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자연스레 상황이 역전되어, 오히려 된통 당하고는 녹음파일 마저 지워져버렸다.
이젠 핸드폰 액정만 봐도, 녀석한테 안겨서 앙앙대는 소리나 내던 내 목소리가 생각나 얼굴이 달아오른다.
녀석은 그런 내 심리를 읽기라도 했는지, 종종 녹음을 해야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새디스트 자식.
내 기분만큼이나 흐린 오늘 날씨.
참 여러가지로 가기 싫게 만드는 구나.
터덜터덜 정문에 다다랐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일기예보에는 날씨가 흐림으로 되어 있어서 비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후다닥 빗속을 뚫고 가는데, 정문에 있던 선도부도 비를 피하느라 바쁜 와중이다.
"으...!!.. 빨리빨리...!"
"......."
정문 앞에 살짝쿵 놓여져있던 낡은 책상을 챙겨가는 선도부 학생 사이로,
비를 맞으면서도 웃는 얼굴로 의자를 챙기고 있는 반장이 보인다.
잠깐 한 눈을 판 그새, 녀석과 눈이 마주쳐버린다.
나는 고갤 휙 돌려 학교 건물 안으로 뛰어간다.
"헥헥..."
"어, 왔어? 역시 오늘도 아슬아슬하구만."
"안녕... 헥..."
"헐, 너 완전 쫄딱 젖었다."
"응..? 아....."
어느 새 교복이 흠뻑 젖어있다.
덩달아 머리까지 빗물로 감겨져서 꼴이 말이 아니다.
교실 뒤편 거울로 꼬라지를 확인하며 얼굴을 찡그려본다.
털썩 자리에 앉아서 한숨을 한번 쉬자마자, 주머니 속에 물이 묻은 핸드폰이 울린다.
대충 팔로 물기를 닦아내서 화면을 확인하니, 녀석의 문자가 와 있다.
나는 확인할 것도 없이 책상서랍에 핸드폰을 쑤셔넣는다.
"아침부터... 콱 그냥..."
"뭐?"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친구가 곧 이야기 보따릴 풀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난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런 편안한 분위기에 어쩐지 행복해진다.
얌전히 머리를 털며 친구의 말을 듣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는 바람에, 이야기는 종결된다.
거의 동시에 들어와서, 내 시야의 대각선 상으로 앉는 녀석이 보인다.
표정이 심각하다.
조회시간 내내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왠지 모를 불안 때문인지 탓에 몸을 떤다.
어찌저찌 조회가 마쳐지고, 녀석이 나를 힐끔보더니 성큼 걸어온다.
나는 녀석과 한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제치고 있다.
"우산 없어서 비 맞았구나?"
"......"
"그러다 감기 걸리겠다.... 이거, 입어."
"...어...?"
녀석은 자신의 손에 들린 체육복을 내게 내민다.
나는 반 애들 눈치를 살피느라 곁눈질을 하다, 썩은 웃음을 지으며 거절한다.
"아니... 괜찮아..."
"입어."
웃으면서 말하는데 그 속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알아, 너무 무섭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웅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체육복을 건네 받는다.
녀석이 웃는 얼굴을 끝으로 자리로 돌아가고, 친구는 반 애들의 마음처럼 나에 대한 관심을 쏟아준다.
"뭐야 뭐야?"
"...뭐가 뭐야."
"야, 왕자님의 애정을 받는구나."
"....왕자가 참 또라이네."
"뭐?"
"...아니다."
"뭐해? 빨리 갈아입고 와~"
"......"
반 애들의 눈치를 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를 피한다.
질투의 눈을 한 아이들도 있고, 부러운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아이들도 있다.
어느 쪽이던 내게는 그리 달갑지 않아서 후다닥 여자 화장실로 뛰어간다.
'...이걸 배려라고 해야할지..'
손에 들린 체육복을 보며 한숨을 쉰다.
확실히 그 녀석이 머리가 좋긴 한가보다, 이런 식으로도 나를 괴롭히다니.
입으면 반 애들이 쏘아볼 것 같고,
안 입으면 녀석이 죽일 것 같다.
나는 지금 당장 편히 있을 곳은 이 화장실 칸 뿐인 것 같아 가만히 앉아서 고민을 하고 있다.
나를 재촉하는 수업종 소리에 천천히 엉덩이를 떼어 조용히 체육복을 들고 나온다.
발을 질질 끌고 화장실을 나오려는데, 화장실 앞에서 녀석과 딱 마주친다.
녀석은 다른 애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말한다.
"입으라니까."
"...어떻게 입냐."
"....?"
"반 애들이 다 나 벼르고 있는데 어떻게 입냐고."
"......"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녀석은 팔짱을 낀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들며 나를 다시 화장실로 떠민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빨리 갈아 입고 와."
"아, 왜 이렇게...!..... 보채는데...!"
"...너 다 비쳐."
"뭐?"
나는 내 상의를 한 번 내려다본 후, 녀석을 바라보며 얼굴을 구긴다.
"안에 나시 입어서 괜찮아."
"...안 괜찮으니까 빨리 갈아입어."
"......"
"아니면 노출증이야?"
"!...누가 노출증이야...!"
"그럼 빨리 (갈아입으러) 가.
나 먼저 반에 가 있는다."
그러고는, 녀석은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짜증이 나서 발을 구르다 시간이 없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옷을 갈아 입는다.
녀석은 그 후, 오전 중에 나와 아무런 말도 섞지 않았다.
나는 또 웬일인가 싶었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가는 걸까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야자 1교시에 복도 중앙으로 나와'
이 자식이 또 웬일로 떳떳하게 중앙으로 보자고 하나 싶다.
나는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2층의 복도로 발걸음을 옮긴다.
녀석은 어느 새 나와서 창문 쪽을 보며 2층 복도 의자에 앉아 있다.
나는 그 뒷모습에 대고 '으휴' 하며 주먹을 올렸다 내린다.
"왜."
"...옆에 앉아봐."
"......"
"빨리."
나는 조용히 얼굴을 찌푸리며 옆자리에 앉는다.
"네가 이해해."
"...?"
"내가 애들한테 완벽해지려는 건, 다 너 때문이야."
"....?"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녀석.
"내가 잠깐 너 쳐낼거야."
"...뭐?"
"그동안 외로워서 딴놈한테 붙지마라."
난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는데,
녀석은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
복도에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애 두 명이 지나간다.
"왔다."
"...뭐?...!..야, 뭐해..!"
"그냥 가만히 있어."
".....아...씨..."
녀석이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어깨 동무를 해온다.
나는 밀어내려다 그냥 얌전해진다.
내쪽으로 고갤 숙이고 있던 녀석이 옆을 돌아보며 자연스럽게 여자애 두 명을 쳐다본다.
여자애들은 움찔하더니 또 다시 슬리퍼를 끌며 반으로 후다닥 뛰어간다.
시야에서 여자애들이 사라지자, 녀석은 내 어깨에 있는 손을 거둔다.
"......"
"......"
"...딴 놈하고 붙기만 해봐.
전학가게 만들어 줄테니까."
"뭐...?"
"나 먼저 들어간다."
제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녀석을 보며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입술을 물며 뒤에서 주먹을 올리다, 팔을 툭 내리며 잠시 벤치에 앉아있다.
도대체 또 무슨 꿍꿍이인 걸까.
그리고 다음 날,
교문 앞에서 마주친 선도부장과 나는 눈이 마주친다.
오늘은 또 얼마나 가식을 떠는지 구경하려는데, 말없이 내게서 시선을 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