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00 (부제:엄마의 일기장)
“달래야 엄마 간다!”
“어어 잠시만요! 금방 나갈게!”
“그러게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나지 그랬어. 엄마 여행 가는 날인데.”
“미안미안. 어제 좀 늦게까지 놀았더니.. 하하”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엄마 없다고 너무 늦게까지 놀러 다니고 그러면 혼나.”
“알았어요. 엄마 이러다 늦겠다. 연화 이모랑 삼촌들 잔소리 듣기 전에 빨리 가요.”
“명심해. 남자는 다 늑대야. 조심해! 일단 승관이 빼고! 승관이는 내가 따로 잘 말해놨으니까.”
“치- 엄마는 내 나이 때 만난 삼촌들 그렇게 많으면서.”
“삼촌들도 늑대였어. 지금은 나도 삼촌들도 늙어서 괜찮아.”
“어? 나중에 삼촌들한테 일러야지.”
“그러던지 말던지. 사실인걸. 암튼 엄마 간다!”
“응, 잘 다녀와요. 전화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름을 알리는 장맛비가 세차게 세상을 향해 떨어지곤 했는데 어쩜 엄마가 여행가는 날 딱 맞춰서 비가 그치고 밝은 햇살이 젖은 도로를 비추었다. 덕분에 나도 기분 좋게 엄마를 보내고 못다잔 잠을 위해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다. 평소같았음 바로 잠들었을 나인데 웬일인지 쉽게 잠들지 않았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어제 늦게 까지 놀다 날 데려다 준 승관이가 생각나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전화기를 들었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은 휴대폰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자식은 내가 도착하면 연락하라니까, 뭐 나도 어제 도착하자마자 잠들긴 했지만 여튼!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니 긴 신호음 끝에 승관이의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
“야! 부승관!”
-“아.. 뭐야. 진짜 아침부터..”
“너 내가 어제 연락하라 그랬지! 하여튼 니가 내 말을 곱게 듣는 걸 본 적이 없다니까.”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대뜸 잔소리를 퍼부어대는 내가 우스운지 여전히 잠긴 목소리의 승관이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어, 약올라.
-“야”
“어제 비도 오고 얼마나..”
-“야”
“뭐”
-“너 심심하지?”
아니라곤 못하겠네. 괜히 찔리는 마음에 어버버 거리니 그제야 크게 웃으며 기지개를 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일찍부터 승관이의 잠을 깨웠다는 사실에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지만 승관이도 이젠 익숙한 듯 보였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항상 발동하는 나의 객기가. 방 한 가운데 서서 전화를 받던 나도 침대에 걸터앉아 승관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밝은 햇살이 따뜻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 토요일, 그것도 요 며칠 간 엄마마저 집에 없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기에 승관이의 전화마저 아니었다면 낯설고 심심했을 것이다. 그 때, 멍 때리며 앉아 있는 날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다른 약속 없냐?”
“..어? 약속? 없어. 심심해.”
-“넌 나 아니면 어떻게 살래?”
“누구보다 잘 살건데.”
-“과연”
“아,암튼 오늘 우리집 와라. 엄마도 며칠 동안 안 계신단 말야.”
-“아, 맞다. 어머님 여행 가셨지?”
“응. 그러니까 과자랑 이것저것 좀 사와.”
-“뭐야, 내가 언제 간다고 말한 적도 없구만.”
“울엄마가 너한테 다 얘기 해놨다 했는데?”
-“어머니 그새 너한테 말하셨어? 깜짝 놀래킬려고 했더니.”
“역시 넌 나한테 안된다니까.”
-“자기소개 하지말구. 진달래.”
“닥쳐. 그래서 언제 온다구?”
-“점심 먹고 갈게.”
“아 좀만 일찍 와. 나 밥 차려먹기 귀찮은데..”
-“누구는 너 차려주고 싶겠니.”
“알았어. 오기 전에 연락해.”
-“알았..”
괜한 심술을 부린답시고 승관이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복수를 했다는 맘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기지개를 키고 물이나 마실까 부엌으로 가니 언제 다 적어두신 건지 냉장고엔 엄마의 예쁜 글씨가 가득 적힌 노란 쪽지가 붙여져 있었다.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글을 딱딱 정리해놓은 쪽지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엄마가 없는 동안 달래가 할 일>
1. 달래방 대청소
2. 부엌 싱크대 밑 선반 정리
3. 라면만 먹지 않기
4. 음식물 쓰레기 잘 처리하기
5. 빨래 제때제때 하기
6. 엄마한테 연락 자주 하기
7. 엄마방 먼지 정도는 청소 해주기
마지막으로 승관이랑 너무 오래 같이 있지 말기
엄마도 승관이 믿지만 승관이도 남자야 명심해!
