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겐 필터링 上
*
남자가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빨간 장미와 하얀 안개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나 기쁜 표정도, 고맙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이 웃으며 내 손에 꽃다발을 쥐여주었다. 남자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들리지가 않았다. 다시 말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졸업 축하해, 세훈아. 남자의 입이 다시 벙긋거렸다. 그리고 난 꿈에서 깨어났다. 베개가 땀에 젖어 축축했다.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것처럼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스스로 다독였다. 괜찮아, 전부 꿈이었어. 나는 지금 현실에 있다.
시계는 벌써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백현은 나가고 없었다. 일부러 자신을 깨우지 않은 것이리라. 그 다운 행동이었다. 전화기를 붙잡고 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끊기고 뒤이어 여보세요, 하고 백현이 전화를 받았다.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회사에 잘 도착했냐는 나의 물음에 백현이 웃었다. 잘 도착했다고, 그러니까 너도 냉장고에 반찬 꺼내서 밥 챙겨 먹으라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나는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전화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현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 꿈을 꾸고 나면 난 꼭 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기 전, 백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일찍 들어갈게. 나는 알겠다고 했다.
나의 시간은 늘 여유로웠다. 백현을 만나기 전부터 해 온 카페 아르바이트만 아니었다면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될 정도로. 백현은 자신이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다며 그만두라고 종종 말했으나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리고 그 카페는 백현에게도 의미가 있다면 있지, 없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나와 백현은 그 카페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첫 번째는 게이바에서.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알아낸 바였다. 조용하고, 분위기도 괜찮으며,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아내기 위한 곳이 아니라 가볍게 술만 마시다 갈 수 있는, 그런. 처음이었다. 게이들이 있는 장소에 간 것은. 문을 연 순간 기분이 어땠는지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더럽고, 끔찍하고, 토할 것 같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조차 역겨울 정도였으니까, 말 다했지.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자책하며 다시 나가려는 내 손을 백현이 잡았었다.
"왜요? 놀다가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그대로 도망쳤었다. 달리면서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준 이름 모를 사람을 수없이 욕했다. 개새끼, 빌어먹을 새끼, 거지 같은 새끼……. 백현은 지금도 종종 그때를 회상하며 중얼거리곤 한다. 진짜! 처음 봤는데 너무 내 이상형인 거야. 원래 거기서는 그러면 안 되는데, 놓치면 끝일 것 같아서 확 잡았지. 그런데 매정하게 뿌리치고 가버리는데, 내가 얼마나 허무했는지 알아? 듣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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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에 백현을 다시 만났다. 아까 말했다시피, 그 카페에서. 백현은 날 보자마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 당신! 백현의 얼굴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바에서는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까. 백현은 커피를 주문하며 내게 쌍팔년도 작업멘트를 날려댔다. 저 기억 안 나요? 혹시 시간 있어요? 알바 언제 끝나요? 같은. 어이가 없어서 대답도 해주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아웃팅 되지 않도록 조곤조곤 말하는 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하루는 백현이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적이 있었다. 이러면 곤란하다는 나의 말에 백현은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 같은 사람 많이 봤어요. 게이 맞잖아요. 아니었으면 주먹부터 날라왔겠지.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게, 그렇게 싫어요?
나는 단박에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서 누구 사귈 마음 없어요. 이러지 마세요."
백현은 눈을 아래로 깔더니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좀 아쉬웠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백현과는 끝날 줄 알았다. 그리고 그건 내 착각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백현은 그 다음 날에도 날 기다렸다. 괜히 화가 나서, 날 기다린 백현에게 짜증을 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에요. 내가 화를 내도 백현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저도 포기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얼굴 한 번이라도 봐야 살 것 같은 사람을 어떻게 포기해요. 있잖아요, 첫눈에 반한 거에요. 그러니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잖아요."
절절한 사랑 고백에 잠시 벙쪄있는데 백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도와줄게요.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거에요? 힘들게 안 할 테니까, 내일 저랑 영화 한 번만 봐요."
나는 백현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고, 그 이후로 우린 만나기 시작했다. 백현은 정말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손도 2달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잡았다. 그것도 내가 먼저. 그전까지는 스킨쉽을 거부했었다. 그 날, 백현은 내 손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나는 백현의 사랑 속에서, 동성애자 오세훈으로서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
1년 전이었다. 백현이 넌지시 나랑 같이 살래, 하고 물어온 것은. 그때 우리는 한강 둔치를 걷고 있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있자, 백현이 다시 중얼거렸다. 나는 너랑 같이 살고 싶어. 알았다는 나의 대답에 백현은 그 자리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딱히 백현이 싫지도 않았고, 나랑 살고 싶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온 말이었다. 실제로 백현과의 동거는 편안했다.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만족스러웠다.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1시. 나갈 준비를 할 때였다. 도시는 구름에 뒤덮여, 꼭 회색 물감을 쏟은 것 같았다.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까지 오면 백현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앞치마를 맸다. 카페는 한산했다. 분위기에 맞춰 틀어놓은 음악만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안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같은 반의 한 남학생을 좋아하게 됐다. 그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잘생겼고, 성격까지 좋아서 무척이나 인기가 많았다. 처음에는 그저 동경으로 시작했었다. 마음에서 작은 불씨가 튀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나 자신이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19년을 이성애자로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애가 발표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웃거나, 공부하거나 하는 모습을 몰래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접어라, 접어라. 오세훈, 접어라, 하고.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수없이 되뇌었다. 졸업할 때까지만 참자. 졸업할 때까지만. 졸업하면 끝이었다.
그리고 올 것 같지 않던 졸업식이 찾아왔고, 나의 첫사랑도 끝이 났다.
문에 달린 종이 작은 소리를 냈다. 카페로 들어온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물에 젖은 머리를 털었다. 왜 갑자기 비가 오고 난리야. 수건이라도 줄까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접어라. 남자는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세훈? 여전히 낮은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그래, 그 아이였다. 사이렌은 끊임없이 울렸다. 접어라…….
"……박찬열?"
마음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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