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 셋이, 얽히지 않는 사이가 됐다면 어땠을까. 태형은 생각했다. 평범한 친구들처럼 놀러도 다니고 서로에게 진심을 다해도 이상하지 않으며 부모님 앞에선 웃는 탈을 쓰고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어렸을 적 엄마의 말처럼 도움이 되는 관계가 되고는 말았을까. 태형은 아파오는 머리에 눈을 질끈 감으며 담벼락에 등을 댔다. 입가에선 하얀 입김이 뿜어져나왔다. 입김 사이로 점점 형체를 들어내는 태형의 양 귀가 붉었다. 꽤 오랜 시간 밖에 있었음을 증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관계를 쌓아나간 저를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정국과 자신이 친한 친구였을지라도 지민이 나타나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스스로에게 결론을 내렸다. 더이상의 나약함은 사치다. 태형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켜 시간을 보았다. 밤 12시 35분.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에도 태형은 지민을 기다렸다.
'태형아 보고 싶어.' 달랑 한 문장만 쓰여있는 문자에도 불구하고 지민의 집 앞까지 찾아 온 제가 너무 우스웠다. 태형의 입가에서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비식 흘렀다. 지민의 말에는 항상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문제였다. 허겁지겁 나온 탓인지 얇게 입은 태형의 등이 오늘따라 유달리 작아보였다. 나도. 지민의 문자에 대한 답이 나즈막히 태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태형아."
고개를 푹 숙여 담벼락에 기대 지민을 기다리고 있던 태형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백여우. 수천번이고 그렸던 지민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지민을 본 것 치곤 태형의 눈동자가 꽤나 건조했다. 냄새가 났다. 지민의 주위에서. 넘실거렸다. 정국의 페로몬 향이.
"왜 너가 여기 있어 태형아. 나 기다렸어?"
아무렇지 않은 지민의 말투에 태형은 이를 악물었다. "나를 부른 건 너야, 지민아. 보고 싶다고 한 건 너야." 흑표범이 감정의 폭포에서 소용돌이 쳤다. 너가 날 불렀는데, 너는 왜. 뒤를 잇지 못하는 말이 입 끝에서만 뱅뱅 맴돌았다. 태형은 원망의 눈빛으로 지민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래 저 눈빛. 지민의 속내와 다르게 순백한 색깔만 담아내고 있는 저 눈빛을 보면 불에 잔뜩 휩싸올랐던 몸이 팍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병신 머저리일지라도 지민의 앞에서면 난 아무 행동도 취할 수가 없다.
"원래 친구는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도 뛰쳐나오고 그러는 거야?"
"……."
태형의 아랫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애가 끓었다.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정말, 친구야? 묻고 싶은 말이 한 가득이었다. 태형이 한숨을 뱉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긴 입김이 흩어져 내렸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눈빛 하지 마 지민아." 태형이 지민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하다가 지민의 앞으로 걸어갔다. "제발…." 애원을 하는 태형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있었다. 지민은 코 앞으로 다가온 태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모든 순간이 고요했다. 태형의 눈동자를 제외한 채. 태형은 손을 뻗어 지민을 붙잡고 그대로 품 속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태형에게 안김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부동의 자세였다. 태형을 끌어안지도, 당겨안지도 않는 정자세. 지민이 자신에게 긋는 일종의 선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넌 변함 없구나. 마음을 줄 듯 안 줄 듯 그러는 거.
"또 나 혼자 착각한 거구나."
분명 먼저 말을 꺼낸 건 넌데. 태형이 여전히 지민을 안은 팔을 풀지 않는 채 얘기했다.
"네 옆에 있으면 항상 갈증이 나."
"……."
"근데 너가 내 옆에 없으면 그땐 정말,"
죽여버리고 싶어 전정국을.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지민아. 흑표범이 끝내 포효했다. 기다렸다는듯 터져나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왜 전정국을 만났는지 물어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지민의 입에서 저의 자격을 다시 한 번 깨닫기가 무서운 탓이였을 것이다. 태형아,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이 문장은 태형을 참 많이도 무너지게 했다.
"물어봐줘."
"……."
"전정국 왜 만났는지, 물어봐 줘."
