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발
무료하다, 무료해. 인생이 무료해 미치겠다. 임팩트 있는 하루로 넘쳐났던 요근래에 비교하면 오늘은 너무나도, 아니 심각하게 반응이 없는 휴대폰이다. 그날 김도영은 또다시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는 홀연히 사라졌고 수능이 끝난 후에도 연락 한 번이 없었다. 설레발이 아니라니? 그럼 나 고백 받은 건가. 며칠을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에 머리카락을 헤집다 이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나저나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만나자는 연락 한 통이 없다니... 괜히 머쓱해져 sns에 들어가 별 감흥없는 염탐을 시작했다.
"얘가 남자친구가 있었던가? 대박이네."
뭐가 그리 분주한지 각자의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영상으로 가득 찬 스토리를 보며 감탄하던 것도 잠깐이었다. 중학교 동창이었던 시준희의 스토리에 익숙한 손과 옷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고 내가 본 게 그 애가 맞는지 확인을 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 결국 또 사고를 쳤다.
'이름 님이 🎉를 보내셨습니다.'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준희 얘랑 연락 안 한 지 얼마나 됐더라. 아마 한 4 년 정도... 이 정도면 남이라 칭해도 될 시간인데 갑자기 보내는 메시지가 저런 폭죽이라니! 손톱을 물어 뜯으며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중 휴대폰에 불빛이 들어오며 알림음이 울렸다. 그냥 실수라 해야 할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야 할까? 도통 나오지 않는 해결책에 휴대폰을 덥석 잡으며 생각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n_ct_jhee_ 님의 메시지 |
🎉 헐 이름아! 오랜만이네 ㅠㅠ 어... ㅋㅋ 안녕 응응 잦ㄹ 지냇어?? 헐 추워서 오타가 ㅠㅠ 미안 ㅎㅎ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뭐 해? 응 나야 뭐 잘 지냈지 나 그냥 집에서 휴대폰하지 아하! 나는 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밖인데 ㅎㅎ 그럼 내일은 뭐 해? 글쎄 집에 있지 않을까 ㅋㅋㅋ 헐 그럼 우리 내일 만날래? 오랜만에! 어... 시간 되면 그러자 ㅎㅎ... 응응 그럼 만나는 거다! 6 시에 네오 공원 분수대 앞에서 봐! |
@n_ct_jhee_ 님의 메시지 |
준희야 나 분수대 앞인데 어디야? 엥? 아직 안 왔어? 아니 나 도착했는데...? |
소통이 되질 않는 대화에 내가 이해를 못한 건가 싶어 대화 내용을 다시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아직 안 왔어라니... 삼인칭으로 말한 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메시지에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던 중 어깨를 잡아 오는 손길에 이제야 도착한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내 눈앞에 서 있는 건 커피 한 잔을 손에 꼭 쥐고 있는 김도영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에 눈을 깜빡이며 당황스러움을 내비치자 내 손에 따뜻한 커피를 쥐여 주는 김도영이다. 이런 순간에도 넘치는 친절과 배려로 나를 미치게 하는 김도영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어... 안녕."
"안녕, 성이름."
"응... 여기서 보네."
"그러게."
"난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그럼 이만..."
"그 약속 나랑 한 약속인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혹시 나만 모르게 이 세상이 나에게 몰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김도영을 향한 내 과몰입을 도와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넋 놓으며 김도영을 빤히 쳐다 보니 김도영이 고개를 돌리며 내 시선을 피한다. 나를 등진 것은 괘씸하지만 빨개진 귀는 숨길 수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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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도영은 저녁을 먹은 후 영화를 보는 흔하디 흔한 데이트 코스를 해냈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시간과 일정에 기분이 좋아 살짝 웃음을 짓자 김도영이 따라 웃는다. 왠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몇 분을 걸었을까, 집 앞에 도착해 인사를 하려는데 김도영이 반응이 없다. 내가 아무리 연애 경험이 적다고 해도 이런 쪽으로는 드라마로 꿰찬 경험이 넘친단 말이다. 설레발이 아니라더니, 김칫국을 5 그릇은 마신 기분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고 엘리베이터에 타니
"잘 가."
문이 닫히기 직전에 버튼을 눌러 손에 편지 하나를 쥐여 주는 김도영이다.
To. 성이름안 |
녕, 성이름. 네가 이 편지를 받았다는 건 몇 년 동안 한 고민들을 내가 드디어 끝맺음했다는 거겠지. 나에게 너는 확신이 서지 않는 존재지만 이렇게 한 번 진심을 전해 볼게. 언제적 고백 방식이냐며 비웃어도 좋아. 다소 지루할지도 모를 편지지만 이 편지에 내 진심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너는 나를 기억 못하겠지만 우리의 첫 만남은 고등학교 1 학년 때야. 매번 가는 독서실 그 자리에서 졸고 있던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너였는데 이런 감정이 스며든 건 왜 나였는지 아직도 의문이야.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을 부정하진 않아. 오히려 더 커졌다면 네가 믿을 수 있을까? 너를 좋아했던 3 년 동안 내 신경 온통 너였어. 너랑 마주치기 위해서 반까지 옮겨 가며 네 눈에 들려고 노력했었는데 네 지갑을 주웠던 그 날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 네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멈췄어. 이러한 감정을 네가 알아 주길 바랐던 게 욕심이었는지 넌 나를 피하기만 했지만 그것마저 좋았어, 나는. 몇 년 간의 고민의 결실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더는 주체하지 못할 만큼 네가 너무 좋아. 네 마음이 나와 같다면 나에게 전화해 줘. 기다리고 있을게. 너와 내가 온전히 같은 마음이길. From. 도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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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은 알고 있었을까? |
작가의 말 |
드디어 설레발이 진짜 끝났네요! 원래 하 편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너무 열린 결말로 해 놔서 여러 커뮤니티 댓글에서 외전이라도 내 달라는 말이 많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짧게 드리고 갑니다. 도영이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정우 작품에서 더 좋은 글로 찾아 봽겠습니다. 독자님들 메리크리스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