으로 끝났다. 가까이 다가온 기척에 태형은 눈을 떴다. 은효가 웃음기 어린 얼굴을 하고 태형의 앞에 서있다. 눈썹을 꿈틀거린 태형은 은효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긴다. 김석진은 짜증 나 죽겠다는 얼굴로 태형을 보고 있다. 저 간질거리는 협상의 주제가 자신이었던가.





"태형아."
"어......"
"너 매일 점심 안 먹길래, 혹시..."
"......"




뜻밖의 화제에 태형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은효가 특유의 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태형의 이름을 재차 부른다. 목소리 끝에, 아까 김석진을 쥐고 흔들었던 애교가 묻어있는 것 같다. 그게 또 심기가 불편한지 김석진은 손으로 이말 짚었다. 곁눈질로 김석진을 보고, 태형은 고갤 반사적으로 끄덕였다. 부러 더 다정한 눈을 하고 은효를 마주 본다.




"어디 아파?"
"...아, 그냥. 귀찮아서."
"그럼 오늘도 안 먹을 거야?"
"......"


"기은효, 그냥 가자니까."




김석진이 둘 사이에 불쑥 들어왔다. 은효가 입을 삐죽 내밀고 석진을 흘겨본다. 석진은 은효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가자니까, 재차 재촉하면서 태형을 쳐다본다. 김석진의 입가에 애매하게 비웃음이 걸려있기에, 태형의 미간이 좁아진다. 은효는 지난번처럼 또 무력하게 김석진에게 끌려가나 싶다가, 태형의 이름을 부른다.





"태형아."
"응."

"괜찮으면, 오늘 우리랑 같이 밥 먹을래?"


"기은효."




김석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어깨를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뻔하다. 석진의 눈치를 한 번 보고, 은효가 태형에게로 손을 내민다. 고개만 끄덕이면 김석진이 저를 눈빛으로 얼려 죽일 것 같다. 뜻밖의 상황에 정지된 태형을, 은효가 다시금 부른다. 태형아.




"같이 가자, 태형아."




내 이름이 이렇게 달았던가.





결국 한 손엔 대차게 삐져버린 김석진의 팔, 한 손엔 영문을 모른 채 끌려가는 김태형의 손을 붙들고. 은효는 잔인하다 싶을 만큼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위험하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태형은 제 손가락에 감긴 비극의 징조를 분명히 느꼈지만. 발목까지 차오른 우연과 필연들이 무언가 웅얼대는 것도 같았지만. 하지만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 놓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말했던 에세이 안 까먹었지. 다음 주까지다. 석진이가 책임지고 다 걷어와."
"네."

"그리고 태형이는 뭔지 설명 못 들었으니까. 그것도 석진이가 도와줘라."




네, 하고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석진이지만 표정은 그렇질 않다. 그러거나 말거나 통보해버리고 영어 선생은 교실을 떠났다. 은효는 석진의 눈치를 본다. 기은효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김석진이 김태형을 싫어한다는 것쯤은 안다. 문제는 왜 싫어하는지를 모른다는 거지. 프린트를 정리하고 있는 석진의 손등을 은효가 콕콕, 찌른다.





"석진아, 바쁘지...?"
"......왜?"
"태형이 에세이는, 그냥 내가 도와줄까?"

"아니. 내가 할게."





석진이 꽤나 쌀쌀맞게 대꾸해버리자, 은효는 바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웅얼댄다. 그냥, 너 태형이랑 사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석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한다. 그런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김태형."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태형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눈을 잔뜩 찌푸린 뜬 채 고갤 들었다. 김석진이 예의 그 싸늘한 표정으로 서있다. 태형의 책상 위에 종이 서너 장을 펼쳐놓는다. 이거, 다음 목요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에세이. 넌 설명 못 들었으니까 나랑 같이 쓰면 될 거야. 조곤조곤 설명하는 말들은 친절하지만, 표정엔 냉기가 서려있다. 태형은 석진을 쳐다보다 꾸물꾸물 볼펜을 꺼내 쥐었다. 김석진은 정말 훌륭한 반장감이네. 태형은 그런 생각도 했다.



"여기엔 직전 석차 쓰면 돼. 칸에는 대학이랑 학과 채우면 되고."
"......."
"여긴 자유 형식. 성장과정, 장단점. 그런 거. 그리고 이쪽은 스킬 그래프."





