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아웃 |
순간 덮쳐오는 것은 검은 불안감. 어렸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깨달을 수 있었던. 엄마는 내 눈에서 새어나오는 불안감을 읽은 모양인지 내 손을 더 꾹 쥐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엄마 금방 올 거야. 저 누나 말 잘 듣고 애들이랑 재밌게 놀고 있어. 알았지? '
" 도경수 또 조냐. "
아직도 졸린 눈을 비비는 나를 보며 내 어깨를 치대는 변백현을 뒤로하고 급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서 변백현을 보며 작게 탄성을 터트리는 신입생들을 보면 그저 웃길 따름일 뿐. 저 멀리서 그 긴다리를 휘적거리며 손을 흔드는 박찬열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 한 쪽에 붉은색으로 책 자국이 길게 늘어져 있는게 여지없이 자다 일어난 모양이었다. 여어, 작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실없이 방긋. 병신같이 헤헤 흘리고 다니는 웃음에 쓰러지는 여자애들은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웃음이라고 하겠지만 알고보면 박찬열의 다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 덕분에 박찬열의 주위에는 여자가 여럿 꼬이는 편이었고 덕분에 박찬열의 모토는 어느새부턴가 '오는여자 안 막고 가는여자 안 막는다.' 주의.
아이러니한 점은 보수적인 박찬열의 부모님은 다른것엔 다 보수적이면서 박찬열의 바람끼돋는 행동에는 아무런 제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박찬열이 이야기하는 박찬열 부모님의 말을 빌리자면 ' 너같은 새끼는 나중에 새끼라도 잘 봐야한다. ' 이 문장을 들어보면 그다지 여자를 만나는 일에 호의적이지 않음을 나같은 멍청이도 잘 알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박찬열은 들은 문장을 그대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아메바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언젠가 박찬열에게 박찬열 왈 '독설 전문가' 변백현이 ' 이 아메바같은 새끼야, 철 좀 들어라, 여자는 어떻게 꼬시냐? ' 라고 물었더니 ' 여자 꼬시는건 다 본능적인거 모르겠냐? ' 라는, 말도 안 되는 대답으로 변백현을 당혹스럽게 만든 전적이 있는 놈이니 할 말 다 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메바라는 말에 발끈해서 무어라고 반박 할 텐데.
그리고 슬며시 자신이 나보다 키가 크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박찬열이 크다, 좀 많이.) 내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며 내가 무어라고 이야기 하기도 전에 ' 빨리 가자, 늦겠다. ' 하며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변백현. 독설전문가는 박찬열이 붙여준 별명으로 사실 생각해보면 단순한 점이 꽤 많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박찬열에게만 뿜어내는 독설 덕분인지 박찬열이 지긋지긋하다며 붙여준 별명이었다. 변백현과는 어렸을 때 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이로 고아원에 엄마가 데려다 준 첫 날, 처음 솜사탕을 건넸던 아이이기도 했다. 변백현은 항상 그 얘기를 꺼내곤 하며 친절인지 호의일지 모를 것들을 항상 베풀곤 했다. 괜히 부담스럽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을 변백현은 고개까지 저어가며 자랑스럽게 하곤 했으니 어떻게 보면 헌신적이라고 볼 수 있었고 어떻게 보면 멍청하고 고지식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변백현은 가볍고 깃털같은 존재였지만 사실 그것도 외면적인 껍데기일 뿐 하는 행동을 보자면 그렇게 깃털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오글거리지만 전형적인 외강내유타입. 뭐 그렇게 박찬열과 나, 변백현 이렇게 셋이 뭉쳐다니곤 했는데 나랑 달리 변백현과 박찬열은 인기가 많았다. 여러 모로. 덕분인지 나는 얻어먹는게 많았다. 초콜릿부터 시작해서 가끔씩 빵이나 도시락까지. 원체 식탐이 많은 놈들이라 가끔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쳐다보는게 쳐다보는 거라고 먹는 것에는 가끔 투덜거리는 박찬열 외에는 별 다른 제지가 없었다. 변백현은 너무 물렀고 박찬열은 너무 단단했다. 그 사이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 뿐이라서 그렇게 셋이서 무난하게 살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앙다문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같은 목소리에 백현이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찬열을 쳐다봤다. 주위 아이들은 숨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을만큼 조용하게 그 둘의 관전을 지켜보았고, 괜히 시끄러운걸 싫어하는 나는 아이들 사이로 연신 미안하단 말을 남기며 급식을 받아들었다. 둘의 관전이 계속되자 이쯤되면 주변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저 멀리서 선생님 몇이 둘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렇게 선생님 몇이 끼어들어 말리고서야 관전을 그만두기로 한 모양인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식당 한 구석에 처박혀 시선은 둘에게로 고정한 채 한참 밥을 떠먹자 내가 어딨는지 안 박찬열이 아이들 사이를 밀쳐내며 다가와 내 머리를 수저로 가볍게 내리쳤다.