그리고 그런 태형을 다시금 일으키는 것도 지민의 몫이었다. 태형은 고개를 숙여 지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태형이 입을 다물자 고요한 정적이 자리잡았다. "나, 이제 자격 있어?" 태형이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 얘기했다.
"아직은." 이 전쟁의 키를 가지고 있는 지민의 대답이었다.
오만과 편견
김태형 X 박지민 X 전정국
[정국아 선물 못 전해 준 게 하나 있어. 잠시 내려와.]
정국의 핸드폰이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났다. 형형하게 빛나는 정국의 폰 화면 덕에 정국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정국은 무거운 눈꺼풀을 떠 흐릿한 시야로 문자의 내용과 발신인을 확인 했다. 박지민. 15년동안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던 시계가 밤 10시임을 알려주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책상 위에 덩그라니 놓여져있는 향수를 흘끔 보았다. 일렁거렸던 태형의 눈동자가 다시금 떠올랐다. "여자를 만나라…." 증얼거린 정국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늑대는 상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 죽어서도 변치 않고 그 사람만을 사랑한다. 어쩔 수 없는 종족의 특성이었다. 빌어먹게도.
정국은 깊은 한숨을 뱉고 집을 나섰다. 불어오는 겨울 바람에 정국이 걸친 검은색 트랜치코트가 흩날렸다. 옷을 한 번 더 여미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계단을 내려갔다. 밑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민이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보아도 지민의 코가 꽤나 붉었다. 매서운 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서있는 지민을 보자 정국의 발걸음이 남 모르게 빨라졌다.
"왔어?"
"추운데 왜 여기까지 왔어."
"선물 못 전해준 건 나잖아. 바보같이."
정국은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러 지민의 목에 둘렀다. 목도리 위로 드러나는 지민의 눈이 샐쭉이 접혔다. 지민은 덤덤하게 자신의 목에 목도리를 두르는 정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왜 내가 준 코트 안 입고 나왔어?"
아마 지민이 전해 준 코트는 평생 입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게 전해주던 그 순간이, 눈에 가득 담아놓았던 그 모든 것들이 닳지 않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냥." 정국은 주체할 수 없는 커다란 마음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제 감정을 정의하는 단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자, 여기."
지민이 건네 준 것은 꽃이었다. 꽃다발 속 분홍색의 꽃은 지민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꽃?" 정국은 되물었다.
"응. 생일 축하한다고 꽃다발 전해주려 했었는데 까먹었어. 알잖아. 그때 상황."
"……."
"태형이는 왜 건드렸어?"
지민의 물음이 정국의 심장을 관통했다. 글쎄. 왜 건드렸지. 너랑 딱 붙어서 웃고 있는 김태형이 너무 미워 보였나. 정국은 지민의 물음을 회피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꽃 고마워."
"대답을 피하는구나."
"나 이만 가볼게. 아, 목도리는 김태형이 보면 화낼 거야. 그냥 너 마저 둘러." 지민은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어 정국에게 건네고 뒤를 돌아 저벅저벅 걸어갔다. 미련이 없어보이는 그 작은 몸짓에서 정국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지민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에겐 기폭제의 역할을 했다. 태형에게로 가는 지민의 모습을 보는 정국의 오른손이 강하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힘줄이 돋아났다.
네 입에서 김태형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국이 그려 쥔 꽃다발 속에서 꽃잎이 떨어졌다. 정국은 그 꼴을 보고 다시 꽃다발을 들어 가득한 분홍색의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가운데에 꽂혀있는 '리시안셔스' 라는 조그만 종이가 눈에 띄었다. 리시안셔스. 정국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꽃말은 변하지 않는 사랑.
죽어서도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것. 제 선조가 자신에게 남긴 유일한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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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정체성을 모르시겠다면 제 의도가 성공한 겁니다 (의도한 척)
항상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암호닉분들도 제가 하나하나 다 기억하구 있어요. 임호닉이 없지만 댓글 달아주시고 읽어주시는 독자분들도 제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해요 (울뛰)
독방에서 제 글 언급이 몇 번 되는 거 같은데, 그게 좋은 쪽이로던 아니던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을 던지고 갈게요.
아마 다음 화 부턴 슬슬 커플라인이 진행 될 거 같습니다 (모름)
암호닉은 [닉네임] 으로 항상 받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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