일단 키워드를 잡아놓고 시작하는 게 좋아. 일단 키워드 채우는 것까지는 도와줄게. 석진은 확인하듯 태형의 눈을 본다. 태형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졸음이 묻은 얼굴을 하고선 아주 느릿느릿 시작한다. 석진도 태형의 앞에 앉아 열심히 뭔가 적고 있다. 태형은 슬쩍 석진의 종이 위를 들여다본다. 지망 대학, 지망학과. 그 외 이것저것. 그리고 교우관계. 딱 기은효 이름 하나만 쓰여있다. 그렇게나 주변에 친구가 많으면서.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두와 잘 지내면서. 참 어지간하다고 생각했다. 태형의 속에서 정체 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무언가 스멀거렸다. 태형은 석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한 마디 건조하게 툭.






"기은효랑 많이 친한가 봐."
"........"


"단순히 친하기만 한 건가."


"김태형."





그 목소리는 차갑다. 태형은 웃으면서 석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다. 끊어질 듯 팽팽한 공기 사이로 석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됐다. 한숨에 가까운 한 마디였다. 김석진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나버렸다. 태형은 실소했다.





김석진의 그 짧은 망설임과 이도 저도 아닌 대답. 아무 말도 못 하고 미약하게 떨리던 입가.

그렇다.



마음이란 무능하다.


















관계란 참 사랑스럽고 애틋한 것이다 싶은데,
그 앞에 '이해'가 붙어, 이해관계가 되는 순간.


머리 아프고 끔찍스러운 것이 된다.







에어컨 바람도 곧 일부에겐 스산하게 느껴질 것이다. 세상을 다 녹여버릴 것 같은 여름도 그 기세가 꺾일 텐데, 이 궁금증과 서낙한 열망은 가실 줄을 모르는지. 지겹도록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한 풀 꺾일 만도 한데. 왜 그 애에 대해서는 지루함도 실망도 없는지. 태형은 괴고 있던 고갤 틀어 교실 뒷자리를 바라본다. 비어있는 책상 하나가 외로워 보인다.





문제집 위에 처박고 있는 서른 개가량의 뒤통수.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담임이 넌지시 석진을 부른다. 김석진이. 교무실로 따라 온나. 그리 말하고 슬리퍼를 끌며 앞문을 빠져나간다. 사슴처럼 고갤 꼿꼿이 든 김석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을 한 번 둘러본 뒤 몸을 일으켰다. 교탁을 지나 오는 김석진의 눈이 정확히 태형을 보고 있다. 태형은 덤덤한 눈으로 응수한다. 김석진은 서늘한 낯을 하고, 조용히 태형의 앞을 지나쳐 간다. 멀어지는 뒤통수에 대고 태형은 입꼬릴 비죽였다.





담임과 김석진의 부재. 교실 안은 늘 그렇듯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김남준을 필두로 한 일부는 여전히 학업에 몰두하고 있다. 반면 교실 뒤쪽엔 껄렁한 녀석을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들의 수다는 저급함을 향해 내달릴 것이고 말이다. 무슨 얘기들을 풀어놓으려는지 눈빛들이 열박하다.






으레 사내 녀석들이 일정 이상 모이면, 서열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학교 안에선 어떻고 이 교실 안에선 어땠을까.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김석진이 앉아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아랠 내려다보고 있다. 꼭 관대한 통치자 같은 모양새로 말이다. 김석진에게 선택받은 소수의 아이들, 즉 어딘가 하나씩 특출난 점이 있는 녀석들. 김석진과 여러모로 결이 비슷해 보이는 김남준. 김석진과 죽이 잘 맞는 정호석. 그 아래엔, 위에 올라가 보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아이들. 한편, 김석진이 그곳에서 미끄러지길 기다리는 것만 같은 또 다른 일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망하고 서있는 김태형. 피라미드를 멀찍이 두고 서서, 남의 일인 것 마냥 보고 있는 김태형.













"내가 부른 이유는, 잘 알 거라 생각한다."
"......"

"왜 그랬냐."




담임 선생은 그저 덤덤하게 물었을 뿐이다. 약간의 의문 정도를 담았지만. 화가 난다거나, 비난한다거나 그런 종류의 표정은 아니었다. 석진의 앞에 내밀어진 답안 카드들, 정확히 말하자면 김석진의 지난 기말고사 전 과목 답안 카드들. 석진은 그만큼이나 덤덤한 얼굴로 있었다. 담임은 한숨과 함께 의자를 돌려 석진을 등졌다. 석진은 가만히 주먹을 움켜쥔다. 묵직한 정적이 석진의 정수리를 내리누른다. 담임의 걸걸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는덴, 꽤 시간이 걸렸다.