역시 오늘도 변한게 하나도 없는 지루한 하루인게 틀림 없었다.
집에 가는 길은 언제나 단조롭다. 왼쪽엔 박찬열, 오른쪽엔 변백현 그리고 중간엔 도경수. 항상 변함없는 자리배치였다. 그다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있어 변함없는 자리배치는 나쁘지 않았지만 단조로운 생활은 나로 하여금 그 날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요새 계속해서 꾸는 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사이로 한 손엔 솜사탕을, 한 손엔 엄마의 손을 꼭 쥐고 회색빛의 흐리게 보이는 뿌연 배경과 마치 대조되듯이 밝게 웃으며 걸어가는 나. 아무것도 바뀐게 없었다. 이렇게 가다가 남은 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을 직감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단조로운 생활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 우리 뭐 먹고 들어갈래? "
한참의 침묵 끝에 말을 꺼낸 찬열의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내가 아닌 백현이. 평소에도 돌아가는 길엔 서로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이 침묵이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찬열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돈이 필요할 때면 찬열의 돈으로 계산하곤 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듯. 찬열과 함께 살기 시작한 날 이후부터 아주 당연하다는듯 해 온 행동들. 백현이와 한 행동들, 그리고 찬열이와 한 모든 행동들이 점점 낯설어지기 시작 할 때즈음일지도 모른다. 그 꿈을 꾸기 시작한 때가.
" 학생은 안 받아. "
작게 그럼그렇지. 하는 백현이의 목소리와 뒤이어 애교부리듯 이야기하는 찬열이의 행동. 한참을 안된다고 손사래치던 아주머니가 결국은 밝은 목소리로 알겠어, 학생. 대신 한 병만 마시고 들어가? 하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나는 반짝거리는 네온사인에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백현이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고는 나를 툭 건드렸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백현이와, 초록색 소주병 뚜껑끝을 질겅질겅 물어 뜯으며 생글생글 웃어보이는 찬열이.
" 자리에 앉아. "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백현이의 목소리에 나는 마법이 걸린 것처럼 플라스틱 의자위로 몸을 얹혔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하는게 얼마 만이더라. 사실 저녁 늦게 나가는 일이야 찬열이네 집에서 찬열이를 불렀을 때나, 저 혼자 클럽에 싸돌아다닐때 뿐이고 야자 한시간에 어둑어둑해져 집에 돌아오면 그 이후론 바깥 풍경을 볼 새도 없이 잠에 들었었다. 고아원에 들어가기 전엔 호기심도 많고 궁금한것도 많았었는데. 고아원에서의 일들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어서 뭐든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텃세도 심해서 조금 세 보이는 사람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참으로 영악해서 욕을해도 웃었고 먹을 것을 뺏겨도 웃었다. 언젠가는 데리러 오겠지 라는 희망도 어둑어둑해져 있을 무렵, 우리 도망갈까? 하는 백현이의 말에 백현이와 나는 그대로 짐을 싸들고 도망쳤다.
