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를 기분 좋게 짼 뒤 뛰어가다가 넘어진 상태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아마 굉장히 쪽팔릴 것이다.
거기다 그 사람이 전남친이라면? 쪽팔리다 못해 도망가고 싶어질 것이다.
모두가 다 그러겠지. 그럴 것이다. 진짜로.
“..괜찮으세요?”
“아, 감사합니ㄷ...”
“....가나다?”
“...헐.”
망했다.
만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뒤돌아 미친 듯이 뛰어갔다. 그냥 무작정 내 앞에 서 있던 그 놈, 정택운을, 그 멀대같은 놈을 피하기 위해서 되도 않는 달리기를 하며 뛰었다.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정택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한참을 뛰었을까, 헉헉대며 숨을 고르고는 앞을 살펴보았다. 어, 여긴.. 내가 신나서 뛰쳐나온 학교 앞 아파트 단지였다. 여긴 분명 지나온 것 같은데.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천천히 돌려보니 집 방향이 아닌 정 반대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바보같은 짓을 해도 유분수지. 뛸 곳이 없어서 여기로 오냐. 혼자 머리를 쥐어박으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한숨을 푹 쉬며 너털 걸음으로 걸어가던 도중 옆에서 누군가가 읊조렸다.
“집……. 거기 아니면서.”
이제 헛것이 들리나 라는 생각에 머리를 헝클어뜨리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까 마주쳤던 정택운이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러듯 그 잘난 포커페이스인지 뭔지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망할 새끼.. 왜 여기로 오고 난리야 진짜. 아 여기 앞이 얘 집이였지. 내가 이상한건가. 내가 이상한건가보네. 괜한 쓰잘데기없는 생각들로 내 머리 속을 괴롭히다 애써 지워본다. 방금 있었던 일이 다시금 떠오르며 두 볼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나는, 진짜로 괜찮은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쉰 뒤, 걸음을 이어갔다.
*
“ 누나, 선물은?”
“ 선물? 서어언물? 내가 니 때문에 뭔 상황이 일어났는지 아니, 이 망할 아이야? ”
“ 뭔데, 뭐 지나가다 돈이라도 잃어 버렸어?”
“ 차라리 그게 낫겠다. 그것보다 더한 거지. 아주. ”
“ 뭔데? 알려줘, 아 뭔데.”
“ 몰라도 돼. 기다려봐. 가지고 올게.”
“ 이응, 얼른 와."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야자를 짼 이유는 이 어여쁜 나의 친척동생에게 있었다. 어화둥둥, 이리보고 저리봐도 이쁜 내새끼 내새끼하는 이홍빈이였다. 친척이라고는 단둘밖에 없고 피붙이도 없던 나와 이홍빈은 연년생으로 태어나서 여느 친형제들과 다름없이 자라났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홍빈에게 더 우쭈쭈 해주는 일들이 많았고 이를 본 엄마 말로는 커서는 그 개지랄 그만 떨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물론 난 전혀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지만. 그런데 이모네가 이모부의 사업 때문에 이사를 가면서부터 반년에 한 번씩, 일방적으로 이홍빈이 우리 집으로 오는 걸로 뭐 얼굴은 몇 분 못 보더라도 우리는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이 오늘인거고, 거기에다 이홍빈 생일축하 겸 이였으니. 나로서는 당연히 야자를 쨀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축구화 망가졌으면 어떡하지. 급하게 가방에 있는 축구화가 망가지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축구화 님은 무사평안하게 계셨다. 박스를 꺼내는데 밖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려왔다.
“ 아, 언제 나오냐고!”
역시 저 멍멍이새끼는 선물을 받을 마음이 없는게 틀림없다. 은혜모를 강아지똥 같으니라고.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냥 주지 말고 다시 넣을까.
나름 진지하게 고민을 하며 들고 나오는데 아까 마주친 정택운이 생각났다. 축구하면 정택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연했던 조합은 그를 다시금 되새기기에 충분했다.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친한 애들과도 말도 잘 안 섞는 애가 운동만 하면 웃기를 하지 않나, 심지어 말까지 하니. 오 지저스 주여 저건 무슨 운동만 하는 로봇인가요. 아니 로봇치고 너무 하얀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석고상인건가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괜히 지나가다 마주친 정택운 때문에 별 생각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에 재빨리 거실로 향했다.
“야, 가져.”
“헐, 누나..”
“알바 하느라 허리 빠지는 줄 알았어. ”
“미쳤다 진짜. 아 사랑해.”
그 눈으로 사뭇 진지하게 고맙다하고는 까르르대며 신발 사진을 여기저기 찍는 이홍빈의 행동은 남고생이라기보다 여고생에 가까웠다. 마치 음식을 앞에 둔 내 모습 같았달까? 얄밉긴 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뿌듯한 마음이 커져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으니 돌아오는 말은 역시나 개같았다.
“음흉하게 웃지 좀 마, 누나. 변태 같아.”
“뭐?”
“변태 같다고.”
자신의 몸을 엑스자로 가리며 변태야 저리가를 연달아 외치는 이홍빈에게 그에 걸맞은 짐승같은 눈빛으로 호응하며 달려들었다. 변태가 니 누나여서 좋겠다 아주 라고 하며 와락 껴안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한 대 친다.
“아, 근데 학교 수행 때문에 바로 가봐야돼. 미안.”
“헐, 그럼 왜 왔어. 오지 말지.”
“그래도 오기로 했었잖아. 와야지.”
자신의 짐을 챙기고는 신발을 신고 간다며 손을 휘휘 젓곤 이홍빈은 나갔다. 그래도 나름 우리만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는 이홍빈 때문에 친척이여도 이렇게 친한 것도 있고 더 정이 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홍빈을 보내고 방에 들어와 가방을 뒤적였다. 필통에, 유인물에, 교과서, 문제집까지……. 공부도 안하는 주제에 가방은 뭐가 이리 많은건지. 별에 별 물건이 다 있는 가방에 두 팔을 걷어 올리곤 책장에다가 끼워넣고 쓰레기를 버리던 도중 바닥에 굴러다니던 무언가가 손에 잡혀왔다.
다름 아닌 쪽지였다.
‘ 이제 아프지 말고 얼른 나아.
14.05.09.
정택운 씀.’
삐뚤빼뚤하지도 않고 정갈한 글씨체인게 이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보면 이걸 어떻게 알아보냐며 눈살을 찌푸리며 볼지 몰라도, 연필로 쓰여 여기저기 다 번져 알아보기 힘들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알아보기 쉬운 쪽지였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정택운이 처음 말을 건 날 이였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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