"여태껏 모의고사도, 내신도 죄다 만점이던 놈이."
"......"

"방심해서 그런 실수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담임은 복잡한 얼굴로 답안 카드들을 펼쳐놓는다. 의도한 것처럼 비어 있는 전 과목 마지막 문제. 석진은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일부러 그런 거, 맞지?"
"......."


"어쩌다 한 번, 반항해보고 싶은 마음이면, 그럴 수도 있다치고 넘어가마."




너 김석진이잖냐. 믿는다. 담임의 투박하지만 애정이 담긴 손이 석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석진은 잘 만들어진 표정, 순종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석진은 일부러 모든 과목의 마지막 문제를 답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계산된 결과였다. 늘 상 만점이었던 자신과, 항상 약간의 간극을 두고 있는 은효의 점수. 그다음 학생과의 차이까지 계산해, 석진은 은효를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거기에 필요했던 건, 일부러 비워둔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정답일 거라는 확신. 평생을 1등으로 살아왔으니, 어쩌다 가끔 그럴 수도 있다며 웃어넘길 아버지의 관대함. 의도된 행동임을 들키더라도, 김석진이니 믿는다며 넘어갈 만큼 두터운 신뢰.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 높던 자존심과, 완벽함이라는 타이틀을 기꺼이 팔아넘길 정도의. 마음.









석진은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너무나 선명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꿈.





단축수업으로 일찌감치 텅 비어버린 학교, 나른한 오후. 더위가 조금은 뒷걸음질을 치는 네시. 부드럽게 부는 바람. 기분이 좋은지 은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금 새 질렸는지 책을 덮는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선, 읽던 책을 베개 삼아 책상에 엎드린다. 작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는다. 긴 속눈썹이 눈가에 번지듯이 그늘을 만든다. 석진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둑질이라도 하는 기분이 들어 시선을 거둔다. 제 책 위의 빼곡한 활자들을 눈으로 훑는다. 물론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실, 은효의 옆에 있기만 하면 되었기에 책 내용 따윈 관심도 없다. 그래서 석진도 이내 책을 덮어버렸다.






은효야, 졸려?
응, 조금.



자고 있어. 이따가 깨워줄게.





은효의 눈가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겨주는데, 은효가 대뜸 석진의 손을 잡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석진을 보면서 배시시 웃는다. 웃는 게 하얗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정말 새하얀 웃음이었다. 석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귀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은효가 석진의 손에 깍지를 껴온다.






석진이 너는 손이 차갑네.
손이 차가운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던데.


뭐라는 거야, 대체.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리는 그 순간, 손가락 끝에 은효의 입술이 스친다. 석진은 화들짝 놀라서 은효의 손을 뿌리쳤다. 은효는 별 이상하단 생각을 않는지. 멀뚱히 석진을 쳐다보고만 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어서, 석진은 귓가를 문지르며 고갤 숙였다. 한 손으론 빨개진 얼굴을 가린 채 다시 책을 펼친다. 파들대는 것 같은, 어딘지 레몬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 여름 바람이 불었다. 조금 침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미안해.
미안해, 석진아.




그렇게 매일 조금씩 망가지고 있다.















"학생, 이거 증정품이 없는데?"
"제가 민증을 두고 왔는데..."
"저기, 혹시 번호 좀..."





머리 아프다. 은효는 한숨과 함께 겨우 몸을 의자 위로 떨궜다. 하루 종일 온갖 진상들에게 시달린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습관적으로 찾아오는 두통에, 주먹 쥔 손으로 머리를 한 번 꾹 눌러보았다. 억지로 장착하고 있던 생계형 미소가,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에서 떨어져 나간다. 넋 나간 사람처럼 천장만 보고 있다가, 눈앞의 모든 게 방전되는 것처럼 뚝뚝 끊어짐을 느꼈다. 피곤해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눈가를 문지르고 하품을 한다. 집에 가야겠다.