그 때가 중학생 2학년 무렵이었으니까, 거의 사 년째 일이었다. 처음엔 갈 데도 없었고 할 것도 없어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악착같이 돈을 긁어 모았다. 나 뿐만 아니라 백현이도. 피시방, 전단지, 편의점 할 것 없이 돈을 긁어 모으면서 공부는 아르바이트 시간을 쪼개서 했고 밥은 굶거나 고아혜택으로 공짜 급식을 먹었다. 낯간지러운 것은 없었다. 부모가 없었다는 것에 편견을 가지는 부모들은 많았지만 싹싹하고 밝은 백현이의 성격 덕분인지 오히려 교육을 잘 받았다 라고 생각 하는 부모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짓밟히지 않으려면 짓밟아야 한다라는 것을 고아원에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했다. 백현이처럼 성격이 그리 좋지도 못했고 밝지도 못했기 때문에 백현이가 사교성에 한 측면을 담구고 있었다면 난 공부쪽을 선택해야 했다.
악착같이 공부했고 고아라는 단점을 극복해 오히려 엄마들에게 부모님도 없는데 공부를 그렇게 잘 한다더라. 너도 본 좀 받아라. 하며 오히려 사귀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돋보이는 장점 하나로 단숨에 사귀고 싶은 사람이 된 것이다. 깊게 이야기하긴 좀 그런 이야기지만 여튼 그렇다. 고아인데도 공부를 그렇게 잘 한다더라. 제대로 들어보면 속이 상할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다면 가릴 것 없는 우리에게 그건 그 나름대로 행운이었다.
빈 소주잔을 들어올린채 흡사 이모티콘 같은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 놓는 찬열을 보며 백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걸 알고 있는 둘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괜히 순대볶음만 젓가락으로 쿡쿡 쑤셨다. 지루했다. 일상에 작은 틈이 생겼지만 그 작은틈은 견고한 지루함에 별다른 흥미를 주지 못했다. 조금만 더 큰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히 견고한 지루함은 깨질것이 틀림없었다.
*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해가 가면 갈 수록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엄마가 돌아올 거란 희망은 버린지 오래였고, 오랜기간동안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 덕분에 아무것도 되지 않을거란 생각만 맴돌고 있었다. 친절해 보이던 고아원 선생님은 시간만 되면 짜증내기 일쑤였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오는 먹을 거라곤 가끔 나오는 소세지같은 반찬 이외의 것들이었다. 당연히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고아원을 막 들어간 직후 놀던 남자아이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18세의 변백현, 도경수, 박찬열과 같이 5살의 변백현, 도경수, 그리고 그 남자아이. 잠시 스쳤던 인연이지만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건, 서로 살기위해 아둥바둥 거리는 아이들 틈에서 잠시나마 이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겨준 아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 야 우리 반에 전학생 왔다? "
찬열의 말에 그제서야 샤프 머리를 두어번 꾹꾹 누른 백현이 다시 바쁜 손으로 샤프를 놀렸다. 드디어 미쳤네. 작게 내뱉는 독설에도 아랑곳 않고 그 큰 다리를 자랑이나 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찬열이 주먹을 꾹 쥐었다. 존나 잘 생겼어. 김종인이래. 김종인. 집도 존나 부자인가 보던데. 딱히 끌리는 말도 아닌데 내 샤프를 가져가 책상위에 김종인하고 세 글자를 적어넣는 찬열의 행동에 자연스레 눈길이 책상 위로 향했다. 김종인. 그다지 정이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이 안 가는 것도 아닌 이름. 부자면 어쩌라고. 제 숙제만 하면 될 걸 끝까지 태클거는 백현의 행동에 찬열이 백현의 머리를 세게 후려치고 나서야 주위가 조용해졌다. 둘은 견원지간인지 틈만 나면 싸우곤 했으므로 둘의 싸움이 시작될 것을 안 아이들이 서로의 입을 틀어막고 둘을 응시했다.
싫다. 우리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것은.
정말로, 싫었다. |
먼저 ㅇㅇ2.. 감사합니다 ㅠㅠ 여러분덕분에 일화 올려요! 해외라서 느릿느릿 썼지만 많이 애정 가지고 썼으니까 앞으로 지켜봐주세요!
제목은 제대로 짓지 못해서 ㅠㅠ.......
혹시 좋은 아이디어 가지신 분이나 댓글 남겨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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