쪽지를 읽으면서 어젯밤 엄마가 식탁에 앉아 열심히 썼을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치만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 조금은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워낙 귀차니즘이 심한 성격 탓에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밥도 잘 안 먹는데. 아직은 깨끗한 집안을 훑어보다 문득 빨래가 눈에 들어왔다. 속옷들이 널려있는 것을 본 나는 승관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빨래를 내가 해본 적도, 개어 본 적도 없기에 서툴지만 꼼꼼히 빨래를 개고 엄마 옷을 들고 엄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성격답게 깔끔하게 정돈된 방은 언제 봐도 내 방과 참 달랐다. 텅 빈 엄마방을 보니 갑자기 엄마의 빈자리가 훅 느껴졌다. 옷장 문을 여니 옷을 얼마나 가져간건지 옷장이 거의 비어있었다. 이리저리 옷을 넣는데 옷장 맨 아래 구석 낡은 상자가 하나 손에 들어왔다. 별로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작진 않았다. 교과서 여러권 들어갈 정도?
“이게 뭐지?”
빨래를 넣다말고 내 두 손은 누런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니 원래는 밝은 노란색이었던 건지 빛이 닿지 않은 상자 안 쪽 벽은 빛바랜 누런 겉모습관 달리 샛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언제적 일기며 편지인지 누런 종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꽤 굵은 일기장 두 권, 편지지 한 뭉텅이.
“와, 이게 다 뭐야. 진짜 많네.”
일기장을 펼쳐보기 전 왠지 모를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익숙한 바른 글씨가 적혀 있는 낡은 일기장, 대충 짐작컨대 이건 엄마의 어릴 적 일기가 분명했고 엄마가 이제껏 나에게 이 상자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걸로 보아 옛날 옛적 엄마와 삼촌들, 이모의 추억이 담긴 비밀 이야기가 가득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헌책방에서나 맡아볼 법한 냄새가 상자 안과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지엔 엄마의 글씨체와는 전혀 다른 편지가 가득했다. 그래 아마 이건..
“연애편지다!”
고요했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눈 앞에 빨래는 잊혀진지 오래였다. 편지와 일기, 엄마가 오기 전까지 모조리 읽어 버리겠다 다짐한 나는 우선 일기장을 먼저 펼쳐들었다. 일기장 표지는 누가 손으로 정성스레 그린 듯 각자 다르게 생긴 귀여운 곰돌이가 7마리 그려져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다 그제야 내 입에선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마 삼촌들과 엄마, 연화이모겠지. 한명한명 맞춰가다보니 마지막 곰돌이에서 문득 생각이 멈춰버렸다. 익숙한 듯 낯선 이미지의 곰돌이. 이모와 삼촌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따지니 한 마리가 남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돌을 맞은 것 마냥 묵직해졌다.
“아빠..?”
낯선 단어였다. 적어도 내겐. 엄마말로는 내가 태어나고 딱 세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들었다. 힘들었던 시절 워낙 바쁘셨던 아빠였기에 아빠와 내가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고 이유는 모르지만 엄마마저 아빠의 사진을 내게 많이 보여주시지 않으셨다. 아빠를 궁금해하던 어린 시절, 엄마는 내게 그저 슬프게 웃어보이며 나와 참 많이 닮았다고만 알려주셨다. 커서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 있어서 아빠란 너무나 큰 존재여서 아직도 마음이 휑하다는 사실을. 어쨌든 아빠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거의 기억도 사진도 없는 아빠. 그런 아빠의 어릴 적 엄마를 만나 사랑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은 너무 멀리 가버린 아빠, 그런 아빠에게 조금은 가까워 질 수 있을까. 아빠의 옛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기쁜 마음에 당장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고 일기장의 첫 장을 넘겨보니 여백의 누런 종이 위에 엄마의 글씨체완 다른, 누군가 볼까싶어 빠르게 휘갈겨 쓴 짧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넌 내 맘 속에 영원히 지지 않는 진달래꽃-
유치하다고 치부해버리기엔 이 짧은 글 한 줄은 나에게 너무나 묵직한 진심으로 느껴졌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엄마와 이모, 삼촌들 그리고 아빠의 추억이 담긴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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