구불구불 휘어져 있는 계단이 오늘따라 가파르다. 가로등 빛에 의지해서, 꼭 스테이지를 깨는 용사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간다. 오늘은 유독 힘겹다고 생각하면서, 갑자기 감당할 수없이 몰려오는 피로에 잠시 발을 멈췄다. 썩 보기 좋진 않겠다만 가로등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한다. 감긴가. 이 여름에. 하기야 먹고 자는 것만도 버거운 마당에, 무슨 병에 걸려도 이상할 건 없지 싶었다.





"야."
".......어?"


"왜 그러고 있냐."





머리 위로 새카맣게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창백한 얼굴 하나가 은효를 내려다보고 있다. 민윤기였다. 확고한 취향, 상하의 모두 새까맣게 입은 민윤기는, 하얀 얼굴만 가로등 불에 물들어있다. 학교에선 이렇다 할 교류도 없지만, 근처에 산다는 것쯤은 아는 사이. 무미건조한 사이. 딱 그만큼으로 민윤기가 거릴 좁혀온다. 은효는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 어지러워서.





"지금 들어가나 봐?"
"응, 너는?"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그 대답에 뒷받침이라도 하는 양,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온 고양이 하나가 어느새 민윤기의 발치에 안착해있다. 꽤 친밀한 사이인지 민윤기의 다리에 제 몸통을 부비작대고 있다. 적어도 기은효보단 친하겠다 싶은데. 민윤기는 삐딱하게 매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려 무언갈 꺼낸다. 하얀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걸 보니 고양이 간식 같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간식을 까서 대령하는 민윤기를 보고, 은효는 소리 죽여 웃었다. 아픈 와중에도 웃음은 나왔다. 민윤기는 퉁명스러운 표정이다.





"어디 아프냐?"
"어? 응...감긴가..."



"얼른 들어가라."




어느새 간식을 깨끗하게 털어먹었는지, 고양이는 이젠 까슬한 혀로 제 털을 정리하고 있다. 민윤기는 고양이를 한 번, 은효를 한 번. 지그시 쳐다보다가 고갯짓을 했다. 은효는 고갤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움에 몸이 잠깐 비틀대는 걸 민윤기가 못 봤을 리 없다. 은효는 머쓱하게 웃고 돌아섰다. 학교에서 봐, 윤기야. 으레 하는 인사 뒤로, 민윤기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작게 따라붙었다. 너무 무리하진 마라. 은효는 대답 대신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떻게 사는 게 나한테 어울리는 건지 모르겠어.
















어둠 속을 한참 헤매다가, 무언가 자신을 붙드는 느낌에 눈을 뜨니. 모든 게 꿈이었고, 눈앞엔 석진이 있었다. 조그마한 창문으로 쏟아지는 가로등 빛이 김석진에게만 내리는 듯하다. 깨어나길 여태 기다린 듯,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김석진의 옆모습이 오늘따라 눈물 나게 반갑다. 아직도 열이 가시지 않은 눈꺼풀을 힘겹게 깜빡거리는데, 자는 동안 겨우 눌러놨던 기침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눈 뜬 석진의 고개가 은효를 향한다. 표정 없는 김석진은 잘 만들어놓은 인형 같다. 석진은 어떤 말보다 먼저 은효의 이마에 손을 짚어본다. 아직도 펄펄 끓는 온도에 석진은 인상을 쓴다.






"병원 안 갔지."
"...약 먹었어."


"이 약 안 듣는다니까, 병원을 가야지. 은효야..."





핀잔을 늘어놓으면서도 목소리는 다정하다. 얼마 못 참고 또 터지는 기침에, 석진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가방을 뒤적여 이것저것 꺼내놓는다. 방구석에 던져둔 백팩 옆에, 익숙한 프랜차이즈 봉투가 보인다. 죽 사 왔어, 얼른 먹고 약 먹어. 은효가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분주한 손놀림으로 상을 펼쳐놓는다.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안 돼."





빈속에 먹으면 안 된대. 조금이라도 먹어.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한다. 은효는 흐릿한 눈을 깜빡대다가, 앓는 소릴 내며 몸을 일으킨다. 식은땀이 흥건한 등으로 석진의 팔이 닿아온다. 석진은 자연스레 은효의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이마에 닿는 차가운 손가락에 은효의 눈이 천천히 내리감긴다. 석진은 낮게 웃는다.




"너는, 밥 먹었어?"
"응. 아까, 남준이랑 간단하게 먹었어."
"...과외는 어쩌고..."

"금요일로 미뤄달라 했어. 걱정 말고, 얼른 먹기나 해."




일회용 수저를 뜯어서 손에 쥐여주고, 석진이 푸스스 웃으며 머릴 쓰다듬는다. 은효는 천천히 죽을 먹다가, 가만히 휴대폰을 보는 석진을 쳐다보다가, 다시 또 한 입 넘기다가. 겨우 반도 못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다 먹었냐는 듯 돌아오는 시선에, 고갤 끄덕이고 뚜껑을 덮었다. 석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약봉지를 꺼내놓는다.





"은효야, 그냥 병원 갈래? 삼촌한테 말해놓을게."
"아니야...그냥 좀 더 자면 나을 거 같아."


"걱정돼서 그래."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손등 위로 떨어지는 손가락은 섬세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창문을 넘어온 주황색 가로등 빛이 이불처럼 몸을 덮어온다. 올려다본 석진의 눈이,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 주황빛 속으로 녹아드는 것만 같다. 이건 명백한 현실인데, 꿈처럼 아득해서 은효는 석진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석진아."
"응."


"...나, 꿈을 꿨는데."





뺨을 쓰다듬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그 짧은 공백에 은효는 흐릿하게 웃었다.





"어떤 여자가 나왔는데, 계속 날 쳐다보더라고."
"......"
"우리 엄마였을까. 혹시."





근데 그냥, 인사도 안 했어. 자꾸 쳐다보기만 하길래 왜 그러냐고 하려는데. 그런데. 먼저 뒤돌아서 사라지더라고. 그거 보니까, 딱. 아, 진짜 엄마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그렇게 매몰차게 뒤돌아가는 데. 뒷모습이 어디서 꼭 본 것 같이 느껴져서. 그래서.





"참 웃기지."
"......"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덤덤한 말투로 이어가는 은효의 말끝에 허무한 웃음이 어렸다. 진짜 엄마가 살아 있으면, 그럼 엄마도 내 꿈을 꿨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웃기더라고. 석진은 점점 아래로 떨궈지는 은효의 얼굴을 보면서. 서글픈 입꼬릴 보면서. 눈물이 맺힌 눈을 보면서 입술을 물었다. 석진의 손이 가만히 멈추자 은효는 손바닥에 뺨을 묻는다. 석진아, 하고 이름이 불린다. 나직한 목소리.





"근데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울음처럼 웃어버린 은효가, 석진의 손에 깍지를 껴온다. 그렇게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석진은 그냥 눈을 감았다. 은효가 내뱉는 숨이 일렁이는 불빛처럼 석진에게로 날아들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모든 게 이대로 멈추는 것. 뻔하디 뻔한 말로 어설픈 위로는 하지 말라고.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자는 입에 고통을 입에 담지 말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말하지. 너는 살아남기 위해, 나는 너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할 뿐인데. 너와 내가 쌓아올려 가는 모든 게 죄가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온다. 둘이면 된다고, 서로에겐 서로만 있으면 된다고. 그럼 행복할 거라고, 그런 철없는 소망만을 웅얼거리고 있을 뿐.





"석진아."
"...응."


"난 더는 잃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가만히 껴안은 몸이 애틋할 만큼 작고 가벼웠기 때문일까.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무는 석진을 보며 은효는 또 예쁘게 웃었다.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은효의 등을 토닥였다.





난 가진 건 없지만, 소중한 건 있어.
그래서 정말 소중한 건, 절대 안 놓치게 꽉 안고 있을 거야.



나한텐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태형아?"
"지나가는 김에 들렸어."





예고도, 기척도 없이 들어온 태형이 아이스크림 두 개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계산을 마치니 하나를 은효에게 건넨다. 이건 네 거. 좀 있으면 끝날 시간이네. 태형은 자연스럽게 가방을 풀어놓았다. 제 방인 것 마냥 편하게, 편의점 앞 의자에 늘어져서 의자를 흔들흔들. 카메라로 여기저기 찍었다가, 확인하고 또 지우고, 그렇게 삼십 분 동안 은효를 기다린다. 알게 모르게 자연스러워진 느낌으로.




"오늘도 사진 찍으러 다닌 거야?"
"응, 근데 좀 별로."
"다른 동네 가지 그랬어."



"네가 여깄잖아."




그냥, 너 보고 가려고 했지. 태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런 말을 던져놓고, 뻔뻔스레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씹었다. 은효의 귀가 순식간에 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태형은 그런 은효를 흘끗 보고선 피식피식 웃었다. 발그레한 볼. 은효는 괜히 말을 돌린다. 태형의 카메라를 가리키면서 묻는다. 나 구경해도 돼? 태형은 대답 대신 카메라를 건네준다.





"아, 맞다. 내가 말 안 했나."
"뭘?"
"사진 공모전, 그거 상금 천만 원이다."
"진짜? 그거 받으면 뭐 할 건데?"



"...너 고기 사줘야지. 천만 원어치."




에이, 또 이상한 소리 한다. 은효의 웃음소리가 둘 사이에서 사르르 녹아내린다. 진짠데. 안 믿네. 태형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은효가 턱을 괸 채로 태형에게 다시금 묻는다. 뭐 하고 싶어?






"여행 가야지. 사진 찍으러. 또 그 사진으로 돈 벌고."
"어디로?"
"......우즈베키스탄?"
"......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거야."
"거기 예쁜 여자 많은데잖아. 그래서 그러는거지?"
"너도 예쁜데. 그만하면."
"아, 네. 이만하면 됐죠. 감사하네요."
"장난이야."





은효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태형을 째려본다. 태형은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장난이지. 그리고 뭐, 딱히 생각 안 해봤어. 이렇게 말하면 또 생각 없이 산다고 그러더라. 태형은 은효에게 쥐여줬던 카메라를 가져와, 능숙하게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은효의 얼굴을 담는다. 그리고 렌즈 너머의 은효가 말한다. 어딘지 침울한 얼굴로.




"우리 나이에, 생각하고 사는 애들도 드물지 않나."
"...그런가."


"나도 그냥 별생각 없이 살아."




아니, 그러려고 하는 편인데. 그냥 해야 된다니까 하고, 하지 말라니까 안 하고. 또 세상엔 생각처럼 안되는 게 더 많으니까. 은효는 독백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네. 태형은 낮은 목소리로 대꾸한다. 태형은 은효의 내리깐 눈이, 속눈썹이, 다물리는 입술이. 복숭앗빛 뺨이. 그 모든 것들이 카메라 속에 들이찼을 때, 셔터를 눌렀다. 태형의 카메라 속에 은효의 얼굴이 점차 늘어간다. 태형의 휴대폰 안에, 일기처럼 써놓는 메모들도 점점 늘어간다.






있잖아.
그땐 그저 잠깐, 감기 같은 건 줄만 알았는데.




우연이 여러 번 반복되니까, 그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더라.






[김석진/김태형] 갈증 01-05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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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hecy
안녕하세요 여러분...저를 기억하고 계실까요 ^_ㅠ...
고 사이에 이직도 성공하고, 삶에 여유가 좀 생겨서 염치 불구하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제 글 많이 좋아해주셨던 분들이 생각나서, 그리고 석진이랑 태형이가 자꾸 생각나서
이 글을 포기할 수가 없더라구요...이전엔 못 썼던 얘기, 분량 때문에 지나쳤던 얘기들을 보태서
다시 한 번 시작해보려구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답글
독자1
2 중간에 보다가 끊겨서 너무 아쉬웠어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이제 진짜 인연이 누가 될 지 알게 되겠죠😆

다시 정주행하겠습니다~!

•••
독자2
하ㅜㅜㅜㅜ 쟈가님ㅜㅜㅜㅜㅜ 보고싶었어요ㅜㅜㅜㅜㅜ
•••
prophecy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님 😭😭😭
•••
독자3
헐 작가님ㅠㅠㅠ 오랜만이에요ㅠㅠ 정말ㅠㅠ 보고싶었습니다ㅠㅠ 오랜만에 보니까 다시 새롭네요... 이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답글
prophecy
ㅠㅠㅠ기억해주시구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열심히 다시 써보겠습니다 💪🏻💪🏻💪🏻
•••
독자4
안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ㅠㅠㅠ 너무 좋아요. ㅠㅠㅠㅠ
•••답글
prophecy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ㅜㅜ 사랑합니다 독자님...
•••
독자5
작가님 ㅠㅠㅠ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갈증 읽으니까 너무 재밌네요 다음 내용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답글
prophecy
감사합니다 독자님 ㅠㅠ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해요
•••
비회원165.46
와...대박입니다... 어서 다음 글도 올라오기를 ㅠㅠㅠ 예전에 썼던 갈증 글은 다 지우신건가요?? ㅠㅠ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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